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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Baroque) 미술
바로크는 에스파니아에서 온 “이지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곡선이 많고 장식이 지나친 비
고전적인 건축이나 장식을 멸시하는 형용으로 쓰이던 말인데, 이것이 그 뒤로는 17세기라는
그 시대와, 그 시대의 미술양식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바로크'의 원뜻은 지나치다라는 남용의 뜻이지만,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것에서 나온 괴상하고 과장된 형태를 뜻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와 비교해서 바로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빛나는 색채, 음영과 질감의 풍부한 대비 효과, 자유롭고 표현적인 붓질 등으로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의 표현이다.
<<대표작가와 작품>>
카라밧지오 , 푸생 , 렘브란트 , 루벤스 , 반다이크 , 벨라스케스 , 베르메르
17세기는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와 분리하여 서로 자기의 자리를 확고히 잡는다. 이 교파는 예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로마 카톨릭은 종교재건운동(로욜라의 제수이트 회 등)을 펼치면서 교리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신도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미술을 이용하였다. 이들은 회화만이 아니고 건축과 조각등을 총체적으로 이용하였다.
유럽은 경제가 발달하면서 귀족사회와 더불어 자본가인 부르주아지의 시민사회도 형성되었다. 이들도 미술품의 고객이 되면서 미술은 또 한번 변신을 한다.
17세기 후기에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아메리카 식민지도 미술품 구매에 참여하여 유럽의 미술 사조가 세계화 경향을 띄게 된다.
이제 미술의 주문도 왕궁이나 큰 성당과 같은 거대한 구조물로부터 극장, 빌라같은 주거지와, 연극과 발레의 무대장치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신교도 지역에 성장한 부르주아지는 초상화를 주문하였다. 화가들도 살 길을 찾아 초상화와 시민 생활을 주제로 하는 그림을 그렸다.
바로크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의 유럽이지만 다양한 사회 배경에 맞추어서 그림도 다양성이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조화, 균형, 완결성에 대하여 양감(volume), 광채(빛=light), 역동성(dynamics)에 호소하는 미술양식이다. 과격한 운동감과 극적인 효과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동적 분위기를 표출해내기 위해서 도입한 방법이 빛이다.
르네상스 미술이 '현실을 토대로 이상미를 추구'하였다면, 바로크 미술은 현 실 그 자체에서 생동감을 찾으려 했다. 바로크도 부분, 부분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서 전체에 종속되도록 하였다. 르네상스기의 균형에는 못 미치지만 매너리즘이나, 로코코보다는 르네상스에 더 가깝다.
유럽미술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우리가 “계몽시대”라고 부르는 과학의 발견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동설이 있다. 하늘과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이 지구가 중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도 바뀌었다. 표현하는 미술도 바뀌었다. 요약하면
1) 색채를 풍부하게 사용하였다.,
물감의 연구와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므로 투명한 물감의 칠하기에서 물감을 두껍게 칠
하는(Impasto) 법을 터득하므로 원하는 색을 마음대로 낼 수 있었다.
2) 빛을 이용한 극적인 대비(밝음과 어둠)로 주제를 드러내고,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빛의 개념이 신성(神性)에서 자연과학의 발달(지동설)로 실재하는 자연과학상의 실상일
뿐이다 라고 믿게 되었다.
3) 근본적인 미술사조는 자연주의이며, 사실주의이다.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크롬웰 -- “초상화를 그릴 때는 흠 하나 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라.”
4) 미술가는 자신의 공방을 “사업체 규모”로 확장하여 많은 제자를 두고 고객의 주문에 따
라서 그려 주었다. 대가의 모사. 모방도 흔히 하였다. 아직 창작이라는 개념이 모자랐다.
5) 감상자가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느낌이 들도록 그렸다.
**바로크 미술의 여러 특징는
1) 장식성이 강하다.(색채)
2) 비논리적이다. -- 르네상스 고전이론에서 벗어 났다.
3) 부자연스런 인체 동작 -- 무대 연기같다.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뵐프린과 리글의 주장
1) 예술관이 객관화에서 주관화로 표현한다.
2) 촉각상(조각처럼)에서 시각상으로(회화처럼) 바뀐다.
3) 실상의 모습에서(사실적 표현)에서 가상의 모습(환상적이고, 상상적으로)으로
일종의 표현주의 기법이 된다.
**** 또 다르게 표현하면
1)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2) 평면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3) 폐쇄적인 것에서 개방적인 것으로
4) 명확한 것에서 불명확한 것으로
5) 다양함에서 단일함으로(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추구하였다.)
===> 고전주의(객관주의) <-------> 고전주의 해체(주관주의) 양식이 반복하여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것이 미술사이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외부의 사정(사회의)에 의
하여 나타나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양식”은 아니다.
A) 로마(이태리)
1) 교황청이 로마 건설을 주창하면서 미술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다.
2) 유럽 예술가들이 모여들어서 정착하였다.--다양한 사조가 집합하였다.
3) 풍부한 고대 유물,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의 대가의 작품이 자극을 주었다.
4) 로마이외의 도시 -- 페스트로 황폐화하여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
5) 3종류의 양식이 추세가 되어서 발전하였다.
a) 카바라지오의 자연주의
b) 귀도 레니의 고전주의
c) 베르니니, 피에트로 다 코르트나의 진짜 바로크 주의
6) 카라바지오 양식이 17세기 유럽 미술 양식을 지배하면서 유행한다.
a) 엄격한 사실주의
b) 빛으로 어둠과 밝음을 극적으로 대비하여 주요 인물이나 주제를 강조한다.
c) 예술가로서의 삶과, 야성적이고 난폭한 삶이 카리스마를 형성하여 유럽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7) 1620년대가 되면 카바라지오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르네상스식 고전주의가 부상한다.
볼로뉴 미술학교를 설립한 카라치가 주요 역할을 한다. -- 고전적인 데생을 가르킴
8) 고전주의가 유행을 한다.
미술학교(Academy) 설립 -- 교과목이 고전미술의 기법이다.(뎃생, 원근법 등)
9) 진짜 바로크 미술
a) 카톨릭 교회의 종교주제 미술을 주문(예수이트 회 등)하므로 종교적 경건성과 보수적
그림 양식이 나타난다. (이런 경향은 라틴 아메리카까지 )
b) 회화만이 아닌 총체적인 예술로 나타난다. 즉 건축, 조각, 회화 등이 어울려져서 전체
적으로 통일하여 종교적이고, 열정적인 표현을 하게 된다.
c) 대표적인 예술가 -- Gian Lorenzo Bernini.
10) 이태리가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미술의 주도권도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로
로마 바로크의 발전 순서
1) 카라바지오가 시동을 걸었다.
a) 카라바지오 미술은 한 마디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은 대각선으로 비추면서 그림의 주요점에 조명을 하므로 강조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어둡게 한다.
b) 16세기(르네상스)에 가장 가까운 바로크 화가라고 한다.
c) 뿌리는 사실성(reality)이다.--르네상스 미술의 계승자이다.
d) 야성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으로 당시의 미술계에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 종교미술, 일반 장르 미술에 모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2) 안니발리 카라치 -- 고전주의에 입각한
a) 1620년 경이 되면 카라바지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카라치가 르네상스로 회귀하는
고전주의 미술을 펼친다.
b) 미술학교(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고전주의 양식을 가르쳤다.
고전주의 양식이 아카데미즘이 되어서 서양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c) 푸생과 같이 외국 생활을 하였다.
d) 그리스-로마 신화를 주제로 그렸다.
3) 카톨릭의 권위적인 바로크
a) 연극적이고, 열정적인 양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b) 바로크는 로마 카톨릭의 제우이트 파가 선호하였다.
===>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이태리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난다. 미술도 대세의 흐름에서 변두리 지역으로 밀려나버린다.
Annabale carraci (1560-1609)
1) 후기 르네상스 및 매너리즘에서 초기 바로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2) 처음으로 잘 조직된 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순수예술 아카데미
의 근거가 되고 있다.
3) 매너리즘의 복잡하고, 지적인 구도에서 “자연주의 양식”으로 회귀하였다.
4) 티치아노와 코렛지오 기법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 그림의 선이 우아해지고, 부드러워졌다.
5) 1590년에 로마로 가서 귀도 레니에게 영향을 주었다.
6) 1595년 파로네세 추기경의 주문으로 페로네세 천정화를 그렸다.
페로네세 천정화
그리스 신화인 헤라클레스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그래드 매너 기법으로 그렸다.
