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갖가지 브랜드의 제품들 중 어떤 것이 더 탄탄하게 말려 있는지, 어떤 것이 가격이 더 저렴한지, 어떤 것이 더 부드러운지 등을 꼼꼼히 따져 휴지를 고르는 그런 현명한 소비자였단 말이다, 나도. 그러나 그런 여유 따윈 사라진 지 오래다. 매번 보게 되는 건 텅텅 빈 진열대. 그저 휴지가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고마운 그런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대체 왜들 그렇게 유독 휴지에 열을 올리는 건지 의아해지는 것도 잠시, 자꾸만 집에 남아 있는 휴지 개수를 셈해 보게 된다.
휴지뿐이랴. 쌀, 파스타, 통조림, 냉동식품 같이 오래 쟁여둘 수 있는 음식들부터 해열제, 감기약, 그리고 코로나19 퇴치에 좋다고 하는 여러 건강보조제들까지 진열대에 놓이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다. 그것들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사놓아야 할 지경이다.
내 가족들의 필요를 제때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사재기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텅 빈 진열대를 본 다른 사람들 역시 위기감을 느끼며 또 다시 사재기를 하고, 사재기가 사재기를 낳는 악순환이다.
마트로 달려간 사람들, 초췌해진 연방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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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대책 기자회견 하는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오른쪽)가 11일(현지시간) 오타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트뤼도 총리는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를 위한 10억 캐나다달러(약 8천700억원) 규모의 재정 대책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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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말쯤, 캐나다에도 코로나19 아웃브레이크(outbreak, 대규모 발생)가 올 수 있으니 2주 치 분량의 'Non-Perishable'(썩지 않는) 식품들을 구비해 두라는 뉴스 기사를 읽었다. 그때만 해도 캐나다의 확진자 수는 셀 수 있을 정도였고, 또 확진자가 늘긴 하겠지만 뭐 음식을 쟁일 필요까지야, 하면서 그냥 읽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2주쯤 뒤인 지난 3월 13일, 그 다음 주로 예정돼 있던 봄방학에 더해 2주를 더 집에 머물라는 공지가 내려온 그날부터 마트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곳곳에 빈 진열대들이 눈에 띄고, 카트를 가득 채워 계산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족히 10미터 이상은 돼보이는 때도 있었다.
세계 곳곳이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로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기에 너무 조용하다 싶었던 캐나다 정부도 가파르게 증가하는 확진자 수를 보며 이제는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수염 가득한 초췌한 얼굴로 기자회견을 하는 트뤼도 연방총리의 모습이 연일 뉴스에 나오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료시스템에 대한 재원 확충을 시작으로 여러 정책들이 매일 업데이트 되고 있다.
예정되어 있던 각종 행사나 스포츠 경기 등의 취소, 학교와 커뮤니티 센터 같은 공공시설의 패쇄와 같은 것들은 별다를 바 없는 조치들이지만, 그중 시선을 끄는 것은 이번 사태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될 개인과 사업체를 돕기 위한 정책들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캐나다인 누구도 집세를 내거나 식료품을 사기 위해 근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경제를 안정시키고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캐나다 연방총리 저스틴 트뤼도의 말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긴급정책들이 노동자들을 위한 것과 사업체를 위한 것으로 나뉘어 총 20가지로 제시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아 아이들을 집에서 돌봐야 하는 부모들을 위해 자녀양육보조금을 일시적으로 인상하는 것, 실직 후 실업수당을 받기까지 걸리던 기간을 단축시켜 코로나19와 관련해 일을 중단하게 되는 경우 바로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실업수당 급여 대상이 아닌 사람들도 일자리를 잃는다든지 본인이 아프거나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경우 2주마다 900불씩 15주간 소득 지원을 해주는 것, 소득 신고 마감일을 미루어 세금을 추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계속해서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고용주들을 지원하는 것, 대출금이나 학자금 상환을 6개월까지 연기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힘내라 한국, 힘내라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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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현지 시각), 캐나다 노스 밴쿠버에 있는 라이온스 게이트 병원의 직원이 안면 가리개와 마스크를 얼굴에 하고 임시로 마련된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앞에 서 있다. 벤쿠버 지역 보건 기관에 따르면, 이 병원의 행정 직원 3명이 바이러스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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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하던 초기, 한국인 친구들이 모일 때면 "확진자 수가 이 정도라는 게 말이 돼?", "검사를 제대로 안 하니 실제 걸린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자기가 걸린지도 모르고 지나간 사람들도 수두룩할 걸" 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런 말들이 그저 지나가는 의심이 아닌 사실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면 싸하게 불안해지곤 했다.
