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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이기철
거기
거기까지 닿기에는 아무래도 숨이 차다.
때로 아픔의 부스러기를 긁어 내면서
때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면서
때론 달리고 때론 쓰러지면서
그러나 거기까지 닿기에는 아직도 숨이 차다.
어느 때는 소중한 추억을 버리면서
어느 때는 버린 추억의 조각을 불태우면서
불탄 재가 삭아지는 길목에서
막막하고 텅빈 휘파람을 날리면서.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나무의 옷 이기철
나무의 옷
상수리는 일흔 번 제 씨앗을 땅으로 보내고도
아직 청년으로 살아있다
신발에 물소리가 감기는 파계천(把溪川)에서는
물소리와 쓰르라미 소리가 구별되지 않는다
눈 앞에 펼쳐진 수해(樹海) 속의 잎들은 모두 쾌청이어서
여기 오면 고뇌란 오직 인간의 몫임을 불전(佛典)없이도 안다
반짝이는 잎새들의 민감한 흡입력으로
햇살은 남김없이 푸름 속으로 빨려들어
산 하나가 온통 초록의 대관식에 취해있다
앞서 간 바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서 간 사람들만 마을의 안부가 궁금해 뒤를 돌아본다
소나무 잣나무들은 둥치마다 태고를 닮은 껍질의 옷을 입고 있다
옷 한 벌이면 넉넉히 일생을 견디는 나무들 곁에서
사람들만 아침 저녁 옷 벗고 옷 갈아입는다
산에 든 자 삭발하고 베 옷 입음은
절록(絶綠)을 뜻함이 아니라 뼈를 갈아 끼우지 못하는 육신을
냉혹으로 다스리기 위함이다
길 위에 발자국 남기지 않은 선승(禪僧)들은
가랑잎을 밟고 경전의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길 끝에 달린 시장에는 푸른 오전부터
상품과 선거 포스터로 들끓는다
맨발로 서면 다람쥐 족제비들도 맘에 닿는 이 산속에서
나는 왜 옷과 신발을 벗어 전나무 가지에 던질 수 없나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이기철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무우꽃이 필 때는 네가 보고싶어진다
저녁으로 가던 목메기들의 울음은 놀 속에 잠겨들고
물소리 땅을 적시고 밤숲 속으로 사라졌다
배추꽃 무우꽃 필 때는 불현듯 네가 보고싶어진다.
제삿날 오신 고모는 깨강정을 잘 만드셨다.
팔자가 세어서 두 번 시집 갔다는 작은 고모는
그래도 우리들의 신봉자였고, 싸릿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모본단 저고리를 툇마루에 벗어 던지고는 어머니 혼자 짚불 태우시며 눈물 반쯤 흘리시며 콧물 앞치마로 훔치시는,
잔치나 제사 때마다 안마당 한 켠에 걸어 놓던 돌무지 아궁이에 앉아 거꾸로 덮은 조선 솥 뚜껑을 짤짤 끓이며 다 닳은 나무주걱으로 들깨를 볶으며 더러는 깨가 다 익었는가 깨알을 입에 놓어 보시며 조청을 녹여 볶은 들깨를 이겨 붙이고 방망이로 강정판을 밀고 칼로 모나게 끊으며 작은 타일 조각 같이 금간 강정을 돗자리 위에 펴서 늘이곤, 끊다가 남은 자투리 강정을 우리들에게 던져 주곤 하셨다.
여덟 팔(八)자 걸음에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팔자가 세다 하던 작은 고모님은 그래도 우리에겐 제삿날 한 주일 전부터는 희망이요 기다림이었다. 싸릿문을 밀고 들어서며 오빠요, 형님요, 주야, 현이야 부르는 목소리의 고모님은 철들 무렵의 우리의 산타요 기독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내 현이 누님의 사춘(思春)의 죄를 고모님이 뒤덮어 쓰신 육․이오 전쟁 뒤의 조그만 일이 있었다.
동네 밖 버드나무 숲 뒤에는 새로 난 통신부대 초소가 하나 있었다. 현이 누님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에게서 버선 깁는 법, 엿 고는 법, 김치 담그는 법이나 배우며 동그란 쳇바퀴에 옥양목 천을 붙여 십자수를 놓으며 심심하면 등불 아래 표지 떨어져 나간 야담과 실화나 읽으며, 황혼이 짙어지면 푸른 별들은, 노래나 부르던 누님은, 언제부턴가 저녁밥을 먹고 나면 한두 시간씩 아무도 모르게 사립문 밖을 나가곤 했다. 현이 누님이 가는 곳이 어딘 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누님은 틀림없이 버드나무 숲 켠으로 가는 것이었다. 거기엔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실개천에는 돌무더기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현이 누님은 늘 그 실개천에서 한참을 쉬며 손을 씻고 돌돌 흐르는 개울물을 찍어 머리채에 바르고 옷고름도 새로 매는 것이었다. 소쩍새가 어둡기 전에 꼬리를 감춘 찔레나무 덩굴숲이 그림자로 서있고 일찍 나온 초승달도 져버릴 때 쯤이면 현이 누님은 개울 건너 저쪽 버드나무 숲 한 켠에서 이제 마악 꽃을 피운 목화밭 두렁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새로 난 신작로처럼 하얗게 돋아난 동정 달린 호박단 저고리를 입고 어둠 속에서 몸을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현이 누님은 틀림없이 독을 올리고 있는 작은 한 마리 들짐승이었다. 그 앙칼진 기다림의 모습은 차라리 따가운 아름다움이었다. 한참 후에 목화밭 뒤쪽에서 군화 발자욱 소리가 도랑물 소리 속에 섞여 적막의 부피만한 크기로 들려 왔고 그럴 때면 현이 누님의 작은 가슴이 더욱 암팡지게 오므라졌고 가냘픈 어깨가 고슴도치처럼 빳빳해졌다. 뒤켠에서 걸어온 다만 그림자일 뿐인 군화 발자욱과 현이누님의 작은 어깨가 어둠 속에서 하나가 되면 도랑물은 소리를 더욱 크게 내며 흘렀고 어디서 호르륵 호르륵 밤새가 갓 피어 난 오동나무 잎새를 찢으며 울었다. 