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기삿거리 하나 드릴까요?”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에게서 전화가 온 건 지난 8월 4일이었다. 그는 대뜸 ‘미래형 교육과정’ 얘길 꺼냈다. 미래형 교육과정은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가 중심이 돼 2011년 시행을 목표로 준비 중인 새 교육과정의 명칭.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10개 기본 교과를 7개 교과군으로 재분류하고 고교 교육과정 편제를 기초, 탐구, 예체능, 선택 등 4개 영역으로 재편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선택영역 포함이 확정된 일부 교과 교사와 사범대 교수 등이 격렬하게 반발, 구상 단계에서부터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다.(주간조선 2009년 8월 10일자 참조) “왜 모든 언론이 이 문제의 화살을 교사들에게만 돌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던 그는 “교육과정과 관련된 논란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고 말했다. 좀 더 자세한 얘길 듣기 위해 이튿날 오후 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미래형 교육과정 도입 논의 과정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난해 여름쯤 교육과정평가원이 일명 ‘교육과정 선진화 연구’란 걸 진행했어요. 그때부터 교육과정 개편에 관한 얘기가 꾸준히 나돌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육과정평가원이 그 작업을 주도할 거란 예상이 일반적이었는데 올 들어 갑자기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이하 ‘자문회의’)로 넘어갔어요. 제가 7차 교육과정 때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썼거든요. 교육과정의 대체적 흐름은 알고 있었죠. 2007년 2월 7차 교육과정 개정 당시 전 극렬하게 반발했어요.
개정안이 발표된 게 금요일(23일) 오전이었는데 다음 주 월요일(26일)자 조선일보에 ‘새 교육과정은 폐기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을 썼을 정도니까요. 이번 미래형 교육과정 역시 절차나 방향, 개편 주체의 인적 구성 등에 문제가 많더군요. 그래서 틈날 때마다 제 의견을 밝히고 그걸 취합해 지난 7월 1일 박영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주최한 ‘미래교육 국민대토론회’에서 발표하게 된 겁니다.”
미래형 교육과정을 둘러싼 최근 논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뭡니까. “제일 심각한 건 애꿎은 교사들만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사들이 칭찬 받을 일은 아니죠. 일반인의 시각에서 아수라장이 된 지난 공청회 상황만 보면 미래형 교육과정 도입을 둘러싼 갈등은 영락없는 ‘교사들의 밥그릇 싸움’이니까요. 그러나 그건 겉모습에 불과해요. 교사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은 따로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드러나지 않은 ‘결정적 요인’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단 교사 뒤에 사범대와 교원대 등 교원양성기관 교수들이 있어요. 사실 교사들은 교육과정이 어떻게 바뀌든 실제로 잃을 게 별로 없어요. 설사 자기 과목이 사라져도 법적 신분이 보장되기 때문에 다른 과목으로 전환될망정 옷 벗을 일은 드뭅니다.
정작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해당학과 교수와 재학생들이에요. 신입생 모집이 안 되면 학과 존폐 여부를 걱정해야 하니까요. 결국 지금 상황은 사범대 교수들이 교사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이권을 챙기려는 것에 불과해요. 교과이기주의는 학교 현장이 아니라 이들에게 있죠. 그리고 드러나진 않지만 진짜 핵심은 교육과정을 만든 교육학자들이에요. 아수라장이 된 지난 공청회 때 상황을 연출하고 유도했던 주체도 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자문회의가 발표한 미래형 교육과정 시안이 적용되면 일부 교과는 수업시수 축소가 불가피해요. 해당 교원양성기관의 저항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게 처음은 아니에요. 7차 교육과정의 핵심이 ‘교과목 간 무한경쟁’이었거든요. 대표적 예가 음악과 미술입니다. 체육과 함께 ‘교양과목’으로 묶이고 선택권이 학교에 주어지면서 수업시간이 확 줄었어요. 지방에선 음악 교사, 미술 교사들이 주당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해 두세 학교를 도는 경우가 허다했죠. 2007 교육과정 개정 당시 이들의 항의가 거셌어요.
