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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동이문자에 간직되어 있는 창세기 1~10장까지의 이야기
고대에 동이족이 만들었던 상형문자인 한자는 우리 배달 동이겨레가 참으로 욕단의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동방에 정착한 한국인의 조상 욕단 족속은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이른바 한자라고 부르는 상형문자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형문자인 한자를 분석해 보면 약 100여자에 달하는 한자가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욕단 시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상형문자인 일부 한자들 가운데 창세기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자주 언급해 왔으나, 싱가포르에서 활동했던 지나(支那 ․ china) 사람 C. H. 강 목사와 미국인 넬슨(Ethel R. Nelson) 박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함께 연구해 책으로 집필하였다. 그들은 “창세기의 발견”(The Discovery of Genesi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이 들어 있는 한자들을 자세히 분석 ․ 설명했는데, 그것은 20세기 성경고고학적 최대의 발견이라고 호평을 받았다(C. H. Kang & E. R. Nelson, The Discovery of Genesis, USA : Concordia Publishing House).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아담부터 노아 홍수까지의 성경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그 책에서 몇 가지 중요한 상형문자들을 발췌, 소개해 보겠다.
창세기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특별한 한자들
‘배’에 대한 한자 船은 아주 특징 있게 묘사되어진다. 이것은 세 가지 요소 즉 ‘배’의 舟와, ‘여덟’八 과, 사람을 뜻하는 ‘입’口로 구성되어 있다. “노아 가 아들들(셈, 함, 야벳)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창 7:7).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함을 보시고 비록 홍수로 이 세상을 멸하실 것을 계획하셨지만, 한편으론 죄 가운데서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순종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방주를 예비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120년을 기다리셨다.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에도 아랑곳없이, 불행하게도 성경 말씀과 같이 겨우 여덟 사람만 방주에 타므로 구원을 받았다.
‘배’에 대한 글자 船은 노아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여덟’八 ‘사람’口 만이 ‘방주’舟에 탄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舟 + 八 + 口 = 船
배 여덟 입 ․ 사람 배
‘여덟 ․ 팔(八)’자는 ‘사람 ․ 인(人)’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새다. 왜 ‘여덟 ․ 팔(八)’자를 그렇게 표현했을까? 그 까닭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 ․ 인(人)’자가 무엇을 묘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 ․ 인(人)’자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그린 것이다. 즉 왼쪽 획 丿은 아담을, 그 왼쪽 획을 받치고 있는 오른쪽 획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하와를 표현한 것이다(창 1;27 ; 2:21~23). 그래서 ‘사람 ․ 인(人)’자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묘사한 문자다. 인류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번성하였다(창 1:28).
그러나 홍수 심판 때에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한 전 인류는 멸절하였고, 홍수 이후의 모든 세대는 노아의 방주에 탄 그 여덟 사람으로부터 다시 번성하였다. 즉 홍수 이전에는 두 사람(人) 아담과 하와가 인류의 조상이었듯이, 홍수 이후에는 노아의 가족 여덟 사람(八)이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된 것이다. ‘여덟 ․ 팔(八)’자를 ‘사람 ․ 인(人)’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그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人) 아담과 하와가 인류의 조상이듯이, 여덟 사람(八)도 역시 인류의 조상이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했던 것이다(‘여덟 ․ 팔(八)’ ‘사람 ․ 인(人)’자는 본 필자의 해석임).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150일을 땅에 창일 하였더라”(창 7:18,24). ‘물 따라 내려갈 ․ 연(沿)’자는 ‘내려오다, 계속하다, 이어지다, 유전하다’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여덟’(八) ‘사람’(口)이 그려진 이 ‘연(沿)’자는 물 위해서 방주에 탄 채로 떠다닌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나타낸 것이다.
氵 + 八 + 口 = 沿
물 여덟(노아식구) 사람 내려오다, 이어지다
물론 ‘연(沿)’자는 모든 전통과 관습, 역사, 지식이 홍수 이후 여덟 사람의 세계로부터 ‘계속해서, 내려온’(沿) 것이라는 진리를 증명해 준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여덟 식구가 첫 번째 거처로 삼은 곳은 커다란 동굴 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으므로 집을 지을 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宀 + 人 = 穴
지붕 여덟 사람 굴 ․ 혈
이와 같이 ‘굴 ․ 혈(穴)’자는 노아의 여덟(八) 식구가 지붕(宀)을 삼고 임시 거처로 정한 곳이 물이 물러나간 동굴이었음을 나타낸다.
홍수로 인하여 땅의 모든 식물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노아의 가족 여덟 사람은 생존을 위해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여덟(八) 사람 모두가 일하기(工) 위해서 들에 나갈 경우 동굴(穴)은 텅 비게(空) 되었다.
宀 + 八 = 穴 + 工 = 空
지붕 여덟 굴 일하다 빌 ․ 공
‘나누다, 분할하다’를 뜻하는 ‘분(分)’은 ‘여덟’의 八과 ‘칼’의 刀로 나누어진다. 노아의 여덟 식구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 모든 양식을 나누어 먹었다. 여기에서 칼(刀)은 분할(分割)을 상징하는 기호로 쓰여졌다.
八 + 刀 = 分
여덟 칼 나눌 ․ 분
숫자 ‘넷’을 나타내는 四는 두 개의 기본 글자 口와 八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의미를 ‘여덟’八 사람으로부터 네 방향, 즉 ‘사방’口으로 나누어졌다는 것 을 제시해 준다.
八 + 口 = 四
여덟 사방 넷
대홍수 때에 노아의 여덟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그래서 노아의 여덟 식구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공동(公同) 조상이 되었다. ‘공평한, 공공의, 일반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公에서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여덟 식구가 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보여진다. 公은 또한 일상 생활에서 ‘할아버지, 노인’ 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할아버지로서 노아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의 약자인 ‘개인의’ 뜻을 가진 厶는 ‘입, 사람’口 의 축소된 형태에서 유래되었다. 즉 ‘여덟’八 ‘사람’厶이 인류의 ‘공통된 조상, 할아버지’公 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창 10: 32)
八 + 厶 = 公
여덟 사람 여러․공
神은 示와 申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들을 모두 창조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왼쪽의 示는 모두 세 가지 형태(示, 示, 礻)로 쓰여 진다. 이들 중에 두 번째인 示는 그 자체로 홀로 쓰일 수 있으며, ‘나타내다, 보이다, 명시하다. 알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분석해 볼 것 같으면, 示의 맨 윗부분인 一은 ‘하늘’을 나타내고 있으며, 아랫부분 一은 ‘땅’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小는 어떤 세분의 존재가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示는 “하느님의 신”, 즉 ‘세 분의 하느님’小이 ‘하늘’ㅡ에서 ‘땅’ㅡ 아래로 내려와 ‘나타내 보이고’示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示는 하느님에 대한 약어이다.
오른쪽의 申은 ‘펼치다, 알리다, 말하다, 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申은 ‘밭’이나 ‘동산, 정원’의 뜻을 가진 田과 관계된 것으로, 말씀을 명하심으로 동산을 펼친 함축된 의미를 알 수 있다. 우리는 示와 申을 합쳐 볼 때, 세 분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말씀으로 명하시어 동산을 지으신 것을 알 수 있다.
ㅡ + ㅡ + 小 = 示 + 申 = 神
하늘 땅 세 개채 보이다 펼치다 하느님
(인격) (하느님) (에덴동산)
이 사실은 다음의 성경 기록을 통해서 더욱 더 명백하게 확실시 되어진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여호와 하느님(엘로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니”(창 2:8).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니라”(창 1:2). 창조활동을 하신 분은 ‘단일신’이 아니라 ‘유일신’, 곧 ‘삼위일체 하느님’이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신 ․ 신(神)’자는 처음엔 유일하신 참 하느님(God)을 뜻하는 자였으나, 나중에 여러 잡신(god)이나 귀신의 의미로도 같이 쓰이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示) 첫(一) 사람(口) 아담에게 에덴 동산(田)을 주신 것, 이것이 복(福)이다. 에덴 동산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과실나무가 있고 생수가 흐르며 정금과 보석도 있는 낙원이었다(창 2:8~15).
示 + 一 + 口 + 田 = 福
하느님 첫째 사람 밭 ․ 동산 복
세 개의 입(口)으로 구성돼 있는 ‘물건 ․ 품(品)’자는 ‘만물’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또한 ‘품격 ․ 품(品)’자는 ‘행위’, ‘품성’을 뜻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말씀이 품행(品行)의 유일무이한 법칙이자 기준이었음을 증거 해준다. 그러므로 ‘품(品)’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문자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제단을 쌓고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신 하느님께 정결한 짐승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창 8:20).
홍수로 인해 중단되었던 제사가 다시 계속해서 드려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제사 지내다”의 뜻을 가진 祭에 묘사되어져 있다. 제사 드릴 때 꼭 필요한 짐승을 나타내기 위한 ‘고기, 살’의 뜻을 가진 月(=肉)과 한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드리는 것을 상징하는 ‘다시, 또’의 뜻을 가진 又와, 제사 드리는 대상자이신 하느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약어인 示가 합쳐져서 구성된 祭는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月 (=肉) + 又 + 示 = 祭
고기 ․ 동물 다시 ․ 용서 하느님 제사 ․ 제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祭의 구성 요소인 又에, ‘용서’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의의와 목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했을 때, 그들을 죄로부터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양(고기, 살)’月을 잡아 ‘계속’又해서 ‘하느님’示께 ‘제사 드리는’祭 제사 제도를 마련하신 것이다.
