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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사회, 인문, 문학, 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과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글을 써온 이우근 변호사의 칼럼 모음집. 한국 교회 병폐의 진원지인 목회자들에 대한 고언과 기독교인들의 비뚤어진 신앙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17세기의 신학자 멜데니우스의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을 강조하는 저자는, '다름'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과 풍성한 인격의 표현임을 역설하며, 중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 통합을 꿈꾼다.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논쟁, 좌우의 대립,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얼룩진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원칙은 지키되 다양성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다. 저자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사회공동체 전체의 성숙을 그르치는 교조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내야만 원칙을 지키되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성숙한 교회, 성숙한 사회를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 책은 한국 교회와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돌아보며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우근
법조인의 전형적인 모델이자 순수한 음악 애호가이며, 문학도이자 도그마dogma를 싫어하는 개방형 신앙인이다. 경향京鄕 각지의 판사와 부장판사를 거쳐 서울중앙지법원장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법조인의 롤모델을 제시했다. 법관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후배들에게 법률 전문서적 외에 철학, 사회학, 문학 책들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법관 시절, 힘의 논리를 가늠하기에 앞서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가를 심사숙고하고 각 사건마다 사람과 정황을 중시하며 판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법관의 자질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공동체적 양심, 자유사회에의 열망, 그리고 합리적 균형감각이라 말한다.
음악은 그의 삶을 이끄는 힘이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아끼고 아껴서 듣는가 하면,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든 아마추어 음악모임 '데뮤즈Demuse'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때론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기도 한다. 사법연수원 수석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사법연수원가를 직접 작곡했다.
한때 그는 문학도였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서 교지를 만들며 시와 소설을 썼다. 지금도 이청준, 도스토예프스키, 니코스 카... 잔차키스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들이다. 자신을 향한 엄중하고도 비판적인 성찰을 위해, 또 영혼의 내출혈 같은 맑은 고뇌를 경험하기 위해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의 글은 간담을 서늘케 하는 날 선 검으로, 우리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고발장으로, 때로는 약자를 향한 애틋한 연민으로 다가온다.
모태신앙인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신학교 진학이 꿈이었다. 그 꿈은 판사 시절, 야간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정규 졸업장을 받음으로 성취되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체화되어야 하며, 영성은 감성과 이성을 함께 아우르면서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고 믿는다. 개신교 장로로 7년 동안 시무한 후 은퇴하고 일반신도로 돌아왔다.
평북 용천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 서울대 대학원, 워싱턴주립대 로스쿨, 서울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현재 국회공직자윤리위원장?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장?사학분쟁조정위원?예술의전당 이사?세종문화회관 감사?한국과학생명포럼 이사?한국소아암재단 고문?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이사?서울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를 맡고 있다. 저서로 『바보가 그리운 시대』, 『불신앙고백』 등이 있다.
평신도에게 잘못이 있을 때 목회자는 마땅히 올바르게 충고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의 중요한 한 책무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비록 평신도라 할지라도 목회자를 충언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한 책무입니다. 목회자도 죄와 허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래서 평신도들과 꼭 같이 하나님 앞에 하나의 '가난한 영혼'으로 설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직분보다 사랑이 언제나 우선입니다.
- p. 16
좌와 우의 어느 한 길만으로 자족할 수 있는 시대나 사회는 없습니다. 좌가 있기에 우가 있을 수 있고, 우가 없다면 좌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서로의 존재가치는 상대적입니다.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소통의 상대’로서 말입니다.
삶과 역사의 진실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진보를 죄악시하며 보수만이 옳다고 우기는 극우도, 보수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면서 진보만이 정의라고 외치는 극좌도 모두 삶과 역사를 통전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시 斜視의 편견일 뿐입니다. 보수가 있어야 진보의 가치가 살아나고 진보가 있어야 보...평신도에게 잘못이 있을 때 목회자는 마땅히 올바르게 충고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의 중요한 한 책무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비록 평신도라 할지라도 목회자를 충언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한 책무입니다. 목회자도 죄와 허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래서 평신도들과 꼭 같이 하나님 앞에 하나의 '가난한 영혼'으로 설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직분보다 사랑이 언제나 우선입니다.
