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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을 깨뜨린 관객동원 >
뒤이어 시작된 33개 도시를 누빈 전미국 순회공연은 제플린에게 있어서는 생애를 통해 잊을 수 없는 연주여행이 되었다. 이 여행에서 제플린은 텍사스의 스테이지 에펙트회사 쇼코우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고 스테이지에서의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쇼코우의 역할은 제플린 콘서트의 음악적 클라이맥스를 시각적인 면에서 연출하는 것이었다.
오버 헤드 플로우 스포드(over head flow spot : 머리 위에서 내리 쬐는 조명)나 그밖에 더욱 효과적인 시각적 장면을 연출하도록 아주 세심한 면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러한 연출효과는 관객의 마음을 휘어 잡았고 제플린의 콘서트를 초일류급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디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면 2-3일전에 스텝들이 현장에 출장해 보다 효과를 올리는 무대 시설작업을 했다.
보통 연주회에서 쓰는 무대시설 투자가 1이라면 제플린은 연주장을 꾸미는데 40정도 투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세트 디자인 및 자재에 40배를 투자한 것인데 실제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미국 연주여행에서 첫 공연장은 어틀랜타 스타디움이었다. 4만 관중이 모인 쇼의 스테이지는 문자 그대로 휘황찬란했다. 호화 스테이지는 제플린의 연주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100% 발휘했다.
연주여행에서 보여주는 제플린 멤버들의 교통수단도 크게 달라져서 주목을 끌었다.
Boeing사에서 만든 보잉-72OB형 제트 여객기를 개조, 제플린의 자가용 비행기로 만든 것이다. 독특한 색으로 칠한 제플린의 자가용 비행기는 [Starship One]이라 명명했다.
원래 138명을 태울 수 있는 것을 제플린 멤버와 스텝 40명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한 'Starship One'은 침실과 식당과 샤워 룸과 클럽 룸과 당구장까지 설치한 초호화 여객기였고 연습용 스테이지에서 각종 비디오 시설과 전자올갠까지 설치해 놓고 있었다.
제플린의 사운드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누구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로버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주변에 있는 것이면 그 무엇에든 흥미를 갖는다.
특히 소리에 대해서는 항상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이를 분석하고 평가해본다.
우리 사운드는 결국 우리 주위의 모든 음향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주여행 도중 잠시 시간을 낸 멤버들은 영국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휴가에서 돌아온 5월 5일 Tampa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기록이 수립되었다.
관객동원수 5만6천8백명, 입장료 매상 30만 9천달러였다.
이 기록은 1965년 비틀즈가 쉐어 스타디움에서 세운 기록을 가볍게 누른 것으로 기네스 북에 등록되었다.
그즈음 레드 제플린 기록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제플린의 멤버들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니냐 해서 사양을 했다. 하지만 주위의 주장도 물러서질 않았다. 오랜 논란 끝에 제플린의 멤버도 영화제작 계획에 찬성하게 된다.
촬영시기는 7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연주회의 세번째 콘서트를 찍기로 했다.
영화제작 스케줄을 짜면서 촬영전담 스텝도 편성했다.
영화 촬영계획은 순조로이 진행되어서 예정되었던 공연실황과 관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을 유감없이 필름에 수록할 수가 있었다. 이 촬영을 마치고 자축하는 파티석상에서 [House of The Holy]의 골드 디스크상을 어틀랜틱 레코드사 사장으로부터 전해받았다.
그 뒤 영국으로 돌아온 제플린은 그동안의 피로를 풀면서 영화제작에 따르는 밀린 작업들을 했다. 그동안 사양해 오던 영화제작이었지만 막상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자, 멤버들은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촬영은 공연현장의 필름외에도 개인적인 기량을 보여주는 장면을 별도로 찍어 삽입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멤버 개개인의 연주장면을 촬영해야 하는데 존 본햄의 촬영은 Santa Ford의 경기장에서 있었다.
로버트의 씬은 웨일즈 지방의 시골에서 촬영했다.
여기서 로버트는 고전의상을 입고 말에게 채이고 나뒹굴어지는 장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 지미의 개인적인 씬은 촬영하지 못했다. Maggie Bell의 앨범제작에 찬조 출연하는 일 때문에 스케줄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존 폴은 마드레드 벨의 앨범제작에 출연하는 관계로 촬영을 하지 못했다. 존 폴은 이 앨범제작에 찬조 출연했을뿐 아니라 작사, 작곡, 프로듀서, 프로모션까지 겸하고 있어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겨울에 접어 들면서 지미는 스코틀랜드에 새로 산 집 [보울시킨]에서 지내기 위해 떠났다.
