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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서평
‘찰나적 영겁’의 순간 포착으로 빚어낸 시의 지문(指紋) 문지르기
- 이성수의 눈 한 번 깜빡(2022)론
오태호(문학평론가, 경희대학교 교수)
1. 봄날을 추억하는 쓸쓸함
이성수는 봄날의 생을 추억하는 쓸쓸함의 시인이다. 그 쓸쓸함은 자신을 둘러싼 타인과 세계를 차분하게 읽어내면서 발생하고 그 의미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삶의 비애로 전이된다. 그리하여 청춘의 시절을 지나온 중년의 남성이 세상의 풍경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생을 복기할 때 감지되는 정서가 바로 우울감이다. 하지만 우울감은 자신과 세계를 깊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성수에게 생은 우울과 슬픔의 길항 속에 길어올려지는 ‘찰나적 영겁’의 순간 포착으로 누적되는 것이다.
이성수 시인의 눈 한 번 깜빡(2022)은 두 번째 시집이다.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한 이후 13년 만에 첫 번째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2004)을 상재하고, 다시 무려 18년 만에 출간한 시집이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 “슬픔을 미끼로 / 낚아 올린 삶”(「내 삶을 탁 내리칠」)을 응시하며 “무덤 속에 먼지만 가득”(「거울 속의 방-실업 그날의 일기4」)한 생 속에서도 “용접봉 하나로 / 사랑을 깁고 있는 사람들”(「용접봉」)을 지켜보며 자신의 일상적 삶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시적으로 육화한 바 있다. 시인의 시선이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을 거쳐 자신을 읽어내며 슬픔과 사랑의 무늬로 생을 빚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과작(寡作)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시를 이 세상에 밀어넣고 / 지문 다 지워질 정도로 / 오랫동안 문질렀다”는 말을 전한다. 시에 대한 사랑이 ‘시(詩)를 향한 지문(指紋)’을 지워낼 정도의 행위를 수반했으니, “이만큼 사랑하면 되지 않나?”라고 반문할 만하다. 하지만 ‘시마(詩魔)’에 들어본 사람이면 ‘시애(詩愛)’의 통증이 지닌 중독성을 감히 알 일이다. ‘지독한 시의 사랑’은 시의 질적 완성도를 높여가며 결국 이번 생의 끝까지 지속될 일이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시인의 시와 생은 서로를 마주보며 ‘지문 같은 사랑’으로 함께 흘러갈 것이다.
2. 삶을 성찰케 하는 일상의 무늬
시인은 일상의 공간에서 마주한 다양한 표정들에서 시적 진실을 발굴해낸다. 뒷간이나 스님과의 대화, 조카의 그림과 중화반점, 고등어 뼈와 고양이 등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자신의 감각을 풀어낸다.
먼저 뒷간을 사유하는 「반가사유상」에서 시인은 화장실에서 용무를 마친 뒤 뒤처리를 하기 위해 거울을 보다 자신의 자세를 생각하며 ‘묵언 수행’의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곧이어 “근심과 번뇌의 경계를 넘”어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일상적인 세속인의 자세로 돌아온다. 「하기야 동백꽃도」에서도 행자 스님이 ‘사진을 찍는 사진사’인지 물으면서 “좋은 직업 가지셨네요”라고 질문하자 긴장이 된 시인은 “스님만 하겠습니까”라며 농반 진반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해 회의섞인 대답을 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으로 “절집도 힘들어요”라는 행자스님의 말에 “화두가 뚝” 떨어진 듯한 경직성 속에 “봄이 오는 것도 힘들”게 느껴지며 ‘봄의 고뇌’에 젖어들게 된다. 뒷간에서든 스님과의 대화에서든 시인은 찰나적으로나마 인생의 고뇌 섞인 진실을 깨달아가는 일종의 수행자가 되는 셈이다.
「삶은 종잇조각」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조카 아이가 스케치북에 ‘삶’이라는 글자를 총천연색 크레파스 색깔로 칠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깊이도 알 수 없는 글자를 천연색으로 새기고 있는” 모습을 ‘장난’인 듯 바라보지만, 아이가 스케치북을 찢어서 구겨버리자 때로 인생은 ‘장난인 듯 아닌 듯’ “바람에 굴러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배 고파서 들렀을 중화반점에서는 “곱빼기의 슬픔”을 상상하기도 한다. 「멀고 먼 중화반점」에서 시인은 “아주 먼 고장”의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데, “보통을 시켜도 곱빼기의 슬픔 두 배를 더 주는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자신에게도 “양파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왜 이렇게 까맣게 살아왔는지”를 되짚어보고 “까만 눈물”을 흘리며 생의 슬픔을 곱씹어보고 싶은 것이다.
