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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북한 사찰 순례 및 문화유적 답사기(10)
글| 정진옥 (제 4차 순례 참가자 , LA거주)
제13일 ( 2016-09-11, 일요일 )
고려성균관, 고려박물관
오늘은 북한탐방의 마지막 날로, 개성과 판문점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양각도 호텔 구내식당에서 조식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뱃속이 편안치 않음을 느낀다. 뭔가 설사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침 도로 옆에 있는 휴게소에 차가 멎는다. ‘불감청 고소원’이 바로 이런 경지로 구나! 재빨리 차를 내린다. 아침 8시 25분이다. 화장실에 간다고 일행에게 알린다. 화장실이 2층에 있다. 볼일을 보고 보니, 물을 내리는 장치가 없다.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핀다. 화장실 밖에 큰 물통이 있고 바가지가 있다. 얼른 물을 퍼다가 변기에 붓는다. 이런 일을 두번쯤 하고나서 여유롭게 계단을 내려와 우리 차에 오른다.
북한 주민들로부터 받은 떡
우리 일행들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알고보니, 내가 뱃속의 소란을 평정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 일행들은 북한의 주민들로부터 떡 대접을 받았단다.
다들 기뻐한다. 떡 모양과 색깔이 너무나 예뻣고 맛있었다는 감회들을 토로한다. 우리처럼 단체로 여행길에 나선 어느 북한주민들이 휴게소에서 먹으려고 펴놓은 떡을 우리 일행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먹도록 했다는 얘기를 듣고보니, 나았던 배가 불현듯 다시 아파지는 구나! 아무래도 나는 흥부 보다는 놀부의 심뽀를 지녔나 보다. 아픈 배가 편안해질 무렵인 9시 35분경에 개성시내에 있는, 한자로 ‘高麗成均館’ 이라 새긴 석비가 있는 건물 앞에 차가 도착한다.
우측에는 ‘고려박물관’이라고 한글로 새긴석비가 있다. 국보유적 제127호인 이 고려성균관이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이에 따르면, 고려시기인 992년에 창설된 고려의 최고교육기관이며 세계최초의 대학이고, 부지가 약 3만 평방미터이며,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동무 서무 존경각 향실 계성사 등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강사 안내를 받으며 고려박물관에 들어가는 순례단
옅은 살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대단히 아름다운 40세 전후의 중년여성 해설강사가 우리를 맞아준다. 여섯 층계쯤의 단아하고 긴 돌계단 위에 세워진 큰 궐문을 들어서니, 저안쪽의 다음 건물까지 100m쯤이 될지 말지 한 넓은 마당이 있는데, 중앙에는 잘 다듬은 돌과 벽돌같은 석재를 반듯하게 깔아서 다음 건물의 중앙계단에 이르도록 2m내외의 너비가 되는 보도를 만들어 놓았다.
이 보도의 양 옆에는 커다란 거목들이 반듯하게 벌려 심어져 있어, 이를 보는 순간 건물의 옛스러움과 거목들의 연륜이 보태어진 것인지, ’아!’ 하는 감탄을 발하게 된다. 고색창연하다는 말로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 10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어떤 기품같은 것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맨 앞에 있는 나무에는 안내판이 있다. ‘국가지정천연기념물 제 386호인 성균관 은행나무’로, 동과 서에서 마주보고 서있는 두 그루의 수컷나무란다. 1992년에 이곳을 방문한 김일성주석이, 1000년은 자랐을 것 같은데 벌레도 먹지않고 푸르고 싱싱하다며, 기념촬영을 한 나무라고 적혀있다.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느티나무같이 보이는 나무들이 더 있는데, 일일히 확인을 하지는 못하고 일행을 따라간다. 유럽인들로 보이는 관광단이 우리들 뒤에서 줄을 지어 온다.
시설의 규모가 아닌 도처에서 배어나오는 세월의 향기와 정갈함에 감동한 채, 해설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박물관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는데 꼭 1시간이 걸린다.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애국처녀 설죽화의 얘기가 가슴에 남아있어,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찾은 한 자료의 내용이다.
