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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 기술된 6·25전쟁 2-2
양일국 : 소련이나 중국은 공산당이라는 소수의 귀족만을 위한 낙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분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공항 매점에서 유명 생수를 하나 사서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마중 나온 공산당 관계자가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생수는 믿을 수 없으니 버려라, 자신의 집에 가면 공산당 간부들에게 지급되는 진짜 생수가 있으니 그걸 주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소수 공산당 간부들을 위한 식자재와 생필품을 별도의 공장 라인에서 만든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공산당 간부에게 제공하는 담배를 재배하는 밭은 따로 관리하고 해로운 농약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허가받지 않은 농약을 사용하다 걸리면 스파이법으로 처벌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중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런 중국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경희 : 최근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서문에 보니 조지 오웰이 1943년에 탈고를 하고 책을 출판하려고 했는데, 2년간 출판을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2년간 12개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했는데, 출판을 거절당한 이유가 책의 내용이 소련의 스탈린을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지식인들이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죠.
지식인들의 좌편향이 최근에 생겨난 게 아니고, 소련이 생겨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양일국 :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북위 37도선 이남까지 밀렸습니다. 이때 많은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하했습니다.
반면에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월북한 사람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때 이미 한반도에서 체제 선택은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는지요?
정경희 : 요즘 교과서에 실린 6∙25전쟁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너무 간단하게 실려 있어서 왜 6∙25전쟁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도 알기 힘듭니다. 2018년에 문재인 정부 교육과정이 나왔는데, 남침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남침에 대해 알리기 싫었던 거죠. 언론과 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남침이라는 구절을 넣었지만, 여전히 교과서에 실린 6∙25전쟁 관련 내용은 빈약합니다.
전쟁 중 피난민들이 남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보면 처절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옵니다. 제가 이번에 6∙25 책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유엔군이 국군과 함께 북진해서 올라갈 때 북한의 지형에 대해서 잘 몰라요.
8군단과 10군단이 동과 서로 나눠서 북진하는데, 낭림산맥이 사이에 있어 양쪽 군대가 북진을 하면 할수록 틈새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중공군이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하면서, 우리 측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거죠.
김일성은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바로 그날에 마오쩌둥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군대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써서 중공군을 불러들였지요.
이 편지가 6∙25전쟁이 사전에 준비된 전쟁이라는, 즉 남침이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최대 300만 명으로 잡는 학자도 있습니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그 처절한 장진호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유엔군은 천신만고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영하 37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 개마고원 고토리라는 마을에 임시 텐트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눈 덮인 허허벌판에 수천 명의 피란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미군만 따라가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북한주민들이 이곳에 모여든 겁니다. 주변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개마고원 지대라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은 지역인데도 말입니다.
고토리에서 똑바로 내려가면 흥남입니다. 고토리에서부터 모여든 피난민들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그 숫자가 불어납니다. 퇴각하는 유엔군을 따라서 피난민도 남쪽으로 계속 내려온 셈이죠.
마침내 유엔군은 흥남에 모인 민간인 피난민도 군인과 마찬가지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고, 2주에 걸쳐 100척이 넘는 배로 10만 명 가까운 민간인을 철수시켰습니다.
서쪽에서도 많은 피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옵니다. 평양에서는 남한으로 내려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폭격 맞은 대동강 철교를 이틀 사이에 건넜다고 합니다. 사실 그 다리는 너무도 처참하게 부서져서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간 북한 공산정권에서 살며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집과 땅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에서 ‘원조 탈북자를 아시나요?’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00만 명 정도가 6∙25전쟁 중에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일국 : 일전에 관객 수 천만 명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흥남철수 장면이 생생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마치 미군은 북한 주민을 돕고자 할 의사가 없는데, 한국군 통역장교의 간청으로 마지못해 피난민을 승선시킨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증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요?
정경희 : 영화에서 통역장교로 나오는 분이 당시 미 육군 제10 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 박사인데, 실제 인물입니다.
물론 이분의 간청도 민간인 철수에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미 12월 초부터 10군단 사령부에서 일본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하고 주고받은 전문에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유엔군을 따라온 피난민들을 대한민국으로 보내야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흥남에서 철수시킨 인원은, 군인이 10만 5천 명 정도이고 피난민이 9만 명 정도입니다. 군인과 피난민 약 20만 명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15일 동안, 전문(電文)을 보내서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 배를 모으고 심지어 화물선까지 모아 100척이 넘는 배로 피난민들을 대한민국으로 실어 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이 적극적으로 피난민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배에 피난민들을 태우는 과정에서는 중공군의 포격으로부터 이들을 엄호하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피난민을 한 명이라도 더 배에 태우기 위해 화물을 배에서 내렸고, 나중에는 560만 톤에 달하는 군사장비, 기름, 화약 등이 흥남부두에 남겨지게 됩니다. 마지막엔 해병대가 흥남부두에 남겨둔 군사장비가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폭파시키고 철수했습니다.
