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경이의 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는 속담이 주는 말의 참 뜻은 웃음이 가지고 있는 가치(價値)를 아주 쉽게 설명된 말이라 생각한다. 웃음 뒷편에 숨겨진 저마다 다른 의미의 사연은 나름대로의 방식에 의해 자신의 얼굴에 엇비슷한 표정으로 나타내곤 한다. 즐겁고 기쁜 의미의 웃음은 그 길이가 길지 않고, 슬프고 우울한 웃음은 억지로라도 감추려고 한다. 체면이라는 겉치레 표정에 속 마음을 숨기고 딴청을 부린다. 이 모두가 지나고 나면 추억의 창고에서 재워진 체 세월의 나이를 보태고 있을 뿐이다. 슬프고 우울한 미소라도 볼 때면 불현듯 비집고 튀어나와 가슴 한 켠이 쓰린다. 지워 버린 줄 알았던, 잊혀진 줄 알았던 추억들이 마치 아무리 숱하게 밣혀도 길섶의 질경이가 꽃대를 올리는 힘처럼 살아있다. 차전초로 불리는 고난을 이겨내는 풀이다.
만춘(晩春)의 오후,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는 한뼘 정도 남았다. 온천장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담소도 하고 살얼음이 담긴 시원한 밀면으로 점심을 한 뒤 유명한 허심청에서 온천욕을 했다. 77번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학교 근처 건널목 신호 지시에 잠깐 정차할때, 창문을 통해 본 학생들의 군것질을 목격했다. 같은 교복의 까까머리 학생 8명중 7명은 손에 햄버그, 토스트, 빵 등의 먹거리가 들려 있었으나 유독 한 학생만이 시선을 허공으로 보내며 쓴미소를 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은 금새 해답이 되어 내 마음에 파고 들었다. “군것질 안해도 나는 공부할 수 있다. 배도 고프지 않다. 까짓거 다음에 돈 있을때 사먹으면 되지.” 이런 성인군자의 말이 아니라 눈물을 삼키며 참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학창시절 겪어봤기 때문에 확실한 그림이 그려진다. 진정한 우정을 논하기에는 어린 학생이라 탓할 수도 없다. 조금 부족한 듯한 교육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화가 난다. 하나 더 사서 친구의 아플 마음을 달래어 주는 우정, 반으로 잘라 나누어 먹는 우정이, 같이 먹지 않는 혼자가 아니라는 참된 우정이 교육의 현장에는 그림의 떡이란 말인가. 안타깝고 화가 난다. 저 아이가 커서 지금 이 장면을 본다면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할까, 신호가 풀려 버스가 움직인다. 또 기억의 한자락이 틈새를 빠져 나온다. 지금은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이 있는 그 곳은 그 옛날 고교 모교 교정이다. 그 때 당시 담장이 일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어 손쉽게 군것질을 할 수 있었다. 간이 포장 호떡장수가 줄지어 있었지만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용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던 시절이라 호떡의 맛 또한 모를 수 밖에. 먹고 싶은 욕심은 교통비를 아껴 모았다가 한 개를 맛볼 수 있었다. 거제동에서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남보다 조금 일찍 움직이면 되는 쉬운 방법이었다. 그 때 호떡의 맛은 기쁜 웃음속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환갑의 지금도 호떡을 보면 주저않고 사먹는다. 기억속의 옛 그 맛은 아니다. 입 맛이 변한 탓도 있지만 배 고픈 시절의 추억을 재현하기가 어렵지 않는가. 얼마 전 구덕 꽃마을에서 사먹은 호떡은 그 옛 맛이 재현 되었다고 느낀 맛이었다.
어저께 오일장인 구포장에 갔다. 장터 골목마다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도 없다. 작은 함지박에 결명자을 파는 할매가 있다. 색깔이 참 곱고 윤이 난다. 한 되를 샀다. 두고 두고 차(茶)로 끓여 먹을 수 있다. 한방(韓方)의 약효는 익히 알고 있는 터라 간략하면 눈에 좋고 변비, 동맥, 혈압, 뒷목이 뻐근할 때 등 상시 복용하면 이로운 차(茶)다.
품앗이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아이는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오월의 햇살을 피해 구구단을 외우고 있다. 학교 자모회에서 학교 화단과 자투리 땅에 어머니들이 힘을 모아 오차(지금 알고 보니 결명자다) 모종을 하러 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 60년대 중반의 시절이라 전기도 수도 시설도 없었던 깡촌이다. 아이들에게 우물물을 끓여 먹일 때 귀한 보리 대신에 약효가 있는 결명자차를 먹이기 위해 어머니는 오월의 햇살을 미워하지 않았다. 모종을 하는 어머니의 호미 쥔 손은 새끼의 환한 웃음을 생각하며 심었지 싶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살아있다. 내 새끼가 먹을 오차물이니까. 아무리 배 고픈 시절이라도 그 때의 어머니 미소는 먹지 않고도 배 부른 미소였다. 결실의 수확은 인정 많고 힘이 센 소사 아저씨의 몫이었다. 찬 바람이 불면 큰 가마솥에 펄펄 끓여 노란 주전자에 담아 각 교실로 나누어 주었다. 그 옛날 소사 아저씨의 사랑은 아버지와 진배 없었고 아저씨의 미소만 기억에 남아 있다. 잊혀지지 않는 어릴 적 기억이 오일장터를 빠져 나오며 길게 길게 이어졌다. 옛 속담에 “논에 물 댈 때와 자식 입에 밥 들어 갈 때가 최고다” 가 주는 진정한 뜻은 바로 어머님의 그 미소(微笑)가 틀림없다.
의령군 지정면 이름없는 소류지 올라 가는 임도에 질경이가 군락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옛날에는 우, 마차가 지나던 길이 지금은 경운기가 지나간다. 경운기 타이어가 지나간 자리의 질경이는 상처투성이다. 갈쿠리 바퀴로 지나갈때면 밑둥이 잘려 나간다. 질경이도 살아 남아야 나물이 되고 약초가 되어 꿈을 이룰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어떠한 경우의 고난이 지나가도 살아 남아야 존재의 가치를 말할 수 있고 못 다 이룬 꿈이라도 욕심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질경이의 꿈은 결코 평범한 꿈은 아니라 믿는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말은 쉽지만 할려는 의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