<<설죽화는 이관(李寬)이라는 평민의 딸이다. 이관은 제2차 거란전투 때 양규의 부대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그의 품속에서 시가 한 수 발견되었는데 ‘이 땅에 침략 무리 / 천만 번 쳐들어와도 / 고려의 자식들 / 미동도 하지 않는다네 / 후손들도 나같이 죽음을 무릅쓴 채 싸우리라 믿으며 / 나 긴 칼 치켜세우고 / 이 한 몸 바쳐 내달릴 뿐이네’라는 내용이었다.
이 시는 우여곡절 끝에 그의 가족인 홍씨 부인과 딸 설죽화에게 전해졌다. 홍씨부인은 남편이 남긴 시를 보자 “네가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으련만-!” 라며 절규하였다. 그 말을 들은 설죽화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리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설죽화는 무관집안의 딸로서 할아버지의 무예를 틈틈이 익힌 어머니에게 무예를 배우겠노라며 설득하였다. 홍씨부인은 딸 설죽화가 걱정되었지만 결국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이후 설죽화는 어머니 홍씨부인으로부터 무예를 익혀나가기 시작하여 점차 다부진 무사로 변하여 갔다. 설죽화는 자신의 무예 실력이 여느 장정 못지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자로 변장하여 곧바로 강감찬의 부대로 찾아갔다. 당시 강감찬은 고려군의 상원수였는데 그의 부대에서는 설죽화가 어리고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설죽화는 자신이 강감찬의 친척이라고 속였는데, 급기야 강감찬과 대면하게 되었다. 강감찬은 뜻밖의 일로 놀랐지만 “전쟁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고 싶습니다.” 라며 말하는 설죽화의 청이 간절하여 일단 무술시범부터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설죽화는 뛰어난 창검술로 강감찬을 놀라게 하였다. 그녀는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는 긴 검과 하나가 되어 능수능란하게 기술을 선보였다. 이후 설죽화는 강감찬의 부대에 있으면서 여러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동료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다. 드디어 1019년 1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강감찬을 비롯한 고려군은 거란군의 퇴로를 막고 혈전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설죽화의 활약이 뛰어나니 거란군이 그녀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힘껏 몰아 붙이며 방어했으나 계속된 공격에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설죽화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몸은 점점 지쳐갔으나 그럴수록 머릿 속에는 용맹함과 질긴 의지만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화살이 몸에 촘촘히 박혀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상태여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이후 강감찬과 장졸들은 설죽화가 남장한 소녀라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으며, 그녀의 품 속에서 나온 아버지 이관의 시를 읽으면서 슬픈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찌된 일인지, 이 나이를 먹도록 도대체 ‘설죽화’라는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 황당하고 부끄럽다.
판문점
고려성균관과 고려박물관을 나온다. 10시 36분이다. 기대하던 선죽교가 바로 옆에 보이는데, 일단은 판문점에 먼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며 차를 타라는 독촉이다. 판문점에 들리는 시각이 미리 예약되어 있거나 지정되어져 있는 것인가 싶다. 11시 정각에 판문점에 도착한다. 먼저 도착한 대형버스들이 많이 밀려 있는데, 우리의 차는 뭔가 특별히 우선적인 대우를 받으며 앞으로 들어가도록 배려가 되는 듯 하다. 기념품판매소에서 구경을 하면서 안내원이 나오길 기다리란다.
기념품판매소는 30평 내외의 크기인데, 고운 한복차림의 여인들이 각기 담당한 판매대에 서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물건을 보여주고 설명하고 판매한다.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데 서양인이 훨씬 많아 보인다. 나는 나중에 선죽교에서 동성동본 조상이신 포은선생님께 올릴 제주로 개성인삼주 1병( $8 )을 구입한다. 마이클님이 오징어를 사시면서, 그것으로 제수를 삼으라고 배려해 주신다. 조금 후에 40대의 나이로 보이는 정복차림의 군인이 우리를 찾는다. 그를 따라 판문점의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서양인들이 아주 많고 중국인으로 보이는 단체관람객들도 많다. 북측 판문점건물의 전망대에서 북측 군인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며 남측 건물과 시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못 감회가 착잡하다. 경호차원이라며 우리를 수행하는 젊은 병사들을 바로 곁에서 보노라니, 영락없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 건강하고 믿음직한 젊은이들이요, 대한민국의 국군병사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밝고 애띤 군인들이었다.