( 영국의 레이놀즈가 주장한 이론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역사화 양식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바로크 회화의 양식이기도 하다.)
-->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그리던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렸지만 다양한 환상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비로크 미술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그림은 푸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라치 가문의 아고타노는 체계적인 해부학 책인 ‘인체소묘’를 동판화로 만들어서 교재로 사용하므로, 그후 200년 간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준다. 한편으는 그가 설립한 아케데미가 너무 고전적이고, 절충적인 그림을 가르쳤다는 비난도 받았다.
페르네세 천정화를 두고 최후의 이태리 르네상스 천정화인 동시에 고전적(신화적) 주제를 도입하여 새로운 장(바로크 미술)을 열었다는 평도 듣느다.
따라서 카라치는 최후의 르네상스 화가이면서, 바로크 회화에 서광을 비춘 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그림1) 피에타(1599-1600)
색상을 조절하여 전체적으로 유연하게 보이게 표현하였다.
그림2) 십자 챇형과 성모, 성 베르나르
독립하여 처음으로 자기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3) 비너스를 발견한 아도니스
* 조용하고, 엄격하다.
* 그의 그림에 지적인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 르네상스의 조각같은 그림으로 그려서 고전주의에 발을 내딛었다.
* 그리스 - 로마 신화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그림4) 다이아나에게 경의를 표하다.
갤러리 페르네세의 천정 벽화이다.
Caravaggio(1571-1610)
시대적 배경
루터와 칼뱅에 의한 종교 개혁이 유럽 대륙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자 카톨릭에서도 종교의 보호 차원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를 거치면서 점점 보수화되어 갔다.
이에 영향을 받은 카톨릭 미술은
1) 신앙체험 및 간결한 구도의 종교적 주제를 요구하였다.
신앙심 고취를 위해 교회가 그림의 제작에 깊이 관여하였다.
2) 성인의 죽음이나, 순교자의 희생 장면, 고난의 예수상을 요구하였다.
3) 누드화를 금지하였다.
4) 신교의 이념(오직 믿음만이 구원을 받는다.)도 표현하였다.
5) 미술이 형식주의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 매너리즘
1571 -- 밀라노 부근의 카라바지오에서 태어나다.
아버지는 지방 영주의 집사 및 석공이었고, 3남매의 맏이이다.
동생은 신부가 되었고, 막내인 여동생은 일찍 죽었다.
1577 -- 페트트로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이 죽자 어머니가 가족을 떠맡음
1584 -- 밀라노로 이주하여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페테르니노 화실에서 공부
그러나 여기서는 배운 것이 거의 없고, 레오나르드, 미켈란젤로 등을 공부하였다.
롬바르디아의 사실주의 그림도 익혔을 것이다. --- 정물화.
* 카라바지오의 그림의 특징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대비하여 긴장감을 유발해낸다.
이것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하며, 카라바지오 그림의 특징을 이룬다. 이것은
레오나르드의 ‘암굴의 성모’의 영향이 보인다.
1592 -- 로마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로마로 떠난 이유는 모르지만, 상속받은 재산(포도밭)을 처분하고 떠났다. 그러나 로마
도착한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는 무일푼의 가난뱅이가 되어서 거리를 헤메는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거리의 화가로 살았고, 이때 창녀들도 얼굴을 익혔다.
* 정물화의 실력으로 체사카 화실에서 8개월 일했다. -- 병든 바쿠스 신
이후에 델 몬테 신부(메디치가 출신의 유력한 추기경)를 만나므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 이후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5 -- 여러 차레 폭행 사건으로 구속, 도망, 사면을 받았다.
1606, 5. 28
테니스 시합을 하다가 사소한 시비로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나폴리 말타, 시실리 등으로 도망을 다니다가.
1610 -- 말라리아에 걸려서 허름한 질병 관리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카라바지오의 미술
카라치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친구이기도 함), 짧은 생애였지만 유여곡절이 많았고, 극적이며, 모험적인 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의 곡절많은 삶은 미술계에 카리스마를 가지므로 17세기 미술계에 강한 영향을 남겼다.
그의 그림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실주의와, 빛과 어둠의 대비를 도입하여 뒤 몇 세기를 두고 화가들이 그의 기법을 따르게 하였다.
카라바지오는 누구보다도 레오나르드와 티치아노를 본받았다. 이것이 그의 그림에 사실주의와 빛을 이용하여 감성을 표현하게 하였다. 그와 카라치와 차이라면 이상미보다는 진실을 추구하였다. 자연이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그대로 묘사하였다.(자연주의 미술이다.) 더욱이 티치아노의 영향으로 밑그림 없이 색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가 로마로 가서 뒷골목을 헤메면서 고생을 하였을 때 많은 명작을 남겼다고 한다. 로마의 됫골목에서 살고 있는 사람과, 뒷골목의 풍습을 생생하게 남겼다. 도박군, 짚시, 창녀, 거리의 난폭한 젊은이, 거리의 여인, 떠돌이 악사를 많이 그렸다.
그의 초기 작품은 빛으로 중화된 배경(주로 어둠의 형태로 배경을 표현)을 하고, 꽃, 과일, 여러 가지 물건을 극사실로 표현하는 정물화를 독립된 장르로 형성하게 했다.
그의 종교화도 극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므로 극심한 찬, 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로마를 벗어나서 이 도시, 저 도시로 도망을 다니면서 사면의 날을 기다리는 중에 1610년에 말라리아에 걸려서 질병 관리소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카라바지오의 작품
* 롬바르디아에는 레오나르드로부터 이어지는 자연주의적 사실적 표현이 내려오고 있었다.
카라바지오도 이들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과일, 꽃, 바구니 등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므로 정물화라는 장르를 시작하였다.
과일 바구니에 담겨있는 사과에는 벌레먹은 부분까지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이 바로 카라바지오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 카라바지오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로마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서민들이 많이 등장한다. (카드사기군, 점쟁이 등) 창녀, 거리의 깡패, 등등
등장 인물의 얼굴은 연극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텐느브리즘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에는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느낌을 준다.
* 바쿠스 신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많다. 그 외에도 젊은이들이 등장하는 그림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불분명한 중성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그래서 동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라파엘의 이상미, 매너리즘의 우아미에서 탈피하여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 종교화에서는
고통과, 수난을 많이 다루엇다. 우아한 표정 대신에 폭력이 흐른다고 한다.(유디트, 성녀
카트리느 등) 막달라 마리아도 평범한 시중의 여인 모습으로 그렸다. 카톨릭이 종교개혁의 역풍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이, 성녀의 수난을 다룬 그림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우리가 살고있는 속세에서 성을 찾으려고 하였다.
성 마태는 너무 천박하고, 지극히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하였다. 베드로도, 바울도 처형의 순간은 영웅적인 표정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종교화라고 하여 인물 묘사를 미화하지 않았다.
카라바지오 미술의 위대한 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속세에서 성(聖)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매너리즘 화가들이 귀족들의 취향에 맞게 우아하고, 고상한 그네들의 모습을 모델로 하여 그렸다면, 그는 현대 미술로 한 걸음 더 나아갔던 것이다.
** 성녀 카트리느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처녀로서 기원 후 4세기 경 막시무스 황제가 황제 숭배 사상을 퍼트리면서 황제에게 경배를 올리도록 하였다. 카트리느는 단호히 거절했다. 막시무스는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50명의 유능한 학자를 내려보냇으나 오히려 설득당하여 개종하였다. 이에 황제는 쇠침이 달린 바퀴로 그녀 위를 지나가게 하였으나 최침이 저절로 부숴져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 살인미학
종교화에 성인들의 죽음을 다룬 거이 많은 것은 종교혁명을 치루면서 카톨릭을 지킬려는 로마 교황청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가 바라보는 죽음은 종교적일 만큼 성스럽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적장 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찡그리고 있으므로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오히려 비명에 죽어간 적장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삭의 제사’에서도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아브라함도 얼굴에는 숭과함보다는 하나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초조한 빛이 흐르고 있다. 이삭의 얼굴에는 공포ㅈ심이 넘쳐난다. 종교적인 거룩함이나 성스러움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 말년의 작품들
난폭한 폭력과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것인지는 모르지만 충격적인 장면을 표현한 것이 많다고 한다.
