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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왕 필립 4세와 연관된 템플 기사단의 이단 고소 사건/라은성
1. 시작하는 글
1119년 성지를 보호하고 성지 순례자들을 지키는 종교적 군사적 기사단으로 시작한 템플 기사단은 1291년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요새 아커(Acre)가 모슬렘인들에게 전멸됨으로써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그 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여러 면제특권으로 불어난 엄청난 재산을 소유했던 기사단은 유럽의 은행가로 전락하였다. 이런 가운데 있는 템플 기사단에 대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프랑스왕 필립(Philippe the Fair)은 비밀 지령을 내려 프랑스에 있는 템플 기사단들을 이단자라는 미명아래 검거하고 심문하도록 했다. 1310년 5월에 120여명의 기사단이 파리 근교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4년 반(1307년 10월-1312년 3월) 동안의 기나긴 설득 끝에 필립의 강권으로 교황 클리멘트 5세는 1312년 3월 22일 교황의 교서 Vox in excelso 내리면서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해체를 명했다. 2년 후, 템플 기사단의 최후의 대 지도자 쟈크 드 몰레이(Jacques de Molay)가 화형을 당하므로 지상에서 템플 기사단은 사라지고 그들이 소유했던 막대한 재물과 소유지는 필립의 차지가 되었다. 기사단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해 몇 가지 방법으로 역사학자들간에 해석을 달리한다. 해석의 관점에 따라 학자들 간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템플 기사단에 대한 이단 혐의들을 유죄로 인정한다면 고발자들의 동기부여는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것이다. 범죄자들을 합법적으로 검거하고 공판하여 형을 집행했던 것이기에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템플 기사단의 혐의에 대한 무죄냐 유죄냐 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기사단의 혐의를 유죄로 보는 학자들 중, 요셉 스트레이어(Joseph Strayer)는 템플 기사단은 "추악하고," "세속적이고, 오만하고 . . . 성지를 위해 저축된 물질을 가지고 방탕하게 살았던" 자들일 뿐만 아니라 음란하고 동성애를 행했던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있는 작가 레그만(G. Legman)은 134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글에서 템플 기사단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해 1308년 8월에 작성된 127항의 고발들을 열거하고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로 템플 기사단은 정치적 야망의 희생자들이며 기사단의 혐의가 무죄일 뿐 아니라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서 미국의 존경받는 로마 카톨릭 역사학자인 헨리 리아(Henry C. Lea)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중세의 종교재판』이라는 기념비적인 3권의 책에서 템플 기사단의 종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템플 기사단의 종말은 중세에서 추악한 죄악"이라고 규정한 후, 그는 그들의 무죄를 주장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탄압은 비극이며 범죄라고 규정한다. 대부분의 중세학자들은 템플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이 무죄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실정이다. 템플 기사단의 혐의사실에 대해 상반된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있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이 무죄라고 인정하는 견해들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그들을 고발했던 자들에 대한 연구, 즉 그들의 고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해야할 필요성을 가지게 된다.
중세의 대부분의 수도회들이 그랬듯이 처음의 목적과 의도를 상실하고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타락했던 것처럼 템플 기사단도 하나의 수도회로서 이러한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소유한 막대한 재물이 필요했던 프랑스왕 필립 4세는 그들의 이단적이고 주술적인 혐의사실을 고발하였다. 혐의들을 진술 받기 위해 온갖 악독한 방법을 총동원하는 마키아벨리주의식 책략을 이용하여 그들의 재산을 마침내 가로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템플 기사단은 희생양이 틀림없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삶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소논문의 주요한 질문을 갖게 된 셈이다. 왜 템플 기사단은 고소당했으며 고발당한 동기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템플 기사단은 누구인가? 템플 기사단을 고발한 자는 누구인가? 등의 부가 질문들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역사적으로 기사단의 유래, 삶, 활동, 그리고 종말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그들의 검거와 종말 과정을 연대적으로 살피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 기사단을 검거하고, 심문하고, 결국에는 해체하고, 참혹한 화형에까지 이르도록 했던 장본인들이 누구인지를 연구해 볼 것이다.
14세기 템플 기사단에 대한 주제는 역사가들간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중이다. 어느 편 주장이라도 명백하게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가운데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템플 기사단이 고백한 사실들이 필립의 구금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들의 고백을 사실 증거로 인정해야 하느냐 아니냐 라는 공방이 가장 열띤 논쟁들 중하나이면서 명백하게 판단하기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이 소논문에서는 기사단의 혐의가 무죄냐 유죄냐 라는 점을 다루기 위해 혐의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고 혐의 사실증명을 위한 논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프랑스에서 일어난 템플 기사단만을 다루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영국,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 있었던 템플 기사단의 이단 공판들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에 있었던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고소했던 필립 4세의 의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도록 하겠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몇 학자들이 쓴 공증된 자료와 당시의 상황들을 연구한 자료들이 이 연구를 위해 도움 될 것이다. 1976년 노만 코온(Norman Cohn)의 Europe's Inner Demons는 템플 기사단의 경우를 마술, 이단, 그리고 우상숭배와 같은 문맥에서 다루고 있다. 2년 후에 출판된 서로 보완적인 책이 될 수 있는 말콤 바버(Malcolm Barber)의 the Trial of the Templars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연구로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바버는 1307년부터 1314년까지 템플 기사단의 모든 사건들의 전말을 학문적으로, 포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템플 기사단과 관계된 원자료라 할 수 있는 공증된 문서 Le Proc s des Templiers를 다루고 있다. 이 문서는 미셀레(Jules Michelet)가 1841년-1851년에 편집하고 번역하여 2권으로 파리에서 출판한 것으로 922페이지에 이른다. 교황 직권자들이 1309년 8월에 작성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희귀본이지만 State Library of Victoria에 한 복사판이 소장되어 있다. 후에 1923년에 첫판에 이어 1964년에 재판되어 나온 리젤란드(George Lizerand)의 Le Dossier de l'Affaire des Templiers 등이 템플 기사단 연구를 위해 원자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영어로 쓰여진 자료로 1937년 출판된 캠벌(G. A. Campbell)의 The Knights Templar, Their Rise and Fall과 1963년에 출간된 파커(Thomas W. Parker)의 The Knights Templars in England도 좋은 자료가 된다. 최근에 들어와서 1980년 존 보스웰(John Boswell)의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Gay People in Western Europe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Fourteenth Century는 템플 기사단의 동성애에 대한 혐의들을 현대적 관점에서 잘 비교하고 분석하고 있다. 1982년에 들어서 피터 파트너(Peter Partner)의 Murdered Magicians: The Templars and Their Myth와 스티븐 호와스(Stephen Howarth)의 The Knights Templars는 템플 기사단의 발생과 종말만 아니라 분명한 자신의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들이다. 호와스의 책은 각주를 가진 학문적인 글이라기 보다는 폭넓은 독자층을 겨냥한 책이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주제에 대해 소개하고 싶은 레그만이 편집한 The Guilty of the Templars이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모든 궁금한 사항들을 원자료와 논쟁들을 다 함께 접할 수 있는 책이라 믿는다.