북측에서 바라본 판문점
조국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결국 천륜을 어기는, 형제자매끼리의 경천동지의 무참한 살상이라는 자각이 아프게 느껴진다. 결단코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절실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민다. ‘정전담판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건물에 들러 양측 협상대표가 앉았었다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은 채 북한측 해설자의 설명을 듣는다. 다시 이웃 건물인 옛 ‘정전협정조인장’에 들러 구경을 한다. 두 건물이 모두 북한의 영토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다. 11시 57분에 판문점 방문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이곳에서 들은 내용들을 어떻게 소화해얄지 갈피를 못잡겠다며 곤혹스러워 하신다. 나 역시 동감이나, 그렇더라도 미래의 평화적 조국통일을이루는 일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선죽교
순례단과 함께 음복
선죽교 옆에 선 필자
우리의 차는 반갑게도 다시 선죽교에 도착한다. 시각은 12시 17분이다.
북한사람일 남자가 백인청년 둘을 상대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 선죽교는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의 푸르름에 싸여 아담하지만 아주 운치있는 모습이다. 우유빛 저고리와 붉은 치마로 성장한 여성이 해설강사로 우리를 맞아 준다. 차분한 분위기의 날씬하고 키가 훌쩍 큰, 30대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 미인이다.
선죽교 옆에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국보유적 제159호라는 설명비가 있다. 이에 따르면 1216년 이전의 고려시기에 놓은 다리로 길이가 8.35m이고 너비는 3.36m이다. 1780년에 선죽교 둘레를 장식을 겸한 돌난간으로 둘러 막아 사실상 출입을 못하게 하고, 바로 그 옆에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따로 하나를 놓았다.
1780년 후손인 개성유수 정호인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석조물을 올렸으며, 1796년 개성유수 조진관이 다시 난간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개울 중간에 4개의 교각을 세우고, 약간은 거칠게 다듬은 바닥돌을 깔았다. 바닥돌의 크기나 모양이 동일하게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 각기 다르고 다듬은 면들도 아주 매끈한 직선이 아닌, 약간은 오돌토돌한 생김이라서, 기계로 자르는 현대식 석재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아마도 석수장이들이 손 연장으로 자르고 다듬은 돌들이라서 일 것이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양을 그림으로 비유한다면, 자를 써서 반듯반듯하게 그린 그림이 아니고, 그냥 손으로 그려낸 그래서 약간은 삐툴삐툴한 선이 있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보다. 그래선지 전체적으로 대단히 정겹고 고풍스럽고 아름답게 보여지는 석교이다.
평양의 룡악산 법운암에서 김수곤님이 감탄을 금치 못하시던 그 ‘대교약졸’의 5층탑과 딱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삼주와 오징어를 제물로 선죽교 앞 돌난간에 얹어 놓고, 엎드려 포은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재배를 올린다. 변변치 못한 후손으로서의 면구스러움이 크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가신지 624년이 지난 먼 훗날에, 어느 한 피붙이가 이곳을 찾아 올리는 추념의 예를 그래도 기꺼이 가납하시리라 기대한다.
“천년고도 고려송도 송악산이 두렷하고 / 세계최고 고려성균관 거목들로 우뚝한데 / 붉구나 선죽의 충절 표충비가 애닯도다” 나의 이런 번잡한 행동거지를 지지하고 지켜봐 주시는 우리 다감한 일행분들께 음복의 술잔을 올린다. 이를 침묵으로 성원해준 해설강사를 따라 선죽교를 둘러본다.