성인의 순교나 십자가의 예수의 표현을 몸이 비틀린 자세로 하여 그 고통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어둠 속에서 빛이 조명하는 가운데에 극사실로 표현한 것은 관객을 긴장시키고,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 대신에 자연광 아래에서 표현되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움은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이 바로크로 이끌고 있다.
귀도 레니(1575-1642)
볼뉴냐의 카라치 아카데미의 모범 학생으로서 고전주의 화풍과 라파엘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다. 그는 17세기 유럽 회화에 가장 뛰어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단단하고, 정밀하고, 완벽하고, 전형적인 양식을 후대의 화가들이 가장 많이 배우고자하는 모델로 삼았다. 너무나 도식적이고, 양식적인 그의 그림을 두고 차갑고,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볼뉴냐의 카라치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에 1600년 경에 로마로 왔다. 그는 로마에서 서로가 전혀 다른 화풍의 그림을 그린 카라치와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보았다. 그는 이 두 화가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그의 그림은 수집가의 시선을 끌면서 로마에서 유명한 화가로 성장하였다.
1609년에 카라치가 죽자 그는 카라치의 화풍을 이어받는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그림에는 그림의 여러 요소들인 빛, 색상, 구성, 표현, 장인정신을 가장 잘 배합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1630년대까지는 고전주의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인체가 길어지고, 색채가 엷어지면서 그의 그림에는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서로 섞여서 나타난다고 하였.
*카라바지오와는 반대되는 성격으로 겁이 많고, 소심히였다. 외아들인 그는 평생 동안 어머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여자를 사귈 기회도 없었고, 또 여자를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자 모델과 단 둘이는 결코 같이 있으려 하지 않았다. (아틀란티스와 히포메네스도 히포메네스가 아틀란티스를 경멀하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는 동성애적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성애에 빠지지는 않았고, 대신에 도박에 빠져서 성적 욕망을 억압하였지만 많은 돈을 탕진하였다. 나종에는 돈 문제로 시비가 많았다.
말년에는 돈에 쪼들리어서 작품을 남발하여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림1) 아타란티스와 히포메네스 1622
두 인물을 서로 대비하여서 아주 세련되게 그렷다. 배경은 하늘과 땅을 청색과 갈색으로 대비하였다. 대칭적인 구도로 안정감을 구하였다.
아트란티스와 히포메네스는 달리기 시합을 하였다. 발이 빠르고, 민첩한 아트란티스를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는 히포메네스는 그의 교활한 꾀를 내었다. 여자는 허양에 약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땅에도 황금 공을 뿌린다. 아트란티스는 달리기를 멈추고 공을 줍는 사이에 시합에 이겼다.
운동감의 표현은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으로 나타냈다.
그림2) 대학살(1611-12)
이 그림은 마치 극장 무대의 한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다. 배경 그림도 마치 무대의 배경과 같다. 그림은 고전주의 양식이.
그림3) 헬렌의 유괴(1631)
이 그림도 무대의 장면과 같다. 고대시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유괴라는 주제와는 다르게 등장 인물들은 우아하고, 고상한 모습이라서 유괴의 간장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도 고전주의 양식이다.
그림4) 볼뉴냐의 종교 제단화 (모세)
구에르치니(1591-1666)
볼로냐 화파로 어릴 때 눈을 다쳐서 사필때기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힘이 넘치고, 명암의 대비를 이용하였다.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이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한 후에 카라치를 추종하였으나, 카라바지오의 기법도 따랐다.
색채를 가볍게 한 것은 루벤스의 영향도 보인다고 한다.
부상한 탄크레아를 에르미나가 발견, 성 베드로의 순교, 성 아퀴나스--, 크리스토 부활
오자리노 젠틸레쉬 (1563-1639)
카라바니오와 동 시대의 화가이지만 카라바지오 화풍을 답습하였다.
대장쟁이 아들로 정교한 표현을 하는 전통에 젖어 있었다. 로마에 온 후로는 카라바지오의 화풍에 빠져서 빛의 조명과 한 두 명을 집중적으로 강조하여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아직 장식성이 강하다고 한다.
그림 -- 다이아나, 수태고지
** 그의 딸 아르케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도 카라바지오의 사실주의를 추종하였다. 그림 선생에게 강간(16세 때)을 당하여 그때의 분노를 그림에 표현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몹씨 뚱뚱했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뚱녀가 나온다. 이 부녀가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300여년 동안 잊으진 화가로 있었으나 190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미술사의 전면으로 불러 냈다고 한다.
베르나르드 스트로지(1581-1644)
제노아에서 바로크 회화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플랑드로 화가인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그의 그림에는 루벤스의 화풍이 많이 들어있다.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피에토 다 코르토나(Piert da cortona 1596-1669)
바르베리니 궁정의 천정 프레스코와, 신의 섭리와 바르베리노의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
스페인의 바로크
16세기의 스페인은 중, 남미 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 은으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면서, 정치적인 전성기를 누린다. 그런데 하느님의 급작스런 이 선물은 준비가 안된 스페인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펠리네 2세는 카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신,구 종교전쟁에 간여하였고, 네델란드 독립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서 국부를 쏟아 부었다. 1588년에는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패하므로 스페인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17세기 스페인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시기가 스페인의 문화, 예술이 꽃핀 시기이다. 정부는 프랑스처럼 절대 왕정(루이 14세처럼)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경제력도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예술도 중앙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역마다 지역에 맞는 특성을 꽃피우고 있었다.
17세기를 지배하는 미술 사조는 바로크 미술이다. 바로크 시대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를 꼽지만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으로, 고야는 후기 화가로 취급하면 벨라스케스가 스페인의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벨라스케스의 미술
극도의 사실주의적 미술로서 눈에 보이는 것은 공기의 미동까지도 그렸다는 평을 듣지만, 그림이 너무 단조롭다는 (자기 양식에 충실함) 평도 동시에 듣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열정이나, 낭만성이나, 신비성이 모자란다는 말도 듣는다. 이것은 그의 생애가 극적이지 않고, 순탄하였던 것도 원인이리라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미술에는 무의식의 표현인 의외성, 비상식성, 은밀한 내면의 욕구를 표현하기보다는 순수 시각적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작품은 너무 완벽하여 ‘거울에 비친 듯한 사실, ’ ‘세계를 비친 한 장의 유리’라고 평하기도 한다.
벨라스케스는 붓을 빠르게 움직이므로 봇자국이 오랜 머문 흔적이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라고 말한다.
초상화는 밝음과 어둠을 대비하여 조각같은 윤곽선을 없애는 대신에 회색의 공간 속에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년보(1599-1660)
1599 -- 세빌라에서 출생,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으로 공증인이었다. 중류의 생활로 별반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세빌라는 스페인의 하나의 중심도시였다.
1611 -- 세빌라의 화가 파체코와 6년간 도제생활의 계약을 맺고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파체코의 화실은 세빌랴의 지식인이 모여든 곳이어서 여기서 인문학과 문학의 지식을
많이 습득하였다. 화가 수르바란도 여기서 만났다.
1618 -- 스승인 파체코의 딸 후아나와 결혼.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온 그리스도’ ‘식탁에 앉아있는 세 남자’ ‘달결 프라이를 하는
노파‘를 그렸다.
술집이나, 부엌, 일상적인 생활 모습, 음식물, 조리 기구 등을 함께 그림의 소재로 다루
었다. 이런 양식의 그림을 “보데고네스(=선술집이라는 뜻) 회화”라고 한다. 이런 양식은
벨라스케스의 초기 회화에 많이 나타난다.
1620 -- 세비야의 물장수를 그렸다.
아주 사실적인 그림이다. 물병 안에 넣어둔 무화과 잎도 선명히 보이도록 그렸다. 이 그
림을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면서 로마에 갈 때 같이 가지고 갔다. 자신의 그림 실력
을 선전할 때 이 그림을 보였고, 실제로 이 그림은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이 그림은 카바라지오의 빛과 사실주의적 기법을 잘 응용하여 그림이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눈으로 읽고 화폭 속에 자신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
다, 라고 말한다.
1621 -- 펠리페 4세가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세비야 출신의 올리바데스 백작
이 대권을 쥐고 권력행사를 한다.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를 후원하여 앞으로 벨라스
케스를 탄탄 대로로 나아가게 했다. 벨라스케스를 궁정으로 불렀다.
1623 -- 올리바데스 백작에 의해 궁정으로 들어와서 펠리페 4세이 초상을 그렸다. 다른 화
가의 견제가 심했다.(이때 6명의 궁정화가가 있었다.)