좌파들은 이걸 가지고 마치 미군이 흥남을 일부러 폭파시킨 것처럼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양일국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Leonard RaLue) 선장이 후에 수도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정경희 :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민간인을 태우고 흥남을 떠난 가장 마지막 배였습니다.
12월 22일 흥남항에 들어갔죠. 미군 장교가 라루 선장에게 배에 몇 명을 태울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화물선이었기 때문에 선장은 12명을 더 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군 장교가 피난민이 무척 많으니 최대한 많이 태워달라고 부탁을 하고, 라루 선장은 그러겠다고 대답합니다. 피난민을 배에 태우는 데만 13시간 40분이 걸렸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웠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총 1만 4천 명을 태웠습니다.
12월 23일 흥남을 떠나 항해를 시작한 배에서 라루 선장은 걱정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기 때문에 갑판을 빼곡히 채운 피난민들이 밤새 얼어 죽을까 봐 걱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다행히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배는 24일에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부산항에 피난민들이 너무 많아 내리지 못하고, 이튿날인 12월 25일, 배는 다시 거제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제도에 전원 무사히 도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라루 선장의 일기에는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시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에서 아기 다섯 명이 태어난 것이죠. 이 아이들의 이름을 선원들이 김치 1, 김치 2… 이렇게 붙여줬다고 하죠.
이런 일을 겪은 라루 선장이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훗날 라루 선장은 자신이 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한 계기를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해 크리스마스 한국 해안의 황량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제게 옵니다.”
라루 선장은 1954년에 고향인 미국 뉴저지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마리너스’라는 이름으로 50년 가까이 수사 생활을 하셨는데, 2001년에 이분이 계신 수도원이 재정이 나빠져 문을 닫을 상황에 처합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부흥시켜 줄 후원자를 찾았는데, 마침 우리나라 경상북도 왜관 수도원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왜관 수도원이 라루 선장이 계시던 이 수도원을 인수하겠다는 계약서를 쓴 지 이틀 후, 오랫동안 투병 중이던 라루 선장은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왜관 수도원은 1949년에 원산에서 북한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수도사들이 세우셨다고 합니다.
양일국 : 이제 6∙25전쟁이 휴전상태로 들어간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는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국제법과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택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포로를 북한에 돌려보내고 휴전을 하려던 미국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것인데요. 끝까지 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회유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었습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는 과정도 궁금합니다.
정경희 : 미국은 6∙25전쟁에 참전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전쟁이 확대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이후에는 이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게다가 미국 내의 사정도 녹록지가 않았습니다. 1952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에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코리아라는 나라로 떠난 내 아들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는 질문이 쏟아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쟁을 멈추기 위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죠.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하게 되면 미군이 바다 건너로 철수할 것인데 반해, 소련과 중국은 한반도와 붙어 있기에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습니다.
휴전협정이 맺어져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안보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른바 반공포로들을 일거에 석방시키는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휴전을 원하던 미국은 휴전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한미간에 군사동맹을 체결해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맺은 조약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흔히 ‘새우와 고래가 맺은 조약’이라고 불립니다. 어느 쪽이 새우고 어느 쪽이 고래인지는 말씀 안 드려도 다 아실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조약으로 “우리의 후손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확고한 대북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치발전과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양일국 :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6∙25전쟁이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6∙25전쟁 하면 피해자 숫자, 파괴된 시설, 동족상잔의 비극이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의 잔재를 털어 버리고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합심하는 계기도 됐다고 봅니다.
내부 결속의 측면에서 북한도 박헌영 일파를 숙청하고 김일성 독재가 완성되었습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정경희 :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깨우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6∙25전쟁 중에 우리나라가 3개월 정도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관념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그 본질을 알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의 인민재판과 수탈 등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25전쟁 이후에는 반공체제를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지배를 겪으면서 비로소 국민의식이 생기고 결속력이 생겼던 것입니다.
양일국 : 지도에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저력이 새삼 가슴 뭉클합니다. 올해로 벌써 6·25전쟁 70주년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6·25가 현 시국에 시사하는 바를 듣고자 합니다.
정경희 : 젊은이들에게는 6∙.25전쟁이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에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체제 대결이었습니다. 전쟁 이후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달리 눈부신 정치적, 경제성장을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유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념의 낙동강 전선에 서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6∙25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밀리면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소멸할지도 모릅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양일국 : 오늘 긴 시간 동안 귀한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출처 월드뷰 06 JUNE 2020
1951년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북한군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