다리의 바닥에 아직도 핏자국이 있다는 풍설을 확인키 위해 바닥을 살핀다. 아닌게 아니라 불그레한 자국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아무래도 화강암 자체에서 우러나온 붉은 무늬가 아니겠나 생각한다. 새로 만든 돌다리를 통해 선죽교를 건너니 왼쪽으로 3개의 비석이 나란히 있다.
그 중의 맨 오른쪽에 있는 석비는 큰 글씨의 한자로 ‘善竹橋’라 새겼는데, 이 글씨는 조선의 명필석봉 한호선생의 필적이다. 포은 선생님을 수행하다 함께 최후를 맞은 분의 이름이 ‘김경조’라는 분인가 보다. 이 분의순의비와 비각이 있다.
표충비
해설강사는 우리를 따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표충비에도 안내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국보유적 제138호 표충비라고 새긴 안내비가 있다. ‘表忠碑( 표충비)’라는 현판의 궐문을 지나면, 거북이 받침돌 위에 세워진 2개의 큰 비석이 한 채의 큰 비각건물 내부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인터넷에서 이 표충비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았다.
<< 표충비는 숭양서원과 마찬가지로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조성된 유적이다.
선죽동에 위치한 선죽교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표충비는 비각의 내부에 건립연대가 각기 다른 두 개의 비석이 자리한다. 북쪽에 위치한 비는 영조 16년인 1740년, 남쪽에 위치한 비는 고종 9년인 1872년 건립한 것으로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조선의 왕들이 직접 건립했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세계인 조선사회에서 정몽주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유적이다.
비각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현존하는 북한지역의 비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북쪽비의 비문은 모두 해서체로 되어있는데 비문의 앞면에는 선죽교에 대해 영조가 직접 쓴 시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1740년 9월 3일 영조의 개성 행차시 선죽교를 돌아보고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말한‘영조가 직접 쓴 시’를 필자가 비문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
“어제어필 선죽교시” 도덕정충선만고 태산고절포은공 (“御製御筆 善竹橋詩” 道德精忠宣萬古 泰山高節圃隱公 )점심을 먹기 위하여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개성의 ‘남대문’을 옆을 지나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국보유적 제 124호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자세히는 몰라도 우선 대체적인 건축형태가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도시에 있는 성문 양식이라 친근감이 느껴진다. ‘민속려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궐문으로 차가 들어간다.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그 안쪽으로 큰 한옥들이 즐비하다.
오래 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아주 세련된 품격이 우러나는 한옥들이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궐문 밖으로 나온다. 길 건너편에‘개성국수집’이라는 간판을 걸고있는 건물이 있다. 크고 아름다운 한옥양식의 건물이다. ㅁ자 형태로 사방을 건물로 꽉 채워 지었다. 마당 중앙에 분수가 있는 둥그런 화단을 조성하여 격조를 살렸고, 정면의 건물은 2층구조이고 나머지는 단층이다. 건물의 목재부분은 주로 붉은 색으로 채색하여 업소로서의 화려함을 살렸다. 1층 왼쪽의 룸으로 안내된다.
중앙에 놓인 큰 테이블을 보면서, 내심으로 깜짝 놀란다. 이곳에서의 우리의 에뉴는 ‘15첩 반상기식사’라 한다. 각 개인별로 최소한 15가지의 음식이 제공된다는 의미겠다. 각 개인별로 15개씩의 유기그릇이 놓여지니, 12인분 정도이니 적어도 180개의 황금색 유기그릇이 뚜껑이 덮인 깔끔한 모양으로 놓여져 있는 것이다. 식탁 전체에 가득, 황금그릇을 늘어 놓은 듯 눈이 부시다. 화려하다.
유기그릇들이 어찌나 정갈하게 닦여졌는지, 아름다운 황금그릇으로 보여지는 품격을 발산한다.
좌정을 하고 밥을 먹으려 15개 그릇들의 뚜껑을 열기 전에 이미 전신에 포만감이 충만해 진다.