이때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은 이후 왕의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1628 -- ‘바쿠스의 축제’ --외교 사절로 스페인에 온 루벤스를 만나서 그의 영향이 보이
는 그림이라고 한다. 벨라스케스가 신화를 소재로 그린 최초의 그림이라고 한다. 고전
적인 누드 양식이 나타난다. 다른 인물은 세파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태리 여행을 하였다.
1634 -- 말을 타고 있는 왕실 가족,
1635 -- 브레다의 항복
1631년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해 이후의 시기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
브레다 함락 -- 1625년 일 년이나 저항하던 네델란드의 브레다가 함락하자 패배한 장
군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승리한 스페인 장군이 같이 말에 내려서 꿇어앉지 않게 한다.
승자의 아량, 패자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는 --- 신사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 이후 벨라스케스의 지위가 계속 높아져 간다. --시종관으로
1640 -- 카탈류 지방의 반란, 네델란드 독립운동의 격화 등으로 스페인 궁정은 어려움에
빠지고 올리바데스 백작도 1643년에 실권한다.
1649 -- 이태리 방문
1650 -- 48-49 50,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후안 데 파레하” 초상화 그림
후안은 무어인의 피가 섞인 벨라스케스 화실의 조수겸 노예였다. 서민의 티가 베여있는
얼굴과, 약간은 깔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 오젤로의 눈빛을 닮았다고 한다. 후
안도 화가였다. 노예신분과 화가로서의 예술적 감성이 어울린 내면이 어울린 그 눈빛이
너무 잘 표현하였다고 한다. 비평가는 같이 전시한 다른 작품을 그냥 단순히 작품이라고
부른 반면에 이 작품은 ‘예술적 진실’이라고 불렀다.
벨라스케스는 곧 후안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후안은 그냥 미미한 화가로 살았다고
한다.
교황 “인노켄타우스 10세”의 초상
로마에 온 벨라스케스에게 교황이 직접 부탁하여 그렸다. 인노켄타우스 10세는 평범한 교
황이나 이 그림의 모델이 되므로 유명해진 교황이 되었다고 한다. 후안과 마찬가지로 색을 거칠게 칠하여 질감을 나타낸 작품이다. 정면이 아닌 약간의 측면으로 그려서 위엄 있는 모습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표정에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자의식이 어린 눈빛(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위의 사람이 못마땅할 때 바라보는 눈빛)을 띄므로 그도 인간임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고통에 찬 인간으로서 교황이다 라고 읽고 그의 작품에 모델로 응용하엿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의 하나이다라는 평을 하였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 로크비 비너스 (1648-9)
이 시대의 스페인은 엄격한 카톨릭주의가 충만한 시기였으므로 섣불리 누드를 그릴 수가 없었다. 벨라스케스는 왕의 신임을 믿고 가장 요염하다는 이 그림을 그렸다. 티치아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 그림이라고 한다.
그는 신화에서 소재를 취하여 성적 매력이 발산하는 여인의 그림을 그렸다. 올린 머리를 한 표현과 몸매는 여신이 아니고 섹시한 인간의 몸을 그렸다. 그러나 거울을 들고 있는 큐피드에 의해서 이 여인이 비너스임을 말한다.
거울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자기 몸을 바라보는 감상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거울의 방향은 얼굴이 아닌 여인의 성기쪽이어서 감상자에게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1914년에 영국의 여성주의자 메리 리차드슨이 전시중인 이 작품을 도끼로 훼손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때 언론은 메리를 살인자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1656 -- “시녀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서 이동민 카페에 따로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1660. 6. 7.
사망
리베라(1591-1652)
스페인 화가인 리베랑는 1615년에 이태리의 나폴리에 정착한다. 나폴리는 당시에 스페인이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던 곳으로서, 총독의 신임을 받고 나폴리에 정착하였다.
리베라를 스페인 회화와 카라바지오로 대표되는 이태리의 나폴리 회화를 연결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카라바지오의 회화를 이해하고, 이어간 후계자이다.
그는 카라바지오의 사실주의에서 시작하여 심리적인 표현을 하였다. 고통을 겪거나, 긴장하고 있거나, 감성이 격앙된 사람을 몸의 자세를 통하여 표현하려 하였다. 배경은 어둡게 하고, 뒤편에 빛을 주는 방법으로 강조하였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공포, 결핍, 고통을 감추지 않고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사실성을 강조하고, 그림에 그대로 표현하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기의 양식을 구축하였다.
나폴리에서 종교화를 많이 그리므로 종교화의 지방 양식을 만들었다는 평도 듣는다.
1630년에 이태리를 방문한 벨라스케스를 만난 후에 명암법보다는 색채를 강조하였다. 이후로는 빛을 사용하면서, 배경의 공간감을 없애버렸다. (배경이 검은 색이든지, 색상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수르바란(1598-1664)
벨라스케스 계열의 화가로서, 세비야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세비야에서 활동했다. 17세 때 독립하여 그림을 그리면서 1620년 경이 되면 자신의 양식을 만든다. 특히 색감의 표현에 뛰어났다. 몸짓과 옷차림을 표현하였고, 극적인 명암법을 적용하여 극도의 감정을 표현하였다.(몸짓을 통한) 그러나 옷의 표현은 마치 패션에 민감한 중류 이상의 여인의 옷차림으로 하였다.
수도사, 성인, 성처녀를 극적인 자세와 화려한 옷을 표현하므로 영적인 것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카톨릭 성당에서 많은 주문을 받아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널리 퍼져서 지금은 조각에서도 많이 애용하고 있다.
정적인 장면을 동적인 구성으로 하여 깊은 정서를 외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1634년에 벨라스케스의 초대로 마드리드에 가서 궁중의 그림을 잠시 그렸으나 취향에 맞지 않았는지 곧 세빌레로 되돌아 가버렸다.
1650년 경이 되면 무릴료 양식의 그림(무릴료는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엄숙한 종교화를 그렸다.)과 비교되면서 인기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의 그림은 성녀의 표현도 시중의 중류층 여성이 입는 화려하고, 값비싼 패션의 옷으로 표현하였다.
그후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림도 팔리지 않아서 무척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 1656년에는 마드리드로 옮겼으나, 1664년에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다.
무릴료(1618-1682)
세빌레의 이발소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을 그곳에서 산 세빌레 2세대 화가이다. 1639년에 화가로 독립한다.
그는 사실주의 기법에다, 벨라스케스의 보데고네스 양식으로 그렸다. 일상 생활의 장면을진실되게 그렸다. 특히 어린이를 소재로 천진한 모습을 많이 그렸다. 인기가 있어서 많이 팔렸다. 그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일찍 많은 아이들이 죽어서 그가 죽을 때는 아들 한 명만이 지키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아이를 많이 그린 것이 아닌가라고도 한다.
그의 그림은 부드럽고, 품위가 있는 종교화도 그렸다.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서 행동을 하는 자세로 표현하였다.
1650년대가 되면서 서사구조를 나타내면서 세밀하게 그림을 그렸다. 수르바란의 엄격한 양식의 그림과 대비가 되면서 쉽게 이해가 가는 그림을 그린 무릴료가 인기를 얻는다.
그는 세빌레에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그림 그리기 기법을 가르쳤다. 제자를 양성하여 모방작 내지 표절작까지도 많이 그리므로 후대에는 그림의 질이 떨어진다는 평도 듣는다.
최근에 와서는 일상 생활을 그린 것이 좋은 평을 받는다.
플랑드로의 바로크 회화
1550년 경에는 네델란드 전 지역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더욱이 북부 네데란드가 신교 지역이 되자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스페인이 탄압을 심하게 하였다. 이에 북부 네델란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부 지역은 북부 지역보다 비교적 부유하고, 카톨릭 지역이었으므로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이 덜한 편이었다.
1576년에 북부 네델란드군에 패한 스페인군은 남으로 내려와서 중심 도시인 안트와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안트와프는 폐허가 되었다.
17세기로 접어들자 도시는 안정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옛 명성을 되찾자 다시 미술도 활기를 띄었다.
이 지역을 출신 무대로 하여 활동한 대표적 화가로는 루벤스, 안토니 얀 다이크, 야코 요르단스, 브뤼겔(형--브뤼겔의 큰 아들로 정물화를 전문으로 그렸다.)