그러나 며칠씩 겹쳐지는 이런 일을 눈치 채지 못 할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 밤에 현이 누님을 불러 등불 아래 앉혀 놓고, 너에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틀림없이 불길한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아버지가 들리지 않을 만한 모진 소리로 현이 누님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나는 누님이 무사하기만을 빌었고 어머니가 제발 문초를 그만두기를 바랐다. 그 때도 제사일로 오신 고모님이 나흘 째 머물고 있는 터라, 고모님은 어머니가 현이 누님을 윽박지르는 큰 방 장지문을 밀고 들어가, 형님, 현이를 아랫담으로 심부름 시킨 것은 내구만요, 내 어릴 적부터 어지럼병이 있었잖수, 그래 아랫담에 가서 피마자 기름을 구해 오라고 시킨 것 내구만요, 심부름시킨 죄는 나한테 있으니 야단을 칠려면 나한테 치구랴. 누님의 아미가 등불 아래 빛나고 죽어도 안 열릴 것 같던 누님의 입술이 방시시 열리던, 아래로 깔아 뜬 눈망울이 그처럼 빛나던 때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가을 해 떨어지고 갑자기 누님이 말문을 닫고, 고모님도 가고 없는 어두운 골방에서 누님이 무명 베 이불 덮어 쓰고 그처럼 슬피 우는 것도, 울어서 눈이 통통 부어오르던 것도, 못물에 수제비돌 띄우며 며칠 전 통신부대가 덕유산 쪽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창길이에게 들었던 것도, 그 이야길 들을 때 누님보다 내 다리가 더 떨려오던 것을 본 것도 그 때밖에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우리 시대가 우리를 밀어던지고 그냥 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려 왔다. 분필 가루와 매운 최루탄 냄새와 낯선 외국 사람들의 이름과, 오래 생각지 않으면 심증을 굳힐 수 없는 책들을 읽으면서, 굳은 콘크리트벽 속에서 잠자고 거친 포장 도로를 걸으며, 유리와 자갈의 나날을, 모래의 나날을 보냈다. 종이에 손을 베고 볼펜에 손톱을 찢기며 실상 우리의 아침과 저녁과는 상관없는 엄청난 문물들을 텔레비젼으로 보면서 질타와 자책의 나날을 보냈다. 식탁에서 재떨이까지 가진 것 모두가 제 속마음 보이지 않고 물방울처럼 반짝이고 튀기며 나를 배반하는 땅에서 살아왔다. 내일 나는 또 그 비좁은 거리, 거리 끝에 붙은 방, 문풍지 없는 도어 핸들을 붙들고 볼펜을 만지고 생소한 글자들을 읽어야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제비꽃도 피지 않고 밤이 와도 뜸부기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자동차 소리, 기계 부딪치는 소리, 사람 발길 스치는 소리 가득한 곳으로 가야 한다.
멀리서 송아지가 운다.
자운영 잎새들은 누굴 위해 꽃들을 붉게 피웠을까
삼십년 전, 오십년 전에 죽은 사람들은 무슨 꽃을 사랑했을까
그땐 미나리아재비꽃을 뭐라 이름하여 불렀을까
베 적삼을 입고 십 리 바깥 저자에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였을까
오월이 오면 무슨 노래를 생각하고 언덕에 올라서서 그들은
누구의 이름을 불렀을까
흙빛은 변하지 않고 휘파람새 울음도
나무껍질 벗기는 소리로 산 속에 묻힌다.
아버지는 원모재(遠慕齋)를 짓는 데 생애를 거셨다
너 마지기 논농사를 어머니한테 맡기고 아버지는
종중(宗中)산에서 외솔을 베어오고 가마골에 가서 외상 기와 사 오시고 찰흙을 지게에 지고 와 벽을 바르며 원모재를 지으셨다 그 때 첫 시집에 실패한 고모님은 친정에 와서 이태를 지내며 들에 나간 어머니 일을 도맡아 하셨다. 고모님은 또아리를 머리에 얹고 물동이를 또아리 위에 놓으면 손으론 상추 바구니와 감자 깎이를 들어도 물동이를 쏟지 않았다. 한번도 실수없이 판자문을 열고 물동이를 머리에 인 채 문턱을 넘어 부엌으로 들어갔다. 보릿짚 불은 열기를 뿜었고 베적삼은 물기에 흠뻑 젖어도 고모님은 물감자를 삶고 일찍 익은 강냉이를 채에 얹어 익혔다. 아버지는 늘 그런 고모가 애처로왔고 저것이, 저 착해 빠진 것이 어째서 팔자는 세어서 ― 바라보는 눈에는 안개가 서렸다. 원모재는 두 번의 여름을 거쳐 가을을 지나면서 완성되었고 낙성식에는 흰 두루마기와 도포 자락들이 와서 시를 짓고 현판을 달았다. 아버지는 그 날 도포자락들한테 배가 부르게 칭찬을 받았고 천자문도 못 읽으신 아버지는 모처럼 먹물들한테 두루마리 한 권은 될 만큼 찬사를 귀에 담았다. 나는 목마 위에 올라가 그 모양새를 바라보다가 거꾸로 떨어져 오른팔을 부러뜨렸지만 울지도 못하고 고모님에게 안기어 토담방으로 돌아왔다.
고모님 두 번째 시집가는 날 나와 현이 누님은 목백일홍 나무 아래서 울었다. 박꽃 같은 고모님은 가마 없는 길을 떠나며 말없이 현이 누님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도랑물이 산굽이를 돌아가고 원추리꽃이 묘비없는 무덤 뒤, 사방공사 비탈 위에 피어나고 마실 아낙들은 모두 나와 물동를 옆에 낀 채, 제발 이번엔 잘 살아야 된데이, 못 사는 놈은 핫바지 두 벌 차면 안되는 기라, 손을 저으며 모롱이를 돌아가는 고모님의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선 돌이 되었다.
해마다 봄풀은 베어 내도 돋고
깨뜨려도 캐어 내도 돌멩이는 남아 지상을 메운다
땅들은 더워지고 분꽃과 살구꽃이 향기를 섞으며 핀다
민주와 자유라는 말이 젊은이들의 지갑 속에
지전과 함께 개켜 넣어지고
보험회사와 호텔들이 더욱 키를 높인다
내 신발과 양말이 놓여지고
입던 바지와 치솔이 놓여진 그 곳에
나는 가야 한다. 가서 다시
전기밥솥의 밥을 먹고 나프탈린 냄새의 수도물을 마시고
온돌 위에 등을 붙이고 잠들어야 한다.