2. 템플 기사단의 역사
중세시대에 가장 유명한 기사단 수도회들-템플 기사단(Templars), 자선 기사단(Hospitallers), 그리고 튜톤 기사단(Teutonic)-은 모두 12세기, 즉 초기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때에 설립되었다. 기사단들 모두는 십자군 운동과 관련되어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이다. 템플 기사단은 베르나르가 창시자 휴그 드 파이엔(Hugues de Payens)을 1127년 처음 만나기 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휴그의 노력과 열정으로 인하여 군사적 형제단으로 공식적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성지를 회복한다는 대 명제아래 시작된 1차 십자군 운동은 1099년 7월 15일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지를 회복하였다. 십자군 지도자들 중 갓프리(Godfrey of Bouillon, 1099-1100)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이 건설된 후, 템플 기사단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기사단은 본래 순수한 군사적 목적을 가지면서도 종교적 맹세와 엄격한 규율을 지녔기에 수도회 중 하나이다. 그 기원은 샴페인(Champagne)의 백작이었던 휴그 드 파이엔와 알토와(Artois) 출신 제프리 드 세인트 오메(Geoffrey de St. Omer)와 관련을 가진다. 이들은 7명의 남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대주교에게 성지를 방어할 것을 맹세하고 성지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지킬 것이라고 맹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군인들(Poor Soldiers of Jesus Christ)'이라고 자칭했다. 이것에 덧붙여 탁발 수도회의 덕목들, 즉 가난, 순결, 그리고 복종을 맹세했다. 1118년 갓프리의 동생이며 두 번째 예루살렘왕이 된 발드빈 2세(Baldwin II, 1118-1131)는 성전이 세워져 있었던 모리아산에 기사단의 거주지, 즉 솔로몬 성전이라 여겨지는 궁궐의 한 쪽을 그들의 막사로 제공했다. 이 때부터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단(Poor Knights of the Temple of Solomon)'이라는 이름으로도 명명되기도 하고 템플 기사단이라는 공식명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와 발드빈이 뜻을 모아 예루살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템플 기사단의 필요성을 교황에게 알렸다. 베르나르는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사단 설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1127년 휴그는 앙주(Anjou)의 백작 풀크(Fulk)와 여러 기사단들을 데리고 유럽을 순회하면서 교회적 승인을 얻기 위해 사방으로 다니며 호소했고 신입회원들을 모집했다. 십자군 운동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던 때라 이듬해, 베르나르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1128년 트로이(Troyes) 종교회의에서 수도회로 인준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기사단의 규율과 법규는 베르나르에 의해 시토 수도회의 규율에 따라 작성되었고 휴그에게 자신의 소논문 『새로운 기사단을 칭송하며』(De laude novae militae)를 선사하며 신입회원들을 모으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안에서 베르나르는 템플 기사단은 가난, 순결 그리고 복종을 맹세했기 때문에 진실한 종교적 수도회라고 극찬한다. 그들의 참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교도들과 전투에서 싸우면서 순교하므로 그와 연합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은 의로우며 불신자들을 죽일 수 있다고까지 했다. 죽든지 살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에 선하다고 했다. 세상의 전투는 영적 전투를 이해하도록 한다. 템플 기사단은 혈육에 대한 가시적 전투를 영적으로 사악한 적들과 싸우게 된다. 그들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다. 지도자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었다. 기사단들은 공적 개인적으로 헌신했고, 침묵을 일삼았고, 노약한 자들에게 친절했으며, 금식일을 준수했고, 그리고 금이나 은, 즉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소유물을 가지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 이들의 외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순결한 삶을 드린다는 의미로 흰색이었으나 곧 붉은 십자가 모양을 그려 넣었다. 어떤 사냥도 허용되지 않았다. 기사단에 입회하기 전에 견습기간을 두어 신중하게 가입토록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을 타고 흰색 긴 옷을 입기 때문에 화려하게 보이겠지만 실제의 삶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철저한 복종을 요구한다고 신입회원들에게 엄히 경고하였다. 기사단에 가입할 때에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의 죄성을 피하고 떠날 것; 우리 주님께 헌신할 것;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가난하고 참회할 것" 등이다. 어떤 여인들도 기사단에 들어올 수 없었고, 막사에는 밤새도록 등불을 밝혀놓아야만 했고 수염마저도 깍지 않았다. 규율을 어기는 자는 엄중하게-채찍이나 감금과 같은-형벌을 받았고 범죄를 행하는 자는 추방당했다. 가장 엄중하게 다루는 범죄-는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며 살기 위해 십자가를 부인하-는 배교였다. 템플 기사단은 대체로 세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 기사급, 성직자급, 그리고 봉사자급이다. 기사급은 귀족출신들로 구성되어 하류계층의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경비를 가지고 자신들의 휘하에 기병들과 보병들을 거닐었다. 사제들은 기사단의 군종 사역자들로서 전투시에 기사단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었고, 봉사자들은 기사들의 개인적 종들이었다. 이들은 검은색이나 갈색의 외투를 입었다. 대 지도자(Grand Master)는 최고의 직급자로서 모든 일에 대표자이며 각 나라와 지역으로 지부장들을 파송하는 권위를 가졌다. 모든 회의는 그의 사회로 진행되고 결정 역시 그러했다.
교황에게 군사적 수도회라는 인준을 받은 후, 휴그는 프랑스와 영국을 여행하며 귀족들로 하여금 기사단에 가입토록 했으며 많은 물질과 부동산을 하사 받았다. 전 유럽에 여러 지부를 두었고 날마다 기사단원들의 수가 늘어가는 현상을 목격한 휴그는 1129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와서 예루살렘 왕국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했다. 1136년 최초의 대 지도자인 휴그가 세상을 떠나자 캔터베리의 대감독인 안셀름의 조카 로버트 경(Lord Robert)이 지도자직을 맡았다. 전세를 가다듬은 모하메트인들의 맹공으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이 위기를 맞게 되자 교황은 이 소식을 듣고 베르나르로 하여금 2차 십자군 운동의 필요성을 전 유럽에 알리도록 했다. 템플 기사단은 에베랄드 드 바르(Everard de Barres)의 대지도자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으나 모하메트인들의 전세가 워낙 강력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독교 지역만 좁아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사단들은 매 전투마다 참여하여 눈부시게 활동했다. 1153년 베르나르는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기사단을 위해 세 서신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열정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십자군들 내분의 알력으로 인해 성지를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동안 모슬렘인들은 살라딘(Saladin)을 중심하여 새로운 전력을 가다듬고 기독교인들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 이에 대해 템플과 자선 기사단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으나 대 지도자와 예루살렘 왕까지 모슬렘의 포로가 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지 않았던 230명은 참수형을 당했다. 1187년 예루살렘이 모슬렘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템플 기사단은 후퇴하여 안디옥을 자신들의 본부로 삼았다. 이런 소식을 접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기사단들에게 많은 재정을 충원하고 군사들을 보내었다. 1189년 템플 기사단은 두로(Tyre)에서 아커(Acre)로 진군하여 피나는 여러 전투에 용감하게 임했지만 대패하고 말았고 이 곳 전투에서 100,000명의 기독교인이 전사했다. 하지만 1191년 3차 십자군 운동으로 인해 살라딘은 예루살렘으로 후퇴하고 템플 기사단들은 여러 전투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여 다시금 여러 요새들을 지중해변 지역에 재건했다. 1218년에 이르러 기사단은 이집트에서 구입한 막강한 함대까지도 소유하였다. 계속적인 십자군의 공격을 받은 살라딘은 이집트로 후퇴하게 되었고 모슬렘인의 세력은 약해져 갔다.
