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직자는 더 투쟁해야 하나
(퍼온 글 한겨레21, 2001, 8/1)
사리불: 그대는 어찌하여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천녀: … 요술하는 사람이 요술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묻기를 어찌하여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한다면 이 사람이 묻는 것이 옳겠습니까.
사리불: 옳지 아니하다. 요술로 만든 사람은 일정한 모양이 없는 것이거늘 무엇을 바꾸겠는가.
천녀: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일정한 모양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여인의 모양을 바꾸지 않는가’라고 묻습니까.
계율 어기면 여자로 태어난다?
그때 천녀가 신통력으로 사리불을 변화시켜 천녀를 만들고, 자기는 몸을 변화하여 사리불이 되고는 다시 물었다. “어찌하여 여인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사리불이 천녀의 몸으로 대답하였다. “내가 어찌하여 여인의 몸으로 바뀌었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천녀: 사리불님이 능히 그 여인의 몸을 바꾼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인들도 몸을 바꿀 것입니다. 마치 사리불님이 본디 여인이 아니로되 여인의 몸을 나타내듯이 모든 여인들도 또한 그리하여 여인의 몸을 가졌지만 여인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이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마경>의 ‘관중생품’ 중에서)
천녀와 사리불의 대화의 요점은 공(空)의 진리이다. 이 대화는 지난해 여름 계간 <불교평론> ‘불교와 페미니즘’ 특집에서 이창숙 박사(동국대 불교학과 강사)가 소개한 내용이다. 공의 진리에 따르면 형상에 따른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고, 따라서 차별도 없다.
한국 불교에서 공의 진리는 다른 모든 것에는 커다란 가르침을 주지만 유독 남녀의 관계에서는 이상하게 뒤틀려 있다. 출가한 지 20년이 넘는 한 비구니의 이야기이다. “노스님을 모시고 어떤 모임에 갔다. 큰 마루에 젊은 비구들이 여러 분 앉아 있었다. 노스님이 들어서자마자 절을 했다. 연거푸 세번이나 하는 동안 어느 비구도 당황해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듯이 노스님의 절을 받았다.”
나이든 비구니(여자 승려)와 젊은 비구(남자 승려)들은 비구니 팔경법을 따랐던 것이다. 상당수의 비구니들에게 불교 계율의 ‘독소조항’이라 지적받는 이 계율은 비구니는 비구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며, 비구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비구니교단은 비구교단에 예속돼야 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따라서 출가한 지 수십년이 지나고 나이가 100살에 가까운 비구니라도 갓 입문한 비구에게 예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한 여성불자의 이야기이다.
“여름 휴가도 날 겸, 큰절의 수련회에 참가했다. 4박5일 동안 몸도 마음도 맑아지는 듯했다. 마지막 날 팔뚝에 향불 자국을 내는 수계식도 엄숙한 마음으로 치렀다. 해산에 앞서 큰스님이 단상에 섰다.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등 몇 가지 계율을 강조하더니 만약 이를 어기면 다음 생에 벌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 벌 중의 하나가 여자로 태어난다는 말이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세에 벌을 받는다는 것은 윤회를 기본사상으로 하는 불교 신도들에게 무시무시한 가르침이다. 여자로 태어나는 게 벌인 까닭은 여자는 성불할 수 없다고 못박은 여인오장설 탓이다. 비구니 출가에 관한 문헌의 끄트머리에 잠깐 등장하는 여인오장설은 여자는 여래가 될 수 없고, 전륜성왕·제석천왕·마왕·대범천왕도 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불교에 귀의한 여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인오장설을 보완한 것이 ‘여자는 남자 몸으로 바꾼 뒤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이다. 사리불과 천녀의 대화에서 보듯 이것 역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지적받지만, 이미 몇천년 동안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왔다.
수행자들의 행동지침에 해당하는 계율과, 여성이 카스트 구조의 말단이었던 옛 인도사회를 배경으로 한 설들은 절대불변의 고정진리가 아니다. 상당수 불교학자들은 많은 부분이 후세의 율장편집자에 의해 삽입되거나 과도하게 해석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물이 평등하다는 가장 큰 가르침을 위배한 채로 21세기에 와서도 불교가 성직자와 신도에게 ‘여성이라는 죄’를 계속 씌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팔경법의 성차별을 주제로 논문을 썼던 세등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불교계 의사결정자들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이다.”
사진/ 믿음은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7월 25일 열린 '언론개혁을 위한 종교인 1000인 선언' 행사장에서 왜 여성종교인은 발언하지 않았을까.(박승화 기자)
성공회에서도 올해 첫 여성사제 탄생
종교는 또다른 사회이다. 조계종 출가승려 1만2천여명 중 반수가량이 비구니이고, 비구니는 법회주관은 물론 수행활동에 비구와 차이가 없지만, 이는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조계종의 종헌과 종법은 종단기구의 주요 교역직 종무원 이상의 자격은 거의 다 비구에 한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앙종회의 의원 81명 중 10명이 비구니로 구성돼 있는 것은 지난 94년 불교계에 불었던 개혁열풍의 작은 성과이다.
