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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證道歌)
<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이 지었습니다. 영가(永嘉)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며, 성은 대(戴)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浙江省溫州府永嘉縣] 사람입니다.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합니다.영가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많이 익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천태종 팔조(八祖)인 좌계 현랑(左溪玄朗) 법사와는 동문(同門)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하여 온 사중(寺中)과 동구(洞口)에서 비방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 보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스님은 전혀 그러한 데 개으치 않았습니다.영가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60여세였습니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老宿)을 보고,"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영가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은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많이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책스님은 영가스님에게 물었습니다."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
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실 분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俠氣)가 있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했습니다."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지만, 당신은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소.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습니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오. 남방에 큰 스승으로 혜능선사가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발 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기시오."
그러자, 영가스님이"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신 듯 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그러나 영가스님은 누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누님이 하는 말이 "나는 다른 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그리하여 현책스님과 함께 떠났는데,그 때에 영가스님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그럭저럭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육조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건방기제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선상만 세 번 돌고 턱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니 그것은 아만심이 탱천하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힐난입니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영가스님 하는 짓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 슬쩍 법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영가스님께서"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은 빠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저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것과는 뜻이 다르므로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이렇게 육조스님께서 반문하시니 이것은 '네가 지금 무상이 빠르다고 하니 그 무상(無常)의 근본을 바로 체험하여 깨치고, 남이 없음[無生]을 요달하면 빠르고 빠르지 않음이 떨어져 버린 구경을 성취하게 되는데 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말씀입니다.이에 영가스님이 답하였습니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본체는 원래 남이 없으니 그걸 우리가 체득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대로가 남이 없고 그대로가 빠름이 없는데, 다시 남이 없고 빠름이 없음을 요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영가스님이 반
박하자, 육조스님이"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고 인가하시니, 천여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그때에야 이로소 영가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습니다. 위의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네가 참으로 남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욱조스님의 질책입니다."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나타남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육
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먼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습니다."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
았노라!"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이로부터 그의 가(歌), 항(行), 게(偈), 송(頌)은 모두가 그의 누나가 수집한 것입니다.영가스님은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7일에 입적하시니 세수 3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라 하였습니다. 그해에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 법담(法談)을 평하기를,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나은 듯하고 육조스님이 말에 몰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수승한 사람이 아니냐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을 하면 영가스님을 잘못 본 사람입니다. 영가스님 자신이 <증도가(證道歌)>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고인(古人)들은 영가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앞의 법담에서,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하는 말 끝에서 깨쳤다고 봅니다.
영가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는 나고 죽음에 자재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도 하였습니다.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합니다.깨달음[悟]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기는 분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합니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망상이 다 끊어져서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을 말하니 곧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證)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입니다.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證)'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앗지 '해오(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조(普照)스님도 처음에는 선가에서 전한 법을 '해오(解悟)'라고 잘못 보았다가 나중에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라든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같은 데서는 선이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가에서의 근본 표본은 '해오(解悟)'가 아닌 구경각이며, 선가에서의 깨달음[悟]이란 구경적으로 체달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 이름부터도 '증(證)'이라 하였지 '해(解)'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친 것을 '돈오(頓悟)'라 하는데, "돈(頓)이란 망념을 순식간에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는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대주(大珠)선사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근본 무명인 제팔 아뢰야는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까지 완전히 벗어나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들어가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친 것이 곧 '증(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그 중간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설명하는 <증도가>를 이해할 수 있지 '증오(證悟)'와 해오(解悟)'를 혼동해서는 영원히 <증도가>를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 <증도가>는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스님까지 달마스님에서 육조스님까지, 그리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내려온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증오처(證悟處)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증(證)'이라 한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그러면 어째서 도(道)라 하는가?도(道)를 보리(菩提)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이 도(道)라 하는 것은 증(證)한 도(道)를, 구경각을 성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합니다
증도가證道歌
君不見 (군부견)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絶學無爲閑道人(절학무위한도인)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히지 않으니
無明實性卽佛性 (무명실성즉불성)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幻化空身卽法身(환화공신즉법신)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法身覺了無一物 (법신각료무일물)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本源自性天眞佛 (본원자성천진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五陰浮雲 空去來(오음부운 공거래)
오음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三毒水泡虛出沒(삼독수포허출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證實相無人法 (증실상무인법)
실상을 증득하여 사람과 법이 없으니
刹那 滅却阿鼻業(찰나 멸각아비업)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若將妄語欺衆生 (약장망어기중생)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自招拔舌塵沙劫(자초발설진사겁)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리로다.
頓覺了如來禪(돈각료여래선)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六度萬行 體中圓(육도만행 체중원)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夢裏 明明有六趣(몽리 명명유육취)
꿈속에선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覺後 空空無大千(각후 공공무대천)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 세계가 없도다.