루벤스 (1577-1640)
1577 -- 독일의 지젠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공의 부인의 법률 고문이었으나, 사적인 문제
와, 스페인과의 전쟁을 피해서 독일로 이사하였다. 부모는 캘빈파 교도였으나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1587 -- 아버지가 죽자 10세가 된 루벤스는 어머니를 따라서 안트와프로 돌아온다.
1590 -- 백작 부인의 시동이 되어서 궁정에 출입하면서 궁정 법도를 경험한다.
1591 -- 풍경화가 페르테히트의 도제가 되었다.
1598 -- 안트와프 화가 조합에 가입--화가로서 생활을 시작한다.
1600 --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베네치아에 들린다. 베네치아 화파의 화려한 색상을 받아들
인다. 만토바에 가서 궁정화가 겸 보좌관이 되어서 외교관으로 활약한다.
더욱이 티치아노의 색채와 육체 표현은 루벤스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준다.
1601 -- 로마에 갔다. 이때의 그림에는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틴토레토, 카라바지오의 영
향이 두루 나타난다.
1603 -- 만토바의 스페인 사절의 일원으로 스페인을 방문한다.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서 갖
고 가던 그림이 많이 훼손된다. 루벤스가 수리를 하거나, 새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이 스페인에서 루벤스의 명성을 드높였다. 특히 사절 단장 레르마ㅣ 공작이 많
은 그림을 주문했다.
1608 --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어머니가 이미 별세
그의 소문이 고향에까지 퍼져서 많은 주문을 받았다.
1609 -- 인문학자인 dis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
알베르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1611 -- 십자가에 메달림
십자가에 내려짐
이 두 작품은 루벤스의 대표적인 종교화이다.
1616 -- 이후 5년 간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신화적 소재로도 그렸다.
1621 -- 펠리페4세 즉위, 유럽 30년 전쟁 시작(독일의 신, 구교 종교전쟁)
1622 -25 -- 마리 데 메디치의 생애를 다룬 21점 연작을 그리다.
(마리 데 메디치의 자료를 보충할 것)
1626 -- 아내 이사벨라 흑사병으로 사망
1630 -- 상인의 딸 ‘푸르망’과 결혼 , 37세의 나이 차이가 남
1637 -- 브뤼셀 근교에 스테인 성 구입( 반 다이크로부터)
정원 생활을 즐겼다. 말년에는 생활에 만족해서인지 그림의 질이 조금 떨어진다고 한다.
1640 -- ‘모피를 두른 여인’ 제작
이 해에 사망하였다.
루벤스의 미술
그는 이태리에 머물면서 그곳 화가의 장점을 받아 들인다. 티치아노의 색채, 카라바지오의 빛, 미켈란젤로의 역동성, 틴토레토의 미적 표현 등을 받아 들였다.
따라서 루벤스의 미술은 극적이고, 역동적이며, 화려한 색채 사용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의 사용은 카라바지오의 무대 조명과 같은 빛과는 다르다. 색채로 구성된 하나의 물질로서 받아들인다. 조명으로서가 아니고 색감으로 빛을 표현할 뿐이다. 어둠도 단순히 빛에 대비되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자체의 기능을 가진다.
티치아노의 색채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므로, 루벤스의 피부는 따뜻하고, 풍만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십자가에서 내려짐”
안트와프 성당의 부속실에 있는 그림으로, 초기 작품이다. 예수의 얼굴은 생명을 잃은 모습이다. 예수를 내리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예수의 체중이 강하게 느껴진다.
3명의 마리아도 표정으로 적절하게 표현하였다고 한다.
“ 리옹에서 만난 ‘마라 드 메디치’와 앙리 4세”
마리 드 메디치의 주문으로 4년 동안에 24작품을 연작으로 그렸다. (마리의 일생이라고 한다.)
마리는 메디치가의 딸로서 27세의 나이에 앙리 4세와 전략적인 결혼을 한다. 1600년 10월 프렌체 성당에서 왕의 대리인가 결혼식을 올린 후에 앙리 4세와는 리옹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마리는 정치적 성향이 아주 강한 여인으로 아들 루이 13세가 10세 때 앙리 4세가 암살당한다. 이때 마리 연루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섭정을 하면서 아들인 루이 13세와도 사이가 나빠서 두 번이나 추방당한다.
루벤트는 마리의 그림에서 정치색을 없애기 위해 제우스와 헬라가 만나는 그리스 고전 신화를 응용하였다. 마리도, 루이 13세도 만족했다고 한다.
“모피를 드른 여인”
두 번째 아내 푸르망을 모델로 한 그림으로서, 판매가 목적이 아니고, 푸르망을 위해서 그림 그림이다. 유언에도 팔지 말고 푸르망을 주라고 되어 있다.
이 그림은 루벤스의 화풍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약간 통통하지만 아주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매와 부드러운 살결의 표현은 루벤스 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루벤스의 그림은 티치아노--루벤스--와토--르노아르로 이어지는 하나의 맥을 이룬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고대 미술의 고상함에서 에로틱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지만 고전주의 예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그의 한계라고 한다.
이 작품의 주요 메시지는 지적이기보다는 관능적이고 로맨틱하드는 것이다.
“스테인 성”
루벤스는 말년에 브뤼셀 근교에 성을 사서 정원 생활을 하였다. 이 그림은 그때의 생활을 그린 풍경화이다. (반 다이크로부터 샀다)
당시에는 풍경화를 회화 분야에서 그리 높이 인정하지 않았다. 루벤스는 아주 치밀하게 구성하여 그리므로 지금은 유럽 풍경화의 선구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바로크 회화에서 초상화 분야에서 명성을 날린 화가이다.
안트와프의 비단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주로 초상화를 그렸다. 안트와프의 미술학교를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하였다. 16세인 1615년에 독립하여 화실을 열고 화가 조합(길드)에 가입하여 루벤스의 제자가 아닌 조수격으로 같이 작업하면서 배웠다.
루벤스는 제자 겸 조수인 반 다이크의 재능에 위협을 느끼고 초상화에 주력하라는 충고를 주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그러나 반 다이크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고, 종교하, 재단화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역시 초상화에 재능이 뛰어나서 1620년 경에는 초상화가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렸다. 1621년에는 영국 --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다.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1626년까지 제노아에 머물렀다.
이태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제노아의 귀족이나 유력인사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얼굴과 손을 모델 앞에서 그린 후에 나머지 마무리는 스튜디오에서 했다고 한다.
26세 때에 안트와프로 되돌아 온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르벤스의 라이벌이라고 말하며서 루벤스를 의식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티치아노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1628년에 이사벨라 궁정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1632년에 플랑드로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영국에 가서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되어서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는 영국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영국 왕으로부터 기사의 작위도 받고 살다가 1641년에 죽었다.
“사냥하는 찰스 1세” 1635 19-39
야콥 요르단스(Jacop Jordaens 1593-1673)
루벤스, 반 다이크를 이어서 플랑드로 화단을 이끌어 간 인물이다. 그는 앞의 두 화가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에 가서 오래 동안 미술 공부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플랑드로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태리 양식의 그림도 그의 개인 양식 속에 걸러져서 그의 양식의 그림으로 그려졌다.
그는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특수 장르의 전문 화가라기 보다는 다재다능하여 온갖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온몸을 즐겨 그렸다. 단순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많이 그렸다. 축제를 벌이는 군중도 그렸다.
1640, 1641년에 루벤스와 반 다이크가 죽자 그가 플랑드로 화단을 이끌었다.
네델란드(프로방스 연합)의 바로크
1609년에 트루스 휴전으로 북부 네델란드 7개 주 연합은 사실상 독립을 쟁취한다.
이 나라의 특징을 들라면 ‘민주주의 사회의 지향,과, ’칼빈주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중심이 된 상인, 농민 선원의 ’‘시민의 나라’라는 말이다.
칼빈주의는 우상 숭배를 반대하였으므로 교회를 사치스럽고, 미술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화가는 성당이나, 궁중에서 대규모 주문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이 지방에서 그림의 주문자는 무역이나, 상업으로 돈을 번 시민들 즉 부르주아지나 정부의 관리였다. 이러한 경향은 1600년을 지나면 훨씬 더 심하였다. 이때는 거의 투기에 가까울 정도로 미술 수집의 열기도 뜨거웠다고 한다.