하지만 비구 의원은 비구들이 직접 선출하는 데 비해 비구니 의원은 전국 비구니 대표단체의 추천과 직능대표선출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한다. 따라서 비구니에게는 선거권이 없고 소속교구의 전체회의격인 산중총회에 참석할 자격도 없다. 조계종 25개의 본사 중 비구니 사찰이 단 한곳도 없는 것 역시 비구니의 지위를 보면 놀라운 게 아니다. 여성이 성직자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는 불교가 이 정도라면 다른 종교들은 사정이 어떨까.
여성사제를 허용하지 않는 가톨릭과 달리, 성공회는 1862년 영국에서 최초로 여성 부사제가 나온 이래 나라별로 여성사제 허용문제를 맡겨왔다. 대한성공회는 1991년 여성성직위원회가 조직된 이래 줄곧 이 문제를 논의해왔으나 완강한 내부 반대에 부딪혔다. 여성사제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지난해 교회법을 바꾸면서부터다. 1년 뒤인 올해 5월 부산교구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사제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민병옥(55) 신부. 200여명에 가까운 성공회성직자 중 유일한 여성성직자이다. 민 신부는 남성들이 공부를 마치고 부사제가 되기 전 1∼2년쯤 거치는 전도기간을 20년이 넘도록 견디어야 했다.
현재 성공회 내부에서는 “개방적인 부산교구였기에 여성사제 서품이 가능했다”는 게 중평이다. 민 신부의 사제서품으로 놀란 성공회 내 보수적인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결혼한 여자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공회는 남성사제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 민 신부는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과 사회 전반의 가부장제가 성공회 안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절감했다”고 말한다.
부부목사를 흔히 볼 수 있는 개신교에서도 여성목사가 탄생한 것은 오랜 투쟁의 산물이다. 여성목사 안수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가 갈라지기 전인 1932년 함흥노회에서다. 원래는 여성장로직을 둘러싸고 공방이 있었으나 일사천리로 부결돼버렸다. 그 다음 여성의 목사 안수 허용문제를 놓고 논박이 오갔다.
남성 교권주의자들이 여성목사 안수를 반대하며 댄 논리는 고린도서 바울서신에 나오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대목이다. 이 자리에서 김충배 목사가 “그건 2000년 전 바울이 한 교회를 대상으로 한 말로, 보편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자 교권주의자들이 들고일어나 김 목사를 파문 직전까지 몰고갔다. 이 일은 어렵게 수습이 됐으나 그뒤로 여성목사 안수문제는 물밑에서만 부글거렸다.
개신교 여성목사는 ‘투쟁의 산물’
1953년 예장과 기장이 갈라졌고, 3년 뒤인 1956년 기장에서는 여성장로회가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목사 안수는 난공불락이었다. 기장에서 여성목사의 길이 열린 것은 1974년 교단법을 손질하면서부터다. 교단법에는 ‘35살 이상의 자’를 목사의 자격으로 규정하고 이를 줄곧 남자로 해석해왔다. 이때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가 ‘자’를 ‘사람’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서울노회에 올려 통과됐다. 사람에는 여자와 남자가 있으므로 비로소 여성목사 안수의 길이 트였다. 해프닝성 사건이었으나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바람과 분노가 그 이면에 담겨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장에서는 1976년 첫 여성목사가 나왔고. 예장에서는 예장통합쪽에서 1994년에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한 이래 1996년에 첫 여성목사가 나왔다. 일제시대부터 미국 감리교법에 따라 별다른 투쟁없이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해온 감리교에서도 여성목사가 나온 것은 1952년에 이르러서였다.