한편, 고향을 오랫동안 떠나온 십자군들은 여러 자연 재해와 군수물자의 공급부족으로 인해 전세는 약화되어갔고 여러 가지 악행들이 자행되었다. 또 사라센들의 여러 공격으로 사기 역시 저하되어갔다. 1242년에 이르자 예루살렘은 다시 적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템플 기사단은 전력을 가다듬고 모슬렘인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가자(Gaza) 전투에서 대 지도자를 비롯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사단들을 잃고 말았다. 마침내 1244년 예루살렘은 달단사람들(Tartars)의 포악한 공격을 받아오다가 함락되고 말았고, 성지의 여러 지역도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무고한 사제들, 수녀들, 남녀노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부 해안 지역 아커로 피신했지만 또 다시 체포되어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유럽 각국들의 알력으로 인해 여러 지원이 차단된 템플 기사단은 술탄(Sultan)과 함께 휴전 협정을 가졌다. 이 일이 기독교계에 알려지자 템플 기사단에 대한 원망이 빗발같이 터져 나왔고 곧 그들 스스로 종말을 자처하고 말았다. 1249년 마지막 대규모 십자군 운동이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년)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사단들도 다시 전세를 가다듬고 술탄을 공격하기도 했다. 1262년 술탄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두 기사단은 전멸 위기에 봉착했다.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요새인 아커마저 1291년 술탄에 의해 함락되자 더 이상 팔레스탄 지역에 기독교 요새가 없는 셈이 되고 말았다. 트리폴리(Tripoli)전투가 있은 지 몇 개월 후 대 지도자였던 드 보우즈(de Beaujeu)가 전사하였다. 노약자들, 병약자들, 여인들과 어린이들은 키프로스(Cyprus)로 피신시키고 남은 템플 기사단은 그 곳에서 6주 동안 맹렬히 방어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계는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성지는 이제 마호메트인들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아커가 함락되자 잔류한 템플 기사단은 영국의 지부장이었던 쟈크 드 몰레이를 대 지도자로 선출했다. 다시 한번 성지회복을 위한 시도를 감행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을 회복하는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기사단의 임무는 본래 성지에서 싸우는 것이고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임무였지만 이제 그들은 성지에 주둔해 있지도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맹세를 준수할 수 없게 되었다. 본래의 맹세와는 달리 유럽 국가간 전투와 국내 전투에 참여하므로 맹세를 거슬리게 되었다. 그들의 상대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기사단의 종말을 재촉한 것은 자신들의 무수한 소유물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해 불평을 내뱉는 자들은 대부분 기사단에게 차관을 빌렸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자들 가운데 프랑스왕 필립이 들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국고가 고갈된 상태에서 필립은 기사단의 재산에 눈독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싸한 명분이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템플 기사단의 숫자는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백 명, 아니면 일, 이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점점 재정이 늘어가면서 2-3만 명으로 늘어났다. 팔레스타인이나 예루살렘 지역에 자신들의 수도원과 부동산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자, 안디옥, 욥바, 아커(Acre) 등지에도 요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성지의 요충 지역들이 그들의 소유지가 아니면 자선 기사단들의 소유지였다. 유럽의 여러 주요 도시에 자신들의 요새를 소유하고 있었다. 루카(Licca), 밀라노(Milan), 페루기아(Perugia), 볼로냐(Bologna), 포르투갈, 스페인, 바바리아(Bavaria), 헝가리, 보헤미아, 모라비아, 콘스탄틴노플, 프랑스, 홀란드와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 등 유럽의 여러 국가에도 자신들의 소유지를 가지고 있었다. 왕은 가끔 템플 기사단에게 자신의 국정을 논하기도 하고 재산을 맡기기도 했다. 점점 그들의 영향력은 유럽의 여러 일에 끼치게 되었다. 왕들과 중요한 섭외도 하면서 국가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대해 시기도 없지 않았다. 특별히 각 지역과 교구 감독들로부터 불평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단이 자신들의 교구에 들어옴으로 자신들의 영향력들이 축소되기도 했고, 기사단들이 저지르는 폭력이 고발되기도 했다. 더욱이 각종 면제들-재정적, 영적, 행정적인 면제권이 주어졌고 세금에서도 면제되어 여러 특권들-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교황의 권위 외에는 어떤 교회적 권한으로부터 독립하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법적 면제까지 받고 있었다. 이러한 각종 면제들로 인하여 재산이 급속도로 성장해 갔다. 동시에 세속 세력과 충돌을 빚었다. 소유한 재물들을 순례자들이나 십자군들에게 빌려주었다. 2차 십자군 운동의 주역인 루이 7세에게 엄청난 돈을 빌려줄 뿐만 아니라 돈과 재물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책임까지 맡았고 자신들의 요새에 저장했다. 십자군 운동으로 종교적 열정에 부응하여 유럽의 귀족들과 군주들은 재물들을 기사단에게 맡겨 안전하게 운송되기를 바랬고, 순전한 신앙적 마음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이렇게 쌓여진 물질을 관리하고 빌려주는 일을 맡게되는 은행가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연의 목적을 상실한 템플 기사단에 대한 관심을 가진 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막대한 재산은 그들의 파멸을 자처하도록 했다.
3. 필립 4세와 체포
템플 기사단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히 감당했다면 성지가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십자군들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템플 기사단에게 묻기도 했다. 기사단이 기독교적 목적 의식을 거역했고, 적들과 친숙했고, 비밀적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의식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도래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러한 소문만을 가지고 프랑스왕 필립 4세는 종교적 수도회를 생각처럼 쉽게 처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템플 기사단이 교황의 직접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적 권위들의 인준 없이는 종교적 기사단을 폐지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필립은 병약한 교황 클리멘트 5세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보르도(Bordeaux)의 감독이었던 클리멘트는 필립의 술책으로 인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청을 로마로부터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3.1 필립
피부가 희고 금발을 가졌다고 하여 레벨(le Bel, the Fair)이라는 성을 가진 프랑스의 왕 필립 4세(Philip IV)는 마지막 십자군 운동을 주도한 세인트 루이(즉, 루이 9세)의 손자이며, 필립 3세(본명은 Guillaume de Nangis)와 아라곤(Aragon)의 이사벨라의 둘째 아들로서 1268년 폰텐블로(Fointainebleau)에 태어나 1314년 11월 29일 같은 장소에서 세상을 떠난 자이다. 그의 나이 세 살도 되기 전, 모친 이사벨라는 십자군 운동에서 되돌아오는 도중 사망하였기에 필립은 모친이 없는 가운데 어린 시절을 지냈다. 1276년 형 루이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 계승에 대한 오랜 투쟁이 있었다. 1285년 10월 부친도 사망하자마자 10월 5일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294-1303년까지 영국과 전쟁을 치렀고 1302-1305년까지 플랑드르(Flanders)와 전쟁을 벌였다. 1296-1303년까지 교황 보니파세 8세와 교황권과의 지상권 다툼을 벌이고 승리하여 교황의 지상권을 전환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마침내 1309년 교황 클리멘트 5세로 하여금 교황청을 프랑스 내 아비뇽으로 옮기도록 했다.
