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조은길
천 년 동안 천 번을 까무러쳤다 깨어난 꼬리 천 개 달린 여우다 흰 날개 긴 목 학이 되고 싶어 이미 천 년 전에 호숫가에 눌러앉은 흰 꼬리 푸른 꼬리 여우 들 학이 호수에 박힌 보석처럼 고요히 날개를 접어 목을 세우면 여우들은 온몸 을 꼿꼿이 모아 세우고 숨을 죽이다가 번쩍 흰 날개를 펼쳐 하늘 속으로 솟구 쳐 날아가면 둑이 무너질 듯 일제히 꼬리를 펼쳐 흔들며 학을 시늉한다. 하지 만 그건 향기로운 꽃송이도 꿀 흐르는 열매 하나도 가져보지 못 한 불운한 생 을 극복하기 위한 한갓 몸부림 같은 것 가을 지나자 몰골이 몹시 창백하고 메 마르다 서릿바람에도 푸석푸석 온몸이 흔들린다 까마득하여라 곧 세찬 눈보라 가 무덤처럼 밀려와 너를 파묻고 말 것이다 하지만 다시 봄이 오면 천 한 개째 의 푸른 꼬리 하나가 네 몸을 뚫고 솟아오르려니
새벽 예감 -칠장사 요사에서
정진규
손도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탕약 한 첩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무너지는 걸 보고도 두 손 묶고 있어야 했던 축대
여, 축대여 사랑하던 것들의 축대여, 풀잎들 나무들 꽃송이들 실로 적지 않다 오늘 그게 왜 한꺼번에 보이느냐 그 자리가 자꾸 저
리게 되젖어오고 눈물, 너를 또한 겨웁게 데리고 오는 새벽이 길다 부우연 먼동의 끝자락까지 매달려 간다 요즈음 나는 새벽잠이
없어졌다 새벽에 자주 엎드려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