- p. 16
좌와 우의 어느 한 길만으로 자족할 수 있는 시대나 사회는 없습니다. 좌가 있기에 우가 있을 수 있고, 우가 없다면 좌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서로의 존재가치는 상대적입니다.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소통의 상대’로서 말입니다.
삶과 역사의 진실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진보를 죄악시하며 보수만이 옳다고 우기는 극우도, 보수를 체질적으로 싫어하면서 진보만이 정의라고 외치는 극좌도 모두 삶과 역사를 통전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시 斜視의 편견일 뿐입니다. 보수가 있어야 진보의 가치가 살아나고 진보가 있어야 보수의 빛이 드러나는 법이니, 오직 중용과 소통의 균형감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 p. 71-72
실용이라는 새 정부의 국정목표가 시의성 있는 ‘정책’의 차원을 넘어 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또 다른 이념적 도그마로 자리 잡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의 신념을 감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실용을 실용답게, 정말 품위 있는 실용답게’ 만들어가는 보완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의 보람을 아는 두툼한 인문정신…. 모두가 ‘가격’을 궁금해하는 시대에 홀로 ‘가치’를 찾아 헤매고, 성장을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내밀한 성숙을 지향하며, 영광을 바라는 사람들 가운데서 스스로 고난과 희생을 무릅쓰는 우둔함, 그 거룩한 어리석음 말입니다.
- p. 95-96
자기 신념의 무오류를 믿는 정신적 갑각류들은 오직 하나의 신념을 위해 일체의 비판을 죄악시하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이단으로 몰아칩니다.
제 신념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푹 빠져있는 지적? 종교적 갑각류들은 제 생각과 다른 견해를 만나면 냉소를 흘리거나 단단한 갑각으로 되받아 내쳐버립니다. 조롱과 비웃음만큼 지성에 반대되는 것이 없으련만, 저들은 감히 지성의 이름으로 조롱과 냉소를 일삼습니다. 어떤 위험 앞에서도 끄떡없는, 마치 바다가재의 껍질처럼 단단한 신념의 껍데기를 내흔들면서….
정신적 갑각류들은 그러나 실은 대단한 겁쟁이들입니다. 저들은 충격과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우상의 갑각 속에 꼭꼭 가둬두고 있을 뿐입니다.
- p. 122-123
종교계만큼 시기와 질투가 많은 곳이 없고, 신자들만큼 툭하면 삐치고 걸핏하면 토라지는 사람들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름 아닌 자존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썩어빠진 자존심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신앙을 어찌 신앙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허영에 들떠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질투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갈라디아서 5:26). 불신자나 세속인들을 향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열심 있다는 신앙인들, 수많은 은사恩賜를 자랑하면서도 서로 편을 갈라 질시와 반목을 일삼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나는 이 질책을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을 향한 슬픈 탄식으로 읽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독입니다. 자신과 공동체를 거짓과 파멸의 어두운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독 중에서도 아무 치료 방법이 없는, 자신의 인격을 철저히 파탄의 자리로 몰아가는 가장 무서운 맹독猛毒입니다.