참으로 평생에 걸쳐 추억할, 전아한 품격의 맛과 멋을 가진 유서깊은 고도 개성의‘15첩 반상기’점심이었다. 약 50분만인 13시 30분에 개성국수집을 나온다.
개성 15첩 반상기 식사
“한민족 통일왕국 고려인삼 정기였나 /한반도 잘린 허리 다시 한번 하나되리 / 정갈한 유기반상기 개성사람 향기로다” 주차한 개성민속려관촌의 한 켠에 기념품판매점이 있다. 어린 판매원 아가씨와 김형근단장이 구면이라며 서로 매우 반가워 한다. 난 개성국수집에서 유기반상기의 아름다움에 감명되었기에, 기념품으로 이곳 개성에서 만들었다는 유기제품 수저 4조를 구입한다. $3씩으로 너무 저렴하다. 이제 평양으로 돌아가는 여정인데, 도중에 박연폭포와 성불사를 들러 간단다. 차가 지나면서 송악산의 원경을 본다. 서쪽으로 머리를 놓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여인을 닮았다는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자모산’이라고도 부른단다.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이겠다. 해발 488m의 주로 화강암으로 되어있다는 산의 골격미의 일단을 보자니, 서울의 북한산의 모습이 떠오른다. 공통점이 있어보인다.
박연폭포
송악산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박연폭포에 차가 멎는다. 14시 25분이다. 폭포를 향해 들어가는 입구에는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고, 폭포에서 부단히 퍼져나올 물안개 때문인지 파릇한 이끼에 덮인 부분이 많이 보인다. 경치가 빼어나다. 역시 여성 해설강사가 우리를 안내한다. 30세가 채 안되었을 젊은 여성인데, 한복이 아닌 붉은 점퍼에 검은 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다. 우리 일행 외에도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 10여명이 폭포의 주변에 흩어져 구경을 하고있다.
폭포는, 입구의 정면으로 매끈하면서 좌우로 장대하게 벌려있는 암벽의 중앙에서 길게 또 매끈하게 큰 물줄기로 곧바로 떨어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볼 수 없지만, 이 폭포의 위에는 ‘박연’이라는 못이 있어 그를 경유한 물이 이 ‘고모담’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한다. 북한측의 소개자료를 인용한다.
박연폭포 앞에서
<< 박연폭포는 개성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70리 떨어진 박연리 천마산에 있다. 천마산과 성거산사이의 골짜기에서 쏟아져내리는데 그 높이는 37m이며 너비는 1.5m나 된다. 폭포위에는 큰 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박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묘한 못이 있다. 그 못의 직경은 8m인데 못 한가운데는 섬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 맑은 물이 여기에 부딪쳐 옥같은 구슬이 되여 박연에 담기였다가 다시 폭포로 떨어진다. 폭포밑에는 직경 40m나 되는 깊이 패인 고모담이라는 못이 있고 그 서쪽기슭에는 룡바위라는 바위가 룡의 대가리마냥 웃부분만 드러내보이고 있다.
고모담기슭에서 바라보는 폭포의 모습은 하늘에서 은하수가 일시에 쏟아지는듯한 광경이며 청산을 울리는 폭음은 산이 무너지는듯 장쾌하다. 여름에 우거진 록음이며 가을철 단풍으로 수놓아진 박연의 풍경은 참으로 황홀하다. 하기에 이름난녀류시인이였던 황진이는 박연폭포를 바라보며 황홀감과 신비경에 빠져 저도 몰래 이런 시를 읊었다.
