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생명의 복음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없는 잔치라니요? 아무런 맛도 흥도 없는 잔치입니다. 뜻도 기쁨도 없는 생명이요,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정결례에 쓰이는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빈 항아리입니다. 경건함도 감사함도 잃어버린 종교요, 신앙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십니다. 물입니다. 그 물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물을 채워봤자 그것이 잔치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이거 힘만 들고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짓이 아닐까요?
가나의 일꾼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빈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두 동이들이나 되는 항아리 여섯을 가득 채웠지요. 그런데 분명 일꾼들이 채운 것은 물이었는데, 잔치 맡은 이가 맛을 보니, 그것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더없이 맛깔나고 향기로운 포도주였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흥겹고 신명나는 잔치가 회복되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며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성구를 읽고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어림없는 일이겠지요.
그것은 기껏해야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겠지요. 우리의 항아리는 비어있습니다. 우리에게 포도주는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의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사순절 동안 우리가 매일 매일 물을 채우면, 마침내 우리의 항아리에도 물이 가득 차겠지요. 그때 예수님이 우리의 물을 맛깔나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른바 제4복음서라고 불립니다. 일찍이 마가와 마태와 누가가 복음서를 썼지요. 이 복음서들은 비교적 같은 관점에서 쓴 복음서라는 뜻으로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을 제4복음서라고 부르는 까닭은 요한복음서가 앞의 세 복음서와 상당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공관복음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처음부터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우선 이야기의 순서가 아주 다릅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먼저, 예수님이 성전을 숙청하신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어디에 나옵니까? 비교적 복음서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직후에 나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성전숙청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은 2장, 복음서 초두에 등장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하고 부르시는 이야기는 공관복음서 초반부에 기록이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나를 따르라”하시는 소명의 말씀이 복음서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이 갈릴리 바다도 디베랴 바다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기록된 복음서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서들도 각각 관점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 때”, “거기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심하며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은 “의미”를 묻고 대답하는 복음서인 것이지요. 요한복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되지 않고 의미의 흐름에 따라 증언이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다른 시기와 다른 장소에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기원후 70년 어간에 마가복음이 처음 기록된 이후, 80-90년 경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로마의 지배가 공고한 때입니다. 유대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못하고 무너진지 30년이 흐른 뒤이지요. 이제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로마의 최고신 주피터의 대리자인 황제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황제숭배와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닥쳐오는 때이지요.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쫓겨납니다. 그래도 로마가 제국의 우산 아래 유대교는 보호해주었는데, 그 유대교로부터 축출당한 작은 무리는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지요.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지주의라는 새로운 사조에 맞서야 했습니다. 영지주의란 무엇보다도 흑백논리로 ‘육체’와 ‘영’을 나누고 ‘육체’를 악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육신은 영혼의 감옥일 뿐이요,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은 무익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저 하류신이 허접하게 만든 것이니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직 영혼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어서 빨리 육체의 감옥을 부수고,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자는 이들도 생겨났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그저 옛날 이야기만 되풀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은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서 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해야 했습니다. 엄청난 돈과 권력, 그리고 수많은 사상과 종교의 도전 앞에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굳게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대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듯 시야를 넓혀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광활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합니다. 또한 요한은 현미경을 대고 살피듯, 그 시야를 좁혀서, 생명의 깊고 깊은 신비를 들여다 봅니다.
요한복음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복음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고, 그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고, 그를 믿게 하려는 것을 넘어서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구원하는 것을 넘어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요20:31) 요한복음이 가장 주목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흔히들 복음서에 ‘구원’(소테리아)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구원’이라는 말을 단 한번 밖에 기록하지 않습니다.(요4:22) 저 세상에 있는 순수한 영적 존재가 이 세상에 와서 우리 영혼을 그곳으로 데려간다는 구원신화는 영지주의의 것이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생명’(조에)이라는 말을 무려 36회(공관복음서는 4-5회)나 사용하며 주목합니다.
요한은 태초부터, 아니, 태초 이전부터 계셨던 말씀이시며,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신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가 지으신 한 알의 밀알 속에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마지막 때에, 마지막 장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가요? 요한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을 전해줍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 요15:12)
이 절기에 주님이 우리를 참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년 이른 봄
한민교회 서재경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