‘만들다, 창조하다, 짓다’라는 뜻을 지닌 ‘지을 조(造)’자는 흙으로 인간 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증거 해준다. 이것은 그 구성 요소가 ‘흙’의 뜻인 土와, ‘입’의 뜻을 가진 口와, 어떤 생명력을 가지고 활동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생기, 생명’의 뜻을 지닌 ‘삐침’丿과, ‘움직이다, 걸어가다’의 뜻을 가진 辶로 되어있다. 이렇게 작은 기호들로 구성되어 만들어진 造는 지구의 흙으로부터 첫 사람 아담을 만드는 최후의 절정의 작업을 나타내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말씀으로 옮겨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土)으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서 그 코에 입(口)으로 생기(丿)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비로소 움직이게(辶) 된지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담은 생령(a living soul), 즉 산 존재가 되었다. 아담은 성인의 모습으로 말도 하며(告), 걷기도(辶) 했다.
土 + 口 + 丿 = 告 + 辶 = 造
흙 입(으로) 생기 말하다 걷다 지을 ․ 조
아담의 이름은 ‘흙’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造자에 의해서도 아담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들다, 창조하다, 짓다’의 造는 하느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드신 것을 기억하기 위한 글자이다.
첫 사람은 아담이었다. ‘먼저․ 선(先)’자는 흙의 사람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먼저라는 사실을 나타 내주고 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흙’土으로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丿를 불어 넣으시므로 만들어진 사람’儿 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처음’先 창조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土 + 丿 + 儿 = 先
흙 생기 살아있는 사람 먼저 ․ 처음
‘시작’을 의미하는 몇 개의 글 가운데, 창세 이야기와 태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을 기념하는 것과 일치하는 문자가 원(元)이다. 이것은 ‘시초, 으뜸, 첫째’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두’(二)와 ‘사람’의 儿(성인)으로 구성 돼 있다. 인류 가족의 시작은 오직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므로 元은 시작에 대한 성경 기록과 창세기의 사실을 확증시켜 준다.
二 + 儿 = 元
둘 사람(아담 ․ 이브) 으뜸 ․ 처음
‘불 ․ 화(火)’자를 살펴보면, 사람(人) 위에 광채 ‵′ 가 발산되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 火로부터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찬란한 영광의 빛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는 나체가 되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10,11).
이 개념은 더 나아가 ‘빛 ․ 광(光)’자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이것은 첫(ㅡ) 사람(儿)에게서 발산되는 빛(⺌)을 나타내고 있다. 火자에서의 人이나, 光자에서의 儿은 둘 다 사람(人)을 나타내는 것이며, 여기에서 불이나 빛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광의 광채이다. 하느님은 빛이시다(요일1:5).
“남자는 하느님의 형상과 영광이니…”(고전 11:7).
“여호와 나의 하느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光)’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火焰)’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시 104:1~5).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 가인은 아담 가족의 양식을 공급했고, 아벨은 가족들이 입을 가죽 옷과 하느님께 드릴 제물인 양(羊)을 충당했다. 그들은 양을 잡는 것을 통해 일찍이 하느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은혜를 기억했다(창 3:21). 또한 자신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 어린 양이 대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어린 양은 자신들의 죄값을 담당할 구세주를 상징한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예배의식을 통해서 잃어버린 의로움(義)을 회복시켜 주실 약속된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표현 하였다. 이와 같은 희생제사 방식은 아담이 그의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手 + 戈 = 我 + 羊 = 義
손 창 나 양 옳을 ․ 의
이 ‘옳을 ․ 의(義)’자는 죄 용서를 구하는 처음의 예배의식에서부터 만들어졌다. 즉, 하느님께 양(羊)을 제물로 드리고, 하느님께서 기뻐 받으시도록 내(我)가 하느님의 어린양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좀더 세분해 보면, 이 하느님의 어린양은 내 손(手)에 의해 창(戈)에 찔려 죽임을 당한 것을 나타낸다. 바로 우리의 죄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것이다(롬 4:25).
‘맏 ․ 형’兄은 ‘말’口하는 ‘사람’儿으로, 가족을 대변하고(口), 동생을 잘 타이르는(口) 사람(儿)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口 + 儿 = 兄
입 ․ 말 사람 맏 ․ 형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쳐 죽임으로 인류 최초의 흉악(凶惡)한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凶 + 儿 = 兇
흉한 사람 흉악할 ․ 흉(살인)
‘흉악할 ․ 흉(兇)’자는 ‘맏 ․ 형(兄)’자와 발음이 비슷하나, 그 뜻은 ‘잔인한, 포악한, 비인간적인’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살인자’를 표현 할 때 쓰이고 있다. 이 모양은 하느님으로부터 잔인하게 살인을 범한 최초의 살인자인 형, 가인의 몸에 찍힌 낙인을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을 ㄨ는 살인이나 자르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글자에 사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형’의 兇에 찍힌 그 낙인 ㄨ은 가인을 살인자로 나타내는데 있어서는 아주 의미있게 쓰여졌다. 이제 가인은 더 이상 가족의 대변자가 아니었다. ‘터진 입(凵)’이 된 것이다.
장자(兄)는 가족과 함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승계 받을 자가 되어야 했다. 바로 이것이 맏아들(兄)의 특권이었다.
示 + 兄 = 祝
하느님 형 기도할 ․ 축
장자(兄)는 가족을 대변하는(口) 사람(儿)으로서, 가족을 대표해서 하느님(示)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잘 수행하야 했다.
고대의 화가, 즉 그림문자의 발명가는 ‘탐내다, 욕심내다’라는 글자를 어떻게 그렸을까? ‘탐내다’라는 뜻을 가진 婪이 ‘두 나무’林와 ‘한 여자’女로 구성된 것은 단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성경에 말하기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선악과를 맨 먼저 탐내고, 그것을 먹으므로 유혹에 넘어간 것은 여자 즉, 이브였지 남자가 아니었다.
林 + 女 = 婪
두 나무 여자 탐내다
욕심내다
그런데 왜 나무는 하나가 아니고 둘인가? 에덴 동산 중앙에는 두 그루의 특별한 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선악과’였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였다(창 2:8~9). 바로 이 두 나무를 묘사한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두 나무’林는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통해서 순종하므로 먹을 수 있는 영생을 상징한 생명나무와 불순종으로 오는 사망을 상징하는 먹을 수 없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리킨다.
하느님에 대한 악어는 示이다. 하느님은 처음에 ‘선악과’만 금하셨다(창 2:16,17).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범죄 한 후에는 ‘생명나무의 실과’도 먹지 못하도록 금하셨다(창 3:22~24).
林 + 示 = 禁
두 그루 나무 하느님 금하다
(명하다, 보이다, 주지시키다)
창조주 하느님께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모습이 ‘예도, 예절’의 뜻을 가진 글자 禮에서 그려진다. 그런데 이것에는 ‘창조주 하느님’示과 함께 ‘노래, 가락, 곡’의 뜻을 가진 曲이 보이므로, 사람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릴 때 찬송한 사실을 증거 해주고 있다. 그리고 고대에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집에서 제사를 위한 여러 가지 기구들(祭器)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것들을 나타내는 ‘제기’(祭器)의 뜻을 가진 豆도 보여진다. 그러므로 禮는 예배드리는 집에서(‘제기’의 豆가 보여지므로) ‘찬송(노래)’曲을 부르며 ‘하느님’示께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예도, 예절)’禮을 나타낸다.
示 + 曲 + 豆 = 禮
하느님 노래 예제기 예배
(찬송) (禮祭器) 예도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이 약 100여자 정도의 한자 가운데 정확하게 묘사가 되어 있다. 이러한 발견은 고고학적 발굴에 비견되는 것으로, 아담부터 대홍수 직후까지의 성경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증시켜 주는 것이다.
원시 한자의 창안자는 동이족(한국인) 이었다
누가 이와 같은 문자를 만들었는가? 지나(支那)의 한족이었는가? 아니다!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 족속이다. 대홍수 이후 동양으로 가장 먼저 천동(遷動)해서 정착한 사람들은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 족속이었다.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섬기는 일신교도들이었던 그들은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하려고 했다. 바로 그것이 상형문자인 이른바 한자의 유래가 된 것이다.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동이족(한국인)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자의 기원을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갑골문자에서 찾는데, 갑골문자가 나온 곳은 은허라고 하는 곳으로 하남성 안양현의 소둔이라는 지방이다. 이곳은 동이족의 땅이었다. 이것은 한자의 기원문제와 주인문제를 풀게 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한자의 모체인 갑골문자가 동이겨레의 땅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지나의 한족이 아니라 한국인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이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갑골(甲骨) 문화였다. 갑골은 거북의 등껍질이나 소의 주걱뼈에 글자를 새긴 것으로, 기원전 2,500년 무렵 발해 연안 북쪽에서 시작되어 중원지방으로 들어가 은나라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은(殷)나라는 동이족이 중원 땅으로 들어가 세운 나라였다(B.C. 18세기).
우리는 한자의 역사에 대해서 커다란 오해를 하나 하고 있다. 그것은 한자를 지나인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지나를 아시아 문화의 패권국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지나인들의 오래된 희망사항일 뿐이다. 오늘날 알파벳을 사용하는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고 해서 알파벳을 “앵글로색슨 문자”라고 해도 될까?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원시 알파벳의 창안자는 페니키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한자’로 부르는 것 역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원시 한자의 창안자는 지나의 한족이 아니라 한국인의 선조였던 동이족이었기 때문이다.
한자는 수천 년에 걸쳐 중원과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이 만들었던 것을 지나의 한족이 자기들의 글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한자는 ‘한자’가 아니라 ‘동이문자’ 내지는 ‘아시아 사인’(Asia Sign)이라고 해야 타당한 것이다. 한자는 지나의 한족만이 소유하고 발전시켜 온 글자가 아니다. 이 기호를 만드는데 우리의 선조가 깊이 관여했고, 또 긴 시간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숨결을 불어 넣었다. 바로 그 대표적인 문자들이 앞서 소개한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약 100여개의 한자들이다.