無罪福無損益(무죄복무소익)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寂滅性中 莫問覓(적멸성중 막문멱)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比來 塵鏡 未曾磨(비래 진경 미증마)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今日分明須剖析 (금일분명수부석)
오늘에야 분명히 쪼개고 쪼개 내었도다.
誰無念誰無生(수무념수무생)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若實無生無不生(약실무생무불생)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喚取機關木人問 (환취기관목인문)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 보라.
求佛施功早晩成(구불시공조만성)
부처 구하고 공 베풂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放四大莫把捉(방사대막파착)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寂滅性中隨飮(적멸성중수음)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諸行無常一切空(제행무상일체공)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卽是如來大圓覺(즉시여래대원각)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決定說表眞乘(결정설표진승)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타야되나
有人不肯任情徵 (유인불긍임정징)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直截根源佛所印 (직절근원불소인)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하신 바요
摘葉尋枝我不能(적염심기아불능)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摩尼珠人不識(마니주인불식)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如來藏裏親收得(여래장리친수득)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六般神用空不空(육반신용공불공)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一顆圓光色非色(일과원광색비색)
한 덩이 두렷한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淨五眼得五力(정오안득오력)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唯證乃知難可測(유증내지난가측)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鏡裏看形見不難(경리간형견불리)
거울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水中捉月爭拈得 (수중착월쟁점득)
물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常獨行常獨步(상독행상독보)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達者同遊涅槃路(달자동유열반로)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調古神淸風自高 (조고신청풍자고)
옛스러운 곡조 신기 맑으며 풍채 스스로 드높음이여
貌悴骨剛人不顧(모췌골강인불고)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돌아보지 않는도다.
窮釋子口稱貧(궁석자구칭빈)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實是身貧道不貧(실시신빈도불빈)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貧則身常披縷褐(빈즉신상피루갈)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道則心藏無價珍(도즉심장무가진)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無價珍用無盡(무가진용무진)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利物應時終不(이물응시종부)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三身四智 體中圓(삼신사지체중원)
삼신. 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八解六通 心地印(팔해육통 심지인)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땅의 인(印)이로다.
上士 一決一切了(상사일결일체료)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中下 多聞多不信 (중하다문다불신)
중. 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但自懷中解垢衣 (단자회중해구의)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誰能向外誇精進 (수능향외과정진)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사랑할건가.
從他謗任他非 (종타방임타비)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把火燒天徒自疲(파화소천도자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로다.
我聞恰似飮甘露 (아문흡사음감로)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 마심과 같아서
鎖融頓入不思議 (쇄융돈입불사의)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 행탈경에 들어가리로다.
觀惡言 是功德 (관악언 시공덕)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此則成吾善知識(차즉성오선지식)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不因 謗起怨親 (불인방기원친)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으면
何表無生慈忍力(하표무생자인력)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할건가.
宗亦通說亦通(종역통설역통)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定慧圓明不滯空 (정혜원명불체공)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공에 응체하지 않는도다.
非但我今獨達了 (비단아금독달료)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河沙諸佛體皆同 (하사제불체개동)
수 많은 모든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도다.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百獸聞之皆腦裂 (백수문지개뇌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香象 奔波失却威 (향상 분피실각위)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天龍 寂聽生欣悅 (천룡적청생흔열)
천룡은 조용히 듣고서 희열을 내는도다
遊江海涉山川 (유강해섭산천)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尋師訪道爲參禪 (심사방도위참선)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自從認得曹溪路(자종인득조계로)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了知生死不相干(료지생사불상간)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行亦禪坐亦禪(행역선좌역선)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語黙動靜體安然 (어묵동정체안연)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縱遇鋒刀常坦坦 (종우봉도상탄탄)
창. 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假饒毒藥也閑閑(가요독약야한한)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我師得見燃燈佛(아사득견연등불)
우리 스승 부처님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多劫 曾爲忍辱僊 (다겁증위인욕선)
다겁토록 인욕선인이 되셨도다.
幾廻生幾廻死 (기회생기회사)
몇번을 태어나고 몇 번인나 죽었던가.
生死悠悠無定止(생사유유무정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自從頓悟了無生 (자종돈오료무생)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부터는
於諸榮辱何憂喜 (어제영욕하우희)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入深山住蘭若 (입심산주란약)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
岑 幽邃長松下(잠유수장송하)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優遊靜坐野僧家(우유정좌야승가)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았으니
寂安居實蕭灑 (적안거실소쇄)
고요한 안거 참으로 쓸쓸하고 깨끗하도다.
