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종소리
신학생 시절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경남 거창에서 시골 교회에 전도사로 있는 친구가 자기 집에 들러서 놀다 가라고 하였다. 집에 내려가도 한가로웠던 나는 주저 없이 친구를 따라 갔다. 친구네 집에 도착하여 두어 시간쯤 지나서다. 친구가 모친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오더니 "자네가 내일 우리 모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좀 인도해 주고 가라. 방금 엄마가 전화를 하셨는데 내 모(母)교회에 담임 전도사가 오늘 다른 교회로 이동을 해서 내일 예배를 인도할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하면서 나보고 하루 갔다가 가라고 하였다. 겨우 신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아직까지 교회에서 설교를 해본 경험이 없는지라 사양 했지만, 친구는 기어이 나를 데리고 자기 모교회로 갔다. 더운 여름 날씨에 에어컨이 없는 버스는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흙먼지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땀에 젖은 하얀 남방셔츠에 황톳물을 들이며 찾아간 곳이 거창 신원면에 있는 신원교회였다. 주일 낮 예배를 인도하고 났더니 교인들이 사택에 모여 앉아 나를 그 교회 전도사로 있어 달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신원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회를 처음 담임해본 나는 새벽마다 종을 치는 일이 너무 재미가 좋아 한차례에 50번씩이나 쳤다. 교인들이 새벽종은 열 번 정도만 쳐야 한다고 일렀지만 나는 50번씩 치기를 계속하였다. 면 소재지 중앙으로 가로질러 난 도로를 가운데 두고 교회 정문은 늑대 영감님 댁의 대문과 마주 보고 있었다. 늑대영감님은 성격이 거칠고 무서운 사람이라 내가 오기 전에 시무하던 전도사가 종을 오래 친다고 새벽기도 시간에 몽둥이를 들고 예배당 문을 박차며 들어와서 "야 이놈 아야! 종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 아니가! 잠 좀 자자 인마야, 너 이놈의 자식 한번만 더 종을 그 따위로 쳐봐라 내가 가만 안 둔다. 아나?" 하고는 몽둥이를 예배당에 던져놓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천성이 다혈질이고 사회성이 부족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니 늑대영감님에게 분개심이 생겼다. 이놈의 영감쟁이가 어디 교회를 도전하고 있나 할 테면 해보라? 하는 반항심으로 종을 백 번씩이나 쳐버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고 세상을 이긴다고 착각할 정도로 나는 교양이 부족하였다. 만약에 그때 늑대 영감님이 몽둥이를 들고 오셨다면 어떻게 할 능력도 없었으면서 그런 호기를 부린 것이다. 하루는 어느 교인이 "늑대영감쟁이가 이번에 온 전도사가 새벽에 종을 너무 오래 쳐서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하더라고 귀띔을 했다. 영감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소심한 나는 은근히 겁이 생겼다. 그렇다고 적게 치기는 뭣해서 전처럼 50번씩만 쳤다. 말이 50번이지 예배당 종을 50번씩 치려면 꽤 오래 쳐야 한다. 교인들은 너무 많이 친다고 걱정을 했지만 사회성이 부족하고 우직한 나는 계속 그대로 쳤다. 그러나 아무런 탈 없이 겨울 방학을 맞았다. 개학 때는 주말에만 교회에 있었지만 방학 동안은 교회에서 상주하였기 때문에 새벽마다 내가 종을 쳤으니 이웃 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끼쳤던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늑대영감님이 "총각전도사라고 봐 줬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하는 소문이 들렸다.
대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다 조금 따뜻해진 어느 날 늑대영감님 댁에서 아침부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묻지도 않는데 가겟집 할머니가 오늘 늑대 영감님의 막내 딸 결혼식이라며 거창에 있는 농협회관에서 예식을 하고 오후에는 집에서 잔치를 한다고 했다. 한 마을에 살면서 이런 일에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하얀 봉투에 축의금을 넣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보통 1000원씩 하는데 큰마음을 먹고 3000원이나 넣었다. 오후 3시쯤 되어서 양복을 차려입고 나가니 면장님과 농협조합장님 우체국장님 지서장님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님 등 면내 기관장님들이 모여 오고 있었다. 모두 잘 아시는 분들이라 인사를 했더니 면장님이 잔치 집에 가는 길이라며 같이 가자고 하셨다. 기관장님들과 한 무리가 되어 들어가니 잔치 집에서는 기관장님들이 오셨다고 부랴부랴 큰방을 하나 비워주었다. 일행 중에 제일 젊은 내가 기관장들의 축의금을 챙겨 늑대영감님께 직접 드리면서 어르신 따님의 화혼을 축하드린다며 인사를 하였더니 늑대영감님이 반갑게 손을 잡고 "아이고! 교회 전도사님이 우리 집에를 다 오시다니" 하며 좋아하셨다. "술도 안 잡숫는 전도사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나? 야들아! 여기 전도사님 자실 것 좀 준비해 봐라! 그라고 사이다부터 좀 빨리 가져 오너라. 술도 안 잡숫는 양반이라 대접할게 없네 그려!" 하시면서 아랫사람들을 불러 이것저것 가져오라고 부산을 떠셨다. 항상 멀게만 여기던 교회 전도사가 이렇게 찾아와 축하를 드리니 늑대영감님의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평소에 길에서 만나 인사를 드릴라치면 겨우 마지못해 헛바람 소리로 야 - 하는 정도였는데 그날 후로는 만나기만 하면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하셨다. 사납다고 소문이 난 늑대영감님이셨지만 내게는 인자한 이웃 할아버지가 되셨다. 겨울 방학도 끝나가는 어느 날 구역예배 후에 교인들로부터 늑대 영감님이 이번에 온 전도사는 인물도 좋지만 인사성도 밝고 사람이 참 훌륭하고 또 예배당 종을 어떻게나 곱게 치는지 새벽잠이 없는 내가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어찌나 편해진다.고 하시더란 말을 들었다. 늑대영감님도 친해지고 보니 이렇게 종치는 것도 양해가 되는 것을 예배당 종소리를 시끄러워 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남을 배려하지는 못하고 심통부터 부렸던 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 때부터 나는 종을 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새벽종을 열 번씩만 쳤더니 가겟집 할머니도 새벽종을 적게 쳐서 좋다고 하셨다.
첫댓글 엿장수가 1분에 가위질을 몇 번 하겠느냐에 대한 답처럼 교회 종소리도 종지기 맘대로 하는 줄 알았습니다.^^* 관심 갖고 사랑으로 대하다보면 동식물과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사람 사이에 통하지 않을 것이 없겠지요. 조금 배려하고 양보하다보면 서로가 이해하고 신뢰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제가 교회에 몽둥이를 들이대던 '늑대영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결혼시킬 딸은 없지만.ㅎㅎ
오해가 이해보다는 언제나 먼저 오는 법이지요. 따뜻한 마음으로 먼저 손 내미는 것이야말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우선하는 용기일 것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