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
우산
손준식
오전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방 안이 어둡다. 오늘도 비가 내릴 모양이다. 예년과 다르게 올해는 봄이 참 수상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는가 하면, 바람이 차고 기온도 오르지 않는다. 꽃은 피는데 봄은 멀고 마음까지 싱숭생숭한 것이 잡아놓은 약속까지 귀찮아져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아무래도 외출할 때 우산을 챙겨야겠다. 저 상태라면 머잖아 빗발이 쏟아질 게 분명하다. 다용도실에서 마땅한 우산을 고른다. 급할 때마다 사나른 우산이 많기도 하다. 손자손녀가 갖다 놓은 것들도 모양과 크기별로 다양하다. 내가 젊었을 시절엔 비닐우산이 고작이었다. 비닐로 된 우산이어도 파란색과 분홍색 등 여러가지 색깔이 있어서 곱기는 했다. 색깔 따라 기분도 달라지곤 하였다. 하지만 몇 번 쓰고 나면 비닐이 찢어지고 우산살이 끊어져 쓸 수가 없었다. 요즘 우산은 튼튼하고 디자인도 특이하며 색과 모양도 고급스럽다. 명화를 그대로 옮겨와 빗물을 받기 미안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길을 걷다가 그대로 서서 펼친 우산을 올려다보며 그림을 감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명화우산은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이다. 그곳 카페 테라스 한 자리에 앉아 밤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냥 한 곳만 바라보며 먼 기억을 끄집어 오고도 싶었다. 그 우산은 때때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선물로 받았을 때, 이런 우산도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실수로 잃어버릴까 싶어 잘 쓰지도 않았다. 집에서나 일부러 우산을 펼치고 그림을 보면서 감상하곤 했다. 그 안에서 나의 시간들을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서성이는 일들이 즐거웠다. 그러다가 감쪽같이, 언제인가도 모르게 우산을 잃어버렸다. 누가 가져간 것도 아니고 내가 잃어버린 것도 아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맞다 싶게, 우산 스스로 사라진 것처럼 없어져버렸다. 많이 서운했다. 온 집안을 며칠에 걸쳐 뒤져봤지만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2단으로 접힌 까만 우산을 챙겼다. 손질이 잘 되어 손잡이 부분을 살짝만 건드렸는데도착, 하고 가볍게 펼쳐졌다. 우산에 부딪는 빗방을 소리가 경쾌하다. 빗방울 소리 맞춰 어깨도 들썩여진다.
빠른 걸음은 아니지만, 비오는 날에는 가급적 천천히 걸으려고 한다. 빗소리도 듣고 빗방울이 바닥에 닿는 걸 보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속삭임이 가끔은 내가 걸어온 시간을 다독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그만하면 잘 살아온 거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아버지의 목소리로도 들린다. 요사이 그런 시간을 자주 갖는다.
나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를 감추듯 살아왔다. 우산 속에 얼굴을 넣고 걸으면 밖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듯이 나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존재로, 어느 날 우산 이야기 속에 계신 분이 되었다.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 아버지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꺼내 놓기조차 두려워,나도 모르게 더욱 깊게 접어놓은 우산속으로 밀어 넣어 뒀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아버지는 내 짝꿍 아버지 같이 양복 입은 멋진 모습이 아니라 그랬는지 나는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어쩌다 아버지를 만나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버지도 으레 그래도 되는 것처럼 빙긋 웃어주고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따뜻한 훈기를 묻혀주고는 지나가셨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들과 놀기에 바빴다.고 집엣도 할머니나 엄마하고 이야기할 뿐 어버지 하고는 대화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부모님과 할머니 집에서 분가하여 대구에서 학교에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 부름을 받고 고향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농사가 대농이라서 일꾼들 관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대구에서 40리 길을 기차 타고 통학해야 했다. 그날 학교를 파하고 신동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우산을 챙겨가지고 신동역 대합실에서 계셨다. 나를 보고는 언제나처럼 빙긋 웃어줬지만, 퉁명스러운 나는 우산만 받아 들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친구들과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 이후 예고 없이 비가 올 때마다 아버지는 신동역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과묵한 성격의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묵묵히 내 뒤를 따라 집까지 걸어오셨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랬을까 싶다.
손녀들이 제 아빠하고 서슴없이 얘기도 하고 재미나게 농담도 하는 걸 보면 참 보기가 좋다. 우리 때와 세대차이가 나서 그런 것인가 싶지만, 그것도 아니다. 내가 아버지께 참 못나게도 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가 해도해도 너무했지 않은가. 아버지는 왜 한 번도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았는지, 다시 지난 날로 돌아간다면 나도 손녀들처럼 아버지께 잘하고 싶다.
종일 내린 비는 밤이 늦었는데도 그칠 기미가 없다. 늦은 봄비가 내 마음속으로 흐르는 회한의 눈물같이 내린다. 반곱슬머리에 반듯한 이마를 가진 아버지가 파란 비닐우산들고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꿈에서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이 비 그치지 말고 밤 깊도록 내렸으면 좋겠다.
손준식
2018년 <서울문학) 신인문학상(시부문)2023년(인간과문학) 수필등단 2025년 <영랑문학상> 우수상, <서울문학상> 우수상(서울문학) 문인회 부회장, (인간과문학> 발전위원회 부회장 yoe12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