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청影靑은 송대宋代에 경덕진에서 청자발전의 기초 위에 창조한 신제품으로, 유색釉色은 맑고 옅은 청색으로 소량의 철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태토는 고우면서 치밀하고, 기벽은 대부분 비교적 얇다. 소성된 뒤에 유약을 투과하여 장식된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므로, '영청影靑' 또는 '영청映靑'이라 불렸다. 영청자기는 송대 경덕진의 주산품으로, 생산량과 영향이 막대하였으며, 경덕진이 후대에 도자업의 중심지가 되는 기초를 다져주었다. 경덕진과 그 부근의 호전湖田 및 상호湘湖 등지에서 생산한 이외에도, 강서江西의 길주吉州, 남풍南豊, 낙평樂平, 포성浦城, 모점茅店 등지에서도 생산하였으며, 심지어 복건福建의 덕화德化와 하북河北의 거록巨鹿에서도 영청자기가 많이 출토된다.
영청자기 태토의 색은 백색이지만, 자토瓷土에 일정량의 철분이 섞여 있으므로, 소성후 굽과 주둥이의 노태처露胎處는 미황색米黃色을 띤다. 동시에 당시의 소성기술상 화염과 소성온도를 완벽하게 조절하지 못한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옅은 청색의 유색釉色에 농담濃淡의 구분이 나타하며, 일부는 심지어 유면 전체가 미황색으로 나타나거나 간혹 빙렬이 존재하기도 한다.
영청자기의 장식기법은 풍부하며, 각화(刻畵-조각하기), 획화(劃畵-긁기), 인화문印花紋, 퇴소(堆塑-만들어 붙임), 가반(加斑-반점을 칠함) 등의 여러 방법이 있다. 각화와 획화한 기물은 대부분 기벽이 얇고, 태토가 희고 깨끗하며 유질釉質이 맑으면서 청색을 띠므로, 문양이 투명하게 나타나고, 각화한 도법刀法은 자연스러우면서 정밀하다. 이 종류는 대부분 호전요湖田窯에서 생산되었으며, 영청자기 가운데 가장 우수한 제품이다.
그리고 인화문은 북방 정요定窯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일부 제품은 인화문을 찍은 뒤에 다시 기벽을 다듬어 인화문의 윤곽선이 선명해지도록 했다. 이러한 제품은 남송시에 길주吉州와 상호湘湖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만들어 붙인 문양(퇴소문堆塑紋) 가운데 일부는 다시 조각하였으며, 일부는 찍어서 만든 문양을 겹쳐 쌓아, 서민적인 정취가 가득하였다.
영청가반(影靑加斑-유면에 반점이 나타나게 함)의 장식수법은 진당晉唐시기 절강浙江의 청자가반靑瓷加斑에서 기원하였다. 유약 내에 산화동을 첨가하여, 소성된 뒤에 옅은 청색의 유약 속에 점점이 붉은색의 반점이 나타나게 되며, 이 반점은 대부분 색이 진하여 흑색에 가깝고, 가끔 우연히 요변窯變에 의해 홍색紅色의 반점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반점은 후대의 유리홍과 유사하므로, 유리홍의 선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影靑帶紅斑(홍반이 있는 영청자기)은 매우 귀중하다.
복건성福建省 덕화德化 일대에서 생산한 영청자기는 태토가 결백潔白한 이외에도, 기벽器壁이 강서江西의 영청자기에 비하여 훨씬 두껍고 무거우며, 두드리면 소리가 날카롭게 쨍쨍거린다. 이 지역의 산품에는 주둥이가 꽃 모양인 병甁과 완碗이 비교적 많은데, 기형이 소성할 때 변형되기 쉬우므로, 병과 완 같은 원형기물에 왕왕 세로로 능선稜線을 덧붙여서 지탱력을 강화하였다.