자유 사상가로 고소를 받기도 하지만 필립의 종교성은 조부와 부모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순례를 할 정도로 뛰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종교성은 가끔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스스로 모든 법, 인간, 또는 신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과대 망상가이기도 했다. 템플 기사단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그는 탐욕과 외식에 가득 찼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필립 한 사람의 의도에서 나온 모략이라기보다 그 주위에 있는 여러 부하들과 여러 사회적 요인들이 함께 가공된 음모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템플 기사단이 자신의 왕국의 여러 요새와 성에 흩어져 있으므로 내정에 간섭하고, 각종 혜택과 면제까지 받고 있는 일에 대해 불평 많은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템플 기사단이 자신의 막대한 재물을 이용하고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왕좌까지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기사단에 대한 어둡고 신비스러운 일들이 함께 어울러지게 되자 필립은 어쩔 줄 몰랐을 것이고 역으로 그들을 공격하므로 그들의 재물을 탈취하고 정권안정을 도모하려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있는 필립에게 불안과 공포를 심어준 사람은 법률가이며 양심도 없는 매정한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였다. 필립은 노가레를 위시하여 국가의 이익이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충직한 심복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소문을 들은 프랑스왕 필립은 1304년 말 아니면, 1305년 초 몇 명의 템플 기사단을 검거하여 코베이(Corbeil)로 보내어 고문한 끝에 소문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였다. 한편, 교황 베네딕트 11세 (1303-1304)를 이어 1305년 클리멘트 5세(1305-1314)는 필립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교황직에 올랐다. 필립은 기사단에 대한 혐의 사실들을 1305년 11월 14일 리용(Lyons)에서 교황식을 앞둔 클리멘트 5세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고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 교황도 기사단에 대한 여러 소문을 들었던 차에 1306년 6월 뽀아띠에르(Poitiers)로 템플 기사단의 대 지도자 쟈크 드 몰레이와 자선 기사단 지도자 풀크 드 빌라레(Fulk de Villaret)에게 서신을 보내어 자선 기사단과의 연합을 상의했다. 드 몰레이는 그 제안에 반대하면서 교황을 직접 알현하겠다고 응답했다. 비협조적인 그의 태도에 대해 교황은 매우 불쾌했다. 1307년 초, 대 지도자 드 몰레이는 60여명의 기사단과 함께 뽀아띠에르에서 풍문에 떠돌고 있는 추문들에 대해 그 진상을 밝혀달라고 교황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파리의 기사단 성전으로 되돌아 왔다. 당시 파리와 프랑스의 국민들의 정서는 기사단들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성지 상실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묻고 있는 상황이었고, 기사단이 원목적을 상실하고 그들의 조직망을 이용하여 서방의 어느 지역에서 정치적 야망을 가질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던 필립은 1307년 5월 14일 만성 질병에 시달리며 힘들게 생명을 유지하는 교황을 초청하여 자신의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했다. 성급한 필립은 클리멘트를 강요하여 템플 기사단에 대한 고발 사항들을 조사해야만 한다고 설득시켰다. 드 몰레이도 떠돌고 있는 여러 악소문에 대한 진상을 알고 싶어했기 때문에 병든 교황은 하는 수 없이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1307년 8월 24일 필립에게 교서를 내려 기사단에 대한 여러 혐의들을 조사하도록 허용했다. 프랑스의 대 종교재판장이며 무정한 사람 기욤 드 임베르(Guillaume de Imbert)는 이 일을 맡게 되었고 세속적 세력의 필요성을 요구하며 기사단의 조사를 필립에게 의뢰했다. 종교재판소의 인식 범위 안에 밝혀진 템플 기사단의 죄악상은 이단, 마술과 같은 혐의들이었다. 그리하여 1307년 9월 14일 필립은 비밀적으로 자신의 소유지에 있는 심복들에게 전국에 있는 기사단을 검거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증거들을 모두 모았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내용들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고, 통탄하고, 극악무도한 내용들로서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무리라고 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필립은 드 임베르와 이 일에 대해 논의하고 상의한 후, 9월 22일 기사단의 혐의들과 고발사항들이 있는 서신들을 모비송(Maubuisson)에서 준비토록 했다. 꾸며진 사항들을 필립은 노가레에게 봉하라고 했으며 같은 날에 파리와 프랑스에 있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검거날 까지도 드 몰레이와 그의 부하 기사단들이 파리에서 체포될 때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교황의 대리자이며 프랑스 종교재판장 기욤 드 파리(Guillaume de Paris)의 인준을 받고 10월 12일 목요일 깊은 밤 필립은 군사들을 보내어 파리 주재 기사단 수도원에 머물고 있는 드 몰레이와 60여명의 기사단을 체포하여 궁궐 감옥에 감금하고, 계속하여 이른 새벽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에 15,000명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체포령은 파리에만 그치지 않았고 동일한 날에 프랑스 전역에서 행해졌다. 10월 14일 파리 대학교의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은 필립의 심복들과 함께 노틀담에 모여 템플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을 점검했고, 10월 15일 백성들을 왕궁으로 불러모아 도미니칸들과 왕궁 대변자들은 이 문제를 설명하여 전국적으로 이런 사실들을 유포토록 했다. 10월 16일 월요일 필립은 서신들을 유럽의 군주들에게 파송하여 기사단의 범죄사실을 폭로했고 자신의 예를 따라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이러한 자신의 처사는 믿음의 변호자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천명했다. 10월 19일-11월 24에 기욤 드 파리와 그의 심복들은 검거된 기사단의 진술들을 낱낱이 기록했다. 급속하게 전개되는 체포에 대해 교황 클리멘트는 필립에게 편지를 써서 불쾌감을 토로했다.
10월의 대대적인 체포가 있기 전에 합당한 고소 혐의가 있어야 했던 필립에게 기사단의 혐의들을 고했던 자들이 있었다. 과거에 템플 기사단이었던 에스키 드 플로리앙(Esquin de Florian)은 왕을 알현하기를 요청했고 필립에게 템플 기사단의 모든 죄악상을 낱낱이 고백했다. 소와송(Soissons)교구에 속한 존 드 반벨롱(Jean de Banbellant)은 1305년에 기사단을 떠난 자로서 포와시(Poissy)의 종교재판자에게 자신이 겪었던 그들의 이단성과 마술들을 소상히 고했다. 1307년 10월 30일과 11월 20일 에드워드 2세(King Edward II)가 아종의 집사(Seneschal of Agen)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그러한 혐의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기사단의 혐의들은 5 가지로 요약되었다: 1) 입회자에게 십자가를 밟거나 침 뱉으므로 모독케 했고 음탕한 입맞춤을 하도록 했다; 2) 사람의 머리 모양을 가진 형상을 경배케 했다; 3) 미사에서 축사를 생략했다; 4) 평신도들에게 사면권을 허용했다; 5) 남색을 행했다. 첫 번째 혐의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사라센들에게 사로 잡혔을 때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이 어떤 것임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도 있다. 입회자들에게 십자가에 침을 뱉으라는 요구는 템플 기사단이 그리스도를 협잡꾼으로 보고 그를 미워하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낸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이것은 악마의 미사(Black Mass)에서 자행되는 악마숭배(Satanism)와 같은 행동이라고 여겨졌다. 매 성금요일(Good Friday)에 십자가에 있는 예수님 상에 오줌을 눈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입회자들이 나체로 템플 기사단의 지부장들 앞에 서도록 했다. 이러한 일은 나체주의적(Adamite heresy) 혐의를 받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라는 혐의도 받도록 했다. 두 번째, 세인트 데니(St. Denis)의 연대기에 따르면, 박제한 사람머리를 숭배했다고 한다. 이러한 머리를 Baphomet 라고 불렀고 머리는 신성을 의미하거나 그리스도나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것을 섬겼다고 한다. 헤브루 신비주의자들(Cabalists)은 머리가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머리를 숭배하는 템플 기사단도 이러한 이단자들과 동일시함을 받았다. 