네델란드는 암스텔담의 오렌지 공에 의한 통치이긴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7개 주 연합이었으므로 플랑드로 지역(벨기에 지역)처럼 중심 도시가 없었다. 미술도 지역성을 띄면서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이들 도시의 중심 역할은 부르주아지 시민들이었다. 미술품도 시장 논리에 의해서 거래되므로 화가도 주문-생산이 아닌, 미리 그림을 그려서 시장에 내다파는 형식을 취했다. 따라서 그림도 시장의 취향에 맞추어서 그렸다. 그래서 오늘의 미술 시장처럼 가짜도 많았고, 비도덕적인 거래도 많았다. 시장성보다는 예술성을 추구한 화가들이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부르주아지들이 좋아하는 그림은 사실주의를 선호했다. 이들은 이태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전적인 카라치의 영향보다는 카라바지오와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안트와프의 루벤스 영향도 받았다.
네델란드의 미술 시장은 전문가의 그림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화가들도 자기의 전문성에 맞추어서 그림을 그리므로 장르가 형성하였다. 왜냐면 시장의 취향에 맞추려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자기가 전문인 장르의 그림이 시장에서 인기가 시들해지면 생활에 곤란을 겪었다. 렘브란트가 그랬고, 베르메르도 그랬다.
그러나 네델란드의 미술은 크게 “장엄 양식”과 “소규모 양식”으로 나뉠 수 있다. 장엄 양식은 이태리의 카라치, 카라바지오의 영향이 강했다. 특히 유트레히트 지방은 카톨릭의 세력이 강해서 이곳에서 활동한 화가들은 이 방식을 선호했다.
소규모 양식의 대표적인 장르는 초상화이다. 돈을 번 부르주아지가 자기가 이룬 성취의 만족감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주문을 많이 하였다.대표적인 화가는 프란츠 할스로서, 스케치 없이 그림을 그리므로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렘브란트, 베르메르, 프란츠 할스 등이 죽고나서는 네델린드 회화도 쇠퇴기로 접어 들었다.
Hendrich Terbrugghen (테르브루겐 1588-1629)
유트레히트에서 활동한 화기이다. 독일회화에서 16세기의 매너리즘 회화에서 카라바지오 회화로 변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기이다.
유트레히트는 다른 지역이 신교지역인데 비하여 시민들은 카톨릭을 많이 믿었다. 이런 이유로 테르브루겐은 전통적인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뒤러, 루카스 반 라이덴의 미술을 통해서 르네상스 미술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1604년에 이태리 로마로 가서 카라바지오의 미술을 직접 익혔다. 유트레히트로 돌아온 그는 이태리의 미술을 젊은이에게 많이 전파하므로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 다시 볼로냐 회화의 카라치의 영향을 받아서 그림의 색상이 옅어지기도 하였다.
Gerad van Honthorst(1590-1656)
유트레히트 화가로서 테르브르겐과 함께 이태리 회화를 독일에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카라치 미술을 네델란드에 퍼트린다.
1610년에 로마에 가서 10년을 머물면서 이태리 회화를 익혔다.
그는 특히 밤의 풍경을 아주 서정적으로 표현했고,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렘브란트(1609-1669)
렘브란트를 “빛과 그늘로 표현한 영혼의 화가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빛과 그늘의 명암 대비로 간장감을 표현한 것이 그의 주요 기법이다.
또 그는 외양만 그린 것이 아니고 표현된 외양에 내면의 영혼이 느꺼지도록 그렸다는 평을 받는다. 앙드레 말로는 “형상의 이상화 또는 외적인 것만 표현한 것이 아니고, 영혼 세계를 계시하였다”고 하였다.
렘브란트가 구축한 미는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다. 그는 색채가 지니는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실제로 색채와 빛을 통해서 영혼의 떨림까지 효현해낸 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렘브란트가 그린 그의 자화상은 그의 인생과 삶이 녹아 있으므로 그의 자서전이라고 말한다.
렘브란트는 네델란드가 독립한 후에 활약한 독립 후 2세대 화가에 속한다. 1세대 화가로서는 초상화를 많이 그린 프란스 할스가 속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라이덴에서 1625년부터 활동하면서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기의 초상화를 평생 동안 약 40 여 점을 그렸다고 한다. 이 초상화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표현해내므로 그의 자서전이라는 평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렘브란트가 그림을 전개한 시기를 3기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제 1 기 ; 태어나서 ~ 1631년 까지
카라바지오의 영향과, 로마파 화가인 라스트만의 영향으로 두드러진 명암법과 정확한
동작을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제 2 기 1631 ~ 1650년 전후
렘브란트의 독창성을 구사하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제 3 기 --- 말년기
인간의 내면을 더 깊숙이 표현하므로 인간의 영혼을 그렸다고 한다. 이 시기는 현실의
삶은 무척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대체로 성격이 까다로워서 주변에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옷차림도 단정하지 못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작업 중에는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주 뜨거웠다.
에칭을 많이 하였다.
풍경화에도 관심을 두었다.
자기 제자들이 자기 양식의 붓질을 하여도 아주 관대하였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평하여 “렘브란트의 화풍은 멋대로이고, 자기류이므로 독창적이다. 형태는 외곽선에 제한하여 표현하지 않고 칠을 되풀이하여 칠하므로 붓질이 거칠어고, 격렬하다. 오래 칠하다 보면 형태가 만들어 진다.” 라고 하였다.
렘브란트는 미(美 )보다는 진실성과 성실성을 중요시 하였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추’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군중 초상화를 자세히 인물 각자가 자기의 표정을 짓고, 멋대로의 자세로 그려져서 번잡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므로 조화롭게 균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말년에는 그림 수집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작품,
1632년에 그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그를 유명하게 해주는 계기의 작품이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므로 네델란드의 중심도시인 암스텔담에 진출하여 머물 수 있었다.
이 그림은 일종의 집단 초상화이다. 등장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표현해내었다. 그러면서도 전체로는 통일감을 준다. 또 극적인 긴장감도 넘쳐난다.
“야경(1642)”도 집단 초상화 형식이다. 말하자면 단체 기념 사진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 실리는 사람은 그에 합당하는 돈을 냈다고 한다. 우리가 기념사진을 찍고 사진을 가질 때 사진 값을 내듯이) 화면의 구석 구석까지 생기가 넘친다. 이렇게 그림에 움직임과 생기를 나타내는 방법은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대비하므로 표현하였다.
렘브란트 년보
1606. 7. 15 -- 헤이그 북쪽의 운하 도시 라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류 가정이었다.
1620 -- 라틴어 공부를 하고 라이덴 대학에 들어가나(아버지가 원해서) 그는 입학을 포기
하고 화가가 되기를 결심한다.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1624 -- 암스텔담에서 로마파 화가 라스트만에게 6개월 사사. 라이덴으로 돌아옴
1625 -- 자기 사인이 들어간 최초의 작품 ‘성 스테판의 순교’ 제작
1628(22세) -- 첫 제자로 ‘도우’를 받아들임. 많은 에칭 작품을 제작함
1631 -- 암스텔담으로 이사(화상과 친해져서 화상의 집에 머물다)
1632 --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비롯하여 그의 생애 중 가장 다작을 한 시기이다.
1634 -- 사스키아와 결혼, 사스키아가 많은 지참금을 갖고 와서 경제적으로 윤택해짐
1638 -- 낭비벽이 나타나서 재산문제로 고소도 당하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도 하면서
1639 -- 암스텔담 시내에 거대한 저축을 구입
이것은 그의 수입이 좋았음과, 낭비벽이 심하였음을 동시에 시사한다. 그러나 이
집의 구입은 그에게 경제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1642 -- 아내 사스키아 사망 대표작 “야경” 제작
1643 -- 가정부로 디르크를 고용하여 동거함. 나중에 불행의 씨앗이 된다.
1649 -- 새로운 가정부가 들어와서 디르크와 애정 문제가 복잡해지고,
1653 -- 경제적인 파탄이 시작된다. 새로 들어온 가정부 헨드리크와 동거, 의지한다.
가정부와 애정문제, 재산문제, 빚등 수많은 고뇌를 가지고 불행한 삶이 입을 벌
리고 있는 중에도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잘 팔린 것은 아니었다.
1658 -- 저택이 경매에 붙였다.
1660 -- 로렌블랑으로 이사
1669 -- 사망
렘브란트는 지금까지의 미술 양식에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자신이 느낀 인상을 표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미술이 고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으면서 그의 말년은 어렵게 보내야 했다.(* 루밴스는 화실을 공장처럼 운영하면서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고수하므로 팔리는 그림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루밴스도 말년에는 개인적인 자신의 시각을 그림에 담았다.)