그 집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나이라 불려져온 Alister Clawley가 살던 역사적인 옛 가옥인데 여기서 지미는 한 겨울 며칠을 지냈다. 그리고 그동안에 촬영하지 못했던 솔로씬의 촬영을 끝냈다.
< Swan Song 레이블 >
1월과 2월에 제플린 멤버들은 6번째 앨범을 준비하는 일로 분주히 보냈다.
연습과 녹음의 반복 훈련은 그 어느 앨범 제작때보다도 바빴는데 6번째 앨범이 이토록 붐볐던 것은 이번이 제플린 최초의 2장짜리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집 앨범에 수록될 곡은 이미 작곡이 완료된 것들이었다.
6번째 앨범을 위해 별도로 작곡한 것외에 그동안 작곡을 해놓고 앨범에 수록하려다 그때그때 제외되었던 30여곡 가운데 추려 수록하는 것이 6번째 앨범의 특징이었다.
그렇듯 많은 곡 가운데서 또다시 추려야 했기에 선정작업은 무척 어려웠다.
이러한 작업 끝에 새앨범의 구성 윤곽이 나타났는데, 새앨범의 구성곡을 보면 새로 지은 곡이 반, 그리고 지난날 작곡해 두었던 것이 반이었다.
2월 14일 지미 페이지, 로버트 플랜트 그리고 존 본햄 3사람은 로이 하버에서 열리는 [발렌타인 콘서트]에 출연, 로니 레인, 키스 문, 맥스 미들튼과 함께 열광적인 스테이지를 작성했다.
제플린은 메니저인 피터 그랜트, 핑크 플로이드, 카리스마 레코드와 함께 공동 출자의 형식으로 연주기록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당시 평이 좋았던 어느 TV 코미디 프로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피터 그랜트와 어메트 아티건 두사람은 그즈음 제플린의 독자적인 레코드 회사인 'Swan Song'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레코드의 레이블 마크는 William Rimmer의 회화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는데 제플린의 6번재 앨범이요, 2장짜리 앨범으로는 처음이기도 한 앨범에는 '스완 송' 레이블을 붙여 팔기로 했다.
레코드 회사 설립 취지로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참가했던 레코드 회사들은 우리에게
그리고 많은 레코드 팬들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코드 회사에서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도 별로 일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한 두회사는 우리르 위해 또 팬을 위해
수입의 일부를 유용하게 썼으나
그밖에 레코드 회사들은 오직 자기네 포켓에 챙기기에만 바빴다.
이러한 레코드 회사의 횡포에 불만을 품어온 우리는 가만 앉아 있을 수만 없어
우리가 직접 회사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스완 송 회사의 설립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는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다.
파티에는 어틀랜틱 레코드사와 제플린의 관계자들 그리고 많은 보도진이 모여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열린 파티는 대단해서 유명한 대중음악 관계자는 거의 모였다.
파티석상에서 제플린은 새로 내놓을 앨범에 대한 소식을 참석자들에게 알렸다.여기서 제플린은 새로 나올 앨범에서는 제플린이 다시 하드 록으로 복귀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에서의 스완 송 레코드 회사의 창설 기념파티는 10월 31일 지젤 허스트의 동굴에서 열렸다. 이 축하 파티는 가장 사치스럽고 호화로웠던 파티로 기록되는데 실크 토피드의 발매 기념을 겸한 것이기도 했다.
동굴 내부는 모두 촛대로 조명했고 나온 술도 세계 최고급의 명주들이었다.
참석자들이 최고의 술, 산해진미의 안주로 얼큰했을 무렵, 동굴 벽 스크린 면에는 영화가 투영되어서 참석자들을 더욱 감탄시켰다.
< 피지컬 그래피티의 발간 >
1월에 접어들면서 제플린은 로텔담의 부랏셀에서 워밍업을 겸한 콘서트를 가졌다.