세 번째, 성미사시에 축사를 생략했다는 것은 템플 기사단이 동방 예배식과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동방 예배식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빵을 성자의 육체로, 잔을 성자의 보혈로 변화시키는 기도, 즉 축사를 행한다. 이러한 것은 에피클레시스(Epiklesis)라 알려지는데 동방 신학자들은 에피클레시스가 성례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만이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성례의 말들이 생략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서방 교회에서 볼 때 이단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템플 기사단이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영지주의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례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템플 기사단들은 고백 후 사면권을 받았다는 것은 카타르와 흡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그들에게 따르는 여러 흉악한 소문들이 있었으니 검은 고양이가 집회를 주도하며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174명의 기사단들이 대 지도자 쟈크 드 몰레이와 함께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심문하는 가운데 36명이 죽었고, 123명이 구역질나는 혐의사실들을 고백하고 시인했다. 심지어 대 지도자 드 몰레이도 기사단에 대해 고소된 혐의들을 시인했다. 10월 25일에 드 몰레이는 파리 대학교 학자들 앞에서 기사단들의 음탕한 범죄사실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실들을 4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시인할 뿐만 아니라 공개장을 써서 모든 기사단들이 순순히 혐의사실들을 고백할 것을 권했다. 마침내 1307년 10월과 11월 고문하고 심문한 끝에 필립은 138항 조서를 작성했다. 클리멘트 5세는 사태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것을 알게되자 필립에게 불평하면서 템플 기사단에 대한 일에 대해(de facto Templarorum) 교회의 인준도 없이 사람들을 이단으로 고소하고 검거하는 일에 대해 간접적으로 불평을 토로했다. 그래서 감독들과 종교재판자들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축소시키기도 했지만 드 몰레이의 고백된 진술과 조서를 보고 받았을 때는 교황도 어쩔 수 없었다. 교황은 1307년 11월 22일에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두 번째 교서인 pastoralis praeeminentiae를 내리면서 모든 군주들은 프랑스 왕 필립의 사례를 따를 것을 명했다. 그리고 1310년 10월 1일에 범교회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기사단들은 개인이든 단체든 참석하라고 명했다. 이제는 교황 스스로 형언하기 어려운 마술과 이단성을 고백했던 기사단의 지도급 인사들을 심문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드 몰레이는 기사단들에게 자신들의 고백을 철회하라고 권했다. 교황청이 최종적 결정을 유보하고 있을 때 1308년 5월과 6월, 필립은 뽀아띠에르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교황과 함께 논의하면서 두 가지를 결정했다: 템플 기사단을 교황의 직권회에 넘기기로 합의하고 그 직권장직을 필립의 고백자인 기욤 드 파리(Guilaume de Paris)에게 맡겼다; 기사단의 혐의를 심문하는 종교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에 동의한 필립은 조건으로 자신의 심복 필립 드 마르니(Philip de Marigny)를 센(Sens)의 대주교로 임명토록 했다. 이제 모든 공적 심문은 필립의 권한 아래로 들어왔다. 1308년 6월 29일과 30일, 7월 1일과 2일에 각 교구 감독들에게 지침을 내려보낸 후, 72명의 기사단들을 6명으로 구성된 추기경 위원회가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심문했다. 그들은 항목마다 자신들의 범죄를 시인했다. 그들의 죄악상이 밝혀졌지만 12월 30일에 이르러 모든 것을 심의한 후, 템플 기사단을 배교자와 불순자들임을 선언하면서 그들에게 그 어떤 피난처나 보호처나 협조를 금지하였다. 법률가들과 종교재판자들이 127항의 고발장을 작성했고 이것을 교황과 유럽의 각지로 보내져서 기사단의 핍박의 합법성을 제공했다. 왕, 교황, 도미니칸 수도회, 파리의 대학교 신학자들, 프랑스 감독들 모두 그들의 편에 서지 않고 그들을 정죄 했다. 하는 수 없이 기사단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취했다. 하나는 그들의 고백들이 고문 가운데 진술하게 되었음을 밝히려고 했고, 다른 하나는 변절자들의 진술과 고백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많은 증거를 가지지 못했으나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1309년 8월 교황의 직권회가 파리 감독의 저택에서 열렸다. 여러 가지 고백들을 점검해 갔다. 11월 26일 드 몰레이는 자신의 진술을 다시 철회하면서 무죄를 천명했다. 그를 따라 여러 기사단들이 고백들을 최소하기 시작하자 1310년 2월까지 직권회는 회의를 휴정했다. 4월에 이르러 500명에 이르는 기사단들은 자발적으로 기사단을 변호하고자 했다. 이제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더욱이 4월 7일 기사단의 대표자로 피에르 드 불론(Pierre de Boulogne)은 심문의 합법성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자 센의 대감독 드 마르니는 교구 내에 변절한 이단자들 54명을 고문하여 유죄로 판결하고 세속 권한으로 넘겼다. 고문으로 심문하는 가운데 1310년 5월 10일 36명의 기사단들이 죽었다. 1310년 5월 21일, 54명의 템플 기사단들은 파리 외곽지역에서 화형을 당했다. 8일 후, 4명의 기사단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5월말까지 120여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형벌을 목격한 기사단들은 좀처럼 자신들을 더 이상 변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교황은 1131년 10월 비엔느 종교회의(Council of Vienne, 1311-1312)에서 모든 사항들을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최종적 논의와 운명은 비엔느 종교회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클리멘트는 개회 설교에서 시편 111:1-2를 읽으면서 종교회의의 세 가지 목적-템플 기사단 사건, 성지 회복, 그리고 교회 개혁-을 밝혔다. 대부분의 의견은 기사단에 대한 새로운 공판이 실시되어야 하며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교황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 필립은 교황 클리멘트에게 압력을 가하며 템플 기사단의 혐의는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라고 설득시키며, 기사단이 지상에서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을 세뇌시키면서 필립은 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종교회의에 직접 참관했다. 10월 16일 종교회의를 개회하였으나 3회기가 지나자 교황은 6개월 동안 휴정한 후, 1312년 5월 6일 다시 개정하였다. 종교회의의 휴정기간동안, 1312년 3월 22일 교황 클리멘트 5세는 추기경들과 고위 성직자들만의 비밀 회의를 열어 Vox in excelso라는 교서를 내리면서 모든 기독교계에 템플 기사단이 타락하고 이단성이 극악하다고 선언하면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템플 기사단의 폐지를 명했다. 그 이유는 기사단이 이단성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들도 자신들의 이단성을 고백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더 이상 성지를 방어해야할 이유가 없으니 존재의 필요성도 없다고 했다. 4월 3일 종교회의 두 번째 회기에서 그 교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주관심이었던 기사단의 재산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을 가진 후, 1312년 5월 2일 교황은 Ad providam을 발표하면서 기사단의 소유지를 자선 기사단(Hospitallers)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기사단의 핍박이 프랑스를 넘어, 독일,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갈, 키프로스, 그리고 영국에까지 확대되었다. 공식적으로 템플 기사단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312년 5월 6일 Considerantes dudum이란 교서가 발표되어 지도자들은 교황의 결정에 따르고, 유죄를 선고받은 자들은 사형에 처해졌고, 무죄로 판명 받은 기사단들은 본인이 원할 시 다른 기사단으로 편성될 것이고, 기사단의 재산들은 팔레스타인의 자선 기사단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했다. 교황은 이미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대 지도자 쟈크 드 몰레이와 세 명의 지부장들에 대한 판결을 유보했다. 5년 동안 기나긴 감옥에 거하면서 지도자 네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를 부인했다는 것과 십자가에 침을 뱉었다는 것을 시인하므로 정죄를 받았다. 그리하여 1314년 3월 19일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광장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모인 가운데 4명의 기사단 지도자들은 종신형을 받기 위해 연단에 섰다.