覺卽了不施功 (각즉료 불시공)
깨친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一切有爲法不同(일체유위법부동)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住相布施 生天福 (주상보시 생천복)
모양과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猶如仰箭射虛空 (유여앙전사허공)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勢力盡箭還墜 (세력진전환타)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招得來生不如意(초득래생불여의)
내생에 뜻과 같지 않는 과보를 부르리로다.
爭似無爲實相門 (쟁사무위실상문)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一超直入如來地(일초직입여래지)
한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但得本草愁末 (단득본초수말)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如淨瑠璃含寶月(여정류리함보월)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旣能解此如意珠 (기능해차여의주)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自利利他終不竭 (자리이타종불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江月照松風吹 (강월조송풍취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永夜淸 何所爲 (영야청 하소위)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가.
佛性戒珠 心地印(불성계주 심지인)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印이요
霧露雲霞 體上衣 (무로운하 체상의)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降龍鉢解虎錫(황용발해호석)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싸움 말린 석장이여
兩金環鳴歷歷 (양금환명력력)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不是標形虛事持(불시표형허사지)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루 지님이 아니요
如來寶杖親跡 (여래보장친적)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不求眞不斷妄 (불구진불단망)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了知二法 空無相 (료지이법 공무상)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無相無空無不空 (무상무공무불공)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卽是如來眞實相 (즉시여래진실상)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心鏡明鑑無碍 (심경명감무애)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 (곽연영철주사계)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萬象森羅影現中 (만상삼라영현중)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一顆圓明非內外 (일과원명비내외)
한 덩이 두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豁達空撥因果 (활달공발인과)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茫茫蕩蕩招殃禍 (망망탕탕초앙화)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로다.
棄有著空病亦然 (기유착공병역연)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니
還如避溺而投火 (환여피닉이투화)
마치 물을 피하다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捨妄心取眞理 (사망심취진리)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사지심성교위)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學人 不了用修行 (학인 불료용수행)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진성인적장위자)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損法財滅功德 (손법재멸공덕)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心. 意. (막불유사심의 식.심.의)
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是以 禪門 了却心 (시이선문료각심)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고
頓入無生知見力 (돈입무생지견력)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도다.
大丈夫秉慧劒 (대장부병혜검)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 (반야봉혜금강)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非但能 外道心 (비단능 외도심)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조증락각천마담)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震法雷擊法叩(운법뢰격법고)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포자운혜쇄감로)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도다.
龍象 蹴踏潤無邊 (용상 축답윤무변)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이 그지 없으니
三乘五性 皆惺悟 (삼승오성 개성오)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도다.
雪山肥 更無雜 (설산비 갱무잡)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 我常納 (순출제 아상납)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一性 圓通一切性 (일성원통일체성)
한 성품이 두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一法 含一切法 (일법함일체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一月 普現一切水 (일월보현일체수)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 一月攝 (일체수월일월섭)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諸佛法身 入我性 (제불법신 입아성)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 還共如來合 (아성 환공여래합)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一地 具足一切地 (일지구족일체지)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非色非心非行業(비색비심배행업)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彈指圓成八萬門 (탄지원성팔만문)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히 이루고
刹那 滅却三祗劫 (찰나 멸각삼지겁)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는도다.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수구비수구)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여오령각하교섭)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건가.
不可毁不可讚(불가훼불가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體若虛空勿涯(체약허공물애)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심연)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覓則知君不可見 (멱즉지군불가견)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다.取不得捨不得 (취부득사부득)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不可得中 只得(불가득중지득)
득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黙時說說時黙 (묵시설설시묵)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문옹새)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有人 問我解何宗 (유인 문아해하종)
누가 나에게 무슨 종지를 아느냐고 물으면
報道摩訶般若力 (보도마하반야력)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或是或非人不識 (혹시혹비인불식)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순행천막측)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다.
吾早曾經多劫修 (오조증경다겁수)
나는 일찍이 많은 겁 지나며 수행하였으니
不是等閑相欺惑 (불시등한상기혹)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建法幢立宗旨(건법당립종지)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명명불칙조계시)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第一迦葉 首傳燈 (제일가섭수전등)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하니
二十八代 西天記 (이십팔대 서천기)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法東流入此土 (법동류입차토)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菩提達磨爲初祖 (보리달마위초조)
보리달마가 첫 조사 되었도다.
六代傳衣 天下聞 (육대전의 천하문)
六代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後人得道何窮數 (후인득도하궁수)
뒷 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眞不立妄本空 (진불립망본공)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有無俱遣不空空 (유무구견불공공)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二十空門 元不著 (이십공문원불착)
이십공문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 (일성여래체자동)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心是根法是塵(심시근법시진)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 猶如鏡上痕 (양종유여경상흔)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痕垢盡除光始現(흔구진제광시현)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心法雙亡性卽眞 (심법쌍망성즉진)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嗟末法惡時世 (차말법악시세)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衆生 薄福難調制 (중생 박복난조제)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去聖遠兮邪見深 (거성원혜사견심)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여
魔强法弱多怨害 (마강법약다원해)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怨害가 많도다.