장거리 자동 전화기에 줄을 서서 전화를 걸고
택시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면 백화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의 물결을 보고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고 빙과를 사 먹고 극장 프로를 보고
구두방 앞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고, 방금 서점 앞에서 만난
사람의 이름이 떠 오를 듯 떠 오를 듯 생각 안나고
그런 것이 우리의 이웃 우리가 살아 간 역사가 된다는
이제는 지겹고 추운 겨울도, 폭발물 차량도, 도시가스 파이프도
우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그 곳에
읽던 책이 놓여 있고 내 찍던 도장이 놓여 있고 주민세와 전기요금 고지서가 떨어져 있을 그 곳을 가야 한다. 그 곳이 이제 싫지 않은 이유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하며, 벼포기가 커가는 이 곳에 내 흰 손과 창백한 얼굴이 욕되기만하다는, 이제 연약하고 감미로움에만 익숙한 내 손은 이 곳을 위해 아무 보탬이 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내 오르기엔 너무 크고 너무 높은 북쪽 산을 바라본다.
이 곳에 와서 피는 꽃 바라보면
산을 돌아오는 메아리인 듯 네 목소리 그리워진다
현이 누님 시집 가고 고모님 도라지꽃 푸르게 피는 산협에 묻히고
아버지의 신앙이던 원모재 기울어진 추녀 끝에 이끼 돋아
아무도 내 마음 속의 불꽃 바라볼 사람 없어도
지게에 우주 하나의 근심을 지고 떠난 사람들 얼굴 보이지 않아도
완두는 초록 껍질 속에 제 씨를 익히고
물길은 풀 뿌리를 어루이며 흘러간다.
솔바람 부는 고모님 무덤 속엔 동학이 들어 있다
짚신 끄는 소리, 죽창 부딪치는 소리 들어 있다
얼어붙은 겨울 산, 동트는 가을 새벽
살피재 넘으며 불렀던 기미년 만세소리
지까다비, 개화장 끄는 소리,
봉창을 새어나오는 명심보감 읽는 소리가 들어 있다
히로히또의 항복문 읽는 소리
성조기 휘날리는 소리
전란의 탱크 구르는 소리가 들어 있다.
두 번째 만난 고모부는 고자(告子)의 성무선무불선론(性無善無不善論)에 심취했다가 사서(四書)를 집어던지고 크로포트킨과 소로우에 빠졌던 사람이었다. 비나리는 고모령을 신파 배우보다 잘 부르고 막심 고리끼, 나쓰메 소세끼 이름도 아는 사람이었다
고추씨 멍석에 말리고 절편 빚는 데나 능수이신 고모님은 늘 고모부 앞에서는 얼굴도 못들었지만, 그래도 고모님은 두 아이를 낳았고 참새 짹짹 우는 아침이면 소보다 먼저 일어나 마굿간의 빗장을 열었고, 정지문을 열고 들어가 시렁을 닦고 밥솥에 불 지피는 일에는 신력이 났다.
신원 사건이 터지고 인민군 숙청이 한창이던 달 없는 밤에
오줌 누러 나간 고모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웃 아낙들은 모두 남편이 북으로 갔을 거라고
가다가 양구나 파주 쯤서 굶어 죽었을 거라고, 집 나간 그 날을 어림잡아 제사라도 지내야 할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고모님은 그런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남편은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라고, 사립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예 부르던 고모령을 콧노래로 흥얼거릴 거라고, 어쩌면 간고기, 마른 명태라도 한 손 사 들고 올 거라고 믿었다. 그런 남편 돌아 오지 않은 채 세월은 갔고 유신 헌법이 통과되던 날 고모님은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보지 못하고 감나무 잎 떨어지는 시월 어느 날 생애를 마쳤다. 물소리 속엔 맘 놓고 쉬어 보지 못한 고모님의 한숨이 들어 있다
산그늘 속에 도라지꽃은 피고
도라지꽃 흔들며 메아리는 골짜기에서 파랗게 멍든다.
목숨 짧은 벌레들 죽어 집 헐리고
단풍나무 잎이 마흔 번 잎을 땅으로 내려 보내도
십 리 논길을 걸어, 징검다리를 건너 나를 찾아오던 단발머리의 네가, 휘파람을 부세요 네, 그러면 제가 당신께 가겠어요, 로버트 버언즈를 편지에 적어 보내던 네가,
송진 냄새 나는 산그늘에 앉아 앞산 양지녘에 누운 고모님 무덤과 고모님 생애를 귀 기울여 듣던 네가
이제 내가 모르는 나라, 바람 센 검은 도시의 아파트 불빛 아래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첫 아이가 에드워드 김이라는 이름의 학적을 얻었다는 소식을 보낸 네가
우엉꽃 이슬 속에 터지는 밭두렁에 서면
그립단 말하기도 부끄런 나이의
내 젖은 구두를 타올라 와이셔츠를 적시고
바람타는 머리칼을 흔든다.
오랜만에 밭두렁에 서서
고모님의 무덤 가에 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울산으로 시집 간 손등이 거친 현이 누님을 생각하며
내 작은 책가방에 부끄런 파란 편지와
당홍색 손수건 한 장 몰래 넣어 주던 네 얼굴의 홍조를 생각하며
지금도 썰물 바다같은 대봉동 한 칸 방을 생각하며
나뭇잎 같은 내 손등의 슬픈 정맥과
가장 작은 흙과 모래 앞에서
가장 서럽고 큰 목소리를 듣는다.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문학과 비평사, 1989
다시 그 날이 오면 이기철
다시 그 날이 오면
당신을 만나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겠습니까
지금 반도는 안녕하다고, 모두들 안심하시라고 안부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목마르게 기다렸던 그날은 40년 전에 이 땅에 왔습니다
출렁이는 물결과 함께 이 땅에 왔습니다.
노루 뛰놀고 산머루 익혀가며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민들레 꽃씨되어 풀풀풀 이 땅에 날려 다니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이라고 부르기만 해야 되는
철부지 어릿광대 거렁뱅이가 되어
돌무지로 시냇가로 처마 밑으로 서산그늘로 떠돌고 있습니다.
산길마다 맺혀 있는 딸기빛 그리움 되어, 골골이 산을 울리다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메아리 되어 동어반복의
노래들만 부르고 있습니다.
철원․김화․화천․고성, 그 땅의 오리잎은 올 여름 더욱 푸르고
속절없이 뻐꾸기만 울어 그 골은 미어집니다
밤이면 달빛 비쳐 일등병 내 아우의 양철 계급장이 푸르게
빛납니다.