아시아에서 상형문자인 한자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사용했던 사람이 동이겨레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한자 5만 3천 5백 25자의 발음 부호인 반절음(反切音)이 모두 우리말 기준으로 옥편(자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인은 1918년 11월에 주음자모(注音字母)라는 표음문자(表音文字) 40자(현재 37자)를 제정하여 옥편 상의 전통 깊은 저 “반절음”과 전혀 다르게 한자 발음을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으니, 한자가 본래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자는 그 모체인 갑골문자 전후 때부터 동이족의 소산인 것이다. 이것이 갑골문자 이래 한자에 이르는 인류 최대의 표의문자로서의 한자가 모두 우리말 이두문(吏讀文)으로 발음기호∼반절음이 표기되어 온 이유이다.
C. H. Kang과 Nelson은 “누가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를 발명하였는가에 대해 확실하지 않으나 이 발명가에 대한 영광은 일반적으로 창힐(蒼頂)에게 돌려졌다”고 말하고 있다. 창힐(蒼頂)은 은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은나라에 대해 오늘날 지나 학자들은 지나인의 조상인 화하족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한국인의 조상인 동이족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지나의 현대 학자인 대만 대학의 임혜상 교수는 은나라가 우리 배달 동이겨레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 책들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이 동이 사람이요, 제나라 환공을 도와 이적(夷狄)을 물리친 관중(管仲)이 또한 동이겨레의 한 갈래인 내이 사람(萊夷人)이요, 또 근래에는 여러 학자들이 은나라가 동이겨레임을 고증하고 있다. 그런데 진시황이 산동 6제후들을 통일한 뒤에, 동이가 모두 흩어져 일반 백성이 되었다”(임혜상, 중국 민족사, 상권, 제1강, 중국 민족의 분류, 제3절, 各系族略設(二), 東夷系漢族來源之二).
또한 지나 학자 강량부(姜亮夫)는 그의 책 「하·은 민족교」에서 말하기를, “은나라는 옛 동방 민족의 겨레 이름인데, 이 은(殷)자가 곧 이(夷)자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고, 또 이에 대한 증거로서 설문(設文)에서 “이(夷)는 동방 사람이다”라고 한 말과, 서전(書傳)의 태서(泰誓)에서 은나라 “주임금(紂王)이 비록 억조(億兆)의 동이 사람들을 가졌으나, 그는 이미 마음과 덕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또 묵자의 비명편(墨子, 非命篇)에서 “주이(紂夷)가 하느님 섬기기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서, 은나라가 동이의 나라임을 고증하였다.
그리고 강량부는 은나라와 조선(朝鮮)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조선 사람의 전설과 은나라의 시조 설(殷契)의 탄생의 전설이 서로 같음과 또 옛날에는 요동(遼東)과 조선 반도 사이가 아직 깊은 바다로 변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은나라는 지나인의 조상인 화하족의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자의 시작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통하여 대체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의 아주 초창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대홍수 이후 동양으로 가장 먼저 천동(遷動)해서 중원 및 한반도를 개척, 지배한 사람들은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 족속이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그림문자를 고안하려는 최초의 노력이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단재 신채호는 한자가 우리 한민족 선조들의 소산이었음을 그의 책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임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塗山)에서 우(禹)를 보고 금간옥첩(金簡玉牒)의 문자를 가르쳐 주었은즉, 이 문자가 곧 ‘한자’일지니 조선이 한자를 연습함이 기구(己久)함을 볼 것이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문자(文字)라고 하는 것은, 문(文)은 그림을 자(字)는 글자를 의미하는데 글의 유래가 그림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자로 ‘文’과 ‘字’를 나누어 하나로 붙여 쓰지만 우리말의 ‘글’은 ‘그림’에서 글이 나왔음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문자의 기원이 지나인보다 한국인이 앞서 있었을 것이라고 최남선은 촌평하고 있다.
그밖에 문정창, 천관우, 임승국 등 많은 역사학자들이 한문은 한족(漢族)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김석형 박사 역시 한문은 ‘한문’(漢文)이라는 터무니없는 논리와는 무관하게 고조선의 문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만 중국문화대학 중문연구소에서 갑골문자와 갑골학을 연구하고 갑골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상명여대의 중어중문학과 교수인 김경일 박사 역시 한자는 동이족의 글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의 선조인 욕단 족속은 홍수 후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 니므롯의 위협으로부터 셈계의 일신신앙을 지키기 위해, 니므롯과 함께 서부 바벨론으로 가는 홍수 생존자들로부터 갈라섰다. 그들은 동양의 산악지대(파미르고원→ 천산산맥→ 알타이산맥)를 넘어, 마침내 ‘스발’(시베리아∼만주)에 이르렀다. 동방의 새 땅으로 이동해 와서 삶의 터전을 잡은 일신교도들이었던 그들은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하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글’의 유래인 것이다. 즉 최남선의 지적과 같이 우리말의 ‘글’은 ‘그림’에서 글이 나왔음을 이미 함축하고 있으므로, 그림 문자인 한자는 바로 우리 겨레의 소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몇 가지 ‘글’을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이 약 100여개의 문자 가운데 정확하게 묘사되어져 있다. 동아시아 대륙의 선주민이요, 처음 개척자였던 고대 한국인은 그들의 시대로부터 약 7~10세기 후에 모세가 기록한 성경 가운데 나타난 홍수 이전의 사건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한국인은 성경 첫 장도 기록되기 전에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보존했던 것이니, 이는 우리 한국인이 동양의 ‘스발’(시베리아∼만주)로 갔다고 성경에 기록된 셈족의 현저한 가지 욕단의 직계 자손임을 명백히 입증해 주는 것이다.
C. H. Kang과 Nelson의 커다란 실수
그러나 C. H. Kang과 Nelson은 그들의 책에서 아주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한자는 처음부터 오직 지나의 한족에 의해서만 만들어졌고 발전되어 왔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해당되는 사실을 엉뚱하게 지나인에게 적용시켜 아주 그릇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림문자나 표의문자를 고안해 내려는 최초의 노력이 전설에 의하면 약 B.C. 2,5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하므로, 고대 지나인들은 그들의 시대로부터 약 700년에서 1,000년 후에 모세가 기록한 성경 가운데 나타난 노아 홍수 이전의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둘째, 공자가 편찬한 역사책인 서경(書經)에, B.C. 2,230년 순(舜) 황제의 사적 가운데 “그가 하느님(上帝)께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후에 지나인들이 ‘봉선제’(진한 <秦漢> 때부터 행해진 하늘과 땅에 드리는 제사)를 행하였음을 보아,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할 수 있었던 고대 지나인들은 ‘하늘의 최고 통치자’를 상제(上帝), 천(天) 혹은 신(神)이라고 부르며 숭배했던 하나의 신을 절대자로 믿는 일신교도들이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지나 사람의 조상은 그들이 ‘상제’(上帝)라고 부르는, 이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신앙을 가지고 바벨 분산 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준다.
무지(無知)도 하나의 죄다. 왜? 거짓을 진실처럼 선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올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나인의 조상은 바벨 분산시 서쪽에서 동양으로 이동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숭배하던 일신교도들이 아니었으며, 원시 한자의 창안자도 결코 아니었다. 순황제는 “동이족”의 사람이었으며, 이른바 “봉선제”라는 것도 동이족의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이었다.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지나인이 아닌 분명한 증거
C. H. Kang은 남의 것을 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련하게도 사실과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남의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오인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주장을 해도, 내 자식이 아닐 때에는 양자간에 무엇인가 안 맞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것이 진실과 거짓을 밝혀줄 것이다. C. H. Kang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명백히 입증된다.
첫째, 지나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용(龍)을 숭배하는 민족이다. 지나인의 한결같고 현저한 문화적 특성은 “뱀의 형상”을 한 용을 지극히 숭상한다는 것이다. 고대에 지나에서 용은 황제를 상징했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지구상에서 용에 대한 애정과 숭배심이 가장 지고한 민족이 지나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용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고래(古來)로 지나 문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짐승이 용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개막식 때에 큰 풍선으로 만든 용 네 마리를 하늘로 띄워 올려, 네 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을 연출시켰던 사례를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실로 용은 지나라는 국가의 상징이며, 지나는 무엇보다 용으로 대표되는 나라이다.
용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용을 ‘옛 뱀’이라고 말한다(계 12:9, 20:2). 즉 신비감을 자극하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용은 다름 아닌 뱀이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하기 이전에 있던 뱀의 형상이다. 창세기 3장은 하와를 꾀어 금단의 열매를 먹도록 한 뱀을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저주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 하느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즉,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하기 이전의 뱀은 지금의 뱀처럼 배로 기어 다니는 혐오스러운 형상이 아니었다. 창세기 3:1에 뱀을 ‘들짐승’이라고 했고, 14절에 뱀을 저주하실 때는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라고 하셨으니―하느님은 뱀에게 ‘네가 공중의 모든 새보다 저주를 받아’라고 하시지 않았다―저주받기 이전의 뱀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처럼 네 발이 달린 형상으로서 걸어 다녔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직도 어떤 비단구렁이는 몸에 다리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때의 뱀은 여자가 유혹될 만큼 매혹적인 형상을 지닌 들짐승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3:1은 “여호와 하느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 가운데 ‘간교’라는 말은 뱀의 속성을 알려주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아룸’이라는 것으로 ‘지혜로운’ ‘멋있는’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자를 유혹했던 옛 뱀은 지혜로웠고 또한 신비감을 자극하는 멋있는 들짐승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 뱀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면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완동물은 단연 뱀일 것이다.
