예전에 <아주 오래된 농담>을 처음으로 접한 후,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전부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었다.
올 초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은 후, 이번이 3번째 읽는 소설이다.
선생님의 글의 특징은 너무나도 소박하다는 것.
그래서 부담없이 읽히지만 그 속에 뼈가 매우 굳세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라고 정확히 짚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뱅뱅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닌, 선생님만이 갖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괜히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한다.
단 한번도 시도해 본적은 없지만.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박완서 전집 중 14번째 도서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한 말씀만 하소서>, <서울 사람들> 세 개의 단편들로 엮어져 있다.
여기서는 단편 하나하나 감상을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1.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현재 호주제 폐지 문제로 여성계가 들썩이고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나는 읽은 것 같다.
이 소설은 MBC에서 드라마의 원작이 된 것이다.
이혼녀와 아내를 잃어버린 남자가 만나 사랑을 했지만, 현실적인 문제 - 남자의 재혼은 처녀장가를 갈 수 있지만, 이혼녀는 아내와 사별한 남자를 만나는 것조차 힘들다 -로 인해 결국 사생아를 낳게 된다.
여자 주인공 이름은 차문경, 남자 주인공 이름은 김혁주.
처음에는 혁주가 처녀장가를 가기 위해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건만, 새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게 되자 갑자기 자신의 아들을 찾아 법적 소송까지 가는 내용이다.
결국은 혁주가 문경에게 그 자식은 내 아들이 아니다, 협박하지 말아라, 라는 메모를 보낸 것이 밝혀지면서 아들을 포기하게 된다.
그럼, 과연, 제목은 누구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일까.
하나, 자식은 아버지에게 남겨진다, 한국사회에서는. - 차문경에게?
둘, 세상은 곧 뒤집어진다, 넌 꿈꾸지마라. - 김혁주에게?
아님, 둘 다에게? 아니면, 우리들 모두에게?
이 소설은 가문을 잇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느만큼 비열해 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아무리 돈도 잘벌고, 미모의 여인이라 하더라도 대가 끊기게 한다면 며느리로서 가장 흠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아들만 들어오면 나는 잘 기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진짜 이해가 안간다. 비록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피도 섞였으니, 내 자식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또 모를까. 하여간, 진짜 이해가 안된다.
'아들'을 얻으려면 어떠한 생각도 자신에게는 비도덕적이지 않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김혁주, 그의 어머니, 그의 새아내, 모두다.
태도가 이렇게 돌변할 수도 있는 건가.
이들은 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돈'으로 아들을 사려고 한다. 애정을 보이는 것에는 물질이 가장 정확하다는 착각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이 모든 걸넘어서고자 했던 소설이다.
2. <한 말씀만 하소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을 앞세우고 나서야 홀로서기가 가능했다라는 그녀의 고백.
더구나 자신의 홀로서기는 주변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사람사이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그녀의 고백.
이런 고백이 책 표지에 쓰여져 있다.
이 글을 아들을 잃고 난 후 차라리 죽지 못한 것이더욱 부끄러움이 되었던 어머니의 솔직한 일기이다, 그녀가 말한 대로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그냥 일기 그자체.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앙이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희망이 되어주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눈치있는 사람이라면 애타게 신에게 바라는 것인지, 원망하는 것인지 좀 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읽으면서 짜증이 좀 많이 났던 게 사실이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고통을 낱낱이 적었건만 나에게는 왜 그렇게 짜증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 고통을 같이 느껴보고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던 부실한 독자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듯하다.
어쨌든 그 짜증이 날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신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 같이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짜증은 어쩌면, 짜증이 아니라, 에미의 고통을 다른 식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좀 드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닥치는 많은 난관들.
그 난관들을 만날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대체 그동안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아왔길래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걸까.
나는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남에게 큰 고통을 준 일도 없거니와, 특별히 나쁜 짓을 하면서 살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치는 것이냐.
선생님은 신의 말씀을 이렇게 깨달았다.
이제껏 난 남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는 기준을 살았다.
그러나 남에게 나는 어떠한 사랑을 주었는가.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3. <서울 사람들>
이 글은 닳고 닳은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인생의 결말은 결혼에서 오는 것이 아닐 텐데, 왜 다들 결혼을 잘 하지 못해서 안달이지?
여기서 말하는 결혼을 잘 한다는 말은, 돈 많은 집의 복부인이 되는 것, 혹은 좋은 가문의 훌륭한 며느리가 되는 것, 그래서 다시 훌륭한 가문을 이어가는 것.
뭐 이런 식의 결혼 생활이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들.
이런 착각들을 얘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럼, 그런 집과 결혼을 하려면 중매와 연애 중 어느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
결론은 없지.
살아봐야 아는 것 아닌가?
선생님은 그냥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허구성만 찾아가는 인간들이 얼마나 무식한 것인지를.
야금야금 인간성을 갉아먹는 꼴을 보라,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면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사는 볼썽사나운 그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