오늘도 막내딸들은 골목마다 어울려 줄넘기 노래에 열중하고
대추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의 소원을 불러대고 있습니다.
고추잠자리 작년에 꽃잎 지운 키다리꽃 삭정이에 앉았다 날아갑니다.
그날이 오기 까지는 뜨거운 여름 햇빛도 천둥도 번개도
제빛이 아닙니다.
곡괭이도 부삽도 조선삽도 엠 씩스틴도 소용 없습니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공자도 마호멧도
코란도 베다도 성경도 논어도 부질 없습니다.
당신이 기다리던 그날은 와서 이 땅의 들깨잎 속에, 뜸부기 소리 속에 남아 있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그날은 언제 오겠습니까
언제 오겠습니까, 면목 없습니다.
전생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마흔 살의 동화 이기철
마흔 살의 동화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 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멱라의 길 1 이기철
멱라의 길 1
걸어가면 지상의 어디에 멱라*가 흐르고 있을 것인데
나는 갈 수 없네, 산 첩첩 물 중중
사람이 수자리 보고 짐승의 눈빛 번개쳐
갈 수 없네
구강 장강 물 굽이치나 아직 언덕 무너뜨리지 않고
낙타를 탄 상인들은 욕망만큼 수심도 깊어
이 물가에 사금파리 같은 꿈을 묻었다
어디서 이소(離騷) 한 가닥 바람에 불려오면
내 지상에서 얻은 병(病) 모두 쓸어 저 강물에 띄우겠네
발목이 시도록 걸어가는 나날은
차라리 삶의 보석을 갈무리한다고
상강으로 드는 물들이 뒤를 돌아보며 주절대지만
문득 신발에 묻은 흙을 보며 멱라의 길이 꿈 밖에 있음을 깨닫고
혼자 피었다가 지는 꽃 한 송이에 눈 닿는 것도
이승의 인연이라 생각한다
일생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일생이 노역(勞役)과 상처 아문 자리로 얼룩져 있어도
상처를 길들이는 마음 고와서 아름다운 사람은 있다
때로 삶은 우리의 걸음을 비뚤어지게 하고
독(毒) 묻은 역설을 아름답게 하지만
멱라 흐르는 물빛이 죽음마저도 되돌려 주지는 못한다
아무도 걸어온 제 발자국 헤아린 자 없어도
발자국 뒤에 남은 혈흔 쌓여
한 해가 되고 일생이 된다
* 멱라: 중국 호남성에 있는 강. 중국 서정시의 효시인 초사(楚辭)를 시작한 전국 시대 초나라의 굴원이 주위의 참소로 분함을 못 이겨 빠져 죽은 강으로 유명함. 여기서는 내 정신의 강으로 은유됨.
** 이소(離騷): 시름을 만난다는 뜻으로 굴원이 멱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기까지의 시름을 적은 장시.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산에서 배우다 이기철
산에서 배우다
어제는 온돌에서 자고 오늘은 한기(寒氣)의 산을 오르다
잎새들이 비워 놓은 길이 너무 넓어
내 몸이 더욱 작아진다
내 신발 소리에도 자주 놀라는 산 길에선
내 마음의 주인이 이미 내가 아니다
10월의 포만한 얼굴에서 나는 연민을 읽지 않는다
누가 다 떼어 갔는지 산의 이불인 초록이 없다
자장(慈藏)이면 이곳에 지팡이를 꽂고
대웅전 주춧돌을 놓았으리라
그러나 범연한 눈으로는
햇볕 아래 서까래를 걸 데가 없다
경전의 글자가 흐려서 책장을 덮는 밤에는
스스로 예지를 밝히는 저녁별이 스승이다
겨울을 예감한 나뭇잎들이 나보다 먼저
뿌리 쪽으로 떨어져 내린다
나는 돌을 차며 비로서 산의 무언(無言)을
채찍으로 배운다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생가 1 이기철
생가(生家) 1
이 곳에 오면
서(西)쪽 길이 잘 보인다.
무너진 다릿목도 보이고
다릿목에서 죽은
물새의 꿈도 보인다.
백년(百年) 전에 핀
안개꽃이 보이고
동구(洞口) 밖에 묻힌
흰 달빛도 보인다.
이 곳에 오면
늙은 느티나무의 생애(生涯)가
보이고
서(西)쪽 길이 잘 보이고
가을에 우는 새의
그리움이 잘 보인다.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서쪽을 가며 이기철
서(西)쪽을 가며
밤중엔 자주 길들이 끊긴다.
먼 마을의 창유리가 소리없이 깨어지고
샛바람 문틈에 불어
호롱불이 꺼진다.
산그늘에 지워지는 초옥(草屋) 한 채를 바라보며
떠나온 날들과 돌아갈 집들을 생각한다.
가슴 속에 묻어 둔 한 겹 우수(憂愁)를 꺼내 보며
참으로 소중했던 것들 다 잃어버린 어둠 속을
머리칼 쓸어 넘기며 혼자 걸어간다.
이 밤에 바람은 멎고 또 길게 불어
우리의 영원(永遠)은 모래알 하나에 잠겨들고
갯풀 베던 사람들의 따스한 꿈 조각이
맹목(盲目)의 길 위에 나와 오들오들 떨고 있다.
건초(乾草) 질긴 잎새처럼 들길은 구겨져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돌아눕는 린인(隣人)들의
열번을 긍정하고 다시 한번 부정하는
고뇌의 이불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씨앗 묻힌 들판엔 서릿발 비추는 한 가닥 별빛
굽어 보면 발 밑에는 또 한 세기를 삭은
부석(腐石)만 하염없이 흩어지고 있다.
전쟁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서정시를 쓰는 남자 이기철
서정시를 쓰는 남자
바람 타는 나무 아래서 온종일 정물이 되어 서 있는 남자
정물이 되지 않기 위해 새들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고전적인 늑골을 들고 서 있는 남자
벽돌집 한 채를 사기에는 형편없이 부족한 시를 밤 늦게까지
쓰고 있는 남자, 아파트 건너 집 주인 이름을 모르는 남자.
담요 위에 누워서도 별을 헤고 백 리 밖 강물 소릴 듣는 남자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개울물에 발목이 빠진 남자
주식 시세와 온라인 계좌를 못 외는 남자
가슴 속에 늘 수선화 같은 근심 한 가닥 끼고 다니는 남자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을 남자
거미줄 같은 그리움 몇 올 바지춤에 차고 다니는 남자
그 흔한 문학 강연회에 단골 초청 연사도 되지 못하는,
그 엄숙한 표정의 민중 시인이 되지 못하는 남자.