그 옛 뱀의 형상이 바로 지나인들이 고대로부터 조상대대로 숭배해 온 네 발이 달린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용(龍)인 것이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 아니다. 이 용을 성경은 옛 뱀이라고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마귀, 사단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용이 사단의 도구가 되어 하와를 꾀었기 때문이다.
용을 숭배하는 지나인들
만일 고대 지나인들이 참으로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사건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할 수 있었던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일신교도들이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하와를 꾀어 범죄케 한 옛 뱀인 용을 그렇게 숭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창세기 3장은 하와를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먹도록 한 짐승이 뱀이라고 말한다. 그 옛뱀이 바로 용(龍)이었으니, 흉측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용에 대한 숭배심을 전파시킨 고대 지나인들이 과연 창세기 3장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일신교도들이었다는 말인가?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참으로 지나인의 조상이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알고 있던 일신교도들로서 그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하여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할 수 있었던 원시 한자의 창안자였다면, 그들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용(龍)을 절대로 숭배하지 않았으리라! 지구상의 다른 모든 종족은 용을 숭상할지라도 지나인들만은 결코 용을 숭배하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지나인들에게 뱀의 모양을 하고 있는 용은 극한 혐오감과 적개심을 일으키는 흉측한 짐승이 되었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지나인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용을 지구상에서 으뜸으로 숭배해 온 민족이다.
따라서 지나인의 이 전통적인 용신숭배 사상은 그들이 서쪽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동방으로 이동해 온 일신교도들이 결코 아니었다는 아주 분명한 증거이다. 고대 지나인들이 서쪽에서 동양으로 이동할 때 갖고 왔던 개념은 일신신앙이 아니라 바로 “용신 숭배”였다. 이 용은 바벨론의 성수(聖獸)였는데, 바벨 분산시 지나인들이 동양으로 가지고 왔으며, 그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조상대대로 사단을 상징하는 뱀의 형상을 한 이 용을 지극히 사랑하며 숭상하고 있는 것이다. 용을 세상에 널리 퍼뜨린 민족은 지나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보존하였던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지나인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숭배했던 동이족이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용
둘째,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지나인이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로, 한자들 가운데서 ‘하느님’이나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행위’를 뜻하는 문자들 안에서 발견되는 삼일신(三一神) 개념을 들 수 있다. ‘하느님’이나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행위’를 뜻하는 모든 한자들의 공통점을 주목해 보라:
* 神 : ㅡ + ㅡ + 小 = 示 + 申 = 神
하늘 땅 세 개채 보이다 펼치다 하느님
(인격) (하느님) (에덴동산)
* 禁 : 林 + 示 = 禁
두 나무 하느님 금하다
* 祝 : 示 + 兄 = 祝
하느님 형 기도할 ․ 축
* 祭 : 月(=肉) + 又 + 示 = 祭
고기 ․ 동물 다시 ․ 용서 하느님 제사 ․ 제
* 禮 : 示 + 曲 + 豆 = 禮
하느님 노래 예제기 예배
모두 示가 있다. 示가 하느님에 대한 사인(Sign)임을 기억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示가 하느님의 약어라는 것을 확인했다. 왜 示가 하느님의 약어인가? 示는 ‘하느님의 신’, 즉 ‘세 분의 하느님’小이 ‘하늘’一에서 ‘땅’一 아래로 내려와 ‘나타내 보이고’示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기호이다. 그래서 示는 하느님에 대한 약어인 것이다. 示의 맨 윗부분의 一은 ‘하늘’을 나타내고 있으며, 아랫부분의 一은 ‘땅’을 나타내는 것이며, 小는 어떤 세 분의 개체 즉 “삼신(三神) 하느님”께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창 11:6~7; 3:22, 사 6:8)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형문자인 한자를 처음 만들었으며 발전시켰던 원시 한자의 창안자들이 동이족(한국인)이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삼신 하느님’ 사상, 즉 ‘삼일신(三一神)’ 개념은 앞에서 우리가 아주 자세히 확인한 것처럼< http://cafe.daum.net/ALILANG/ETMv/21 > 한국인 고유의 독창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한자가 지나의 한족의 소산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생각과 숨결이 들어간 동이족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지나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C. H. Kang과 Nelson은 역사적 진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사실을 전혀 관계가 없는 지나인에게 돌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순임금과 지나의 봉선제(封禪祭)
C. H. Kang과 Nelson은 공자가 편찬한 책인 서경(書經)에 순황제(B.C. 2,230년)가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과, 그 후에 지나인들이 ‘봉선제’를 행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고대 지나인들이 하느님을 숭배하던 일신교도들이었다고 단정하고 있다(「창세기의 발견」, 이강국 역, 서울 : 미션하우스, p. 37).
이 역시 잘못된 상식이 낳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순임금은 지나의 화하족이 아니라 한국인인 동이족의 사람이었다. 맹자는 말하기를 “순(舜)은 제풍에서 태어나서 부하에서 살다가 명조에서 돌아가시니 곧 동이인이었다”(孟子曰舜生於諸馮遷於負荷卒於鳴條東夷地人也. 孟子卷八)고 했다(제풍, 부하, 명조 등은 동이족이 살던 곳의 지명임). 그러므로 순임금의 제천 행적을 근거로 고대 지나인들이 일신교도들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순(舜)은 ‘무궁화 순’자 이다. 이것은 순임금이 화하족이 아니라 동이겨레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궁화는 동이의 꽃이었기 때문이다.
‘봉선제’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봉선제’는 지나인이 동이족의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봉선제’는 지나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 태산을 중심하여 예로부터 그 주위에 분포되어 있던 동이족의 유풍을 계승 삽입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최남선,「不咸文化論」, p. 51).
‘봉선제’란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나에서 진한(秦漢) 시대부터 황제가 행했던 ‘하늘과 땅에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봉(封)이라 하고, 땅에 바치는 제사를 선(禪)이라 했다. 이 두 제사는 각각 따로 행하여졌는데 ‘봉제’는 동지 때에 황제가 남쪽 태산 위에 토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고, ‘선제’는 하지 때에 황제가 북쪽 태산 아래의 양산(梁山) 작은 동산에 땅을 파고 땅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
지나인의 이 ‘봉선제’는 바로 우리 배달 동이겨레의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의 제천의식에서 배워간 지나인의 ‘봉선제’라는 것은 상당히 변질된 것으로, 한 분이신 하늘의 하느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아니었다.
최남선은 제천의 풍속이 지나인들의 ‘봉선제’와 같은 줄로 아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하면서 “제천의식”과 ‘봉선제’의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불함문화론, p. 51).
① 제 일은 오직 하늘에 시배(是拜)하고 제신(諸神)을 배(配)치 아니함이요
② 지나에서처럼 왕이 독행(獨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같이 함이요…
최남선의 지적과 같이 첫째, “제천의식”은 오직 하늘의 하느님께만 경배하는 것이요, 여러 다른 신들을 함께 섬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나인들의 ‘봉선제’라는 것은 홀로 한 분이신 하느님께만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땅에게까지 경배하는 의식이었다. 즉 지신(地神)을 비롯한 잡신들이 함께 제사의 대상이었다.
둘째, “제천의식”은 나라 전체 온 백성이 함께 하는 거국적인 행사였던 반면, 지나인의 ‘봉선제’는 황제가 홀로 행하는 것이었다. 즉 황제 개인의 의식이었다. 동이족의 제천의식은 천군(제사장)과 함께 온 백성이 같이 거행하는 나라 전체의 일이었으나, 중국인의 ‘봉선제’는 일반 백성들은 관계없는 황제 개인만의 행사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천의식”과 ‘봉선제’는 근본이 다르다.
왜 지나에서는 황제만이 홀로 천제(봉제)를 행했는가? 그것은 지나(화하족)와 한국(동이족)이 근본적으로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이족은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백성 모두가 당연히 하느님께 제사하고 하느님을 섬겼다. 그것은 동이족의 삶 자체였다. 채옹―한나라 학자―의 독단(獨斷)에서는 ‘천자(天子)란 동이족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고래로 제천행사의 진원지가 바로 우리 동이 땅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지나인(화하족)은 한국인(동이족)처럼 처음부터 하늘에 제사하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한(秦漢) 때에 이르러 동이족의 “제천의식”을 답습해 ‘봉선제’라는 것을 행하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의 일이 되지는 못했고, 홀로 천자(天子)임을 자처했던 황제 개인의 의식만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당시 지나의 황제는 자신만이 천자라고 주장했다―이 천자사상은 원래 동이족의 것이었다―그리하여 ‘봉선제’는 천자인 황제만이 독점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만약 일반 백성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그것은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택된 종족인 욕단의 직계 자손 우리 알이랑 민족, 배달 동이겨레는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자녀였고 백성 모두가 당연히 하늘에 제사할 수 있었다. 3백년 전 북애자(北崖子)가 전한 「규원사화」에는 단군의 8조 교칙(八條敎勅)이 있는데, 그 제1조는 “너희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이족은 모든 백성이 천제를 드렸으며, “제천의식”은 나라 전체의 행사였다.
우리는 아득한 옛날의 단군 성조 때부터 임금에서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느님께 제사하는 민족이었다. 비록 삼국시대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왔어도, 제천의 풍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전보다는 미약해졌지만 그것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때까지도 유지되어 왔던 풍속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나를 천자의 나라로 받들면서 단절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제후 정도의 통치자로 여겨 ‘황제’나 ‘천자’라는 호칭을 쓰지 못하고 ‘왕’(君)이라고만 했다. 하늘에 제사하던 “제천행사”도 천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하여 그 행사를 그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조말 고종 임금이 스스로 황제라고 하고 빼앗겼던 “제천권리”를 되찾아 다시 하느님께 제사하려고 가까운 곳에 제천단을 마련하였다. 그곳이 서울 시청 앞 조선호텔 뒷뜰에 있는 ‘원구단’(園丘壇)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언제나 한국인의 마음과 영성 깊은 곳에 살아있는 신(神)이었다.