그랬더니 체육이 음악이나 미술과 분리되면서 상대적으로 음악·미술 교과 채택률이 높아졌어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 셈’이죠. 덕분에 교사들은 7차 교육과정을 겪으며 ‘내 과목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걸, 2007 개정 교육과정을 거치며 ‘목소리를 높이면 들어주기도 한다’는 걸 경험했어요. 바로 그 7차 교육과정과 2007 개정 교육과정을 만들고 시행해온 이들이 지금 고스란히 자문회의에 들어가 미래형 교육과정을 만들고 있어요. 교사들은 교육학자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교육과정이 교육학자의 전유물처럼 된 데는 (그들에게 전권을 위임해온) 정부 탓도 있는 것 아닌가요. “사실 우리나라 교육정책 쪽 영역은 교육학자들이 다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외부 의견은 배제한 채 그들만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죠. 특히 교육과정에 관한 한 저처럼 소속 교과와 무관하게 총론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럴 만한 여유들이 없는 거죠.
그러다 보니 교육과정을 둘러싼 갈등의 소지를 만드는 것도, 갈등이 심화되면서 터져나오는 부작용을 즐기는 것도 모두 교육학자들이에요. ‘봐라, 저렇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교육과정 개편을 맡기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맡을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죠. 그러니 저처럼 쓴소리 일삼는 사람이 얼마나 눈엣가시겠어요. 박영아 의원 토론회 땐 ‘7차 교육과정 때문에 교육(과정)학으로부터 심각한 피해를 당했고 그 트라우마 때문에 미래형 교육과정을 비판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현재 자문회의에 소속돼 미래형 교육과정 개편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교육학자로부터였죠.”
박 의원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은 주로 어떤 것이었나요. “핵심은 두 가지였어요. 학습량을 현행 교육과정보다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게 하나, 80여개에 이르는 고교 선택과목을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는 게 다른 하나였습니다. 7차 교육과정이 모형으로 삼았던 게 일본의 유도리(여유)교육과정이에요. ‘교육내용 30% 감축’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그대로 따랐죠. 덕분에 요즘 고3들은 교과서 공부 안 합니다. 고2 때 진도가 끝나버리거든요. 1년 내내 수능 대비 문제풀이에만 급급하죠.
고2, 고3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준답시고 도입한 ‘선택교과제’도 문제입니다. 현재 국어는 문학·국어생활·독서·작문 등 6개, 수학은 수학1·확률과 통계·수학2·미분과 적분 등 6개 하는 식으로 각각 분리돼 있어요. 그 덕에 적분 기호 못 읽는 공대생, 파리가 어느 나라 수도인지도 모르는 고교생이 속출했죠. 이런 문제 인식 없는 미래형 교육과정 논의는 무용지물이란 점을 강조했습니다.”
미래형 교육과정 구상안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요. “고교 선택과목을 과감하게 줄인 것, 꼭 가르쳐야 할 과목과 그렇지 않은 과목군을 분류한 것 등은 토론회 때 제가 제안했던 내용과 유사합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렇지만 여전히 만족스럽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특히 미래형 교육과정이 첫 번째로 내세우고 있는 ‘학습부담 경감’은 아주 잘못된 접근 방식입니다.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며 사교육이 돌연 급증했어요. 혹자는 이를 두고 ‘공교육이 신뢰 받지 못한 탓’이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좀 달라요.
학교와 학원은 그 역할이 서로 다르죠. 학교 교사는 지식교육 전문가이고 학원 강사는 문제풀이 전문가예요. 강사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반복할 뿐 새로운 내용은 못 가르쳐요. 그런데 사교육이 늘었다? 그건 역으로 해석하면 그만큼 문제풀이가 중요해진 거고, 학교에서 습득할 지식의 양이 줄어들었단 얘기예요. 결국 사교육 급증의 진짜 주범은 잘못된 교육과정인 거죠. 그런데 소위 7차 교육과정의 대안이라는 미래형 교육과정에서 다시 학습 부담 경감을 내세우는 건 첫 단추부터 잘못 꿰는 꼴이에요.”