반정부 인사도 동서기도 되기에는 부적합한 남자
활자 보면 즐겁고 햇살 보면 슬퍼지는 남자
한 아내의 부채로만 살아 가는 남자
가을 강에 잠긴 산그늘 같은 남자
버려진 빈 술병 같은, 지푸라기 같은 남자
서정시를 쓰는 남자.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문학과 비평사, 1989
서풍에 기대어 1 이기철
서풍(西風)에 기대어 1
별리(別離)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간이파리 하나쯤 떼어 가는 아픔이야
별리의 아름다움에 비길 수 있으랴
마음보다 치장이 아름다운 서풍이여
너의 안식의 축도(祝禱) 앞에서 몇 사람은 저녁 수저를 들고
몇 사람은 길 위에서 이슬처럼 깨어지기 쉬운 약속을 한다
저녁으로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언약들이 반짝인다
우리는 이제 이른 저녁을 먹고
들 가운데 서서 오늘보다 아름다울 내일을 말할 차례다
양치기 소년들의 고단한 발을 쉬게 하고
펄럭이는 내일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만남보다 진한 이별을 말할 차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문 밖에서 바람은 흰 피륙을 짜고 있다
사람의 하루가 고단하여 침실에 몸을 눕히는 저녁에도
과일 나무의 과일은 저 혼자 익는다
서쪽으로 가면 웬일인지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가 있을 것 같아
오늘도 들판 끝을 헤매다 서풍의 옷자락에 싸여 돌아온다
선사(先史)로 돌아가고 싶은 장엄한 몸짓인 서풍이여
너의 치마 끝에 내리는 놀의 물감으로
오늘 우리는 주홍빛 이별을 기록해야 한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기록하리라
어둠 뒤에서 마지막 한 겹 속옷마저 벗고
알몸으로 초록 위를 부는 서풍이여
이맘때쯤 바람과 능금나무의 화간(和姦)에도
우리는 박수 치리
그리고 세상의 푸름들이 시들기 전에
우리는 필생의 편지를 한 사람의 이름 앞으로 보내야 하리
문학사상 12월호, 1994
서풍에 기대어 2 이기철
서풍(西風)에 기대어 2
누구도 그 다음 생(生)을 맞이해 본 적 없는 삶들이
서풍 앞에 뜨돈다
바람은 바람끼리 만나 즐거웁고
노래는 노래로 떠돌면서도 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깨어질수록 투명한 유리의 꿈을 꾸며
절이 삭은 밤이 한 세계의 편안을 이끌고
그의 발꿈치 앞에 와 눕는다
별리는 낱낱이 아름답고
언약들은 깨어져서도 유리처럼 빛난다
강가에는 슬픔을 이긴 처녀들의 흰 발등
돌에 새긴 약속들이 풍화되어도
별리의 마지막 눈빛은 불꽃처럼 타오른다
천년을 불어도 아직 처녀인 서풍이여
너의 수줍은 치마폭에 싸여
이승의 처음 아이 낳는 여자는 행복하다
아이 둘 낳으면 황혼이 되는 여자여
들녘 끝에서 들리는 바람의 발자욱 소리는
이 세상 태어나 처음 딛는 아이의 신발 소리를 닮아 있다
지상의 만남들에 도취해 승천을 포기한 서풍이여
사람들이 버린 말, 사람들이 버린 옷
사람들이 버린 마음까지 쓸어 담고
네가 가는 길은 늦을수록 환해지는 서쪽이다
접어 넣어도 구겨지지 않는 추억들을 기르며
놀 속에 접히는 책들
찬탄하라, 책 속에 있는 불타는 마음을,
그러나 오늘 우리의 별리는 아무래도 혈흔이다
문학사상 12월호, 1994
소백산 기슭에서 이기철
소백산 기슭에서
흘러가도 남아 있는 여울물처럼
살 수는 없느냐
져 내려도 씨앗 보듬는 떨기나무처럼
살 수는 없느냐
소백산 지붕 아래 장가 들고
소백산 기슭에 무덤을 만들 사람들아
오늘 서리 내려 베옷이 춥고
옹긴 고무신 한쪽이 터지는구나
부삽도 조선 낫도 싫지 않은데
노을만 제 혼자 이승 저 켠으로 가고 있다
내일 벨 벼들 남아
논들이 아직 풍성하고
연필로 쓸 사연 있어
마음 아직 넉넉한데
절벽에 닿아도 돌아오지 않고는 사라질 수 없는
메아리로 살 수는 없느냐
절규 같은 빛 하나로 지상에 와 닿는
제 숨소리 숨긴 별처럼 살 수는 없느냐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문학과 비평사, 1989
슬픔에 대하여 이기철
슬픔에 대하여
여우야 얼마나 슬프냐, 다람쥐야 너는 얼마나 슬프냐
말똥구리 사마귀 개미야 너는 얼마나 슬프냐
파리 모기 귀뚜라미 잠자리야 얼마나 슬프냐
한밤내 듣다가 아침에 멈춘 빗방울
울타리가 홰나무 잎새를 흔들던 실바람아
너는 얼마나 슬프냐
긴 밤을 창가에 와 부서지던 별빛
지난 겨울 내리자 녹던 싸락눈아 얼마나 슬프냐
티눈아 먼지야 너는 얼마나 슬프냐
그러나 우리에게 더 큰 슬픔은 있다.