1897년 원구단 전경, 동그라미로 표시한 곳은 서울 시청
조선호텔 뒷뜰에 있는 ‘원구단’(園丘壇)
실로 우리 알이랑 민족, 배달 동이겨레는 지나인에게는 없는 천신관(天神觀)을 가지고 민족사를 시작하였다. 고대 한국인은 이 천신 신앙(하느님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 사상을 각성하면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문화적 전통으로 삼아 겨레의 역사를 전개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아득한 상고(上古)의 선사(先史) 시대부터 하늘을 받들고 우러르며, 늘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따라야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또한 하늘에는 겉으로는 드러나 보이지 않으나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運行)하는 절대자인 주재자(主宰者)가 있다고 믿었으며, 그 천지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제천의식―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던 민족이었다. 우리 한민족의 선조들은 이러한 제천의식을 통하여 하늘의 주재자와 영적으로 교통하고 그 뜻을 좇아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세상 어느 민족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애호민족’인 까닭은, 한국인은 처음부터 하늘의 하느님을 공경하여 그 하느님께 제사하며 삶을 영위하던 하느님의 백성, 곧 천손민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평화애호민족’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건국이념 속에 담겨진 경천애인(敬天愛人),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이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민족(異民族)을 편견과 오만으로 대한 것이 한족(漢族)의 일관된 역사이다. 한족의 중화의식(中華意識)이 이웃 민족을 보는 기본적인 눈이 오랑캐 관(觀)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 주변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모두가 야만이라 하여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이라고 하였다. 실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민족 가운데 한족(漢族)만큼 이웃 민족을 무시, 경멸하는 민족도 드물다.
중국의 한족은 그들만이 제일가는 존재이고 그 이웃은 무조건 오랑캐라는 독선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살아온 존재들이다. 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는 달리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는 일방적 이족천시(異族賤視) 사상이요, 국수주의적 “침략적 민족주의”사상이다. 그러므로 한족이 강한 힘을 갖고 있을 때 이웃을 침략하지 않은 사례가 드물다. 실로 지나가 ‘중화’라는 악한 사상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제나 패권주의를 추구할 것이다. 지금도 지나는 약소국 티벳을 총칼로 박해하고 있다. 또한 한국 영토인 만주 땅을 무단강점하고 있고, 그 땅을 완전히 가로채기 위해 고구려를 지나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렇게 편협한 민족성과 반평화적 침략전쟁을 끊임없이 자행해 왔던 지나인의 선조들이 참으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던 일신교도들이었단 말인가? 열매로 나무를 알 것이다.
‘중화주의’는 아주 옹졸한 이념이다. 왜냐하면 남은 다 오랑캐라고 깎아내리고 나만 으뜸이라는 편협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는 결코 대국이 아닌 것이다. 인구가 많고 영토만 넓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이념이 커야 진정한 대국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홍익인간!’ 이 얼마나 큰 이념인가. 이 얼마나 위대한 세계 비전인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지나인들은 우리나라 국호에 ‘큰 대’(大)자가 있는 것이 자못 불쾌하다. 자기들이 ‘대국’인데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나라가 맞장을 떠보자는 듯이 국호에 ‘큰 대’(大)자를 버젓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우리나라 이름이 그들의 ‘자존심’과 ‘대국의식’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호에 대한 지나인들의 보편적 감정이 이런데, 2002년 월드컵 대회 때에는 ‘큰 대’(大)자에다가 악센트까지 넣어서 “대~한민국”이라고 우렁차게 전 국민이 응원을 했다. 게다가 4강까지 올랐다. 이 꼴을 볼 수 없는 지나인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이 심판을 매수해서 4강까지 갔다고 떠들고, ‘대한민국’을 ‘대견민국’(大犬民國)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아주 치졸한 행태이다. 왜 지나인들은 그렇게 반응 했을까? 대한민국에 대한 열등감과 시기심,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못된 중화사상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나는 결코 대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나의 ‘봉선제’라는 것은 지나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이족의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것도 여러 잡신에게 함께 절하는 변질된 것이었다. 따라서 지나의 황제가 행했던 ‘봉선제’ 역시 고대 지나인들이 일신교도들이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절대로 될 수 없다. C. H. Kang과 Nelson은 동양고대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인의 성경상의 기원
고대 지나인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던 일신교도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지나 사람의 성경상의 기원을 확인해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지나인의 조상은 한국인과 달리 ‘셈’이 아니라 ‘함’이다.
지나인을 부를 때 ‘시노(Sino)’ 족이라고 하는데, 이 ‘시노’는 함의 후손 ‘신(Sin)’ 족속에 해당된다(창 10:17). ‘신’은 가나안의 아들이요,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창 10:6,15). 지나의 기원은 함의 가계, 그 중에서도 가나안의 아들 ‘신’이 지나 민족의 고대 선조이다(창 10:17하).
이 세상의 역사가 종말을 맞기 전에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수많은 예언들이 거의 모든 구약의 예언서에 있다. 이사야 49:12은 그런 구절 중의 하나인데,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북방은 러시아의 유대인을 말하며, 서방은 주로 북남미 특히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을 가리킨다. 그리고 ‘시님’(Sinim) 땅이 나오는데, ‘시님’이란 바로 ‘신’(시노)족이 살고 있는 지나를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지나의 유대인들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지나 족은 함의 후손이다.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의 아들 ‘신’이 지나인의 고대 선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용을 숭배하는 지나인들의 독특한 문화에 의하여 입증된다. 지나는 무엇보다 용으로 대표되는 나라이다. 이것은 지나인이 함계의 후손임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이다. 앞서 말했듯이 용의 원고향이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이기 때문이다. 용은 바벨론의 성수(聖獸)였다. 이 용을 바벨 분산 시 고대 지나인들이 동양으로 갖고 왔던 것이다. 용 숭배 민족인 지나인은 셈의 후손이 아니다. 그들은 함계의 민족으로 가나안의 아들 ‘신’족의 후손이다. 이렇게 지나 민족도 성경상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샹다이(Shangdai)와 샤다이(Shaddai)
그러나 C. H. Kang과 Nelson은 「창세기의 발견」이라는 그들의 책에서 또 한 가지 비상식적인 이론을 근거로 더욱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샹다이’(Shangdai)로 발음되는 상제(上帝)라는 말과 하느님에 대한 히브리어의 명칭 중 하나인 ‘샤다이’(Shaddai)라는 말이 유사한 발음이라면서,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조상이 한 때는 같은 혈통으로서, 같은 절대자이신 한 분의 하느님을 섬겼다는 증거가 된다고 단정하고 있다(The Discovery of Genesis, p. 20).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자는 소리글자가 아니고 뜻글자다. 하느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는 최고의 주재자”이시기 때문에 ‘높음’을 뜻하는 ‘윗 상’(上)자를 ‘임금 제’(帝)자 앞에 놓아 상제(上帝)라고 했다. 그런데 이 두 글자를 합해서 읽어보니 ‘샹다이’로 발음이 된 것이다. 즉 상제(上帝)에 대한 지나어 발음인 ‘샹다이’는 음성학적으로 히브리어의 하느님에 대한 명칭 ‘샤다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각자의 신에 대한 발음의 유사성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 절대로 특별한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 H. Kang과 Nelson은 히브리어 ‘샤다이’와 상제(上帝)에 대한 지나어 발음인 ‘샹다이’가 유사하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것은 유대인의 조상과 지나인의 조상이 한 때는 같은 하느님을 섬겼던 같은 혈통이었다는 증거라고 당치도 않은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아득한 옛날부터 용을 숭배하는 민족인 지나인의 조상이 히브리인의 조상과 같은 혈통이란 말인가? 히브리인은 용을 숭배한 일이 없다. 유대인과 지나인은 같은 조상에서 분리된 종족이 아니다. 유대인의 조상은 ‘셈’이지만, 지나인의 조상은 ‘함’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흔히 쓰여지는 하느님에 대한 명칭은 ‘엘’(EL)이다. 엘 샤다이(전능자)는 50번 나타나는 데 비하여, 엘(강하신 하느님)은 창세기 31:13, 35:1,3을 위시하여 230회나 나온다. 이 ‘엘’에 상당하는 한국어가 ‘알’이다. ‘알’은 홍수 이전 사람들이 사용했던 하느님의 명칭으로 노아에 의해 전해졌다. ‘엘’은 바로 ‘알’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느님’도 원래는 ‘한알님’에서 전음된 것이다(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 ‘메아리’라는 말도 원래는 산신을 뜻하는 ‘뫼알이’였다.