하북河北 거록巨鹿에서 생산한 영청자기에는 양면을 획화劃畵로 장식한 기물이 많다. 삿갓처럼 생긴 완의 굽은 비교적 작고 기물의 높이는 높으며, 기형과 도안이 요주요와 유사하지만, 푸르기는 하늘과 같고 얇기는 종이와 같으며 소리는 옥경玉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영청자의 제작은 시유방법상 두 종류의 형식이 있다. 하나는 기물의 안팎에 가득 시유하지만 굽에까지는 도달하지 않는 것으로 粗底(거친 굽)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구연부의 둘레를 시유하지 않고 기타부위는 굽을 포함하여 모두 시유하며, 망구(芒口 - 거친 입구)라고 부른다. 이 망구의 제작방법은 소성할 때 복소법(覆燒法-기물을 엎어놓고 소성)을 사용하기 때문으로, 일부는 망구 부위에 은박銀箔이나 동박銅箔을 입혔으며, 대개 명기용冥器用이다.
영청자의 장식도안은 각지의 장점을 흡수하여 일반적으로 해수어海水魚, 각종 초목과 화훼, 연판蓮瓣과 해아반련(孩兒攀蓮-연꽃을 든 어린이) 등의 문양이 있다. 퇴소는 대부분 인물과 용봉 등의 문양이다. 기물의 조형에는 과릉형(참외 모양)과 화판형花瓣形 등이 많다. 분합에는 과릉형과 매화형(또는 해바라기형)이 있으며, 일부에는 합 안에 화과花果를 퇴소법으로 만들어 넣었다.
병의 조형에는 매병, 희이병犧耳甁(희생동물 형태의 귀가 달린 병), 방병(方甁-사각병), 과릉병 등이 있으며, 일부 병의 구연부는 말린 잎모양이며, 매병에는 대부분 뚜껑이 있다. 영청에는 완과 접시의 수량이 가장 많으며, 완은 대부분 굽이 작고 주둥이가 벌어진 양모식(凉帽式-삿갓형)이며, 해바라기형 주둥이의 참외형 몸체도 있다. 접시에도 과릉형이나 직구直口, 평저平底, 세형洗形이 있다.
부장품 가운데 비교적 보편적인 영청기물은 곡창穀倉으로, 통상 의반관衣飯罐이라 부르며, 조형은 대부분 비교적 높은 원주형圓柱形으로, 문양은 기물의 상반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인물과 운룡雲龍과 비금飛禽 등을 첩소한 것이 많고, 뚜껑의 꼭지에도 새 등을 첩소하였다. 일부 기물의 몸체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붙였으며, 이것은 대개 매달기 위한 것이었다.
근대 경덕진에서 송대의 영청을 많이 모방하며, 일부는 모방수준이 뛰어나, 감정할 때 태토와 유약 및 장식수법 등에서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1) 영청자기 진품의 태토는 결백潔白하며 고우면서 치밀하다. 기물의 노태처露胎處는 대부분 산화되어 미황색米黃色이다. 모방품의 태토는 굵고 성글며, 기물의 노태처에 미황색이 적다.
2) 진품의 유면은 영롱하고 투명하며, 비록 침식되었지만 대부분 일정한 광택을 보유하고 있다. 모방품의 유면은 희박하며 일부 기물에는 미세한 '모공'이 가득 분포한다. 유색釉色이 어둡고 침침하며, 일부는 회색을 띠는 청색으로, 방금 가마에서 나온 듯한 '화기火氣'가 한 꺼풀 존재한다. 위조처리를 거친 제품은 유면이 부식되어 답답한 느낌이 든다.
3) 진품은 장식면에서 획화선이 가늘고 깊으며, 기벽이 얇으므로 광선아래에서 투명하게 비쳐 보이며, 인화문은 잘 정돈되어 있고, 선이 대부분 반원형을 형성하며 도안의 배치가 적절하다. 모방품의 각화선은 굵고 넓으며, 불투명하거나 부분적으로 투명하고, 도안의 배치가 무질서하고 엉성하다.