가을엔 싸리꽃 지고
봄 오면 잔풀 돋는 우리나라
상처난 강원도를 품에 안고
기슭엔 게를 치는 섬 많은 한반도(韓半島)
이 방언(方言) 이 피부, 나면서 낫질 배운
베 옷 입은 사람들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시인 이기철
시인&
내 마음의 천도(遷都)는 끝났다
고황에 든 병 더욱 깊어가도
빛이 끌고 오는 아침은 즐거움의 찻숟갈을 잦게 한다
오래 걸어온 걸식의 마흔 살이
투덜대는 내 발의 욕망을 덮어 주지는 못하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버리지 못한 시를 쓰는 삶이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떳떳하다
시인이라 불릴 때마다 아직 열여섯 소년처럼 낯붉히지만
내 마음의 천도는 끝났다
시가 영광인 시대가 아니라도
번쩍이는 금(金)의 광휘가 시의 가난을 대신할 수 없다
어둠은 어두워질수록 제 살을 피워 무는
불빛을 밝게 한다
생각하면 나는 너무 멀리 걸어왔구나
내 걸어온 길들이 모두 나를 떼밀고
내 바깥으로 사라졌구나
그러나 상추잎처럼 푸르던 날들과
엽록(葉綠)을 물고 날아간 새들은 내 기억의 장롱 속에서
노래한다
마음의 어디에도 멱라가 있고
꿈의 어디에도 구강(九江)이 흐른다고
돌들도 시간 속에서 수정을 품는다고
오늘밤엔 저 들판의 풀잎들에
아직 아무도 불러보지 않은
아름다운 이름 하나 붙여주고 싶다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옛날의 금잔디 이기철
옛날의 금잔디
4월이 오면 살구꽃이 피는 마을로 가야지
죽은 강아지풀들이 다시 살아 일어나고
초가(草家) 추녀 끝에 물소리가 방울 울리는 마을로 가야지
풀밭에는 어릴적 잃어 버린 구슬이 고운 숨 할딱이며 누워 있겠지
이랑에는 철 만난 완두콩이 부지런히 제 몸에 푸른
물을 들이고
잠 자던 뿌리들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물 아래 내려가
물들의 가장 깊은 속살을 빨아 먹겠지
눈썹에 앵도꽃을 단 처녀애들은
작년에 넣어 둔 분홍신을 꺼내 신고 들판을 달리고
마을 사람들은 햇빛보다 먼저 일어나
간격이 고른 녹색대문(綠色大門)을 달겠지
동구길엔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복숭아꽃이 피고
구르는 돌멩이도 부서져 제비풀의 거름이 되겠지
4월이 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은 옛날의 금잔디
거기 가서 휘파람 몇 가닥 남겨 두고 와야지
거기 가서 댕기에 눈물 닦던 누님의 기침 소릴 듣고 와야지.
전쟁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오랑캐꽃 이기철
오랑캐꽃
그것은 슬픈 기억이다. 우리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역사(歷史)보다는 숨겨 놓고 싶은 사실(事實)이 더 많다. 동학난(東學亂)도 3․1운동 6․25도 그렇다. 더 많다는 이 숨겨 놓고 싶은 사실(事實)들, 그 끝을 달려가 보면 역사(歷史)의 주인(主人)은 없고, 오랑캐꽃이 혼자 무거운 꽃잎을 달고 길 옆에 시들고 있다. 길은 무너진 길일수록 그리움이 더하다.
확성기와 소형 탱크와 방독면과 볏짚들, 메밀밭과 소나무와 휴지와 풀 뿌리. 마을 근처에선 소심(小心)한 연기 숨어 오르고 인가(人家)를 떠나는 굶주린 쥐떼들. 흑인병사(黑人兵士) B29 국방색 지프 화염투척기, 반도(半島)의 남쪽에서 흘린 젊은 어머니의 덧없는 눈물
오랑캐꽃을 보면 수심(愁心) 많은 한반도(韓半島)와 6․25의 아문 상처가 돋아 온다. 도처에 밤은 오염으로 얼룩져 피난민의 담요 위에 별똥이 떨어지고 남북(南北)의 방언(方言)이 함께 잠든 밭둑에 수수깡 흔들리고 박꽃이 벌고.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오월에 들른 고향 이기철
오월(五月)에 들른 고향(故鄕)
오월(五月)에 들른 고향(故鄕)은
아까샤꽃이 피고 있었고
한 잎 두 잎
지다 남은 복숭아꽃이 지고 있었다.
비둘기 울음이
뚜깔잎의 저녁 이슬을 떨고 있었고
서풍(西風)이 풀잎의 이른 잠을 깨우며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고개를 저으며 올라 가고 있었다.
멀리 석양(夕陽)의 붉은 그늘 아래서
천(千)년 전에 들었던
청동기(靑銅器)가 깨어지는 소리로
개가 짖고 있었고
마을 앞에는
포플라만이 키 큰 서양사람처럼
활짝 만개(滿開)하고 있었다.
오월(五月)에 들른 고향(故鄕)
거기엔, 서툰 걸음마가 쓰러지기 잘하던
내 아이 적의 고통과
비 오면 자주 끊어지던
학교길의 도랑이 걸레처럼 구겨져
흐르고 있었다.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월동엽서 이기철
월동엽서
순이, 손을 몇 번 불어서 그 겨울은 지나갔나
미나리 잎새 얼어서 얼음 밑에 묻혀 있던 그 겨울
장작개피 책보에 얹고 가던 등교길
소백산맥 끝 웅크린 골짜기
너는 전근가는 아버질 따라 진주ㄴ가 사천인가로
닳은 고무신을 끄을며 떠났지만
얼음이 얼다 녹던 축축한 묏부리에 앉아
마른 잔디만 집어 뜯던 나는 지금
허언을 괴로와하는 삐걱이는 강의실 계단을 오르내린다.
스물을 지나 서른이 되어서 너의 검정 치마도
세상따라 모양이 달라졌겠지만
진주ㄴ가 사천인가의 언덕 아래 조그만 마을에서
너는 이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들길에 나가 너의 아이들에게
새로 핀 꽃 이름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겨울에 난로 꺼지면 나는 양말을 갈아 신고
저 죽은 풀빛의 들판이나 밟으면서
겨울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야겠다
눈이 내리면 다시 시린 손을 불며.