고양이는 시인이 봄날을 응시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대표적인 매개체에 해당한다. 「고양이의 봄날」은 봄날의 고양이와 함께 고등어의 삶과 죽음을 대비시켜 보면서 “이생의 봄날”이 지닌 참의미를 마주하는 절창이다.
고양이 옆에 대가리만 남아 있는 고등어가 누워 있다 / 바다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한세상 원죄 / 등 푸른 비린내를 털어내고 싶은 고등어 // 살은 욕망의 덤불이었을지 모른다 / 우두커니 뼈만 남아서 뼛속까지 남은 비린내만 / 살의 그림자를 만드는 햇살 아래 // 세상에 남아 있는 / 그림자를 지우는 순간은 위대하다 // 비린내 나는 콧등까지 다 먹고 / 눈깔이 묻혀놓은 냄새까지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서 / 지상의 모든 흔적을 지우는 / 고양이의 식사는 얼마나 위대한 고행이냐 // 죽어서도 남아 있는 비린내에 고등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 하루의 밥벌이를 위한 밥그릇 깨끗이 핥아 내리는 고양이의, / 한 놈은 괴로움 내주고 / 또 다른 놈은 괴로움 핥아주는 // 이생의 봄날이 / 고양이 등뼈 위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 꽃은 피려는지 / 목련 나무 아래로 날이 저문다
- 「고양이의 봄날」 전문
시인은 1연에서 어느 봄날 포식자 고양이 옆에 주검으로 누워 있는 고등어의 형해화된 사체를 바라본다. 그리고 2연에서 이제는 사라진 ‘고등어의 살’이 사실은 “욕망의 덤불”에 불과했던 짐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뼛속의 비린내’가 부재하는 “살의 그림자”를 빚어내는 상상을 한다. 3연에서는 ‘그림자’까지 제거하는 햇살의 역능을 ‘위대함’이라고 찬양하지만, 4연에서 보면 그 위대함이 실상은 햇살의 도움 아래 “지상의 모든 흔적”을 지워냈을 “고양이의 식사”가 만들어낸 “위대한 고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적시한다. 5연에서는 죽은 자신의 몸에 잔존하는 비린내에 괴로워했을 고등어의 속내를 짐작하고 그 괴로움을 핥아준 존재가 고양이라고 상상하면서 포식자와 피식자의 감각을 공생의 관계로 치환한다. 6연에서는 ‘고등어의 육탈’ 이후 고양이의 행보에서 “이생의 봄날”이 목련꽃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짐작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한다. 결과적으로 ‘고등어의 육체’를 모두 먹어치운 고양이의 포식 행위를 ‘봄날의 고행’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전복적 시선이 드러나는 시편이다.
「봄날을 보내는 방법」에서도 시인은 “고양이가 밤 그늘에서 울”고 있다면서 고양이의 “하루 살기가 어디 쉽기야 하겠”느냐며 “헝클어진 한뉘 인연의 고비를 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고양이만이 아니라 「폭포」에서도 시인은 폭포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거꾸로 자라는 나무”를 연상한다. 그 나무에는 “저 멀리 바다까지 뿌리내리고 / 연어를 풀어놓는 / 흔들리지 않는 슬픔”이 자리하며, 나무에게는 “죽어도 서서 죽는 / 한 행짜리 아가미”가 있으므로, 가을이 되면 “뻘건 비늘로 산을 넘는 / 비린 이파리”가 생겨난다고 상상된다. 시인은 이렇듯 폭포에서 ‘나무와 물고기의 슬픔’과 함께 가을도 포획하고 있는 셈이다.
3. 가족과 타인이라는 거울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 현실뿐만 아니라 가족과 타인들로부터도 세상을 독해하는 방법을 배운다.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인 「눈 한 번 깜빡」은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생이 흘러가버렸다는 엄마의 한 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짚어보는 시편이다.