헤라르프 도우(1613 ~ 1675)
유리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시작하여, 젊은 렘브란트에게 유화기법을 배웠다.(1628-1630)
그의 그림은 유리 공예 그림의 기법이 남아서 꼼꼼하게 세밀하게 그리므로 라이덴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많은 마니아가 있었다.
얀 스텐 (1626 -1679)
17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의 그림 소재는 일상의 생활에 취하였다.
서민생활을 주로 그렸고, 그림에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베르메르와 비슷한 추세를 다뤘지만, 붓질을 빠르게 하여 그렀다. 작품 수도 많다.
그가 그림을 보면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고객의 취향에 맞추어서) 젊었을 적에는 서민들을 많이 그렸다. 나이가 든 후로는 궁중장식용처럼 그림이 화려해졌다. (아마도 고객의 취향을 계산하고 그렸을 것이다.)
그의 그림도 역시 빛과 색채가 있다.
그는 인물화를 얼굴을 좀 거칠게 표현했다.
라이덴의 양조장의 아들이다. 풍경화를 그렸다. 수많은 풍속화를 그리므로 17세기 네델란드인들의 삶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다.
Jan(Johannws) Vermer(1632-1675)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네델란드의 회화사에거 거의 거론하지 않고 수 백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19세기가 되면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그의 이름도 회화사에 오르 내렸다. 요즘에는 네델란드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사랑받고 있다.
여관집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화가 조합(길드) 회원으로 가입하여 그림도 그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화실에서 명작은 아니었집만 많은 그림을 구경하므로 당시의 그림 경향과 양식을 익혔다. 따라서 그의 그림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태리 그림을 좋아하였고, 적어도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다.(이 시대는 이태리 미술의 전 지역에 퍼져나가면서 영향을 미쳤다.) 또 아주 정밀하게 그리는 플랑드로 화풍도 물려받았다. 빛을 이용하여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그려내는 것이 그의 기법이고, 양식이다.
그의 명성은 아주 작은 ‘소품’에서 얻었다.(신교지역인 이곳에서는 소품을 그려서 가정의 벽을 장식하므로 소품을 많이 그렸다.) 그는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인 일상의 생활을 소재로 그렸다. 그래서 아주 친밀감을 주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단순히 매력적인 것만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깊이가 있고, 마술적인 힘이 있고, 진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따뜻함이 있다. 그는 당시를 살던 보통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는 화가이고, 평화와 다스로움을 표현한 화기이다.
1632년에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산으로 여관과 화실을 물려받았다. 그는 주문을 받아서 그리기보다는 많은 그림을 그려놓고 팔았다. 그래서 생활이 무척 어려웠다. 여관과 그림 상점을 물려받았는데 삶이 무척 어려운 것은 그림을 좋아해서,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43세에 죽었다. 죽고 나자 빛을 청산하기 위해서 그의 그림을 아주 헐 값으로 처분하였다.
(조금 더 보충 요함)
프란츠 할스(Frans Hals 1580?-1666)
루벤스와 동시대의 화가이다. 신교도인 부친을 따라서 남부의 카톨릭 지역을 떠나 북부의 하틀렘에 정착했다. 그의 일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주 가난하게 살았고, 말년에는 양노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의 초상화는 마치 사진에서 '스냅 사진'처럼 그렸다. 이전에 그린 초상화(루벤스, 반 아이크, 렐라스케스 등) 는 주인공의 품위를 나타내기 위해세 자세나, 얼굴 표정을 세심하게 연출하여 그렸다. 그러나 찰스는 특징적인 한 순간을 포착하여 화폭에 고정시켰다.
빠른 붓질을 하여 빨리 빨리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정말 스냅 같이 그리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계산하고, 구상하여 그렸던 것이다.
좌우 대칭도 아니고, 한쪽에 치우쳐서 불안감을 주지 않으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시대의 화가는 주문을 받지 않고, 미리 그린 그림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자기 점포에서 ㅈ기를 팔기도 했고, 화상을 통해서 팔았다. 화상은 어느 분야에 전문가인 화가(장르화)의 그림을 선호하였다. 이로부터 장르라는 개념이 생겼다.
Pieter de Hooch(1629-1684) 흐흐
가정 생활의 정경을 평화롭고, 조용하게 그렸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시적인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은 독일 가정의 실내 장식에 적합한 그림이다. 그는 이 장르에 아주 뛰어난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대의 독일에는 이런 그림이 유행했다. 베르메르도 이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후크는 베르메르처럼 심리적인 표현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는 렘브란트와 두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1663년에 암스텔담으로 이주하자, 그의 그림은 부르주아지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의 그림은 내면적인 깊이는 없으나 외면적인 장식성이 부르주아지의 취향에 맞았다.
충을 하세요.)
Gerard Ter Borch(1617-1681) 보흐
초상화가로서 정밀화를 그렸다. 집안의 실내장식용 그림를 주로 그렸다. 17세기이 독일 회화의 화풍을 따라서 양식적이고, 시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15세 때 암스텔담으로 가서 미술 공부를 하였으나 꼳 이태리 미술을 배웠다. 1635-1642년 까지 여행하면서 유럽의 여러 화파의 그림을 섭렵하였다. 먼저 런던으로 가서 반 다이크를 만났다. 다시 로마, 스페인을 거쳐서 암스텔담으로 돌아왔다.
그는 렘브란트의 빛을 효과를 이용하는 법을 익혔고, 곧 베르베르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1654년에 ,Dwventer로 이사가서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보냈다.
초상화를 잘 그렸지만, 모든 장르의 그림을 모두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서 담았다. 그의 그림에는 따뜻한 인간이 느껴진다.
네델란드의 풍경화
네델란드는 장르화가 발달하였다. 신교지역으로서 미술의 주문자가 바뀌므로 화가들은 주문자의 기호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가정생활을 그린 그림 등등, 이중에 풍경화의 발달은 미술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서 순수하게 즐기기 위한 그림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술사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야곱 반 로이스달(Jacop Van Ruisdal 1628-1682)
그는 좁안 집안에 태어나서 화가로 밥먹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화가의 꿈을 버릴 수 없어서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시골 풍경과, 바람에 의해서 변하는 풍경을 잘 그렸다. 그의 풍경화는 후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인들은 조국의 하늘과 풍경을 사랑했다. 그러나 화가들은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재구성하여 그렸다.
로이스달 일파의 풍경화 특징
1) 구름으로 채워진 하늘
2) 지평이 그림의 아래쪽에 배치하였다. 하늘을 넓게 그렸다.
3) 처음에는 단조로운 색상의 풍경화였으나 나중에는 색상이 다양해졌다.
* 제자인 호베마의 가로수 길이 유명하다.
* 살로몬 반 로이스달(Ruysdael1600-1670)---아주 청량하고 선명한 풍경화를 그렸다. 구도는 비슷하다. 마치 비온 뒤의 하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해양 풍경화도 많이 그렸다.
Albert Cuyp(1620-1691)
클로드 로랭의 영향을 받았다.
그림-- 세계미술사 p 792
프랑스의 바로크(17세기 프랑스)
17세기 프랑스는 인구가 증가하였고, 중앙집권화된 군주제를 갖춘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유럽의 패권을 완전히 이어 받았다.
16세기의 프랑스는 이태리로부터 르네상스 정신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에 휘말리어 국력은 고갈하고, 예술은 메말라진 상태에서 1600년을 맞이 하였다. 루이 14세는 건축분야에는 활기를 불어 넣었으나 회화는 1640년대가 되도록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 출신이면서 이름이 쟁쟁한 화가인 모이스 발량탱, 푸생.클로드 로랭 등은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궁정미술은 루이 13세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루이 14세는 예술의 총량을 궁전 예술에 쏟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장식하는데 모든 예술적 역량을 집중하였다. 베르사이유 건설은 1661년에 시작하여 거의 30년이나 계속하였다. 17세기 말에는 다양한 장식물로 치장한 베르사이유 궁전이 절대군주 시대 미술의 최고 형태로 등장하였다. 18세기의 유럽은 이 궁전을 본받아서 궁전 건축을 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미술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루이 14세 때의 재상 콜베르는 국가 정책으로 많은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예술의 중흥에 국가가 한 몫을 담당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 활동이 예술적 취향과 지적인 발전을 주도하였다. 콜베르는 예술분야 뿐 아니라 직물이나, 공예, 기술 등 모든 분야에 아카데미를 세워서 육성하므로 국가가 필요로하는 공산품을 다량 생산하여 수입에서 수출로 발전시켰다.
