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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일문화의 향 원문보기 글쓴이: 오상지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3당합당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8.15 때 활동했던 우리 민족의 혁명 역량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 그 중 가장 활발하고 강한
역량은 백두산 밀림을 근거지로 해서 일제의 최정예로 뽐내던 관동군과 조선군 그리고 그들의 주구 위만군의 토벌군을 상대로 15개성상
간난신고의 기나긴 유격전쟁을 벌려 그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겨주고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개선한 김일성 장군의 조선인민혁명군과 이들의
통일전선 조직이고 장차 해방된 조국의 건설을 영도할 당의 영도를 받는 「조국광복회」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국내에서
비밀지하조직으로 연합군이 장차 조선반도에 상륙하여 일제를 몰아내는 결전을 승리적으로 맞이할 준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있던 여운형
선생이 조직 지도하셨던 「건국동맹」의 역량이 있었고,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산하에서「조선의용군」을 조직하고 중국인민해방군인
8로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두봉 선생이 지도 하던 「조선독립동맹」의 역량이 있었다.
여기에다 조선에서 일찍이 공산주의운동을 하며 일제의 모략적 탄압과 처음부터 종파싸움으로 그 역량이 전멸적 타격을 받아 거의 일제에 투항하고 변절하고 말았지만, 더러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지켜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8.15해방을 맞이하자 각자의 세력으로 그 역량을 조직화했다. 그 결과 미군정이 통치하는 조선의 남부에서는 여러 종파들이
그들 종파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른바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고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설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으로 조직된 「조선공산당」이 있었고, 여운형 선생이 조직지도했던「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국내의 다른 민주역량을
흡수하여 조직한 「조선인민당」이 있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활동한「조선의용군」의 정치적 역량으로 조직된
「조선독립동맹」이 해방을 맞아 국내에 있는 동조자를 흡수하여 새로이 조직한 「신민당」이 있었다. 이들 3당은 그 정치적 지향이
비슷하고 계급적 토대가 같아서 그 역량을 3당으로 분산된 역량으로 투쟁하기보다 하나의 역량으로 묶어세우는 것이 필요했고 당시의
정치적 정세 하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제로 되고 있었다.
그것은 남조선의 민주정당과 민주적 사회단체의 통일전선체로서 「민전」이 이미 조직되었고 이 통일전선체에 3당이 모두 개별적 정당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통일전선이 하나의 영도적 당 아래에 지도되어야 조직과 운동이 통일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미제의
식민지체제로 재편하고 있는 남조선의 정세를 맞아 통일전선의 통일적 영도는 필요성과 아울러 그것은 절박한 과제로 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3당은 하나로 모아 거대한 역량으로 하나의 통일전선으로 집결되고 있는 민주세력의 통일적 영도를 두고 모두 그 필요성과 절박함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대중적 요구로 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맞아 제일 먼저 8월초에 「조선인민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3당합당 제의를 결정하고 다른 두 우당에게 호소했다.
즉시 다른 우당은 물론이고 민주진영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조선공산당」은 그 이튿날 중앙위원회를 열고 3당합당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합당교섭 개시를 결정했고, 이어 「신민당」도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뿌리깊은 「조선공산당」의 종파성이 이러한 정세를 힘입어 또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8.15 이후 이른바 「조선공산당」
재건을 둘러싸고 종파싸움을 벌렸으나 박헌영이 우여곡절을 거쳐 다른 종파를 밀어내고 당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3당합당의 새로운 정세를 이용해서 당내의 다른 종파분자를 몰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새로운 당마저 자기의 지도력 밑에 두고자 했고,
강진을 비롯한 여타 종파분자들이 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박헌영 일파의 합당주장은 당의 총의를 무시한 관료주의적 경향이라면서
비난하는 성명을 내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성명을 낸 중앙위원 강진, 서중석, 김철수, 이정윤, 김근, 문갑송 6명과 이에
동조하는 40여명을 제명시켜 종파싸움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해 제명당한 종파분자들은 합당문제를 당대회에서 결정하자는 주장을 그들의 영향 하에 있는 조직을 통해 강력히 들고 나와 당은 내부혼란에 빠져버렸다.
「조선인민당」은 합당문제에 대하여 처음은 별로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당대회 개최를 둘러싸고 심한 종파싸움이
벌어지자 합당문제에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났고 이들은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된 ‘당대회파’와 합세하여 합당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합당 작업이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신민당」도 역시 초기에는 합당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지방 당부에서는 「조선공산당」의 내부혼란에 영향을 받고 합당을 반대하는 세력이 점차 늘어나 내부에 진통을 겪어야 했다.
「조선공산당」의 고질적인 종파 싸움이 합당 국면을 맞아 새로운 당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싸움으로 되었고 다른 우당에 합당을 반대하는 세력을 만들어주는 결과로 되고 만 것이다.