한국어 ‘얼’이라는 말도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인데, ‘신’(神) · ‘혼’ · ‘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정신 나간 사람을 가리켜 ‘얼간이’, ‘얼빠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 내면의 ‘영적 상태’가 바깥으로 표출되는 곳이 ‘얼골’인데, 얼골(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 즉, ‘얼’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도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
하느님에 대한 히브리어의 대표적인 이름 ‘엘’과 매우 유사한 발음인 한국어 ‘알’과 ‘얼’은 음성학적으로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말이다. 이와 같은 사례야말로 한국인과 유대인의 조상이 한 때는 같은 혈통이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더 좋은 사례가 있다. 언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말이 엄마(어머니)와 아빠(아버지)이다. 따라서 이 말은 쉽게 변화되지 않으며 가장 오래 지속된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말과 동일한 어간을 가지고 있다. 곧 아버지는 ‘압’(Ab)이요, 호칭의 접미사가 붙게 되면 ‘아비’(Abi)가 된다. 어머니는 ‘엠’(Em)인데 호칭의 접미사를 붙이면 ‘에미’(Emi)가 된다. 우리도 아버지, 어머니를 흔히 ‘아비’, ‘에미’로 부른다. 이는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로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인 부모를 호칭하는 발음이 유대민족과 한민족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은, 그들이 한때는 같은 혈통으로서 동일한 조상 에벨로부터 분리된 종족임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동의’를 표시하는 말로 ‘아멘’(Ame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한국인도 ‘동의’를 표시하는 말로 ‘암’(Am)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유대인들은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땅합니다’라는 뜻으로 타인의 말을 옳다고 긍정할 때 ‘아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우리 한국인의 언어 가운데에도 동의를 표시하는데 그와 유사한 발음으로 ‘암’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하먼’으로 발음하고 있다. 예컨데 “암(하먼), 그렇고 말고, 동감이다”라는 말 가운데 ‘암’(하먼) 이라는 말은 틀림없이 동의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쓰이는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은 동감을 표시하는 한국어 ‘암’, ‘하먼’, ‘아무렴’ 등의 말은 히브리어 ‘아멘’과 그 어원이 같은 말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인과 유대인이 한 때는 같은 혈통으로서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나뉘인 민족이라는 증거가 된다. 한국인과 유대인은 동일한 조상 ‘에벨’로부터 분리된 “욕단의 후손”이요, “벨렉의 후손”인 것이다.
지나(china) 고대사의 진실
줄거리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상형문자인 원시 한자의 창안자가 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고대 지나의 성립 과정에 대하여 간략히 짚어보고 이 단원을 마치자.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 행적이 서경(書經)에 기록되어 있는 순임금은 동이족임을 확인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순임금뿐만 아니라 고대 지나의 제왕들은 거의 동방족(동이)이었다는 것이다.
동방족(동이)인 고대 지나의 제왕들
지나에서는 맨 처음 복희씨를 자기들의 전설적인 시조 임금이라고 치켜세웠는데 그가 동이족(한민족)임이 판단되자 재빨리 황제 때부터 역사를 가르쳐 왔다. 그러다 보니 황제 헌원(皇帝軒願)도 동이족임이 밝혀졌다. 중국 고전(古典)인 초사(楚詞)에 보면 황제는 생어백민(生於白民)이라 하였고, 또 그는 동이족에 속했다고(白屬東夷)고 했다. 또한 갈홍이 쓴 포박자(包朴子)에서 황제가 백두산에 있는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부터 사사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헌으로 인해 황제가 동이족임이 밝혀졌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 역시 우리 동이족의 사상인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자 중국인은 다시 요(堯)임금부터 역사를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나 요·순도 동이족임이 드러났다. 사마천의 사기(史記卷十三)에서는 요(堯)가 황제의 직계 5세손(帝堯起黃帝至佶子五世號曰唐堯)이라고 하였고, 또 고사변(古史辨)에서는 요(堯)는 황제의 5세손이고, 순은 황제의 8세손이라고 하였다(古史辨七冊上編 쪽 208, 쪽 191 ; 舜爲黃帝之八世子系). 이렇듯 요와 순임금의 선대(先代)를 황제라고 분명히 밝혔으니 황제가 동이족인 이상 그의 직손인 요·순이 동이족이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맹자도 순(舜) 임금이 동이족이라고 하였다(孟子卷八). 그래서 이제는 주나라부터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기(史記)에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의 오제(五帝)가 모두 성이 같았다고 하였고 맹자는 순임금이 동이(東夷)라고 했으므로 오제(五帝)는 본래 동이였는데 지나에 들어가서 왕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대만의 학계는 지나 고대사를 놓고 “이는 조선 사람들의 상고사이며, 그 기록에 나오는 삼황오제와 진씨 시황제까지의 모든 지나 고대사가 다 동이족 즉, 고조선의 것이었음을 안다. 당신들의 역사를 중국사라고 우기지 말고, 당신들의 문자를 한문(漢文)이라고 하여 중국 글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얼마 전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유적이 고조선의 강역구내인 요녕성(遼寧省) 지역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들의 정직한 주장이 사필귀정의 사실(史實)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고대 중원의 개척·선주민인 동이족
본시 중원(中原) 대륙의 선주민이요 개척자가 배달·동이족이다. 지나 학자인 왕동령(王桐齡)은 「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 호북(湖北)·호남·강서(江西) 등의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 동이)의 영속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이고 임금은 치우(蚩尤)였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로프도「중국사」에서, “기원전 3천년 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양자강·서강의 중류 이동(以東)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천5백 내지 2천년 후에 동방 천자, 치우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나학자 서량지(徐亮之)는 그의 책「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세석기 문화부족”(細石器文化部族)이 맨 처음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점점 동녘으로 옮겨 왔는데 그들이 곧 동이족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은·주(殷·周) 앞·뒤 시대에 동이족의 활동무대가 사실 현재의 산동성 전체, 하북성 발해 연안, 하남성 동남, 강소성 서북, 안휘성 중북. 호북성 동쪽 모퉁이와 요동반도, 조선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동이족이 춘추시대까지도 중국의 하북성에서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등지를 모두 차지했었다고 밝히고 있다(서량지,「중국사전사화」, p. 229). 일본 학자 도리이류쇼(鳥居龍藏)는 “한(漢)족이 지나 땅에 들어오기 전에, 지나의 중부와 남부는 본래 동이족의 갈래인 묘족이 살던 땅인데, 한(漢)족이 들어온 뒤로부터 점점 접촉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의 지나 사학자 대만대학의 임혜상(林惠祥) 교수도 그의 책「중국 민족사」에서 “중국의 춘추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중국의 하남성 전체를 동이족이 차지하고 살았으며, 또 여기에서는 동이의 예절과 풍속까지 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동이의 예절과 풍속이란, 예컨대 상투를 하는 풍습이나 ‘봉’(鳳·봉황새)을 상서로운 동물로 생각하는 풍속은 지나 대륙에 있었던 동이족(東夷族)과 한반도에 살고 있던 동이족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나에 자리 잡았던 동이족과 만주·한반도로 이주한 동이족 사이의 근친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동이족이 원래 지나 서북 지역에서 동북 지역으로 이동할 때 일부는 지나의 동쪽 해안 지방으로, 다른 일부는 요서·만주·한반도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그런 근친성을 갖게 된 것이다.
지나와 만주·한반도에 있던 동이족의 근친성은 지나의 내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고인돌이 지나의 동해안 지대에서 산동반도·발해만을 거쳐 한반도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입증이 되는 것이다. 동이 문화권에 많이 나타나는 고인돌 - 전 세계 고인돌의 55%는 한반도에 있으며, 한국의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은 원래 아담 때부터 희생제물을 드리던 제단이지 무덤이 아니다. < http://cafe.daum.net/ALILANG/ETMv/13 >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무덤이 아니라 제단으로 축조된 것이다.
임혜상 교수는 같은 책에서 동이족의 영역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나라의 무임금, 성임금 및 주공 때(B.C. 12C)는 중국 땅이 가장 좁았었다. 중국 하남성 낙양을 동경(東京)이라고 하였는데, 이 동경만 하더라도 동이족이 차지하였고, 또 기도(杞都), 옹구(擁丘) 및 변주(汴洲) 땅(지금 하남성 개봉)에 예속된 읍(邑)들이 또한 동이의 예법을 썼으며, 또 노나라에 예속된 주(邾)를 동이라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 중국이라는 곳은 홀로 진(晋), 위, 제, 노, 송, 정(鄭), 진(陣), 허 등의 지방만으로 전부 몇 10주들에 지나지 못하여 중원(中原) 전체의 1/5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의 지나는 그 나라의 이름에 ‘중화’(中華)라는 이름을 쓰면서 지나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자의 뜻대로라면 중국(화하족)은 동이 세력에 밀려 산서성 한 가운데 있던 가운데 나라란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중화’라는 이름의 본래의 뜻이다. 동이족에게 둘러 싸여 바다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고대 지나인들이었다.
화(華)족과 동이(東夷)족 명칭의 유래
동아시아 대륙의 선주민이요, 첫 개척자는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이었다. 고대 지나인은 동이족이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지 수세기 뒤늦게 서쪽으로부터 곤륜산을 넘어 동하해온 언어와 풍속이 전혀 다른 당시의 이민족이었다. 곤륜산은 일명 화토(花土)라고도 한다. 화토를 지나왔다는 뜻에서 그 종족을 화(華)족이라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자국밖에 거주하는 지나인을 ‘화교’(華僑)라고 부른다.
동이(東夷)라는 칭호는 이(夷)가 화(華)족의 동쪽에 살았다는 이유로 동이(東夷)라 한 것이다. 이(夷)는 고대 중원의 강자였던 동방족의 칭호로서 ‘대궁’(大弓) 또는 ‘대인(大人)이 활(弓)을 가졌다’는 뜻의 문자이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設文解字)에 보면, 이(夷)자가 ‘크다’(大)와 ‘활’(弓)의 조합으로 설명되어 있어, 예로부터 동이족은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홍수 이후 최초로 동양으로 이동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동방 산악지대들을 통과하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야생 동물들과 큰 활을 들고서 수없이 싸워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활 잘 쏘기로는 동이족이 다른 어느 종족보다 뛰어났었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 궁사들이 국제양궁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앞을 다투어 내고 세계 정상에 군림하는 것은, 한국인은 활 잘 쏘는 동이의 후손이기에 그들 속에 유전되어 잠재된 전통적 가능성이 어떻게든지 작용했다고 본다. 예로부터 일본이나 지나에서 “조선은 활, 지나은 창, 일본은 조총”으로 장기를 꼽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그러나 고대 한국인인 동이족이 주변 다른 종족들보다 특별히 ‘활’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창세기 9:13에 기록된 노아의 언약과 깊은 연관이 있다. 홍수 후 아라랏 산정에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모든 육체를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언약의 증거로 하느님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다.