그들에 대한 공적 고소문이 선포되었고 이것을 시인했을 때 그들의 죄가 사면 받게 되어져있으나 드 몰레이는 침묵을 깨뜨리고 자신과 모든 기사단들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모든 진술들은 고문에 의해 필립의 사주를 받아 작성되었던 것이라고 쇠사슬에 묶인 채로 소리쳐 외쳤다. 노르망디의 책임자였던 제프리 드 샤르니(Geoffrey de Charney)도 따라 행했다. 이러한 상황에 당황한 재판관들은 그들을 다시금 구금시켜서 다음날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립은 화가 치밀어서 교회의 직권자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그 날 밤, 그들을 당장에 화형 시키도록 명했다. 전설에 의하면, 소름끼치는 불길이 타오르는 가운데 드 몰레이가 외치기를 일년 안에 심판대에서 필립과 클리멘트는 자신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한 달이 조금 지나자 교황은 불결한 병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필립은 6개월 후 사냥하다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2 필립의 동기
심지어 한 나라의 국왕이라 하더라도 공정하고 타당한 이유와 교회의 허락 없이 종교적 기사단의 재산을 전유할 수 없을뿐더러 그들을 일방적으로 구금하고 심문하는 종교재판을 행사한다는 것은 중세사회의 기독교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동기로 인해 템플 기사단에 대한 검거와 처벌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1291년 성지가 모슬렘인들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책임을 템플 기사단에게 묻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교황에게 절대 복종을 맹세하며 충절을 지켰던 기사단은 클리멘트가 제안한 두 기사단의 연합을 반대하였고, 그리고 기사단이 정치적 세속적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가운데 필립은 템플 기사단에 대한 거사를 행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 졌다고 보인다. 무엇보다도 필립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물에 대한 욕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먼저 필립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가진 자처럼 보인다.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비잔틴과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심판을 가져오기 위해 십자군 운동을 주도하기로 마음을 먹기로 했다. 세 살도 되기 전에 모친을 잃고 뜻하지 않는 형 루이의 죽음으로 십대에 왕위에 오른 필립은 스스로 조부 세인트 루이에게서 자신의 이상형을 찾으며 살았다. 게다가 1306년 사랑하는 아내 잔느(Jeanne)가 사망하자 재혼도 하지 않고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 왕위를 받으려고도 했다. 유대인들을 프랑스 전역에서 몰아내는 일도 종교적 일념으로 행했다. 새롭게 구성된 연합 십자군 운동을 기사단들의 연합으로 추진하여 연합 기사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템플 기사단은 기사단들을 연합하려는 그의 의도에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필립이 보기에는 교회와 교황도 역시 방해물이었으나 보니파세 8세를 물리친 여세를 몰아서 클리멘트 5세도 교묘한 술책으로 자신의 주도하에 있게 했다. 두 번째로 필립은 교황의 지상권을 타파하고 왕의 지상권을 주창했던 자이다. 기사단이 교황에게만 복종하고 따르는 것을 못마땅히 여길 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 국가의 어느 인물과 권력을 공유하거나 국가로부터 모든 면제 특권을 받고 있는 그 어떤 인물들을 간과할 인물이 아니었다. 템플 기사단은 그들이 가진 막강한 재정과 세력, 즉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그들의 세력으로 당시의 연약한 프랑스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필립을 비롯한 그의 심복들은 이 일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세 번째로 필립은 템플 기사단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기사단의 지도자로 임명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드 몰레이로부터 단호히 거절당하므로 개인적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네 번째로 필립은 자신의 정치적 술책을 수행하기에는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해 있었다. 재정적 충원의 근원들이 다 소모되고 세금 징수마저 메마르게 되었다. 영국이나 플랑드르와의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고 있었다. 재정적 어려움을 채우기 위해 프랑스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했다. 템플 기사단의 재산에 대해 탐욕을 가지게 되었다. 필립이 템플 기사단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된 이유에 대해 리아는 "재정적인 이유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반세기 동안 재정적으로 허덕이던 필립은 부유한 단체를 박해함으로 재정적 적자를 채우려고 했다. 그래서 템플 기사단에 관심을 가지기 이전에 1291년에는 많은 돈을 빌렸던 롬바르드인들을 검거했고, 1306년 7월에는 프랑스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검거하여 그들의 재산을 압수했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을 가지면서 재정적으로 허덕이던 필립은 재정적 결핍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근원을 가지고 있는 템플 기사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적 기사단이기에 롬바르드인이나 유대인의 경우와는 다른 경우이다. 그래서 필립의 심복들은 그들에게 이단이라는 혐의를 사용하도록 그에게 권했던 것이다. 1305년-1306년에 템플 기사단에 대한 추문들, 즉, 이단자, 우상숭배자, 배교자, 그리고 남색자들이라는 추문을 듣게 되었다. 에스키 드 플로리앙(Esquin de Florian) 같은 인물이 필립의 개인적 감정에 불을 붙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여기에다가 오랫동안 노가레(Nogaret)의 조종을 받아온 필립은 머뭇거리는 교황 클리멘트 5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1307년에 템플 기사단의 검거를 명령 내리게 되었다. 종교적 망상을 지닌 필립에게 템플 기사단에 대한 도발적 행위를 하도록 불을 지핀 사람들은 라몽 룰(Ramon Lull)과 노만의 법률가 피에르 두보와(Pierre Dubois) 같은 자 등이다. 두 사람은 그들의 재산에 대한 탐욕보다는 왕의 주도 아래 기사단을 재조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특별히 룰은 영성파 프란시스칸들(Spiritual Fransicans)의 종말론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가 그들이 이단자들로 규정되고 특히 이단 카타르(Cathars)의 후예임을 알게 되자 떠났던 자였다. 그 후로부터 이단자들에 대한 냉소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본래 룰은 필립의 왕궁에서 오랫동안 거하면서 국정에 관여하거나 조언을 행했던 자였다. 비잔틴 제국과 동방제국에 대한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는데 두보와와 함께 십자군에 대한 망상을 지녔던 자였다. 그래서 기사단들의 연합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 연합은 교황의 주도가 아닌 군주의 주도 아래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민족주의적 생각에서 발로되었다. 필립은 자신이 '전사 국왕'(Rex Bellator)이 되어 예루살렘 형제단들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로마에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수하에 모든 기사단이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기사단들은 적극적으로 이런 주장에 반발하고 나섰다. 게다가 템플 기사단은 자발적으로 행해지며 모든 사법적인 것에서 면제를 받고 있었기에 다른 기사단들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필립은 템플 기사단에 가한 동일한 압박, 즉 자신이 주도하는 연합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자선 기사단들에게도 동일하게 행했다.
필립에게 템플 기사단의 검거를 시행하도록 자극을 준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노가레를 들 수 있다. 필립의 행정가인 노가레는 마키아벨리주의에 심취해 있던 자였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여러 악소문을 접하자 템플 기사단에 대한 개인적 악감과 분노를 그대로 나타내어 필립을 부추겼던 것이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이단적 정죄와 반역에 대한 혐의는 리아가 주장한 대로 세속적 권력의 재산 몰수가 항상 따라온다. 로마법에 따르면, 반역죄에 해당하는 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되어있었다. 이처럼 필립의 검거는 그들의 부동산과 재산을 가지기 위한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또, 마키아벨리주의적 심사를 가진 필립이 템플 기사단에 대한 일을 진행했다고 바버는 주장한다. 마키아벨리주의적 심사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주신제적인 혐의를 씌우는 데서 나타난다. 이러한 혐의는 1308년 8월 그들에 대한 고발장에서 나열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혐의는 1307년 10월과 11월 파리에서의 공청회에서는 고발되지 않았고, 1309-1311년 교황 직권자들의 보고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에 마키아벨리주의가 필립이 처음 템플 기사단을 체포하거나 심문한 후 검거의 합법성을 내세울 때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음모가 가능했던 이유를 13세기말과 14세기초에 프랑스인들이 "마술적 공격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던 사회적 상황, 즉 주술자들에 대한 갖가지 고발이 빈번했던 14세기의 사회적 정황에서 찾을 수 있다. 특별히 코온은 주술, 이단, 그리고 우상숭배와 같은 정치적 고발이라는 문맥에서 템플 기사단의 혐의가 고발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마녀 핍박에 대한 전초전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피터스(Peters)에 의하면, "14세기-15세기 정치적 공판에서 주술자들에 대한 고발자들은 그들이 고소한 내용들이 실재로 범죄적 행위이며 피고자들이 고소된 사실대로 행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대에 주술자들에 대한 고발이 범람했다는 사회적 정황은 필립이 자신의 음모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필립 이전 프랑스왕들도 이단들에 대해 여러 번 공격을 가했지만, 생각만큼 효과 있게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템플 기사단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종교적 수도회라기보다는 평신도로 구성된 사회적 수도회라는 인식이 국민들의 정서에 강하게 심겨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서에 템플 기사단이 마술적 음모를 꾸미는 자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의 불안과 실패의 원인이 사탄의 간악한 모략 때문이며 이러한 모략이 기사단의 주술과 마술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국민들에게 세뇌시키므로 국민적 불평을 벗어나기 위해 기사단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필립이 이단 사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정서를 충분히 이용하여 감행했기에 무리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사회적 정황을 필립이 적절히 이용하였기에 템플 기사단 검거, 공판, 그리고 재산 몰수가 용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고발들이 당대의 마술적이고 주술적 고발들과 흡사하다는 이단성을 밝혀야할 필요성이 있다. 럿셀(Russell)에 의하면, 마술적이고 주술적 행위를 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악마를 부르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악마에게 충성과 봉사를 맹세하며, 악마를 찬송하며, 그리고 음탕한 키스를 한다." 기사단에 대한 고발장에서는 이와 같은 주술적 행위를 일삼았다는 명백한 확증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러한 혐의를 추론할 수 있다. 기사단의 혐의들 가운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을 부인하고 성례의 축사를 부인하면서 대 지도자와 우상이 구원을 허락한다고 믿는다는 사실, 고양이나 우상을 숭배하고, 대낮에 동성애를 즐기는 음탕한 무리, 우상이 마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주술적 행위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4. 혐의들
1308년 8월 12일에 작성된 템플 기사단의 혐의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혐의들은 그들의 비밀적 의식에서 비롯된 이단적이고 악마적이었다는데 있다. 집회들은 엄격하게 통제된 방과 이른 새벽에 모였다. 특히 신입회자들은 십자가에 침을 뱉고 그리스도를 부인토록 강요당했고, 불평 없이 성적 희롱을 당해야만 했다. 또 미사 시, 축사를 생략한다는 것과 성금요일에 십자가를 발로 밟았다. 악마숭배 의식을 행하면서 검은 고양이나 검은 우상을 'Baphomet'라 불렀다. 여인의 형태를 취한 악마들은 기사단들의 주신제(orgiastic)에 도움을 위해 사용되었다. 출생한 기사단의 자녀를 불에 태워 지방을 우상에 붓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사단의 교리가 이단적 교리, 즉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템플 기사단의 혐의들이 모두 이단적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든 인정하지만 그 혐의 사실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을 펴는 학자들과 또 다른 입장에서 혐의를 분석하고 고소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들이 있다.