청산행, 민음사, 1982
이른봄 이기철
이른봄
마을로 들어오는 푸섶길에는 철 잃은 패랭이꽃 한 송이 피어있다. 벌초(伐草)도 하지 않은 무덤이 두엇 누워 있고 전주이공지묘(全州李公之墓), 이끼마저 말라붙은 묘비가 오래오래 그 모습대로 서 있다. 바람이 불 때 모로 쓸리는 마른 풀잎들, 그 적막 가운데 잘못 피어난 한 잎 패랭이꽃. 연날리기 자치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발길에도 밟히지 않고 누구도 뜻있게 이름 불러 주는 이 없는 이 작은 한 송이 들꽃. 자손도 유림도 돌볼 사람 없는 폐허가 되어 버린 두엇의 무덤. 마을로 들어오는 산어귀엔 멎은 지 오래인 물레방아,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봄나물 캐는 누이들의 부끄러운 수심가(愁心歌).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이향 이기철
이향(離鄕)
제대를 하고 대학(大學)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시골에서
시(詩)나 쓰는 가난한 서생(書生)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重役)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촌부(村夫)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校庭)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 소릴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놀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나는 맨발을 꽂으며
눈에 익은 돌멩이들의 정분(情分)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들 불러 모으는 비음(鼻音)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할아버지의 산소를 한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都市)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되면 아직도 그 고을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葉信)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저녁놀의 성찬 이기철
저녁놀의 성찬
금기는 짧고 방임은 길어라
내 어린 처녀들의 작은 침실에
면사포 같은 행운이 찾아오고
꽃다운 신부들은 오늘 밤 첫아일 가질
채비를 한다
이제 비탄의 노래는 부르지 마라
어둔 하늘엔 별들이 작은 여행을 서두르고
저물수록 어둠들은 서로를 불러
한 식구가 된다
어느 탕자(蕩子)가 저 붉은 노을에 장가들 수 있으랴
노을은 다만 노을일 뿐,
벌레들의 귓속으로 초저녁 달빛이
흘러 들어간다
열광이란 저렇게 찬란한 것임을,
한 사람의 생애에 마침표가 찍히는 시간에도
내 친척들은 찬탄을 기다리며
대문을 닦는다
그러나 아직은 기다려라
저 저녁놀의 성찬(盛饌)에 가기 위해선
내 사랑하는 처녀들이 바삐 단추를 풀고
수밀도 같은 알몸으로 목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은쟁반 같은 손으로
너무 멀리 가 버린 환희를 불러
형벌조차 초대할
저녁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
문학사상 12월호, 1994
정신의 열대 이기철
정신의 열대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 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 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더러 초록을 입에 넣으며 초록만큼 푸르러지는
사람들 살고 있으리
그들이 봄 강물처럼 싱싱하게 묻는 안부 내 들을 수 있으리
오늘 아침 배춧잎처럼 빛나던 청의(靑衣)를 물고
날아간 새들이여
네가 부리로 물고 가 짓는 삭정이집 아니라도
사람이 사는 집들
남(南)으로만 흘러 내리는 추녀들이
지붕 끝에 놀을 받아 따뜻하고
오래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기고 일어나는
아이 울음처럼 신선한 뜨락 있으리
저녁의 고전적인 옷을 벗기고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
살아서 깊어지는 노래 한 구절 보탤 수 있으리
오래 고통을 잠재우던 이불 소리와
아플 것 다 아파본 사람들의 마음 불러 모아
고로쇠 숲에서 우는 청호반새의 노래를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번역할 수 있으리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좋은 날이 오면 이기철
좋은 날이 오면
좋은 날이 오면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 쓰리라
바라보기도 눈부신 좋은 날이 마침내 오기만 하면
네 맘 내 맘 모두 출렁이는 강물이 되는
기쁜 서정시 한 편 쓰고야 말리라
그때가 되면, 끝없는 회의의 글을 읽고
번민의 숟가락 들지 않아도 되리라
돌 별 하늘 꽃나무만 노래해도 되리라
피 노호 상처 고통을 맑은 물에 헹궈
얼굴 맑은 누이 이름처럼 불러도 되리라
금빛 날을 짜서 만든 찬란한 한낮처럼
오래 가는 메아리처럼, 즐거운 추억처럼
루비 호박 에메랄드 사파이어처럼
잠을 밀어내는 젊은 날의 약속처럼
아, 좋은 날이 오면 잊었던 노래 한 구절
들 가운데서 불러 보리라
이름 부르기 조차 설레는 좋은 날이
대문과 지붕 위에 빛으로 덮이기만 하면.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문학과 비평사, 1989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이기철
지상(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 뒤에 연좌(連坐)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를 빌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날[日]을 노래하고 싶다
나이 먹기 전에 늙어 버린 단풍잎들은 내 가슴팍을 한번 때리고
곧 땅 속으로 묻힌다
죽기 전에 나무둥치를 감고 타오르는 저녁놀은
지상(地上)의 죽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
살이 연한 능금과 배들은 태어나 첫번째 베어 무는
어린 아이의 갓 돋은 치아의 기쁨을 위해 제 살을 바치고
군집(群集)으로 몰려오는 어둠은 제 깊은 속에다 아직 밤길에 서툰 새끼 짐승을 위해
군데군데 별들을 박아 놓았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도
검은 새가 나는 하늘을 밟을 수는 없고
우리가 아무리 정밀을 향해 손짓해도
정적으로 날아 간 흰 나비의 길을 걸을 수는 없다
햇빛을 몰아내는 밤은 늘 기슭에서부터 몰려 와
대지의 중심을 덮고
고갈되기 전에 바다에 닿아야 하는 물들은
쉬지 않고 하류로 내려간다
병(病)들도 친숙해지면 우리의 외로움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산과 들판에 집 없이도 잠드는 목숨을 위해
거칠고 무딘 것들을 달래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이다
달콤하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발 시린 짐승의 무릎을 덮는 짚이기만 하다면,
향기롭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이슬 한 방울에도 온몸이 젖는 풀벌레의 날개를 가릴 수 있는
둥글고 넓은 나뭇잎이기만 하다면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2 이기철
지상(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2
언덕 너머에 집이 있고 길 건너에 물이 있다
배추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말은 너무 난해해
소들은 풀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귀를 대고 산다
안 보이는 곳에서 샘물이 솟고
벌레들은 해지기 전에 가시나무 울타리에 집을 짓는다
가 본 길만 길이 아니다, 어둠 속으로 벋은
가 보지 않은 길은 얼마나 깊고 싱싱한가
그곳에 흩어진 마음 조각들이
저들끼리 모여서 노래가 된다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문학과지성사, 1993
청산행 이기철
청산행(靑山行)
손 흔들고 떠나 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靑山)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山)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치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慣習)들.
서(西)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 오르고
생목(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초록을 보며 이기철
초록(草綠)을 보며
돌자갈 마꽃 수세미들의 하늘은 아직 쓸쓸하다.
들판엔 몇 번을 지워졌다 피는 풀꽃
길들은 언제나 서성이면서 남(南)으로 뻗어 있고
모래들 흩어지고 산들은 허리 잘려
그리움 많은 사람들의 봄도 강물에 조금씩 숨긴 맘 풀어 놓는다.
