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공원(育英公院)은 과도적 근대학교 중에서 보다 근대학교로 접근한 학교로 고종 23년(1886) 8월(양력 9월)에 설립되었다.
육영공원의 설치가 내정되기는 그것이 설치되기 2년전인 1884년의 일이었다. 즉 1882년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설립된 후 민영익(閔泳翊) 등 보빙사 일행이 미국에 다녀와서 근대학교의 설립을 건의함으로써 1884년 9월에 고종으로부터 그 내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사의 초빙 등 그 설립을 추진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중단되었고, 그후 다시 추진되어 그 설립을 내정한지 2년만인 1886년 8월에 그 설립을 보게 되었다.
육영공원의 설치에 있어서 1886년 6월에 내무부(內務府)의 상계(上啓)로 내무부 소속 수문사(修文司)의 당랑(堂郞)이 육영공원의 사무를 겸관케 하는 동시, 감찰 전양묵(全良黙)과 교섭통상아문 주사 이전(李忌)을 육영공원의 주사에 임명하여 개설 준비에 착수케 하였다.
그리고 7월에는 육영공원에 입학할 학생으로 내외아문의 당랑(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의 자서(子壻) ․ 제질(弟姪) ․ 족척(族戚) 중에서 선발하여 추천케 하였다. 그리고 수문사 당상으로 하여금 육영공원의 규칙인 설학절목(設學節目)을 작성케 하여 8월에 그 제정을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어 좌원에서는 과거출신과 참하관으로 연소자 10명을 선발하여 한문 ․ 경사 ․ 서어(西語, 영어)를 학습케 하고, 우원에서는 15세에서 20세까지의 재질이 총명한 20명을 선발하여 독서 ․ 습자 ․ 자법(字法) ․ 산학 ․ 지리 ․ 문법을 학습케 하되, 초학을 졸업한 후 대산법(大算法) ․ 각국언어 ․ 의학 ․ 농리(農理) ․ 지리 ․ 천문 ․ 기기 ․ 각국역사 ․ 정치 ․ 금수 ․ 초목 등을 학습케 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수업연한을 3년으로 하고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기거하게 하였으며 방학과 명절 ․ 경축일 등의 휴일 제도가 마련되었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교를 내리어 육영공원의 좌원은 연소한 문무관, 우원은 통민유학(通敏幼學)을 선발하여 입학시키되 한학(중국어) 월과(月課)와 동일한 규제로 교육시킬 것이라고 하고, 아울러 이 교가 내린 뒤 10일 이내에 학생을 공원에 채울 것이며, 만약 이 계획에 어긋남이 생기면 학생의 부형들이 큰 죄를 받을 것이라는 분부를 내림으로써 마침내 양력 9월 23일에 육영공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육영공원에는 수문사(修文司) 당상과 주사 ․ 교습(敎習) 등을 두어 운영하게 하였으나 고종 24년(1887) 3월에는 관제가 따로 마련되어 판리사무(辦理事務)와 사무(司務, 주사) ․ 사첨(司籤, 교서)을 두고, 그 밖에 서사(書史) ․ 고직(庫直) ․ 대청직(大廳直) ․ 식당직(食堂直) ․ 방직(房直) ․ 좌원청직(左院廳直) ․ 학당사환(學堂使喚) ․ 군사(軍士) ․ 기별서사(奇別書史) 등의 역원(役員)을 두었다.
교사로는 미국에서 초빙된 헐버트(한국명 할보(轄甫)), 길모어(길모(吉毛)), 벙커(방거(房巨))의 3인이 중심이 되었으나, 이들은 육영공원이 설치되기 2개월 전에 우리 나라에 도착하여 육영공원설학절목(設學節目)의 제정 작업에도 참여하는 등 우리 근대교육사에 공헌이 큰 인물들인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육영공원의 교육은 이들 미국인 3인을 중심으로 영어에 의하여 강의되었고 교과서도 영어로 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학업에 열중하여 영어단어 하나 더 외는데 힘썼고 학문적 지식을 넓히는데 노력하였으며 교사들은 신이 나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영공원은 날이 갈수록 부진과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그 원인은 당국의 시책의 졸렬, 학생들의 안일한 사고 방식 등에 있었다고 하겠다. 당시 육영공원의 학생들로서는 아직 근대의 학문과 교육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하였다. 그런데다가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어 구속함으로써 크게 불편을 느끼게 되어 무단결석, 꾀병 결석, 공무를 빙자한 결석 등 출석 상황이 매우 불량하였다. 특히 편안만을 바라던 고관의 자제들에 있어서 더욱 심하였고 현직관리로 있던 학생들도 공무를 빙자하여 출석을 기피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학교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고 비방하였다. 여기에서 육영공원은 설치된 지 3년만인 1889년 1월에 우원은 종전과 같이 과일독학(課日篤學)하게 하고 좌원은 가정에서 학습케 하되 3일에 한 번씩 육영공원에 나아가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교육상 일대 후퇴가 아닐 수 없고 따라서 육영공원의 교사들의 반발을 사게 하였다. 이에 그 해결책으로 좌원의 학생들에게는 간일(間日)출석제를 실시하는 한편, 우원의 학생에게는 과일독학을 엄수시키되 만일 구습에 따라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부형 또는 천주(薦主)를 문책하도록 하였다.
한편 절일(節日)에는 3년에 한 번씩 대고(大考)라 하여 총리대신의 관할 밑에 시험을 치르게 하던 것을 4년에 두 번씩 치르게 하여 그 성적이 조(粗, 가) 이상의 자는 응제시취(應製試取) 즉 과거를 보이게 하여 관리로 등용케 하고,그해(1889년) 6월 2일에는 경무대에서 응시를 실시하여 과차(科次)를 만경전(萬慶殿)에서 행하였다.
육영공원의 운영에 있어서 학생들의 안일한 사고 방식, 공원의 재정난 등 여러 가지 난관이 겹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교사의 확보였다. 미국인 교사들은 당초 2년 계약으로 부임하였기 때문에 1888년 4월로 만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들이 돌아가는 마당에는 육영공원은 그대로 문을 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이들의 임기연장에 대하여 소극적이었다. 그 원인은 위에서 들은 것과 같이 학생들의 안일한 사고 방식으로 교육의 성과가 별로 신통하지 않았다는 점과 육영공원 자체의 재정난 등에 있었다. 그렇다가 정부에서 육영공원의 존속을 결정하고 미국인 교사들에 대한 임기를 3년간 더 연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임기의 연장으로 육영공원도 폐쇄의 운명에서 헤어나게 되었으나, '길모어'는 사직하고 귀국하였으나, '벙커'만이 임기의 연장을 받아 남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육영공원에 대한 인사이동이 잦았고 또, 정부에서 육영공원에 대한 흥미를 잃어 그 존속은 명색만 남게 되었다. 이에 '벙커' 역시 임기 5개월을 앞두고 고종 31년(1894) 2월에 사직하고 말았다. 이렇게 교사를 전부 잃게 된 육영공원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정부에서 그 운명을 영국인 '하치슨'에게 맡기게 됨으로써 마침내 영어학교로 개편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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