13. 나는 나의 활(무지개)을 구름 안에 두어 나와 세상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으로 삼겠다.
14. 내가 세상 위에 구름을 나타나게 할 것이고, 사람들이 구름 안에서 활을 보게 될 때
15. 나는 나와 너희 사이 모든 산 생명 사이에 세운 나의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의 홍수로 모든 육 있는 생명을 멸절시키지 않을 것이다.
16. 활은 구름 속에 머물 것이고 하느님이 모든 생명과 곧 세상의 모든 육 있는 산 것과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 활을 쳐다볼 것이다.
- 원전직역 -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구절에 기록된 무지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활’을 의미하는 ‘케쉐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는 무지개에 해당하는 특별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보통 “활”을 뜻하는 ‘케쉐트’라는 일반적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겔 1:28). 그 이유는 곡선으로 된 활의 모양이 무지개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땅에서 볼 때 무지개는 활모양으로 보인다.
고대 한국인인 동이족이 활과 친근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홍수 후에 한국인의 직계 선조인 욕단은 노아를 비롯한 홍수 후 족장들―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과 함께 동양으로 이동했다. 그러므로 욕단 족속은 아라랏 산정에서 드린 노아의 제사와 무지개 언약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지개는 활 모양과 일치한다. 따라서 고대 한국인에게 있어서 활이라는 것은 단순히 전쟁하는 무기나 짐승을 잡는 사냥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지개”였다. 무지개는 은혜와 자비, 그리고 평화를 상징한다. 한국인의 선조들이 ‘활’(케쉐트)을 선호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동이족에게 ‘활’은 무지개였다. 한국인의 선조들은 하느님께서 ‘케쉐트’, 즉 활로 언약하셨던 것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인들은 무지개의 언약을 믿고 기리던 거룩한 백성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명절이 되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지개 색깔의 아름다운 색동옷을 입혔다. 그러나 동양으로 이동한 욕단과 반대 방향인 서부 바벨론으로 향했던 홍수 생존자들이, 시날 평지에서 하늘 높이 바벨탑을 쌓았던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 니므롯의 말을 듣고 “무지개 언약”을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의 선조들이 무지개의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지개”라는 말이 증명하고 있다. “무지개”는 “물지게”라는 말에서 ‘ㄹ’이 탈락한 것이다. “물지게”란 “물을 지는 지게”라는 뜻으로, 인류를 멸하는 ‘궁창 위의 물’(창 1:7)이 다시는 쏟아지지 않도록 지게로 지고 있음을 뜻한다. 즉 “무지개”라는 말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지 않겠다는 노아의 언약을 말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예로부터 “솔롱고스의 나라”라고 부른다. ‘솔롱고스’는 몽골어로 ‘무지개’를 뜻한다. 이는 한국인이 노아의 일신신앙을 계승한 셈족의 현저한 가지 욕단의 후손으로서, 고대로부터 무지개를 은총의 증표로 기억하고 있었던 천손민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나인들은 무지개를 홍예(虹蜺)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용’(龍)을 의미한다. 홍(虹)은 “숫용”을 뜻하고 예(蜺)는 “암용”을 의미한다. 고대 지나인들은 무지개를 ‘용’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지나인들에게 무지개는 ‘용이 하늘에 나타난 것이다. 성경은 ‘용’이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말한다(계 20:2).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증거가 무지개이거늘, 지나인은 무지개를 보면서 하느님이 아니라 정반대로 마귀를 연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상인가?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어느 민족이 욕단 계열의 성민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중국 민족 구성의 근간이 된 동이족
화(華)족이 중원대륙으로 이동해 들어옴에 따라 동아시아 대륙의 선주민인 동방족(동이족)과 서장족(화하족)의 접촉과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동이족의 현저한 유풍인 ‘제천사상’이 중국인에게 전달되었고, 이른바 한자를 비롯한 동이족의 많은 문화유산(음력, 책력법, 한의학, 신선사상, 천자사상 등)이 그들에게 전수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서장족(화하족)이 중원에 동하 해 들어옴에 따라, 지나 본토 내의 선주민이었던 동방족(동이족)과의 혼혈이 이루어지게 됨으로, 동이족은 중국 민족 형성과 문화탄생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渡來人)이 일본민족 형성과 문화 탄생의 근간이 된 것과 같다. 오늘날 일본인의 약 80%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한국인의 후손이다(최재석,「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 과정」, 일지사, 1990, pp.78~81; 김홍길,「일본인의 한민족에 대한 콤플렉스 2000년」, 집문당, 2000, p. 174).
오늘날 만주를 포함한 지나 대륙의 13억 인구를 통칭 한(漢)족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우리처럼 단일 종족이 아니다. 백인종의 합중국이 미합중국(USA)인 것같이, 황인종의 합중국이 한(漢)족의 지나합중국(USC)이다. 한(漢)족은 15, 6종족들의 혼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통설이다. 그러한 중에서 지나족의 근간은 ①양자강 이북의 선주민이었던 선퉁구스 즉 동이(東夷)인과 ②선사 이래 10세기 말엽까지 만주에서 이름을 날렸던 부여인과 고구려인 즉 조선족이었다.
현대 지나 학자들 가운데 대만대학의 임혜상 같은 이는 한(漢)족을 구성한 종족들이 15, 6족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제일 큰 줄거리 종족을 ① 화하계(華夏系) ② 동이계(東夷系) ③ 형오계(荊吳系) ④ 백월계(百越系) 등의 네 가지로 잡고 있다(임혜상,「중국민족사」, 중국 민족의 분류).
그런데 그는 화하계를 맨 앞에 놓음으로써 화하족을 한(漢)족 구성 줄거리의 첫째 종족으로 나타내고 있으나, 사실은 동이계(한국인)가 맨 처음에 놓여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4종족 가운데 인구면으로나 슬기면으로 보아 동아시아 땅의 선주민이었던 동이계가 다른 종족들보다 단연 뛰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5, 6개가 넘는 여러 종족들이 모여 이루어진 지나합중국(USC)에서 차지하는 우리 동이겨레의 비중은, 마치 미합중국(USA)에서 앵글로색슨(Anglo-Saxon)이 차지하는 비중과 맞먹는 것이다. 지나 민족 형성과 문화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느 종족보다 큰 기초가 되었던 종족이 배달 동이겨레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 학자 서량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국 신석기 말년에 동서연맹(‘동’은 동방의 동이족을 말하고, ‘서’는 서장족인 화하족을 말함)이 성립된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한 바탕은 동서 양측 “용(龍) 봉(鳳) 이원(二元) 연맹”이었으니, 이것은 후일 이·하일가(夷·夏一家)의 중국 민족 구성과 정통 문화가 탄생하는 시원적 기초가 된 것이다”(서량지,「중국사전사화」, p. 29).
지나 민족의 근간이 동이족이라는 것이다. 실로 동이(東夷)는 비유컨데 USC를 형성한 원료나 재료 그 자체인 것이다.
봉(鳳)의 나라 한국과 용(龍)의 나라 지나(china)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왜 서량지는 동방족(동이족)과 서장족(화하족)의 혼혈이 성립된 것을 "용봉 이원 연맹"이라고 설명했는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 지나인(화하족)은 ‘용’을 숭배했던 종족이었고,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은 ‘봉’(봉황새 :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으로 봉황은 암수 한 쌍을 뜻함)을 상서로운 동물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오늘에 살아남은 유일한 동이족의 일원인 한민족은 지금도 대통령의 문장(紋章)에서 무궁화 좌우에 각 한 마리씩의 아름다운 봉황새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예로부터 ‘봉’을 귀히 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동이족은 ‘새’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새의 깃털이나 날개로 머리를 장식하는 것을 특별히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동이족은 한알님(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을 숭배했는데, 새는 날개가 있어 한알님 계시는 한알(한알 → 하날 → 하늘)을 누구보다 가까이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하느님은 날개 달린 ‘그룹’ 또는 ‘스랍’, 즉 천사들 사이에 계신다(출 25:18~20, 사 6:1~3).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동이족이 ‘봉’이라는 새를 종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삼았던 것은, 한알(하늘)을 숭배하고 가까이 하려 했던 그들의 일신신앙에서 기인하였던 것이다.
한알(하늘)을 사모하고 숭배했던 동이족은 죽음이라는 것이 한알(하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동이족의 무덤은 봉분의 형태이다. 그것은 바로 커다란 알, 즉 한알을 뜻하는 것으로 한알(하늘)로 돌아감을 나타낸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새의 알’에서 탄생했다는 우리 겨레의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새를 귀하게 여기는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은 한알(하늘)에 계신 한알님(하느님)을 숭배하며, 한알(하늘)을 공경했던 선조들의 유일신 신앙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다. 새는 한알(하늘)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언제나 한알(하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봉’은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새인데, 다름 아닌 하늘을 왕래하는 천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중국인의 ‘용’은 악한 마귀를 상징한다. 이 얼마나 극적인 대립 개념인가? 시베리아를 건너와 만주에 정착했던 동방족, 즉 한국인의 선조들은 처음부터 봉황새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깃발을 봉도등(鳳圖騰)이라고 하였고, 지나에서는 진시황이 고대로부터 지나인들이 숭배해 왔던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삼으면서 용도등(龍圖騰)으로 그 깃발을 삼았다(문정창,「고조선사 연구」). 두 민족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 현격한 사상과 문화의 차이에서도 우리는 하늘에 속한 백성 즉, 욕단계 선민이 누구인지를 익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서쪽(바벨론)에서부터 용을 숭배하던 화하족이 곤륜산을 넘어 중원으로 동하해 들어옴에 따라, 지나 본토 내의 선주민이었던 동방족(동이족)과 한동안 중원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 불가피했다. 예로부터 전쟁을 할 때는 깃발을 들고 나간다. 이때부터 ‘봉’을 종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삼고 있었던 동방족(동이족)은 봉황새가 그려진 ‘봉도등’ 깃발을 들고 나갔고, ‘용’을 종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삼았던 서방족(화하족)은 ‘용’이 그려진 ‘용도등’ 깃발을 앞세우고 나가 싸움을 했다.