여기저기 추억의 얼룩처럼 돋는 풀잎, 그러나
초록(草綠)의 얼굴들은 오래 가지 않는다.
지상에는 대부분 단명(短命)한 것들
상처(傷處)의 보석(寶石)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깊은 침묵 속으로
들새들 행방 감추며 길게 날고
산들은 이 봄에 엄청난 무지(無知)로도
도라지꽃을 피워 놓고 혼자 잠든다.
조그맣고 정결한 삶 하날 찾기 위해
우리는 또 몇 천리의 길을 걸어야 하나
금언(金言)과 망각(忘却)의 고통스런 뒤섞임 뒤로
양심과 휴지 조각과 두어 겹 부끄러움 숨겨두고
흐려진 불빛 세워 잠든 마을 바라보면
천(千)의 바람 끝에 실낱처럼 흩어지는
슬픔의 섬세한 얼굴을 보인다.
전쟁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하산 이기철
하산(下山)
예컨대 말은 부질없다.
저 공장(工場)에서 흘러 나온 폐수(廢水)나
우리들의 끓던 여름을 한동안 술렁이게 했던
해운대(海雲臺), 바다의 오염 소동은 이제 잠잠하다.
여기저기 힘센 노역(勞役)만 아직 무성하고
주화(鑄貨) 몇 개를 위해 우리들이 덧없이 써 버린 말들도
무성한 노역(勞役)처럼, 잠처럼 부질없다.
더러는 고딕으로 남기고 싶은 전언(傳言)도 그렇다.
후일, 우리가 떠날 때 두고 갈 표식(標識)은
흩날리는 구름과 쓸쓸한 흙빛깔.
수평(水平)으로 부는 바람의 추운 귀
산(山)마루에 몸 버린 가랑잎을 밟다가
흐린 밤에는 이념(理念)과 강변(强辯)만 남은
서책(書冊)을 뒤진다.
강(江)을 건너다가 잃어버린 생각들도
바라보면 저문 마을에 등불로 걸려 있고
우리들을 혹사(酷使)하던 모든 관념(觀念)들도
더욱 늦게 내 손에 와 따스하다.
마을을 돌아보며 작은 수심(愁心) 길들이고
하산(下山)하는 발길에는 아픈 서너 개 채이는 돌자갈.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
핵겨울 이기철
핵겨울
풀뿌리와 개구리가 깊이 잠든 겨울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오소리와 너구리 비단뱀들이 잠든 어두운 겨울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터지는 핵전쟁 속에서도
3월이 오면 대지가 녹고 금잔화는 필 것이며
연지새 울고 시냇물은 소리 내어 흐를 것인가
인간의 마음은 얼어 붙어 있는데 꽃피는 봄은 마을의 병아리들을
잠깨워 줄 것인가
지금 인간의 가진 핵은 얼마나 되며 저 타오르고 싶은 핵을 영원히
잠자게 할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불꽃이 오르고 콘크리트 건물이 파괴되고
아침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저녁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핵폭발을 막을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우리가 가꾸던 시장과 백화점, 우리가 아끼던 자동차와 피아노
우아한 벨벳 빛나는 다이아몬드 언제나 감동적인 음악과
시들을 핵폭발 속에서 보호해 줄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전나무와 벽돌집이 내려앉고 대리석이 깨어지고
햇빛 비치던 창문들이 폭풍 속에 날아가 모래와 뒤섞이고
정직한 소와 말들이 풀밭에 쓰러지고 과일나무의 뿌리가 뽑히고
강물이 방향을 바꾸어 흐르게 되는 핵폭발을 막을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겨울은 이 지구에 오래 제 겨울만 남기를 원하고
전쟁은 음흉한 의도와 파괴와 정복이 지상을 메워 주길 원한다
차가운 바람 땅 속 깊은 어둠 안타까운 기다림 오랜 주림을 막아 줄
넉넉하고 더운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겨울의 냉혹함 전쟁의 잔인함을 막아줄 부드럽고 큰 힘이
인간에게 있는가.
전쟁과 평화, 문학과지성사, 1985
햇살이 왜 슬퍼지는가를 이기철
햇살이 왜 슬퍼지는가를
나는 언제나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다
구비 잦은 골목의 끝에는 낯익은 문패와 늘 듣던
수도물 소리와 백열등 켜져 있는 뜨락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시금치의 밥상과 오이 써는 도마 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서리 내린 아침에 초록이 대지 위에 사라지는 것은
풀 뿌리가 불빛이 되어 겨울을 데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워진 쓴 냉이 잎새는 죽음 속으로 묻혀 간 것이
아니라 새 봄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도 저렇게 노도처럼 터지는 젊음의 함성과
포플러나무를 시들게 한 최루가스의 눈물을 보며
나는 슬프게도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진다
겨울이 가면 봄이 살구나무를 꽃피게 하리라는 믿음에도
자신이 없어진다
저 투명한 햇살이 슬퍼지는 이유를
이제는 조금씩 깨닫는다.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 문학과 비평사, 1989
화전 이기철
화전(火田)
경남(慶南) 산청군(山淸郡) 시천면(矢川面)에 사는 친구 경묵(景黙)에게. 그 편지에 이 고장에 살았던 대유(大儒)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이야기를 자주 했다.
목탄(木炭)가루를 밟으며 산에 오른다.
해를 더할수록 지천으로 쌓여 빗물에 썩어 가는 가랑잎을 밟고
오리나무 말오줌나무의 마른 잎새 사이로
재재바르게 달아나는 다람쥐들의 숨바꼭질을 보며
버려진 돌 위에 앉아 땀을 씻는다.
삭은 초려들 몇 채 웅크린 마을을 지나
화살 줄기를 그리며 굽이도는 무심한 냇물을 내려다보며
이 산협에 사랑을 심었던 선지자(先知者)의 묻어 둔 말씀을 생각하고 옷깃을 여민다.
너무 오래 세상을 살아 휘고 굽은 나뭇가지 사이로
맑은 햇살 내리고
가난을 오히려 일락(逸樂) 쪽에서 바라보려 하는
땅콩과 감자와 옥수수의 친화(親和)를 가꾸는
손마디 굵은 주민들.
이 비탈진 산밭에 심는 그네들 사랑을
동지(冬至)에 피우는 화톳불은 그저 무심히 타는 것인가
여기저기 바람 일고 너구리들도 꼬리를 감춘 겨울 산에
숯불처럼 타오르는 이 고장 주민들의 꿈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자유시, 실천문학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