이때 로버트는 TV인터뷰에 출연, 이해에 있을 중요한 예정을 발표했다. 그 중 가장 큰 계획은 특별히 영국 팬들을 위해 여름에 스페셜 이벤트를 갖겠다고 했고 머지않아 제플린의 기록영화가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제플린은 1975년 1월 18일부터 3월 27일까지 연주여행을 했는데 이때 지미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열차 창에 손가락이 끼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연주회가 취소되진 않았지만 공연 레파토리에서
이번 연주여행에서 연주무대는 더욱 휘황찬란해서 레이저광선까지 활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연주여행이 절정에 이를 무렵 2장이 한 세트로 된 새로운 앨범 [Physical Graffiti]가 스완 송 회사의 발행으로 출반되었다.
레코드 자켓은 레코드사상 유례없이 특이한 이미지의 오묘한 디자인이었다.
수록된 곡은 모두 15곡.
1. Custard Pie 1. House of The Holy
2. The Rover 2. Trampled Under Foot
3. In My Time of Dying 3. Kashmir
1. In the Night 1. Night Flight
2. Born-Yr-Aur 2. The Wanton Song
3. Down By The Seaside 3. Boogie With Stu
4. Ten Years Gone 4. Black Country Woman
5. Sick Again
[Physical Graffiti]의 내용은 그동안 제플린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던 평론가들까지 좋은 앨범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평론가들은 제플린의 각 멤버들이 제각기 자기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칭찬했고 또 제플린의 멤버들은 통일된 음악성을 표현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이 앨범이 나옴으로써 팬들도 제플린이 지향하는 음악방향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곡에 대해 로버트는 자동차에 대해 노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동차의 의미가 좀 다르다. 흔히 말하는 그런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의 근원적인 에너지의 바탕이 되는 동력의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스테이지 위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는 시각적으로 흥미를 준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Push! Push!'의 부분은 로버트가 그의 정열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 곡의 오프닝은 그것이 고래의 절규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로버트의 보컬은 2중으로 녹음된 것이다.
미국 연주여행중에 얻은 많은 경험을 테마로 한 노래인데 록 뮤직다운 필링을 아주 짙게 풍긴다.
이 앨범이 출반되었을 때 지미 페이지는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지미의 주장에 의하면 제플린의 앨범은 한장 한장 모두 나름대로 특성을 가지며 이 특성은 서로 유사하다든가 그게 그것 같다든지 하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앨범 판매고를 높이기 위해 이 앨범 속에서 한 곡을 뽑아 싱글을 내놓았다. 제플린의 싱글로 스완 송에서 내놓은 첫싱글이기도 한데 싱글로 뽑힌 곡은
이 싱글은 1천장 한정판으로 나와서 앨범 판매에 촉진제 구실을 했다. 촉진제라 하게된 이유는 앨범을 20장 살 경우 이 판을 하나 선사하는 식으로 판매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미국 연주여행도 끝나갈 무렵 근 한달이상 계속된 로버트의 감기도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존 본햄이 위장병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그의 위장병은 너무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러나 로버트나 본햄의 병보다는 역시 지미의 손가락 상처가 제플린에게는 심각했는데 미국 순회공연의 막바지에는 그의 손가락도 완쾌되어 피날레 공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콘서트에선 그 어떤 곡도 연주할 수 있도록 지미의 손가락은 기능을 되찾았다.
연주여행에서 보여주는
지미가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에서는 초록과 바이올렛색으로 채색된 드라이 아이스 연기가 스테이지로 흘러들어왔고 '3각형 모양의 악마의 광선'이 지미를 둘러쌌다.
여기에 금상첨화로 레이저 광선이 비쳐, 무대의 광경은 환상의 극치를 이루었다. 그밖에도 마그네슘 폭발과 전광효과가 제플린의 연주무대 효과를 최고로 장식했다.
연주여행이 끝나갈 즈음 새로운 앨범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반응은 한마디로 갈채의 연속이었다.
존 본햄의 위장병도 그럭저럭 회복되어 갔다. 그는 1천4백달러를 주고 포드자동차의 모델을 사가지고 선셋 대로에서 트럭경주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시가지에서는 자동차 경주를 하면 당장 걸려들게돼 있었지만 그 많은 자동차 경주를 했음에도 그는 꼭 한번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었을 뿐이었다.
적발되었어도 벌금은 내지 않고 넘어갔다.
자기들은 레코드 취입을 해야되는 뮤지션으로 격무에 시달린 마음을 스피드로 풀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사정을 했더니 그 단속경관은 그대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여튼 미국 연주여행은 크게 성공했고 그 때문에 레코드의 매상도 크게 올랐다.
그리고 제플린이 내놓은 6장의 앨범은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빌보드 차트 상위에 올랐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