바로 이때 생겨난 동이족의 유명한 말이 “용(龍) 용(龍) 죽겠지!”라는 말이다. 동이족의 후손인 우리 한국인은 오늘날에도 다투거나 장난을 칠 때 상대방을 향하여 “용용 죽겠지!”라고 한다. 이 말의 기원은 고대 지나 본토 내에 있었던 ‘봉’을 종족의 상징으로 삼은 동이족(한국인)과 ‘용’을 종족의 상징으로 삼았던 화하족(지나인) 사이의 전쟁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양의 고대 역사는 ‘봉’의 동이족과 ‘용’의 화하족간의 대패권 다툼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패권 다툼을 겪으면서 동이족과 화하족 사이의 접촉과 혼혈이 이루어졌고, 동이족은 지나 민족을 구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용’은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다(계 20:2). 그런데 우리 한국인은 수천 년 이상 “용(龍)! 용(龍)! 죽겠지!”라고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해 온 민족이다. 그 고백대로 한국인은 말세에 성령의 큰 권능으로 악한 마귀, 용의 나라에 치명타를 가하게 될 것이다.
말세에 한국에서 늦은 비 성령의 역사로 큰 부흥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감추어 두신 자기 백성을 찾아 당신의 거처인 셈의 장막으로 기필코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것은 아주 강력한 방문이 될 것이다. 그 결과 동방 한국으로부터 사도적 권능이 충만한 종들이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세계 열방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전 세계적 능력전도 사역으로 인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사단의 견고한 진”이 있는 아시아 서쪽의 공산주의 문화권(지나), 힌두 및 불교 문화권(인도·동남아), 이슬람 문화권(중동)을 선교적 과제로 삼아 복음의 깃발을 들고 서쪽으로 진군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 서쪽의 땅 끝인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들어가 복음의 깃발을 세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면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실로 마지막 때에 사단의 왕국은 알이랑 민족, 한국 백성으로 인해 회복불능의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단이 악몽을 꾼다면, 그것은 뜨겁게 찬양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 한국 사람 꿈일 것이다. 알이랑 민족 한국 백성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선민으로서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쓰임 받을 백성이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할 민족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지나 안에서 동이족이 소멸한 까닭
지나 민족 형성의 근간이 되었던 우리 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중원에서 소멸한 까닭은 무엇인가? 지나에 있던 동이족의 세력이 위축된 것은 전국시대(B.C. 5~3세기) 무렵이다. 그 이유는 지나인들이 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려 수적으로 동이족이 아주 열세해졌기 때문이다. 동이족은 본래 기마민족으로 말 잘 타고 큰 활로 맹수사냥을 잘하는 활동적인 민족이었다. 그러나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화하족은 왕래가 없고 이동이 적었다. 그리하여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연나라 때 이르러 그 숫자가 동이족의 10배 정도로 팽창하여 동이족은 서서히 중원(中原)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점차 동쪽으로 밀리게 되었던 동이족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B.C. 221~206년) 시황제 때에 와서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대륙을 통일한 시황제는 지나 안에 있는 이질적인 소수 민족을 지나 민족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나 안에 있던 동이족은 지나 민족에 분산·편입되어 주체성을 상실케 되었고, 만주·한반도 지역의 동이족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지나 안에 있던 동이족의 일부는 지나 민족에게 정복·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요서·요동 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위씨조선(위만조선)의 설립자인 위만이다. 위만은 오늘날의 지나 북경 지역의 연나라에서 망명한 사람이다. 그가 망명할 때 머리에는 상투를 하고 동이(東夷) 사람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상투에 동이 옷을 입고 조선으로 들어오자 준왕은 그를 일종의 국경수비대장에 임명했다. 그만큼 준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인데, 위만이 준왕의 신임을 받게 된 데에는 같은 민족(동이족)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된 지나 역사 및 문화와 문자
참으로 한 옛적부터 진시황(B.C. 3세기) 때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지나 천지는 배달·동이겨레가 온통 차지하고 살았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하고, 그 속에 있는 외민족을 정복·동화시키거나 또는 지금의 이산가족처럼 분산편호(分散編戶)를 시켰는데, 그 당시 동이족도 그냥 두지 않고 지나 민족 속으로 그 세력을 흩어버렸다. 그 후에 지나 본토 내에 있던 동이족은 점차 소멸되고 만 것이다.
지나의 한(漢)족이 원래부터 중원 대륙을 지배했던 것이 아니다. 즉 B.C. 221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대 중원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동이족(한민족)의 활동 무대였으며, 중원 문화 또한 동이족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한족 문화는 알려진 바와 같이 뛰어나게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자료를 주위의 민족에게서 힘입었으며, 특히 그들이 말하는 동이족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대아시아문제연구소, 육당 최남선 전집 제2권, 현암사, 1974, p. 51). 그러나 지나인이 중원 대륙의 일반 통치자로 점차 등장하면서 동이족의 문화유산들을 자기의 것들로 삼았으므로, 한족이 그 모든 중원 문화들을 창달한 주인처럼 역사의 진실이 왜곡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지나 역사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하여 정직하게 새로 정리한 지나측의 사서(史書)인 고사변(古史辨)에서 지나의 진실한 석학들은 “옛적의 중국의 제왕들의 종적을 보니 거의 동방족이었다(古代帝王踪蹟多在東方)”라고 기록하였고, “종래에는 ‘중국 역사는 중국인 시조로부터’라는 중국적 우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우상이 타파되어야 하고 중국사는 저 동이족의 선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 중국 석학들은 중국 고전을 두루 인용하면서 저들의 선조가 동이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곳 동이의 본고장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아직 사대모화(事大慕華) 사상에서 깨어나지 못해서인가?
지나 역사는 동이족이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지나에 들어가 시작 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 지나에 들어가서 많은 왕조를 세워서 지나 역사가 발전되어 온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나인이 현대인류학에서는 몽골 인종으로 분류되면서 언어학에서는 몽골 인종이 사용하는 알타이 어족과는 다른 어족, 즉 지나 어족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지나뿐만 아니라 동양에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지배적인 기원이 되는 가계는 욕단을 통해 이어지는 동부 히브리인들, 즉 알이랑 민족 우리 배달 동이겨레(한국인)인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지나의 13억 인구를 통칭 한(漢)족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이 한(漢)족이란, 그 이름뿐만 아니라 그 종족 자체의 생김이 오래되지 못한 것이다. 한족이라는 명칭은 문헌적으로 A.D. 220년의 문헌 속에서 겨우 발견되는 것이다. 한족은 15, 6개의 종족이 모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한족”이라는 명칭은 어떤 특수한 종족이나 민족을 표시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저 “한나라 사람”(漢人)이라는 말이다. 백색인종의 합중국이 미국이라면 황색인종의 합중국이 곧 지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나 민족 구성의 시원적 기초와 근간을 이룬 가장 큰 줄거리 종족이 중원 대륙의 선주민이요, 개척자였던 우리 동이 겨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황하 문명의 주인공은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인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독립된 종족으로서의 한(漢)족은 없다. 이미 밝힌 바처럼 그 말은 독립된 민족을 표시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지 “한 나라 사람”(漢人)이라는 말이요, “한 나라 백성”(漢民)이라는 말이다. 이른바 ‘한문’(漢文)과 ‘한자’(漢字)라는 것이 또한 그렇다. 과거에 없었던 글자를 15, 6 종족들이 모여서 성립된 한인(漢人)들이 비로소 “창제”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동아시아 대륙의 선주민이요, 중원 문화의 개척자였던 동이족이 만든 원시한자(초기 상형문자)들이 발전해 온 것을, “한 나라 사람”(漢人)이 또한 자기의 글과 글자를 삼았다는 의미에서 한문(漢文) 혹은 한자(漢字)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족은 “옥편”이니 “자전”이니 라는 말을 써도 자기들은 한자(漢字)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지나인이 오늘날 전적으로 한자(漢字)를 사용한다는 것이 곧 그들이 한자를 창제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는 한자‘가 아니라 “동이문자” 또는 “아시아 사인”이라 해야 옳은 말이다. 고대에 동이족이 만들었던 원시 한자들이 오늘날 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고대 페니키아인이 고안해 내었던 원시 알파벳이 오늘날 서양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알파벳을 “알파벳”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영국 문자도 아니고 독일 문자도 아니며 러시아 문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자도 사실은 ‘한자’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며, 원시 한자를 만들었던 동이족을 존중해서 “동이문자”라고 하든가 아니면 “아시아 사인”이라고 해야 타당한 것이다.
대홍수 후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고 넘어 스발(새벌: 시베리아∼만주)에 이르는 영웅적인 대장정(大長征) 끝에 극동의 새 땅에 삶의 터전을 잡은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 족속은,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을 잊지 않기 위하여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존하였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바로 여기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셈의 가계 욕단의 후손인 한국인의 선조들은 구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최초의 인류 역사에 대한 내용을 기초로 하여 표의문자(表意文字)를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앞에서 몇 가지 글을 확인한 바처럼, 약 100여 자에 달하는 한자들 가운데 창세기 1장부터 10장까지의 사건들이 정확하게 간직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인이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신앙을 계승한 셈족의 현저한 가지 욕단의 후손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인은 그 사실을 입증해 주는 아주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동이문자에 간직되어 있는 창세기 1~10장까지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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