이제는 COVID-19 Assessment Centre(진단 센터)를 곳곳에 열기도 하고 검사 수를 늘리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때문에 접촉자의 동선을 일일이 공개하고, 접촉자의 접촉자까지 샅샅이 찾아내 신속히 검사하며 또 매일 그 결과를 발표하는 한국의 시스템은 바다 건너 동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 빠른 검사 속도와 검사량을 자랑하는 의료 시스템, 모든 것을 공개하는 한국 정부의 투명성, 차분히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시민의식 등을 다루는 기사들을 종종 접하는 요즘, 정말이지 '오 필승, 코리아!'다.
그런 한편, 위와 같이 시민들의 경제적 필요를 정확히 이해하고 관련 정책들을 발 빠르게 펴내고 있는 캐나다 정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역시 복지 캐나다!'라는 칭찬이 나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직장을 쉬게 되면 꽤 타격을 입겠는데"라는 생각을 할라치면, 그와 관련한 실업수당 관련 기사가 뜬다. 그 외에 예상치 못했던 양육수당까지 더 받을지 모른다 생각하면 더욱 안심이 된다.
이와 더불어, 전부 모아 예쁜 표지의 그림책으로 엮었으면 싶을 만큼 따뜻한 이야기들이 한국에서 날아드는 것도 이 흉흉한 상황을 묵묵히 이겨내가는 데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마스크 공장에 인력이 부족해 많은 양의 마스크를 생산하기 어려워지자 기꺼이 자원봉사자가 되어준 동네 주민들, 그들 덕분에 추가 생산된 5000장의 마스크를 기부한 공장주, 대구로 의료봉사를 나간 의료진들에게 무료로 호텔 객실 전부를 내어준 통 큰 호텔주, 일시적으로 임대료를 받지 않거나 감액해주는 착한 건물주들과 또 그에 상응하여 그 절반의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정부,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마스크를 양보하는 이들, 금액이 얼마 되지 않아 죄송하다는 손글씨와 함께 현금을 놓고 간 사람… 모두들 동화가 아닌 아름다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이다.
캐나다에서도 확진자 수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례들도 함께 늘고 있다. 혼자서 자가격리 중인 노인들을 위한 장보기 서비스, 의료진들의 아이들을 위한 아이돌봄 서비스 등을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행동하는 대학생들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어마어마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미국에서는 식품 사재기뿐만 아니라 총알 판매량도 함께 급증하고 있다지만, 이 와중에 마스크나 생필품을 되팔아 이득을 챙기는 기생충 같은 이들도 있다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있다지만'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부한 말을 나는 믿고 싶다. 어둠이 창궐한 곳에 쨍하고 비쳐드는 한 줄기 빛이 어둠을 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이나마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은 이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한,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가 있는 한, 차분히 정부의 지침을 따르며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멀지 않은 날에 일상이 회복되리라 기대해 본다. 아이들과 이제 겨우 며칠을 집에 묶여 있었을 뿐인데, 아무 걱정 없이 학교를 보내고 학원에 데려가고 친구들을 초대하던 날들이 먼 예전의 일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함이 아닌 특별함으로 다가올 때, 그때서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 일상이란 당연하고 흔해 빠지고 그래서 지루한 것이 아닌, 소중하고 절실하고 그래서 감사해야 하는 것이라는 진실. 아, 외치고 싶다.
"얘들아, 심심한데 마트나 갈까?"
첫댓글 어둠이 창궐한 곳에 쨍하고 비쳐드는 한 줄기 빛이 어둠을 폐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