聞說如來頓敎門 (문설여래돈교문)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恨不滅除令瓦碎 (한불멸제령와쇄)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도다.
作在心殃在身 (작재심앙재신)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不須怨訴更尤人 (불수원소갱우인)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欲得不招無間業 (욕득불초무간업)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莫謗如來正法輪 (막방여래정법륜)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栴檀林無雜樹 (전단림무잡수)
전단향 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鬱密深沈師子住(울밀심침사자주)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다.
境靜林閒獨自遊 (경정림한독자유)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니니
走獸飛禽 皆遠去 (주수비금개원거)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나도다.
師子兒衆隨後(사자아중수후)
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뒤따름이여
三歲 卽能大哮吼 (삼세즉능대효후)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若是野干 逐法王 (약시야간 축법왕)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 (백년요괴허개구)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로다.
圓頓敎勿人情 (원돈교물인정)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 (유의불결직수쟁)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不是山僧 逞人我 (불시산승 령인아)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修行 恐落斷常坑(수행공락단상갱)
수행타가 斷. 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非不非是不是 (비불비시불시)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여
差之毫釐失千里(차지호리실천리)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도다.
是卽龍女頓成佛 (시즉용녀돈성불)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非卽善星 生陷墜 (비즉선성 생함타)
그른 즉 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吾早年來積學問(오조년래적학문)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亦曾討疏尋經論 (역증토소심경론)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分別名相 不知休 (분별명상 부지휴)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入海算沙徒自困 (입해산사도자곤)
바다 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도다.
却被如來苦呵責 (각피여래고가책)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數他珍寶有何益 (수타진보유하익)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건가.
從來 學虛行 (종래 학허행)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多年 枉作風塵客 (다년 왕작풍진객)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하였도다.
種性邪錯知解(종성사착지해)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여
不達如來圓頓制 (불달여래원돈제)
여래의 원돈제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二乘精進勿道心(이승정진물도심)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外道聰明無智慧 (외도총명무지혜)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亦愚癡亦小駭 (역우치역소해)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空拳指上 生實解(공권지상생실해)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執指爲月枉施功 (집지위월왕시공)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根境塵中 虛捏怪 (근경진중허날괴)
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도다.
不見一法 卽如來 (불견일법 즉여래)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方得名爲觀自在 (방득명위관자재)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다.
了卽業障 本來空 료즉업장 본래공)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未了還須償宿債 (미료환수상숙채)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빛 갚으리로다.
飢逢王膳不能飡(기봉왕선불능찬)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病遇醫王爭得差 (병우왕쟁득차)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在欲行禪知見力 (재욕행선지견력)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 (화중생연종불괴)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는도다.
勇施犯重悟無生 (용시범중오무생)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早是成佛于今在 (조시성불우금재)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師子吼無畏說 (사자후무외설)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 頑皮達(심차완피달)
어리석은 완피달을 몹시 슬퍼하는도다.
只知犯重障菩提 (지지범중장보리)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不見如來開秘訣 (불견여래개비결)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有二比丘犯狀殺 (유이비구범장살)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波離螢光 增罪結(피리형광증죄결)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維摩大士頓除疑(유마대사돈제의)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還同赫日消霜雪 (환동혁일소상설)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不思議解脫力 (불사의해탈력)
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이여
妙用恒沙也無極 (묘용항사야무극)
묘한 작용 항하사같아 다함 없도다.
四事供養 敢辭勞 (사사공양 감사로)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萬兩黃金 亦銷得 萬兩 (만양황금 역쇄득만냥)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연초백억)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法中王最高勝 (법중왕최고승)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 (하사여래동공증)
강 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하였도다.
我今解此如意珠 (아금해차여의주)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 (신수지자개상응)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了了見無一物 (료료견물일물)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 (역무인혜역무불)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大千世界 海中 (대천세계해중)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一切聖賢 如電拂 (일체성현 여전불)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假使鐵輪 頂上旋 (가사철륜 정상선)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 (정혜원명종불실)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日可冷月可熱 (일하냉월가열)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 (중마불능괴진설)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다.
象駕觴嶸漫進途 (상가상영만진도)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誰見螳螂 能拒轍 (수견당랑 능거철)
버마재비(사마귀)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大象 不遊於兎徑 (대상불유어토경)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 不拘於小節(대오 불구어소절)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莫將管見謗蒼蒼 (막장관방창창)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 (미료오금위군결)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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