엄마는 당신이 살아온 날을 소설로 쓰면 몇십 권은 될 거라면서도 눈 한 번 깜빡하니까 머리가 하얗더라는 // 되도 않는 역설을 자주 말씀하셨다, 꽃이 핀다 // 하긴 엄마 뱃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도 황홀한 인연인데 엄마가 한평생 한 번 깜빡인 눈은 얼마나 이 생이 아름다울까, 꽃이 나부낀다는 것은 꽃이 진다는 말인데 //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생이 지나고 또 다른 생을 맞는다 // 엄마가 쓴 이번 생 이야기 읽어보려고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는데 / 왜 계절은 저만큼 먼저 꽃을 내던지는지 다시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 「눈 한 번 깜빡」 전문
시인은 엄마로부터 “당신이 살아온 날”이 책으로 쓴다면 몇십 권에 이르는 대하소설감이라며 “눈 한 번 깜빡”할 새에 머리가 세었다는 인생무상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전해듣는다. ‘눈 한 번 깜빡하는 생’을 자주 언급하는 엄마의 말씀에 대해 시인은 일언지하에 “되도 않는 역설”이라고 단언하지만, 꽃이 필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에 동화되는 자신을 느낀다. 모자의 관계가 “황홀한 인연”임을 전제로 시인은 ‘한 번의 눈 깜빡임’이 ‘생의 아름다움’을 낳는 조화임을 깨닫는다. 더불어 ‘꽃의 나부낌=꽃의 낙화’라면서 ‘눈 한 번의 깜빡임’에 ‘한 생의 지나감’과 ‘새로운 생의 마주침’을 겹으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 이야기’를 독해하기 위해 어머니처럼 창밖을 바라보지만 시인에게는 창 밖의 세상이 결코 독해되지 않는다. 시인에게는 어머니의 눈이 없으며, 계절이 먼저 꽃을 던지고 가는 순간 시인 역시 “눈을 깜빡이”며 시간을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시인 역시 부지불식간에 ‘눈 한 번의 깜빡임’이라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또 한 생을 지나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하하, 아버지」에서 시인은 “엄마 돌아가시고” “엄마 이름 부르며 사십구재 내내 울었”던 아버지께서 “혼자 집 지키는 화석이 될 것 같았”기에 부친을 위해 “사십구재 끝나면 예쁜 할머니랑 같이 사세요!”라고 당부한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엄마의 천국행을 기원하며 “우리 신현봉 천국 가게 해주세요, 나무아미타불”을 주문처럼 계속 외쳐댄다. 부부의 오랜 인연은 부친으로 하여금 그토록 깊은 속울음과 함께, 생전에 아내가 겪어냈을 이승에서의 고행을 넘어 아내의 천국행을 기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부모로부터 오래된 생의 표정을 읽어낼 뿐만 아니라 시인은 타인으로부터도 생의 비의를 읽어낸다. 「흔들리는 흙」에서는 씨앗이 흙을 뚫고 나오는 풍경과 “동네에서 가장 젊은” 65세 농부가 봄날에 “어린 잎맥처럼” 마음이 뛰는 모습을 겹쳐보면서, “흘러가는 이생의 봄날이 가려운 것”임을 체감한다. ‘어린 씨앗의 발아’와 ‘65세 농부의 춘심’을 ‘봄날의 가려움’으로 연결시키면서 봄날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종점」에서는 “등 굽은 할머니”가 라면 박스를 느린 속도로 밀고 가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의 오래 쓰다 폐품이 된 엉덩이”의 무게를 상상하기도 하고, 「돌아가는 길」에서는 단풍 드는 가을과 함께 “산모롱이 옆 산막 마당 쓸던 할매”가 떠난 생을 조감하기도 한다. 결국 시인은 오래된 존재들로부터 세계의 진풍경을 읽어내는 삶의 혜안을 얻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시집 왔다」에서는 우체통에 “봄을 우려낸” ‘가난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시집 읽기’가 “꽃 이전의 꽃을 보는 것”이며, “꽃이 피는 순간부터 / 봄의 표정에 물들어 / 끝내 내가 봄으로 살다가 / 꽃 떨어지는 절정 / 시밖에 쓸 줄 모르는 견고한 눈물을 / 내 눈 가득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타인의 시집 읽기가 “견고한 눈물”로서의 ‘봄꽃의 생’을 진정으로 마주하도록 시인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은 가족과 타인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보며 자신의 생을 향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셈이다.
4. 세계의 풍경으로부터 배우다
시인은 타인뿐만 아니라 시인을 둘러싼 침묵의 풍경에서도 세계의 진상을 읽어낸다. 그리하여 「침묵의 경전」에서는 “정적이 경전을 쓰”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샛강에 버려진 내 침묵으로 / 천년 새벽빛에도 풀어지지 않는 밀경을 엮”는 침묵의 풍경을 채집하기도 하고, 「송광사에는 풍경이 없다」에서는 “흔들려야 깨지는 / 마음”이고 “무릇 / 흔들리고 소리라도 나야 / 사랑도 시작”할 수 있다면서 ‘풍경(風磬)이 없는 절의 마음’을 독해하고자 한다. 이렇듯 시인은 ‘소리 없는 풍경(風景+風磬)’으로부터 이 세계의 의미를 배우고 다시 내면을 성찰하면서 자기 자신의 흔들리는 좌표를 파악하고는 쓸쓸해 한다. 생의 풍경이 시인을 우울의 세계로 내밀고 시인은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더욱 깊은 슬픔에 젖어드는 것이다.