원대 경덕진의 원산元山 등지에서 영청자기가 여전히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는 기벽이 두텁게 변해갔으며, 유색釉色이 백색을 향하여 진일보하였으며, 운룡雲龍과 연판蓮瓣 등으로 장식하였지만, 문양이 없는 기물이 비교적 많다. 이 당시에 영청자기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백자는 점차 영청자기를 대체하였으며, 동시에 유하채釉下彩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영청자기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靑白瓷 감정의 네가지 요점> 청백자靑白瓷, 속칭 영청影靑 또는 은청隱靑과 영청映靑은 백색의 유색에 미미하게 청색이 어른거리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송대宋代에 요지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여 생산량이 많으면서 공예수준이 정밀한 자기로서, 진귀한 정도는 송대 오대명요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명성은 그 당시에도 멀리까지 퍼졌다. 많은 요지 가운데 경덕진의 호전湖田, 상호湘湖, 승매정勝梅亭, 남시가南市街, 황니두黃泥頭, 유가만柳家灣 등의 요지에서 생산된 청백자가 우수하여 "가옥기假玉器"라고 불리워졌다.
경덕진에는 천 여년간 끊임없이 가마의 불꽃이 타올랐으므로 청백자를 제작할 수 있는 도공들도 대대로 전승되어, 현재에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공방에서 진품을 혼동시킬 만한 송원宋元시기 청백자의 모조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수장가들이 항상 각종 모조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으며, 더욱이 늘 이러한 모방품제작장에 가서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으므로, 수장과정에서 그림을 보고 천리마를 구하러 다니듯이(按圖索驥) '실수'하는 일이 발생한다. 청백자를 감정하는 요점을 다음과 같다.
1. 표면의 유약의 관찰 송대의 청백자는 호전요湖田窯를 대표로 하므로 현대의 작업장에서도 대다수가 호전요를 '표준형'으로 하여 온갖 궁리를 다해 백색 가운데 청색이 은은한 유색을 가지면서 옥 같이 윤택하게 만들어 내려고 노력을 기울이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송대宋代의 청백자는 고칼슘유자기로서 유약에 산화칼슘의 함량이 14%정도에 달하며, 1300℃정도의 고온에서 소성될 때 유약의 유동성이 커서 기물의 각화刻畵, 인화印畵, 전각轉角, 절만折彎 등의 부위에 유약이 비교적 두텁게 뭉쳐 유색이 호청색(湖靑色-호수 빛깔)을 띠며, 물방울처럼 맺힌 유약의 덩어리(누흔淚痕)가 나타나고, 유약이 얇은 부위는 백색을 띠며 유면의 광택이 맑고 윤택하다.
그러나 모조품은 대다수가 석회염유를 사용하여 유약 속에 산화칼슘의 함량이 낮으므로 고온에서 유동성이 약하여 취유현상(聚釉現象-유약이 뭉치는 현상)이 적게 나타나며 기물 전체의 유색이 비교적 천편일률적이고 유면이 투명도를 잃어버렸다.
일부 모조품은 인위적으로 취유현상을 만들고자 각화, 인화, 전각, 절만한 부위에 유약을 많이 칠하여 유층을 두텁게 만들어 유색을 진하게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인 취유현상은 유약 속에 거품이 모인 듯한 작은 유약 덩이를 형성하기 어려우므로 취유현상이 부자연스러워 색괴(色塊-색칠한 얼룩)와 유사하게 보인다.
일부 모조품은 유리질감이 특히 강하여 광택이 눈을 찔러 고대기물의 '보광寶光'과는 거리가 멀다.
또 일부 작업장에서는 산酸으로 광택을 제거하는 수단을 사용하지만, 그 결과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까끌까끌하게 되며, 부식정도가 지나치면 유면에 구멍이 뚫리게 되므로 조금만 주의하면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2. 태토를 관찰 여러 서적에서 송대 청백자의 태토를 소개하여 '결백潔白하고 치밀하며 고우면서 기름지고 자화瓷化정도가 높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그 당시의 생산력과 공예수준에 대하여 말한 것에 불과하다. 현대자기의 태질이 결백하고 치밀하며 고우면서 기름지고 자화정도가 높은 정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송대 호전요 청백자의 태토는 담담한 미황색米黃色과 옅은 회백색이 대다수이며, 당시에는 자석瓷石에 고령토를 첨가하는 이원배합二元配合(원대元代에 비로소 발명되었다)법을 아직 채용하지 않았으므로 태질이 현대자기의 견고하고 치밀한 것에 비할 수가 없다. 이것은 파편의 단면에서 관찰이 가능하며, 더 엄중한 경우에는 단면에 세밀한 구멍도 나타난다.