한 줄기 긴 내가 뿜어서 골안이 뽀야한데 / 백길이나 되는 고인 물에 가는 비온다
나는 샘이 거꾸로 쏟아져 은하수인가 싶은데 / 성산 폭포가 드리워 흰 무지개 일시 분명하다 우박이 퍼붓고 우뢰가 달리여 골짜기에 그득한데 / 진주가튀고 큰 돌이 부서져 맑은 하늘에 비친다
구경다니는 사람들아 / 려산폭포가 이 보다 낫다고 하지말고 모름지기 천마산에 있는 박연폭포가 /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것을 알아라 >>
떨어지는 물줄기를 중앙의 고모담에서 바라보자면, 폭포가 떨어지는 암벽 전체가 한마리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해설강사가 일러준다. 듣고보니 정말 그렇다. 좌우의 암벽 너비가 100m는 됨직한데, 암벽면의 좌우 양 가장자리에 수목들이 자라나 있어 부분적으로 암벽을 가리기도했다. 드러나는 밝은 암벽의 모습이, 왼쪽은 호랑이의 처든 머리, 오른쪽은 주저앉은 궁둥이가 된다. 폭포의 물줄기는 약간 잘룩한 이 호랑이의 등에서 쏟아져 내리는 격이다. 신비롭다. 고모담의 왼쪽편에 ‘룡바위’라는 이름의 큰 바위가 있다. 높이가 4m, 길이가 8.4m, 너비가 5.5m인 크고도 널찍한 바위이다. 고모담의 왼쪽 가에서 이 룡바위로 건너 오르도록 철재교량이 놓여져 있다.
길이가 10m쯤이 되는 무지개형의 다리이다. 바위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새겨놓은 글씨들이 많은데, 그 중에 이곳 개성 즉 송도의 명기 황진이의 필적이라는 초서체의 음각문이 시선을 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의 후반 2구를 적은 글이라 한다.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 흐르는 물이 아래로 곧장 3천척이나 떨어져 내리니, 마치 하늘에서 은하수가 흘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 고모담의 오른편에는 산기슭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나선형으로 아취있게 놓여져 올라가는 돌계단을 따라 20층계 가량을 오르면 계단 옆 오른편에 준수하고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있다. 사방 2칸 크기의 ‘泛傞亭( 범사정 )’이라는 정자이다. 이곳에 올라있으면 마치 안개낀 바다위를 떠가는 뗏목에 몸을 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정자이다. 폭포수에서 일어나는 물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여, 고모담에 담긴 물이 마치 바다처럼 어렴풋이 보이는 그런 정경을 읊은 한 편의 시라고 할 그런 이름이겠다. 예로부터 ‘송도3절’이라 하여 이 박연폭포와 황진이 그리고 화담 서경덕선생을 개성의 자랑으로 꼽아 왔다는데,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니, 박연은 지금도 여일하나 인걸은 묘연하여 간 곳을 모를지니, 일말의 서글픈 감회가 가슴을 적셔온다. 어설프나마 송도3절을 추모하는 내 얕은 정감을 적어본다. “송도3절 박연폭포 명불허전 빼어났네 / 매끄러운 단애 암벽 황진이의 화용이고 / 멀리보면 호랑이 형용 화담선비풍모라네”
정방산 성불사
성불사에서 단체사진
성불사 법당에서
14시 50분경에 박연폭포를 떠난 우리는 이번 북한방문에서의 마지막 탐방지인 정방산 성불사를 향해 달린다. 다시 한번 송악산의 씩씩한 골격미를 보게 된다. 길섶으로는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가운데 그 뒤의 농경지에는 주로 옥수수들이 자라고 있다. 돌연, 비가 억수되어 퍼붓는 가운데, 성곽이나 요새를 지키는 시설같이 웅장하게 지어진 관문을 통과한다.
곧이어 17시 정각쯤 성불사에 도착한다. 폭우가 쏟아진다. 빗속을 허겁지겁 달려 돌계단을 오르고 ‘正方山 成佛寺( 정방산 성불사 )’라는 현판이 붙은 입구 건물에 들어선다. 지금 소낙비를 피하고 있는 이 건물이 淸風樓( 청풍루 )이고 정면으로 안쪽에는 빗줄기 사이로 주불을 모셨을 極樂殿( 극락전 )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應眞殿( 응진전 )이, 좌측으로는 雲霞堂( 운하당 )이 있다. 요사로 보인다. 이 청풍루와 나란히우측 뒤로는 冥府殿( 명부전 )이 있다. 마당 중앙에는 석탑이있다. 짜임새가 있는 사찰배치로 아담하고 푸근하다.