먼저 템플 기사단의 고발들은 대부분 비밀적인 의식과 신입회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 성격이 주신제든, 악마적이든, 이단적이든 간에 사회적 정서와 중세적 정신에 위배된 것이었다. 그들의 입으로 고백된 진술을 바탕하여 작성된 127항은 대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13항에 이르는 고발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거나 특히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오줌을 싼다는 것이다. 둘째(30-45항)는 등, 성기, 입 등에 음탕한 입맞춤을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상숭배와 연관을 가지는데 검은 고양이와 인간의 머리 형태(Baphomet)와 같은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이다(14항, 46-61항). 이 우상을 가리켜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부르면서 그 우상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을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러한 혐의들의 진의를 밝히는 것보다는 그것들을 어떻게 진술 받았으며 심문했느냐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 템플 기사단을 고발하고 검거하고, 전멸 시켰던 행위 자체 켤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러한 대전제를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따르고 있으며 1308년에 작성된 127항의 고발들은 고문과 엄포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대로 받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현대 역사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왜냐하면 템플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이 주로 그들의 고백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단의 고백은 1307년 왕의 직권자들이 고문과 협박으로 작성된 것과 1309년 8월부터 1310년 교황 직권자들 앞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해야만 한다. 후자의 경우 왕의 심복들이 참여하지도, 절차에 간섭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사단들은 3년 전보다는 조금 자유롭게 자신들을 변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1310년에 진행된 심문에서 기사단은 세속군주의 심문에 대해 여러 불평들을 털어놓았다. 1310년 2월 몇 명의 기사단들은 자신들의 변호를 행하기 전에 감옥에서의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3월 28일 감옥의 조건을 개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감금된 상태에서 성례도 허용되지 않았고, 개인의 모든 소유물까지 압수된 상황에서 자유스러운 진술이 나오기 어렵다고 청원했다.
1310년 4월에 이르러 500명에 가까운 기사단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고백을 철회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당황했던 클리멘트는 4월 4일 교황 칙서 Alma Mater를 발표하여 1310년 10월 1일에 개회하기로 했던 비엔느 종교회의를 일년 후로 연기했다. 1310년 4월 7일, 9명으로 구성된 기사단의 대표자들을 통해 파리에 구속되어 있었던 74명의 기사단들은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유가 허용되지 않은 채로 심문된 진술들은 증거로 채택하기가 어렵다고 4월 23일 청원서에 밝히고 있다. 여러 면으로 혐의사실들을 인정하라는 유혹을 가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고문과 협박에 대해 기사단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좋은 문서적 자료가 있는데 용감한 어느 프랑스인 공관이 1308년 초에 쓴 편지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는 고문을 받고 있는 기사단을 동정했고 그들의 입장이 합당하고 보았다. 더욱이 1309년 11월 27일 폰사 드 기지(Ponsard de Gizy)라 불리는 어느 템플 기사단은 필립왕에게 기사단의 범죄사실들을 고발했던 에스킨 드 플로리앙의 증언이 악의에 찬 것이라고 비난할 뿐만 아니라 거짓 고발자들의 이름들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9명의 대표자들과 대 지도자 드 몰레이는 대부분의 기사단들이 혐의 사실들에 대해 응답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전문적인 변호자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변호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기사단의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고 까지 했다. 또 기사단은 자신들의 맹세와 복종을 성실히 준행 했다고 주장하면서 파리 전역에 흩어져 구속되어 있는 기사단들의 효과적인 변호를 위해 한 곳으로 모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목소리로 자신들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고 이 길만이 필립의 책략을 이길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을 필립이 들어줄리 만무했다. 기사단의 감옥 생활조건과 전문적인 변호자를 세워달라는 청원이나 요구에 대해서는 누구든 반대하지 않을 것이지만 혐의사실들에 대해 협박과 고문을 받았기에 1307년의 진술들이 모두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없다거나, 혐의사실들에 대해 범죄한 사실이 없다고 마구 무죄만을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고 여겨진다. 미쉘레이(Michelet)의 문서에 의하면, 1310년 1월 프랑스 사법지역에서 벗어난 루시용(Roussillon) 출신 템플 기사단 25명 기사단은 혐의사실에 대해 심문을 받았는데 어떤 고문이나 협박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판 과정에 대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템플 기사단의 혐의들이 사실이냐 아니라는 판단은 아직도 계속되는 논쟁이다. 버로우는 기사단의 영적 삶을 보고 무죄를 판단할 수 있지만 이단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적이라고 설명한다.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의 사실 여부에 있는 것보다 혐의의 진술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이미 혐의 사실을 어느 정도라도 인정한다는 것이기에 완벽한 무죄를 주장하기란 억지처럼 보인다. 모든 혐의들은 모두 그들의 삶이 바르지 못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볼 때는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기사단이 진술하고 고백한 혐의들이 고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과 함께 혐의를 위한 검거 자체가 합법적인 것에 대한 것도 살펴보도록 하자. 이에 대해 필립왕은 템플 기사단의 체포와 감금에 대한 합법성과 재산 사용권에 대해 7 가지 질문으로 1308년 2월에 파리 대학교의 신학자들에게 문의한 적이 있었다. 1) 세속 군주가 교회의 허용 없이, 즉 교회의 인준이 있거나 교회가 군주에게 이단자들을 넘겨주었을 때 외에는 그들을 감금하고, 심문하고, 형벌을 내릴 수 없다; 2) 템플 기사단은 믿음의 변호를 위해 수임 받은 기사도들이기에 세속 사법권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단을 소유한다하더라도 교회가 판단할 일이다; 3)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기사단이라도 정죄 받아야 한다; 4) 이단자가 아닐지라도 네 번째 내용은 시정되어야 한다; 5) 세 번째 네 번째 답변으로 다섯 번째 답변이 이루어졌다; 6)와 7)는 템플 기사단의 재산이나 소유지는 군주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지와 신앙의 변호를 위하는 사역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응답했다. 조심스럽게 대답한 신학자들의 견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고백이라도 정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지연하고 있는 교황의 태도에 대해 군주가 직접 일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자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종교적 수도회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회의 일이지 세속 군주의 일이 아니며 이단 척결을 위해 종교재판을 하려면 종교재판자들이 나서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아니면 그들이 세속 군주에게 요청하므로 이루어 졌어야만 한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은 당대의 여러 단체들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진 것들이다. 중세는 이단자들이 극성을 부렸던 시기이고 그러기에 종교재판이라는 끔찍한 제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1307년 검거 당시 가장 두드러진 혐의는 그들이 이단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그리고 제단의 성례를 부인하는 것, 굵은 줄로 옷과 함께 입는 다는 것, 자신들이 효과적인 구원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 비밀 집회, 그리고 재산을 가로챈다는 것 등이다. 이런 혐의들은 전통적인 이단자들의 죄목이었다. 이러한 혐의가 이원론적 이단성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루시만(Ruciman)과 슈워드(Seward) 등이다. 루시만에 의하면 "템플 기사단의 비밀적 예식들은 사악하고 부도덕한 의식들을 일삼는 것으로 부분적으로 이원론적 사상과 관행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또 슈워드는 루시만의 견해를 따르면서 알비파 이단의 핵심 지역에서 일어난 비밀 카타르 이단자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보화들을 기사단들에게 맡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사단의 이단성을 지적할 때에 카타르 이단과 연관짓는 학자들의 견해들도 있다. 템플 기사단이 지닌 혐의들의 이단성의 특징을 이원론, 즉 영지주의로 본다. 몽터규 서머스(Montague Summers)에 의하면:
십자군 운동 시절,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가끔 동방 종교, 즉 모하메드인들과 섞여 살면서 영지주의적 단체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틀림없다. . . . 그들은 사라센들과 터키인들로부터 사상들을 가끔 빌려왔다.