이 밖에 송대의 자토瓷土는 방아와 절구로 분쇄하고 수공으로 도련淘煉하여 자토가 아주 세밀하지는 않다. 많은 기물의 노태처露胎處(특히 굽 부위)에 과립형태의 흙 찌꺼기가 존재한다.
현대의 모조품은 태질이 설백색雪白色으로 매끄럽고 단단하므로 이 점은 식별하기 매우 쉽다. 수장가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일부 작업장에서 자토에 미량의 유색토有色土와 고운 입자를 뒤섞어 태색과 태토의 구조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일부 모조품은 완성된 자기의 노태처에 황토나 흑색의 진흙을 칠하여 출토품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은 약간의 상식만 있어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3. 굽을 관찰 전세품과 출토품을 보면, 송대 청백자는 기본적으로 망구복소법(芒口覆燒法-구연부의 유약을 깍아내고 뒤집어서 소성)과 삽권첩소법(澁圈疊燒法-내면의 유약을 둥글게 훑어내고 겹쳐서 소성) 및 점병치소법(도지미를 받쳐서 소성)의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현대의 모조품에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망구복소와 삽권첩소는 망구와 삽권 부위에 태토가 드러나므로 태질의 특징을 파악하기만 하면 식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점병치소법의 경우에는 진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주의할 점은 진품의 점병흔적은 담담한 토황색土黃色 혹은 황갈색黃褐色을 띠며 또한 농도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모조품은 실제로는 원형의 도지미를 받쳐서 소성하지 않고 갑발 속에서(심지어 갑발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소성한다) 소성한 다음에, 다시 인위적으로 유약원료와 안료 및 기타 물질을 이용하여 점병흔(도지미 자욱)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점병흔'의 색은 황흑색黃黑色 혹은 장색醬色으로 매우 진하며, 심지어 점병흔이 기물의 굽을 벗어나기도 하여, 진품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간 흔적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일부 모조기물에서는 더욱 간단하게 담담한 황색의 장수漿水 혹은 황색의 진흙을 굽에 칠하여 '더러움'으로 '진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또 주의할 점은 일부 권족의 기물에는 굽벽에 유약이 없이 굽 바닥에 유약이 가득 칠해져 있으면서 점병흔이 나타나기도 하며, 일부 기물에는 점병흔이 있으면서 지정흔(눈 받침 자욱)도 존재하여 기본적으로 상식에 어긋나는데, 이것은 모조자가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 스스로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4. 기형을 관찰 청백자를 생산한 요지가 매우 많으며 장기간에 걸쳐 생산되었으므로 기형이 매우 풍부하다. 일용품, 진열품, 예물禮物, 명기冥器 등의 품종은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우며, 시기별로 품종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과 연변규율 및 특징을 잘 파악해야 한다.
현대의 작업장에서 생산하는 청백자는 대다수가 정식으로 출판된 도록이나 전세품을 보고 모조를 진행하지만, 결국에는 모조품에 불과하므로 일정한 상식이 있으면 구별할 수 있다.
비교적 어려운 것은 소수의 사이비한 기형(존재한 듯하면서 확실한 근거가 없는 기형)으로 조금만 부주의하면 가장 실수하기 쉽다.