- p. 169
바티칸이 내놓은 `세계화 시대의 신 7대 죄악'은 21세기 초의 시대적 주류로 등장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큽니다. 신자유주의는 인류사회의 모든 가치를 시장의 교환 법칙 아래에 두려는 유혹에서 그리 자유로운 편이 못됩니다. 시장의 기능을 절대화하면 재화와 용역은 물론 원초적 자연혜택인 공기와 물과 대지, 정신적 열매인 지혜와 문화와 예술, 우주의 물리적 바탕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마침내는 사람의 몸과 생명까지도 기어코 상품화하고야 말려는 천민자본주의의 그늘, 그 죽음의 늪으로 떨어질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 p. 284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다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과 풍성한 인격의 표현이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여유 있는 관조까지, 원칙이 지켜지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한 중용과 소통의 균형감각
한국 교회와 사회, 인문, 문학, 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과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글을 써온 이우근 변호사의 칼럼 모음집이다. 그동안 “광야처럼 뜨겁고 적막한 도시의 일상에서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다가 문득 묵상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지막이 말하고자” 온라인 '쉐어플라자'에 꾸준히 올렸던 글을 모아 출간한 '바보가 그리운 시대'와 '불신앙고백'에 이은 세 번째 ‘광야의 묵상’이다. 이 책은 주로 한국 교회 병폐의 진원지인 목회자들에 대한 고언(苦言)과 기독교인들의 비뚤어진 신앙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원칙 준수와 다양성의 존중, 이를 위한 중용과 소통의 균형감각에 대한 강조이다. 17세기의 신학자 멜데니우스(Rupertus Meldenius)의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은 여전히 우리 시대가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보기에, 저자는 이것을 “나라의 정체성과 사회의 자유민주적 토대를 지키는 근본 문제에서는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하지만, 그 밖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는 각자의 개성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며, 이 모든 인간적?사회적?국가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관용과 상생과 사랑의 힘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논쟁, 좌우의 대립, 보수와 진보의 싸움은 가없는 역사발전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드넓은 대양 속의 한낱 포말처럼 부질없는 한바탕 소동에 불과할 수 있기에,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톨레랑스’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치, 자유, 사랑’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거대한 우상숭배로부터 해방되어야만 가능하다. 종교인이든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자기신념의 무오류를 믿고 오직 하나의 신념을 위해 일체의 비판을 죄악시하며 다른 모든 가치들을 이단으로 몰아치는 근본주의적 도그마라는 우상을 숭...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다름’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과 풍성한 인격의 표현이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여유 있는 관조까지, 원칙이 지켜지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한 중용과 소통의 균형감각
한국 교회와 사회, 인문, 문학, 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과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글을 써온 이우근 변호사의 칼럼 모음집이다. 그동안 “광야처럼 뜨겁고 적막한 도시의 일상에서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다가 문득 묵상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지막이 말하고자” 온라인 '쉐어플라자'에 꾸준히 올렸던 글을 모아 출간한 '바보가 그리운 시대'와 '불신앙고백'에 이은 세 번째 ‘광야의 묵상’이다. 이 책은 주로 한국 교회 병폐의 진원지인 목회자들에 대한 고언(苦言)과 기독교인들의 비뚤어진 신앙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원칙 준수와 다양성의 존중, 이를 위한 중용과 소통의 균형감각에 대한 강조이다. 17세기의 신학자 멜데니우스(Rupertus Meldenius)의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은 여전히 우리 시대가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보기에, 저자는 이것을 “나라의 정체성과 사회의 자유민주적 토대를 지키는 근본 문제에서는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하지만, 그 밖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는 각자의 개성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하며, 이 모든 인간적?사회적?국가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관용과 상생과 사랑의 힘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논쟁, 좌우의 대립, 보수와 진보의 싸움은 가없는 역사발전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드넓은 대양 속의 한낱 포말처럼 부질없는 한바탕 소동에 불과할 수 있기에,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톨레랑스’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치, 자유, 사랑’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거대한 우상숭배로부터 해방되어야만 가능하다. 종교인이든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자기신념의 무오류를 믿고 오직 하나의 신념을 위해 일체의 비판을 죄악시하며 다른 모든 가치들을 이단으로 몰아치는 근본주의적 도그마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데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그마에 갇힌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기 신념과 다른 합리적 견해가 그 도그마의 껍데기를 뚫고 들어오면 격렬히 방어하며 반발한다. 지식인과 종교인뿐 아니라 사회공동체 전체의 성숙을 그르치는 교조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내야만 원칙을 지키되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통하는 성숙한 사회를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와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되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단초를 제공한다.
첫댓글 똘레랑스-
뭐라할까요? 절제가 있는 약간의 지나침, 상대방이 받아줄만한 한도,
타인을 의식하는 절제있는 약간의 지나침이라 할까?
그것과 함께 봐주는 사람들의 똘레랑스가 필요하겠지요, 똘레랑스를 누릴 수 있는 관계 !
똘레랑스는 '나 다움"의 포기가 아니라..
'나와 다름"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어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