템플 기사단들은 이런 환경에서 형성되었고, 모하메트교의 겉치레 아래서 고대 영지주의적 전통을 행했던 여러 분파들과 암살 비밀 결사단(the Assassins)과 친숙하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은 사실상 영지주의적 이단자들, 이원론자들로서 그들의 신앙은 마왕적 계보(Luciferians)에 들어서 있었다. 그들은 최고 지상적 신성, 영과 모든 선의 창조자, 즉 인간의 이해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를 경배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신성, 즉 물질과 모든 악의 창조자인 존재를 숭배하였다.
람버트에 의하면 이단들의 신앙 핵심에는 영지(gnosis)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죄에서 벗어난 신입회원들은 성령을 선물을 받아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육체를 소유한 그리스도와 연관 있는 정통 교리들은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고난받지 않았다. 무덤에 장사되지도 않았고 당연히 부활하지도 않았다. 교회의 성례의 효험도 불필요하게 여긴다: 세례로 모든 죄를 씻을 수 없으며; 서품식도 미사처럼 거부되었다. '사제의 축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성례란 있을 수 없다.'
위와 같은 당시의 이단자들의 특성과 기사단의 교리와 삶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단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307년 7월 14일 최초의 검거 때 기사단의 혐의를 이단성에 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겉으로 이단자들을 검거한다고 천명하면서 이단자들의 고소 절차와는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을 검거하고 심문하는 것은 교황이 주도하는 종교재판자들의 본분이었다. 그들이 검거하고, 심문하고, 재판하는 것이며 세속군주는 그들을 협조하는 것이고 형을 집행하는 자들일 뿐이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혐의들에 대한 새로운 분석이 아그립파 (Henry 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가 쓴 De occulta philosophia 안에서 1310년 그들 가운데 주신제적(orgiastic) 범죄 행위를 일삼았던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대낮에 성적인 떠들썩한 술잔치가 벌어지고 나체 형상을 숭배하면서 성적 행위로 태어난 아이들을 불에 태우고 심지어 남은 재를 가지고 과자를 만들어 헌신자들에게 먹이는 악습을 행했다고 한다. 코온에 따르면, 중세 성직자들도 기독교의 역설적이고 구속적인 성적 윤리의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적들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데 전문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308년 작성된 127항의 고발장과 1310년 교황의 직권자들이 엘느(Elne) 교구에서 행해진 144페이지에 이르는 종교재판 기록문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비슷한 내용이 나타나는 곳은 신입하는 기사단원들에게 여성들과 성관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지만 남성들과 성관계 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립파가 이런 혐의를 템플 기사단에게 있다고 한 것은 이들의 의식이 워낙 비밀적이기 때문이고, 육체를 경시하는 영지주의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고, 127항의 고발장에 나타나는 그들의 혐의들 중 마술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바버는 127항의 고발장의 주된 혐의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는 것, 동성애를 하고, 우상 숭배하는 것이라 언급한 후, 주신제적인 혐의가 그들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이러한 어떤 것도 명백하지 못하다. 중요한 요소 하나가 없다. 템플 기사단이 악마적 행동을 하여 해를 끼쳤다는 것이 아니라 16세기 마법을 쓰는 모습을 행했다는 것이다."
5. 맺는 글
시작하는 글에서 주요한 질문들을 던졌는데: 왜 템플 기사단은 고소를 당했으며 고소자의 동기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고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부가적 질문으로 템플 기사단은 누구인가? 템플 기사단을 고소한 자는 누구인가? 였다. 이제 그 답변들을 정리하도록 하자. 템플 기사단은 종교적이면서 군사적 성격을 가진 수도회였다. 십자군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성지를 위하고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대목적을 가지고 1119년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1291년 성지가 모슬렘인들의 세력아래 영속되면서 그들의 목적을 더 이상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에 대한 여러 악한 소문들이 있었지만 성지가 패망하면서 그러한 소문들이 원망으로 그들에게 쏠리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200년 가까이 유지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끌어 모았다. 순수한 마음으로 헌납한 자들의 뜻을 기리어 성지를 위해 쓰지 않고 권력을 확장하고 재산을 늘리는 일을 위해 썼다. 그러므로 세속정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또 그들의 몰락은 그들이 소유한 막대한 재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레그만은 그의 글에서 템플 기사단의 "주요한 죄목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은행가, 즉 "고리대금(usury)"이라고 한다. 중세의 최고의 전당포업과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던 유대인들보다도 그들의 활동은 더 활발했다. 가난을 맹세하고 청빈하게 사는 것이 수도사들의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템플 기사단은 물질에 눈이 멀어 성지를 위한 본래의 맹세를 망각한 채 교황청을 위하게 되었고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열정은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더욱이 중세의 최고의 고리대금업자로 행사하였고 각국에 자신들의 지점들을 만들었고 그 곳에 재물들을 쌓고 국정의 여러 일에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교회는 고리대금을 공공연히 정죄하였기에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을 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템플 기사단이 빌려준다는 미명아래 여러 왕들과 상인들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템플 기사단을 고소한 자는 프랑스왕 필립 4세와 그 심복들이었다. 13세기 서방에서만 템플 기사단의 매년 수입금이 6백만 파운드(pounds)에 달하였다. 이러한 막강한 수입원인 템플 기사단에 대해 재정난에 허덕이는 필립은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308년 8월 작성된 127항의 고발장에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재정적으로 허덕이던 프랑스왕 필립은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었을 때 심복들의 권면에 의해 템플 기사단이 소유하는 재산을 탈취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수도회이기 때문에 교황의 권력아래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법적 교회적 세속적 일에서 면제대상이었다. 그들을 처단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종교재판이었다. 종교재판이 세속정부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필립은 먼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교황권을 자신의 손아귀로 넣었다. 이어서 그가 준비 할 일은 템플 기사단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해 필립은 자신의 심복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조서를 만들기 위해 각종 잔혹한 고문을 사용하기도 하고, 화형으로 공포를 주기도 하고, 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면서 127항 혐의들을 만들어내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템플 기사단을 화형 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1312년 비엔느 종교회의에서 템플 기사단을 해체시키도록 했다. 이리하여 본래의 목적인 그들의 재산을 가로챘던 것이다. 템플 기사단의 최후는 철저하게 계획된 필립의 책략으로 이끌려 간 것이다. 템플 기사단도 완벽하게 무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해체를 당할 정도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