당연히, 위에서 말한 네 가지를 제외하고, 또 송대宋代와 원대元代의 호전요와 기타 요지, 장식기법 및 소성공예 등과 같이 비교하여 구별해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으므로, 수장가는 실천을 통해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면, 송대 청백자의 기벽은 원대보다 더 얇으며, 정교한 기물은 탈태에 가깝다. 그러나 모조한 박태청백자는 비록 기벽이 심지어 0.5mm정도로 얇지만, 현대의 제모관주법(制模灌注法-형틀에 니장을 주입하여 성형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성형되었으므로 송대宋代에 수공으로 성형한 기물과 완전히 구별되며, 매우 규정하고 틀에 박혀 영활함과 운치가 결핍되어 있다. 동시에 모조한 박태청백자는 인화印花 혹은 획화劃畵 장식만 나타나고 각화刻畵장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처럼 얇은 기물에 각화하는 기예는 "세자의 얼음이 얼려면 하루의 추위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氷凍三尺,非一日之寒)"라는 말처럼 현대의 일반 도공이 흉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호전요 영청자기의 특징> 호전요 湖田窯 는 경덕진시 동남의 호전촌 湖田村에 위치해 있으며, 오대시기에는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였다. 청자의 태토는 청회색이었으며, 백자는 결백하였고, 주로 반盤과 완碗을 생산하였다. 북송초기에 앙소법仰燒法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순구완脣口碗과 규구완葵口碗 청백자를 생산하였다. 조형이 간단하교 태골이 비교적 두터우며 유색은 회색이나 미황색米黃色이었다. 대부분 문양이 없는 소면素面이다. 이 시기의 제품은 아직 청백자의 기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북송중만기에는 지표층의 가장 잘 풍화된 자석瓷石을 원료로 사용하였으며, 도세기법이 점차로 완성되고 성형기법도 날로 성숙해졌다. 특히 선배기법旋胚技法(물레성형)으로 성형하여 그늘에서 건조한 다음에 철도鐵刀로 규정하게 다듬어 기벽을 극히 얇게 다듬었으므로, 조형이 매우 아름다웠다. 대량으로 생산한 두립완斗笠碗은 구경이 20cm정도로 완벽의 두께는 0.2cm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처럼 구연부가 크고 얇은 자기는 명청시기에도 대규모로 생산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의 유약에는 유회釉灰의 비율이 비교적 높아 유약이 비교적 철저하게 용해되어 투명도가 극히 우수하였다. 소성후의 유층에는 기포와 결정結晶 및 기타 잔류물이 비교적 적었다. 각화刻畵, 획화劃畵, 인화印畵 기법으로 장식된 오목한 문양은 넓이와 깊이가 서로 상이하였으며, 유층의 퇴적된 정도와 뭉친 부위의 크기가 제각각 이었다. 기물의 유색釉色은 담담한 청백색에서 천청색天靑色이나 호록색湖綠色으로 점차 단계별로 부위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순정하고 맑으며 색조의 변화가 다양한 청백자유는 문양의 장식효과를 크게 제고시키고 끊임없이 감도는 음악의 선율과 같은 미감을 가져다주었다.
종안棕眼은 청백자유 유면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배체에 사용된 유액은 생료生料로서 고온의 소성과정에서 대량으로 기포를 발생시켰으며, 이 기포가 유면을 통과하여 빠져 나오면서 유면에 크기가 서로 다른 종안을 형성시켰다. 종안은 광택이 없이 오목하며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깊이도 서로 다르며, 형태도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유면에 오목한 흔적으로 남지만, 일부는 도리어 바늘처럼 가느다란 구멍이 유층을 투과하여 자태까지 도달해 있기도 하였다. 천여년의 침식으로 유층 하부의 태토상에 크기가 서로 다른 방사상放射狀으로 부채형태의 토침반土浸斑을 형성하였다. 빛에 비추어보면 선명하게 드러나므로 감정의 중요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영청자의 장식기법은 독보적으로 특히 각화와 획화기법으로 장식한 왜왜문娃娃紋(어린이), 연문蓮紋, 수파문水波紋 등은 구도가 풍만하고 선이 유창하며 생활미가 넘쳐흐른다. 이러한 문양은 먼저 수직으로 굵은 선을 한 번 긋고 다시 이 선을 따라 비스듬히 깎아내었다. 이 기법은 한대漢代 옥조각의 '한팔도漢八刀'기법을 연상시킨다. 도공은 구도에 따라 굵은 직각 선의 깊이와 비스듬히 깎아내는 기울기 및 깎아낸 면의 넓이 등에 풍부한 변화를 주었다. 하나하나의 선마다 모두 시작하고 멈추는 흔적이 선명하여 마치 서예의 '제안돈날提按頓捺' 기법과 유사하였다. 가느다란 선은 깊이와 넓이의 변화에 따라 꽃잎, 이파리, 물결, 어린아이 등의 윤곽을 표현해내었으며, 힘이 넘치고 유창하여 운율감이 느껴진다. 선의 시작하고(起) 멈추며(頓) 교차하고(銜) 맞닿는(接) 부위가 정확하고 자연스럽다. 도공은 전문적으로 이 일을 하였으므로 자신감에 차 있고 수법이 능숙하여 '포정해우포?丁解牛'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만하였다.