예장통합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한 배경에는 1988년부터 거세게 불었던 교회 평등공동체 운동의 영향이 컸다. 기독교계의 여러 여성단체들이 예장 여성목사안수제 통과를 위한 연대회의까지 구성해서 싸울 정도였다. 교회법을 바꾸려면 교회→노회→총회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대부분의 남성목사들은 이 요구를 무시했다. 여성기독교인들이 여러 경로로 여성목사 안수 허용문제에 관련해 헌의를 하자, 3년간 이 문제로 헌의를 못하도록 법률화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장통합은 대세에 밀려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하게 됐고, 첫 시험에 70여명의 여성이 무더기로 붙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안수제도를 통과한 여성목사들은 그 다음의 벽에 부딪혔다. 아무도 교역자로 불러주지 않았고, 가물에 콩나듯 청빙목사로 갈 경우에도 남성목사와 명백한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여성의 목사 안수만 허용했을 뿐 교회 안팎의 분위기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장 소속 한 여성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36년 전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해보자고 제안해왔다. 사례비를 물었더니 담임목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은 뒤 ‘10만원으로 잡혀 있다’고 말했다. 전임으로 있던 남성전도사는 기본월급 13만원에 여러 혜택을 받고 있었다. 나는 대학원도 졸업하고 그 남성전도사보다 나이도 많은 처지였다. 어째서 월급 차이가 나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여자라서 그렇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항의했더니 소명감이 없어 함께 일하기 힘들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 교회는 나 대신 같은 자리에 여성전도사 둘을 청빙했다. 월급은 한 사람당 5만원씩이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몇년 전 실시한 여교역자실태조사에 따르면 같은 교회 소속 부목사나 전도사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사례비(월급) 차이는 2분의 1에서 크게는 4분의 1까지 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여성으로서 권리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교회 일각이 “소명이 약하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게 여신학자협의회의 분석이다.
사례비, 크게는 4배까지 차이
성직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뜻이다. 남성성직자에게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쓰이는 이 말이 종종 여성성직자에게는 글자 그대로 종으로 해석된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한국염 목사는 “전체 교계를 통틀어 개신교 목회자는 1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성목사들은 1%도 안 된다”며 “개별교회로 청빙되는 경우도 드물지만 설사 청빙이 돼도 심방전도사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일부 교회에서는 나아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여성목사들은 구역 할당이나 사례비 지급, 사택·자동차 지원 등에서 차별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개신교든 불교든 가톨릭이든 신도들의 70∼80%는 여성이고, 교회와 절, 성당의 각종 사회봉사와 전도활동에도 여성의 참여가 도드라진다. 하지만 여성성직자와 여성지도자의 양성을 가로막는 성차별적 제도와 인식의 장벽은 여전히 공고하다.
지난 6월14일 가톨릭 주교회의 산하 평신도사도직위원회에 여성소위원회가 설치됐다. 가톨릭 여성단체를 비롯해 70여개 수도회 대표모임인 한국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등에서 여성사목 전담기구를 설치해달라고 오래 전부터 꾸준히 청원한 결과이다. 이날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여성의 지위와 관련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응답자들은 교회의 개혁과제로 △여성의 활동범위 확대해야 한다(26.7%) △교회의 총체적인 의식개혁(24,8%) △여성과 여성의 활동에 대한 가치를 왜곡 또는 편협하게 평가한다(24.2%) 순으로 응답했다. 가톨릭여성연구원 최혜영 수녀(성심수도회)는 “최소한 교회가 남녀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여성 종교지도자를 키우고 양성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의식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했다.
다른 종교의 여성성직자, 수도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원불교의 경우 전국 2천여명의 교무 중 여성교무가 1300여명으로 남성교무의 숫자를 능가한다. 게다가 주요직책에 여성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하정남(영산원불교대학 여성문제연구소 소장) 교무는 “성직에서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사회적 관습도 문제이지만 종교 자체의 관행이 더 큰 문제”라며 “원불교는 가장 중요한 교리에 남녀의 권리동일을 구체적으로 못박고 있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불교는 최고의결기관인 수위단을 남녀동수로 구성하고 최고지도자인 종법사 역시 남녀가 모두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원불교 초창기인 1920년대(1916년 창시)에는 최고지도자인 종법사를 남녀공동대표제로 하자고 할 정도로 여성의 권리를 적극 옹호했다. 가부장제 탈피와 여성인력 양성을 중요한 실천과제로 삼고 출발한 것이 오늘날 원불교 남녀교무의 동등한 지위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원불교 남녀교무의 동등한 지위
7월25일 열린 ‘언론개혁을 위한 종교인 1000인 선언’ 행사장.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원불교사회개벽교무단,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이 행사에는 내로라 하는 종교계 개혁인사들이 참여했으나 단상에 오른 이들 중 여성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이크를 잡고 발언한 종교인들 역시 모두 남성이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지만 단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사실이다.
여성성직자, 여성수도자가 겪는 성차별은 종교인으로서 겪어야 할 ‘고난과 만행’의 과정인가,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 종교윤리’의 또다른 얼굴인가. 종교가 부박한 세상에서 예언자적 지위를 당당히 가지려면 일반사회의 주요화두인 양성평등을 성직에서부터 모범적으로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김소희 기자 |
첫댓글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적 종교윤리’의 또 다른 얼굴, 여성성직자가 투쟁해야 하는 이유...... 양성평등은 성직자 사회에서 부터 구현되어야 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사회의 공인으로서 모범을 보이면 좋을 것 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