어린시절에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를 통해 이름을 알게 되어 막연히 상상해 보았던 성불사가 바로 여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이고, ‘풍경이 어디있을까’는 호기심이 앞선다. 이은상 시, 홍난파 곡으로 온 국민이 애창하던 그 노래의 고향이니 만큼 감회가 크지 않을 수 없다.
빗줄기가 다소 수그러든다. 우리를 맞으러 나오신 ‘주승’은 50대 중반 쯤의 연세로 보이는 분이다. 표정이 밝으시다. 군살이 전혀 없이 보기좋게 마른 체형으로 올곧은 정갈한 삶을 사시는 분으로 읽혀진다. 남북을 막론하고 한민족이라면 모두가 다 이름을 들어 알고있는 고찰의 ‘주승’인만큼 당연히 그만한 경륜을 지니신 분일것이다. 주지스님의 인도로 예불을 올린다.
성불사는 국보유적 제 87호로 지정되어 있다. 898년에 처음 세워졌고, 고려말기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전후에 또 다시 지은 것이라고. 마당에 있는 5층석탑은 국보유적 제 279호이다. 극락전의 건물 네 귀퉁이에는 ’성불사의 밤’에 등장하는 그 풍경이 하나씩 달려있다. 그러나 이 풍경은 그 옛날에 노산 선생이 이곳에 묵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중에 그윽한 소리를 내던 바로 그 풍경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때, 저‘운하당’에서 주승과 객이 함께 밤을 보냈었을 것이다. 선생이 잠을 이루지 못하던 것은 혹 일제에 빼앗긴 조국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두 동강으로 쪼개진 겨레와 강토의 현실에서는 또 다시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실 것이겠다. 빗방울은 그치지 않고 부지런히 떨어지는데, 풍경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사찰 밖 어느 곳에선지 주민들이 부르는 노래가락이 풍경소리를 대신한다. 밀러보살님은 500 나한을 모신 응진전에서 주불을 향해 어두움속에서 홀로 절을 올리고 있고, 김형근단장은 주승의 안내로 극락전의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산신각을 둘러보고 있다. 북녁 동포, 남녁 동포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의 안녕을 발원하며, 1시간을 머무른 정방산 성불사를 나와 평양을 향해 떠난다. “성불사 극락전에 빗소리 소란한데 / 응진전 오백나한 한결로 침묵이네 / 향민들 노랫가락만 운하당을 휘도누나”
제14일 ( 2016-09-12, 월요일 )
양각도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순안공항으로 이동한다. 아쉬움과 후련함을 가지고 흘러가는 평양시내의 이모저모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북측 해동의 책임자인 백광석님이 축구를 화제로 얘기를 꺼낸다. 요즘 평양시내에서는 직장대항 축구경기가 벌어지고 있단다. 우리를 공항에서 배웅하고 나면, 자신도 직장의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있기에, 곧바로 축구장으로 경기를 하러 가야 한단다.
그 쪽은 축구경기에 대한 설레임을 안고, 우리는 2주일에 걸친 긴 여행을 마치고 포근한 집으로 돌아간다는 설레임을 안고, 08시경에 순안공항에 도착한다. 08시30분에 순안공항을 이륙한 고려항공의 비행편으로 북경공항에 도착한다. 다시 13시20분 대한항공의 비행편으로 북경을 이륙하여 17시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이로써, ‘미주현대불교’에서 주관하여 시행한 ‘북부조국 사찰순례 및 문화유적답사’ 여행을 모두 다 마친다.
이 행사를 주관하신 김형근단장, 14일의 일정동안 침식과 동정을 같이 한 우리 일행분들, 북측 인솔자 및 안내원들과 이 행사가 이루어지도록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의 인사를 올린다.
2018년 1월 미국 LA의 KOREA TOWN에서 정진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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