시인은 매미를 보면서도 생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노력한다. 「아득한」에서 시인은 “비 그치자 / 매미가 / 방충망에 / 죽기 / 살기로 / 매달”린 모습을 보면서 “사는 게 왜 이리 아득하냐고 / 허기진 별들 다 데려다놓고 / 온몸으로 울었다”고 진단한다. 「9월」에서도 시인은 매미 한 마리의 ‘마침표가 된 사체’를 보며 손바닥의 간지러움을 느끼면서 “누구 울어줄 사람도 없어 / 우주의 한순간 악보를 접”은 매미에게 시인의 죄를 다 덮어씌웠다고 생각한다. ‘매미의 울음과 죽음’이 시인의 울음과 생을 비춰보는 거울이 된 셈이다.
매미가 삶과 죽음 사이로 난 울음의 길을 보여준다면, 꽃의 개화는 인생의 정점을 보여준다. 「피는 꽃」에서 시인은 ‘한 번의 환해짐’을 갈구하면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자갈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순간”의 환함을 마주하고 싶어한다.
태어나서 한 번만 환해지면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번만 환해지면 그 환장할 것 같은 어둠을 굽이치는 여울이라 한다 // 부끄러움도 없이 / 두려움도 없이 // 난생처음 어둠의 바닥에서 자갈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 「피는 꽃」 전문
인용시에서처럼 시인은 ‘단 한 번의 환해짐’이 ‘피는 꽃’이 지닌 ‘존재의 필연’ 같은 ‘출생의 비밀’이라고 진단한다. ‘한 번의 환해짐’이 ‘환장할 인생의 어둠’을 “굽이치는 여울”로 퉁칠 수 있게 만드는 ‘찰나적 영겁의 황홀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가 되면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어둠의 바닥에서 자갈의 향기”를 길어올릴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어두운 인생’에서 ‘돌의 향기’를 흡입하는 개화의 순간 포착된 ‘단 한 번의 환해짐’이 꽃이 지닌 진정한 일생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단 한 번의 환해짐’의 실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오후 4시」에서 알 수 있다시피 시인은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 내가 갈 곳 어딘지 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맬 뿐이다. 더구나 「낮과 밤의 깊이」에서 시인은 ‘낯과 밤의 깊이가 같아지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언제까지 부유하는 시선을 끌고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철길을 달리며 흔들리는” 자신의 흔들림을 감지한다. 흐릿한 정체성으로 갈 길도 모른 채 흔들리는 존재감 속에서 「열대야」에서는 “이번 생의 문지방을 / 넘어갈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기도 하며, 「동구릉」에서는 “외롭고 쓸쓸한 청춘”의 시절을 회상하며 “오래된 청춘의 무덤”을 조망하고, 「끈적끈적하게, 빌어먹을」에서는 “골동품이 되어가는” 자신을 감지한다. 「꽃산적」에서는 시인이 산에 한사코 오르려는 자신과 그런 시인을 버리려는 산의 형벌 속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모두 / 눈이 되어 내리는 날” 그 눈이 자신만 모르는 이유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살을 찌르”는 통증을 감지한다. 「계엄령 내린 날」에서도 시인은 “무참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아침마다 “기다림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고행”을 체감한다. 이렇듯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전체에서 부끄러움과 흔들림과 기다림의 정서를 환기하며 자기 생의 반성적 성찰을 묵묵히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모호한 정체감 속에서도 형벌 같은 생의 방향을 가늠하며 자성의 언어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생’(백석)을 고독하게 견뎌가고 있는 것이다.
「고드름」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서 가장 빛나는 절창 중의 한 편이다. 고드름의 찰나적 존재감을 응시하면서 ‘사랑과 우울’ 사이를 배회하는 인생의 시린 비의(秘意)를 파악한 시편이기 때문이다.