다른 나라도 프랑스를 본 받아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자국의 미술과 산업을 진흥하였다.
시몽 부에(Simon Vouet 1590-1649)
회화에서 프랑스 화파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미술의 탄생은 시몽 부에가 파리로 돌아온 1627으로 본다. 시몽 부에는 로마에 15년간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으나 프랑스 미술을 재건하려는 앙리 4세의 부름을 받고 파리에 돌아왔다.
이태리에서 티티아노, 베로네세, 틴토레토, 카라바지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파리로 돌아와서는 밝고, 명랑한 색채를 사용한 장식적 회화로 화풍을 바꾸었다. 그러나 궁정미술에 부응하지 못하여 루벤스를 불러서 궁전 장식을 하였다. 또 시몽 부에에 실망한 리쉴리에는 역시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푸생을 불렀다.
발렌틴 드 볼로뉴(1591-1632)
로마로 가서 시몽 부에와도 같이 활동했고,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다.
Georges de la Tour(죠르주 드 투르 1593-1652)
오래 동안을 미술사에서 이름이 없는 화가로 지내왔다. 카라바지오의 화풍으로 그리는 무명화가의 작품으로 치부하였으나 최근에 와서 재조명을 받았다. 1972년 파리 전시회에서는 그의 작품이 발견되면서 평가도 새로워 졌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이태리로 여행해서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젊었을 적에는 카라바지오 회화를 충실히 따랐다.
최근에 와서 평가를 받는 이유도 당시에 유행하던 그림 양식에서 단순화하므로 근대 그림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낮과 밤의 표현을 촛불을 밝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년륜이 쌓이면서 사실적 그림(realism)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프랑스 고전주의 화파로 이어지는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구도와 인체 표현을 대체로 단순화 시켰다. 아내의 고향인 루네빌레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1620년 이후에)
그러나 곧 페스트의 유행과 전쟁으로 도시는 황폐화되고, 그의 초기 작품들도 많이 유실하였다.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자 다시 고향인 루네빌레로 돌아와서 1652년에 죽을 때까지 보냇다.
Nicolas Poussin(1594-1665)
푸생은 세느강 하류인 노르망디 지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사가 되기를 바라Tdmsjk 18세 때인 1612년에 아버지 몰래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라파엘의 판화를 보고 이태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베네치아를 거쳐서 1624년에 로마에 도착했다.
17세기의 로마는 푸생의 화풍과는 다른 바라크 미술이 유행하였다. 푸생은 거의 독학으로 뎃생에서는 라파엘을, 색채에서는 티치아노를 배웠다. 또 로마의 조각을 공부하므로 그의 그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또 카라바지오도 배웠고, 볼로뉴 미술학교(카라치가 세운)에서 귀도 레니의 화풍을 배웠다.
그는 대형 종교화를 주문받기에 어려움을 겪자 가정집에 걸 수 있는 수품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특히 불란서에서 부자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그의 이름은 프랑스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회화에 나타난 인물 묘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을 따랐다. 감정 표현은 풍부하지만 자연스러움이 모자란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감상자에게 감동을 적게 준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외양보다는 정신의 표현이 중요하다면서 시각적인 색채보다는 형태의 구성에 더 역점을 두었다. (즉 연극적인 구성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의 그림은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는 말을 듣는다. 말하자면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엮어가는 능력이 뛰어난 위대한 화가라고 하였다. 그는 이야기를 엮는 위대한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신화의 창조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귀족 가문에서 자라면서 인문학 공부를 하였고, 화가 생활을 하면서도 독서량이 무지하게 많았다고 한다. 그는 대화에서도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지만 대화 속에 풍부한 지식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은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마치 무대 예술의 연출처럼 구도, 배치, 구성, 심지어는 인물의 자세까지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그래서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믄 말도 들었다.
1640년이 되면 프랑스에서 궁정화가로 초대하였다. 그러나 2년을 머문 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프랑스 화가의 질투와 궁전 생활의 부적응이 이유라고 한다.)
로마에서 죽을 때까지 화가의 보편적인 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말년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특징은 ‘풍경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그의 풍경화는 자연 그대로가 아니고,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변형하고, 연출한 풍경이었다.
이후 프랑스가 유럽의 예술에 중심 역할을 하면서 푸생의 고전주의가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아카데미즘에 흡수되므로, 푸생은 유럽 미술에 공적을 세운 만큼 규범화하는 화도 초래했다고 하지만, 그것이야 푸생이 저지른 죄과가 아니지 않는가.
클로드 로랭(Claude Rorrain 1600-1682)
17세기를 대표하는 가당 유명한 풍경화가라고 한다.
1613년에 로마에 가서 1619-21년 사이에 나폴리에 머문 일이 있다. 그 이외는 사뭇 로마에서 살았다. 로마의 Tassi 아카데미에서 로마의 풍경화를 배웠다. 그는 근대 회화에서 풍경화라고 부를 수 있는 첫 번 째 화가로 꼽는다.
그는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고, 야외에서 직접 스케치 했다. 초상화에는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도 듣는다. 또 그림의 마무리는 그의 제자에게 맡긴다는 말도 있다. 그의 그림은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므로 푸생처럼 엄격하지 않다고 한다.( *푸생도 말년에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지만 고전주의 양식이 강하여 딱딱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 고대 로마의 한 장면이 아니고 향수를 자아내는 고대의 풍경으로 표현하였다.
로마의 시골 풍경을 정서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푸생과 클로드 로랭을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풍경화의 두 거장이라고 말한다.
클로드 로랭은 영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루이스 르 낭 (Louis Le Nain 1593-1648)
프랑스 아카데미의 고전주의는 푸생과 르낭이 이끌엇다고 한다. 그는 애조 띈 시골 생활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을 북부 도시인 리옹의 인근에서 농민들과 생활하였다.
그는 플랑드로의 화실에서 일한 뒤에 1629-30년에 로마로 여행한 후에 파리에 정착했다.
그의 형제들도 화가로서 같이 일을 했다.
펠리페 드 샹파뉴(Phillipe de Champaigne 1602-1678)
1621년에 파리로 가서 푸생을 만나 같이 작업을 하였다. 마리 드 메디치에 의해서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루이 13세 궁전에서 일했다. 그는 루이 13세와 리쉴레위의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에는 내면의 정신도 잘 드러낸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그림은 프랑스의 우아함과 플랑드로의 정신 표현이 잘 어우러져 있다고 한다.
1648년에 데브론과 프랑스 아카데미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찰스 레브룬 (Charles Lebrun 1619 -1690)
프랑스 아카데미 창설자로서 루이 14세의 궁정화가 책임자 역을 맡았다.
15세 때 시몽 부에에게 배웠다. 1642년(이때는 프랑스 궁전화가로 일할 때이다.) 로마로 갔다. 로마의 화풍과 푸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그림의 구도와 인체의 자세를 면밀하게 관찰한 후에 연출에 의하여 구성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와서 궁중화와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Hyacinthe Rigad(1659-1743)
태양왕 루이 14세 초상화가 있다.
* 렘브란트- 그는 네덜란드의 최고의 화가일뿐더러 루벤스와 더불어 당시 전 유럽의 제1급
의 화가중의 한 사람이다.그는 명암을 직중적으로 표현하여 신비로운 박력을 나타낸 화가
로서 그를 [광선의 화가] 라고도 부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야경, 해부도 등이 있다
첫댓글 화백님~` 고맙습니다. 맨위에 노인과 여인은~~?!! 푸에르 토리코의 독립 투사였던 아버지와 딸 이라고 하던데요. 국립 미술관 벽에 걸린 명화~` 검은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위해~ 딸은 해산한지 얼마 안되어 찾아갔지만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버지를 보는순간 눈에 핏발이 서게되고~` 여인은 퉁퉁 불은 젖가슴을 .. 검은 수의를 입고있는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어 입에 물렸다는 그 작품이네요 많은 사람들은 젊은 여자와 불륜의 애정 행각이라고도 했다는 .. 본질을 알고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명화~~~?!!
교만과 아집 ~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세상이 보인다는 교훈을 주는 그림이라고 ... 이렇게 이 ~ 그림을 다시 보게될 줄 알았으면 좀더 신경써서 봤을텐데.. 제 머리는 한계를 느끼게 합니다. 울님들 중에 보충 설명 하실분 있으시면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에구~~` 아는 척 하다가~` 창피 당하는건 아닐련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