마침내 9월 4일 3당에서 합당을 추진하는 세력들이 모여 3당합당 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열었다. 이 연석회의에서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한다는 것과 근로인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옹호하는 민주주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모든 권력을 인민정권의 참된 기관인
인민위원회에 넘겨주기 위한 투쟁을 선언한다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이러한 연석회의의 결정이 발표되자 여운형 선생은 성급하고 무원칙한 결정이라고 표현했고 「조선인민당」의 합당 반대파를 자극하여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신민당」의 백남운 선생은 합당은 절대 필요하지만 두 우당의 내부 통일을 기다려 촉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조급한 합당 결정서의 발표를 비난했다.
3당합당을 둘러싸고 혼란에 빠져버린 국면을 만회하기 위하여 박헌영은 당초에 10월 하순에 예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총파업 투쟁을
9월로 앞당겨 지령하고 총파업으로 지도부가 지하로 들어간 상태로 몰고 가서 반대파의 당대회 주장을 무산시키고, 나아가서 총파업에
대한 탄압국면의 엄중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합당을 추진시킴으로써 합당을 자기 주도하에 이루어 새로운 당의 주도권을 쥐려고 했던
것이다.
박헌영의 이러한 기도는 모처럼 「민전」이 조직되어 통일전선의 영도적 당을 결성하려는 합당의 분위기를 헝클어놓고 말았다. 결국 총파업투쟁도 역량을 결집하지 못하여 각개격파 당하고 합당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9월 4일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한다고 발표한 결정서를 반대하고 나섰던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신민당」의 백남운,
「조선공산당」의 반간부파이고 대회파인 강진이 10월 15일 공동으로 3당합동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하여 「사회노동당」의 발기를
선언하고 그 이튿날 16일에 3당합당으로 「사회노동당」의 발족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제까지 상대방이 발표한 합당결정서를 졸속하다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먼저 당 결성을 발표하고 나서다니! 그것도 10월인민항쟁의 봉기의 불이 아직도 도처에서 타고 있는 중에.
3당의 당내에 있는 이들 반대파의 맹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당명을 도용했다고 「사회노동당」 결성을 반대하고 나섰다. 「민전」
사무국에서는 통일전선을 분열하는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전평」, 「전농」, 「민청」 등 민주적인 대중단체들이 배신행위라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백남운은 「신민당」의 평양 본부로부터 소환 받고 평양으로 갔다. 거기에서도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사태가 이 모양으로 당초 합당을 반대하던 반대파들이 「사회노동당」으로 떨어져 나간 셈이라 3당합당은 우선 보기로는 순조롭게 전개되어갔다.
10월 하순에 들어 「남조선노동당」은 민족과 노동대중을 위하여 평생을 다 바쳐온 허헌 선생을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남조선노동당」과 「사회노동당」 양쪽 준비위원회에서 함께 위원장으로 되어 있는 여운형 선생은 분열된 이 두 당을 합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사회노동당」에 속한 많은 인사들이 탈당 또는 「남조선노동당」으로 합류하였다. 11월 23일에
3당이 현실적으로 합당이 되어 「남조선노동당」을 정식으로 결당하였다.
결당식에는 미 군정청을 대표하여 범펠러가 왔고 허헌 선생과 김원봉 장군 외 558명의 대의원이 참석하여 당중앙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허헌 선생이 추대되고 부위원장으로 박헌영과 이기석이 선출되었다.
허헌 선생은 근로민중의 역량을 집결하여 민주진영의 통일을 강화하고 반동세력을 분쇄하며 민족의 독립을 전취할 수 있는 강력한 정당을 창건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여운형, 허헌, 이승엽, 김형선 등 14명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어 그 이튿날 오전까지 대회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반동세력은 이곳에 수류탄을 던져 소란을 일으켰으나 마침 대회가 끝나고 해산된 다음이라 원고정리를 하고 있던 기자단석에 폭발되어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입는 피해만 생겼다.
이미 북조선은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북조선노동당」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족의 독립과 부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내어 축하했다.
「사회노동당」으로 결집된 많은 인사들은 당을 해체하기를 주장하고 「남조선노동당」으로 결집하게 되었으나 일부 인사들은 잔류하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세력은 줄어갔다. 합당을 반대했던 「조선인민당」의 인사들은 「인민당재건위원회」를 만들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근로인민당」을 결성했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여운형 선생을 추대하고 백남운, 이영, 장건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여운형 선생은 합당에서 빠진 많은 민주역량을 따로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근로인민당」의 결성을 받아들였다.
이상은 10월인민항쟁 당시 벽보투쟁으로 자주 밤샘을 하는 나를 두고 걱정하시면서 당시의 시국에 관해서 나에게 해설하셨던 나의
할아버지의 말씀과 그 후 내가 공부하면서 얻은 3당합당에 관해 정리된 나의 지식이다. 할아버지는 당시 「조선인민당」에 속해
있으면서 합당을 처음부터 열렬히 지지하면서 「남조선노동당」 밀양 군당을 조직하는 사업에 열정을 기울인 분이다. 할아버지는 그때
대동단결된 합당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참으로 안타까워 하셨고, 일제 때부터 「조선공산당」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고질적인 종파성과
그로 인해 좌경적 모험주의를 걱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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