내장을 드러내놓는 / 울음은 손가락 끝까지 시리다 // 드러낸 푸른 하늘 눈부처였는데 /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하고 / 누구는 퇴행적 우울이라 했다 // 삶은 늘 번드르르한 / 피곤함 // 한순간도 /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 집 처마 끝에서 / 오늘이나 내일이나 / 내가 사라질 순간만 / 울지 않는 풍경으로 걸어놓았다 // 저 꽃은 어디쯤부터 병이 들어 몸을 던졌을까 / 어느 마음 한 귀퉁이에 골병이 들어 / 다 보이는 그리움 하나 끄집어내지 못하고 / 바람의 창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바람이 되었을까 // 떨어져 부서지는 / 시린 허공 되었을까
- 「고드름」 전문
시인은 ‘겨울의 꽃’인 ‘고드름’을 바라보면서 단상에 젖어든다. 1연에서 시인은 ‘깊은 울음’으로 “내장을 드러내놓는 울음”을 울면서 “손가락 끝까지 시리다”는 느낌을 받는다. 2연에서 ‘눈부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눈부처’로 동일시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사랑’이라거나 “퇴행적 우울”이라는 식으로 자가진단할 뿐이다. 3연에서는 이렇듯 삶이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진단하는 까닭에 “늘 번드르르한 피곤함”을 제공한다고 판단한다. 4연에서는 처마 끝에 자리한 고드름을 보면서 시인 자신이 오늘이나 내일이나 “사라질 순간”의 풍경(風景)을 “울지 않는 풍경”(風磬)처럼 걸어놓고 싶은 마음을 토로한다. 5연에서는 고드름이 ‘병든 꽃’으로 변이되었다가 다시 ‘골병 든 그리움’조차 끄집어내지 못한 채 ‘스스로 바람이 된 존재’라고 상상한다. 마지막 6연에서는 고드름이 “떨어져 부서지는” 운명 속에 “시린 허공”이 될 수밖에 없는 신세임을 확인한다. 날씨가 풀리면 녹아서 물로 떨어져 내리면서 결국 ‘텅 빈 허공’에 자리를 내어주는 생이 바로 ‘고드름의 숙명’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인은 뒷간에서 시작하여 일상과 가족, 타인을 거쳐 ‘고드름’ 같은 세계의 풍경을 읽어내면서 ‘눈 한 번 깜빡’하는 생의 진풍경들을 채집하는 수렵 시인인 셈이다.
5. 우울과 슬픔의 힘
이성수의 시는 봄과 꽃과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겨울과 낙화와 이별의 쓸쓸함을 내장하고 있기에 역설적 우울을 내포한다. 봄날의 풍경에서 고양이의 생과 고등어의 죽음을 유추하듯 삶과 죽음의 흔적이 동시적으로 포착되며, 타인의 묵묵한 삶으로부터 자신의 쓸쓸한 표정을 읽어내기도 하고, 폭포의 하강에서 상승하는 나무의 이미지를 길어올리듯 시인은 겹눈의 감각으로 세계를 입체화한다. 일상과 가족, 타인과 풍경으로부터 시인은 알 수 없는 생의 복합적 다면성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김정수는 시집 발문 「“하하하 성수야! 우리 막걸리 한잔하자”」에서 막역한 문우로서 습작 무렵부터의 애정을 담아 문청 시절 이래로의 인연을 담아낸다. 35년이 넘는 ‘세월의 시간’을 복기하면서 두 번째 시집에서 ‘꽃이 67번, 봄이 35번, 사랑이 27번’ 사용되었음을 적시하고, “진한 페이소스”를 내장한 이성수의 시적 여정을 꼼꼼히 응시한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이성수의 두 번째 시집은 봄날의 생을 추억하며 ‘짙은 비애미’를 뿜어내는 시인의 궤적을 보여준다. 쓸쓸한 우울의 힘이 시집 안에 깊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1991년 등단 이후 13년 만에 첫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을 상재하고, 다시 18년이 흐른 뒤 두 번째 시집 눈 한 번 깜빡을 출간했으므로, 우리는 이성수의 세 번째 시집을 만나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 우리의 지문(指紋)을 문지르며 기다림의 고행을 경험해야 될지도 모른다. 바라건대는 더 늦기 전에 우리 앞에 ‘추억처럼 깜빡이는 비애’의 누적으로 결과물이 당도하길 바란다. 그때 우리는 함께 우울한 통증을 공유하면서 ‘봄날의 생’이 여름의 무더위와 가을의 쓸쓸함과 겨울의 혹한을 견디고 마주할 수 있는 기적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될 것이다. 생은 아름답고 쓸쓸하고 허전한 시간의 나이테가 빚어낸 ‘찰나적 영겁’의 표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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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호
1970년 서울 출생.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평론집으로 오래된 서사, 여백의 시학, 환상통을 앓다, 허공의 지도, 공명하는 마음들 등이 있으며, 연구서로 문학으로 읽는 북한, 한반도의 평화문학을 상상하다 등이 있음. 2012년 젊은평론가상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부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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