도공은 현지에서 재료를 구해 각화와 획화에 사용하는 도구를 발명하여 작업효율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효과를 일으켰다. 대나무로 수파문(물결문양)을 획화하기 위하여 편평하고 끝이 비스듬한 죽필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넓이는 1-2cm로 붓끝은 계단형태로 배열되도록 깎아내어 가느다란 대나무 빗자루처럼 만들었다. 팔의 움직임에 따라 길이와 굵기가 서로 다른 동심同心의 수파문을 획화해내었다. 이러한 동심의 수파문은 자연스럽고 질서정연하게 굵은 윤곽선의 내부에 배치되어 주요 윤곽선과 공동으로 한 폭의 완전한 도안을 구성하였다. 율동감이 넘치는 변화는 마치 연꽃 잎이 바람에 살랑이며 연밥이 터져 나올 듯한 느낌이 들도록 표현되었다.
근경을 보면 호수 위에 물결이 살랑이고 원경을 조망하면 강물이 격렬하게 굽이친다. 몇 차례의 칼질로 윤곽선을 구륵해 낸 어린이는 커다란 머리에 통통한 몸으로 생기발랄하게 연못 사이에서 노닐고 있다. 언핏보아 혼잡한 화면이지만, 자연스럽고 멋이 넘쳐흐른다. 전체 화면에서 도무지 빼거나 더할만한 하나의 선도 찾아낼 수가 없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당시의 도공들이 얼마나 뛰어났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출토기물을 관찰해보면, 북송중만기에서 남송에 이르기까지 우수한 품질의 호전요제품은 대부분 갑발점괴앙소법(점편을 받쳐 갑발에 넣어 소성)으로 제작하였다. 당시에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다수점병갑발복소법(여러 개의 지정을 이용하고 갑발에 넣어 엎어놓고 소성) 및 정요에서 발명하여 널리 사용되었던 점권조합식의 요구窯具를 이용하여 기물을 적재해서 엎어놓고 완이나 반을 소성하는 기법은 생산효율이 매우 높았지만, 상등품을 생산하는 호전요 기물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망구芒口가 자기의 품질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갑발점소법의 사용은 생산량의 제약을 받지만 최대한 우수한 품질을 담보할 수 있었다. 또한 호전요에서는 도공이 능숙하게 환원염을 통제하여 자태의 소결燒結을 치밀하게 만들고 투광도를 고도로 높였다는 점이다. 유약이 철저하게 용해되어 청백자유가 청색을 띤 백색으로 옥처럼 윤택하였으며, 또한 태토와 유약의 결합이 극히 긴밀하여 투명도와 경도에 있어 근대 경질자기의 표준에 도달하였다.
북송중만기에서 남송시기, 영청자기의 제작기법은 절정에 달하였다. 제품은 완, 반, 호壺가 주력이었으며 화병, 향로, 조소彫塑 등의 신품종도 제작하였다. 호전요와 상호요湘湖窯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남송중만기, 표층의 우수한 품질의 자석瓷石이 결핍되고 사회가 혼란하여 숙련된 도공들이 대량으로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오로지 생산량을 채우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점권조합식의 요구를 사용하여 요내의 습기가 배출되기 곤란하였으므로 요내의 온도를 높이기가 어려워 기물의 유면이 어두운 황색으로 변화되기 쉬웠다. 이 시기에 화문花紋을 인화로 장식한 망구완芒口碗은 천하에 두루 퍼졌으나, 기형이 단조롭고 문양이 번잡하며 자잘하였다. 이시기에도 점괴앙소법으로 생산한 기물이 약간 존재하였는데, 문양의 구도가 간략하고 각화와 획화선이 유창하지만 섬약한 분위기가 진하였다. 또한 선의 교차와 연결에 부주의 하였다. 남송말에서 원대에도 여전히 영청자기를 생산하였다. 특히 원대중기에는 많은 제품의 특징이 우수한 영청자기의 기본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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