‘학습 부담을 지금보다 늘려야 한다’는 뜻인가요. “물론입니다. ‘학습량 30% 감축’과 ‘과목 쪼개기’의 결과, 지금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6차 교육과정 때와 비교해 30~40%에 불과합니다. 이 상황에서 또 다시 학습 부담 경감을 앞세운 교육과정이 통과되면 학습내용은 더 줄어들고 사교육은 더 급증할 수밖에 없어요. 요즘 학생들의 기초지식 수준은 형편없습니다. 6·25 전쟁이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 간에 벌어졌는지 모르는 고교생이 수두룩하죠. 제가 2006년 국제화학올림피아드를 진행할 때 퀴즈대회를 열었는데 ‘우리나라 강 중 충남·충북·전북의 경계를 지나는 강이 어디냐’는 질문이 있었어요.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이었는데도 ‘대동강’ ‘한강’ 등 어이없는 오답이 많았어요. 학생들이 무식해진 게 아니라 교육과정이 너무 느슨한 탓이죠. 학생에게 공부 부담 주는 게 두려우면 교육 안 시키면 됩니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게 당연해요.
다만 그 경쟁이 얼마나 원활하고 공정하게 이뤄지는가 하는 점엔 신경을 써야죠. 학교에서 덜 배운다고 경쟁이 줄었나요. 아니거든요. 영양실조 상태에서 서울대 가려고 기 쓰다 보니 사교육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죠. 대한민국에 태어난 이상, 서울대 경쟁률이 낮아지지 않는 이상 학생 간 경쟁은 불가피해요. 대신 투명한 경쟁이 되도록 국가가 도와야죠. 기왕 땀 흘리는 거면 그 땀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미래형 교육과정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개편 방향에 대한 조언 한마디 부탁합니다. “교육과정에 대한 교육학자의 전횡을 막으려면 범정부적 기구 설립이 시급합니다. 각계에서 균형있게 선발된 인사들이 모여 바람직한 교육과정 개편을 논의할 필요가 있어요. 또한 학생이 선택하지도 못할 엉터리 선택권은 과감히 정리하되 ‘이 정도는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이른 과목에 한해선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전 그게 언어능력·문학·철학 등을 아우르는 어문학적 소양, 그리고 과학적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둘은 전문지식을 갖춘 교사에 의해 학교에서 교육돼야 합니다.
가정에선 해줄 수 없는 영역이에요. 반면 학교보다 가정에서 다뤄지는 편이 더 효과적인 영역도 있겠죠. 거듭 강조하지만 학교는 할 수 있는 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학생과 학부모를 만족시키고, 추가로 요구되는 사항은 서로 간의 합의를 거쳐 처리해야 합니다. 그 외의 부분은 사교육으로 전환하면 되고요.”
교육과정 개편과 관련, 개인적 계획이 있다면요. “제가 처음 교육과정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01년 고교 과학 교과서의 대표 저자를 맡은 직후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 관심은 온통 과학교육에 쏠려 있었죠. 융통성 없는 교육과정의 틀에 묶여 명색이 저자인데도 교과서에 원하는 내용을 넣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점점 관심을 갖고 교육과정을 들여다 보니 과학교육 문제는 극히 일부이고 교육과정 전체가 문제투성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2007년 개정 교육과정안이 발표된 후엔 과학계의 만류도 뿌리치고 교육과정 전반을 비판하는 데 치중해왔습니다.
미래형 교육과정은 일단 구상안에서 제 의견이 상당수 반영됐기 때문에 좀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총론이 정해지고 개별 교과로 공이 넘어가면 또 다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입니다. ‘대한민국 교육학자’라는, 아주 성공적으로 결집된 전문가 집단에 맞서려면 목소리를 내야겠죠. 계란으로 바위 아주 많이 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