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자전거 도둑(오선화)
올해 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해왔던 것처럼 엄마와 함께 하는 시험 준비를 좋아한다. 난 내심 스스로 하는 걸 기대하지만 야무진 딸아이와는 달리 뭔가 서투르고 어설퍼 보여 도와줘야 나도 마음이 편하다. 수학, 영어, 과학은 자신 있게 잘 해내지만 국어는 엄마의 설명이 있어야 머릿속에 쏙쏙 남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품사편이 끝나고 다음 단원에 실린 것은 다름 아닌 자전거 도둑이었다. 올해 1월 박완서 님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를 접하고 이런저런 목마름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지라 이미 읽었던 책이었지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수남이는 청계천 세운상가 뒷길의 전기용품 도매상의 꼬마 점원이다. 수남이는 단골손님에게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 주인 영감에게도 여간 잘 뵌 게 아니다. “내년 봄엔 시험 봐서 야학이라도 들어가야지·····.”라고 주인 영감이 말할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 어느 해보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건만, 겨울은 아직도 뭐가 부족했던지 화창한 봄날에 끼어들어 심술을 부렸다. 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쳤다. 골목 안의 모든 것이 ‘뎅그렁’, ‘와장창’, ‘우르릉’거리며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른다. 조금 전만 해도 서 있던 자전거가 누워 있다. 그래도 날아가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자전거에 올라 타 막 폐달을 밟으려는데,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 “아니, 이놈이, 어디로 도망가려고 해! 인마, 네 놈 자전거가 쓰러지면서 내 차를 들이받았단 말이야.” 꼭 오늘 재수 옴 붙는 일이 생길 것만 같더니만, 마침내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구나. 울음이 왈칵 솟구친다. “울긴 인마, 너 한 달에 얼마나 버냐?” 신사는 계속해서 수남이를 다그친다. 한 번만 봐 달라는 수남이의 말을 무시한 채 자물쇠를 하나 사다 자전거를 잡아 놓고 오천 원을 갖고 와 찾아가라 한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도망쳐라, 도망쳐. 그까짓 자전거 들고 도망치라고.”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처럼 은밀하고 감미로웠다. 수남이는 자전거를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달리면서 마치 오래 참았던 오줌을 시원스레 누는 듯한 쾌감까지 느꼈다. 수남이는 겨우 숨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주인영감에게 털어놓는다. “잘했다. 잘했어. 촌놈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인데, 제법이야.” 그러면서 펜치로 자물쇠를 깨뜨린다. “네놈 오늘 운 텄다.” 그러고는 수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과 턱을 두둑한 손으로 귀여운 듯이 감싼다. 그런데 오늘은 싫다. 영감님의 손이 싫다.
수남이는 가게 문을 닫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낮에 내가 한 일은 옳은 짓이었을까? 낮에 내가 한 짓은 도둑질이었단 말인가” 아아, 도둑질을 하면서도 나는 죄책감보다는 쾌감을 더 짙게 느꼈던 것일까? 혹시 내 피 속에 도둑놈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날, 순경한테 수갑이 채워져 잡혀가는 형을 보며, 서울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런 수남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타일렀다. “무슨 짓을 하든지 그저 도둑질은 하지 마라.” 그런데 오늘 수남이는 도둑질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수남이는 스스로 결코 도둑질이 아니었다고 변명을 한다.
소년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도덕적으로 견제해 줄 어른이 그리웠다. 수남이는 짐을 꾸렸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수남이의 얼굴은 누런 똥빛이 말끔히 가시고, 소년다운 청순함으로 빛났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났다.
중1짜리 나의 아들은 수남이가 무조건 억울하단다. 꿈을 키우는 수남이의 꿈을 짓밟아버린 신사가 밉다고 투덜댄다. 바람이 그런 것이지 수남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냐고 억지 부리는 세상이란다. 하지만 나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헤치며 꿋꿋이 살아가던 수남이가 도덕성을 견제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척 친절해 보이던 주인 영감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조금만 버렸더라도, 세 사람 몫을 해내던 수남이를 끝내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오히려 수남이의 잘못된 행동을 칭찬해 준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어른으로서 제시해 줄 수만 있었더라도 수남이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
뒷이야기를 만든다면 자전거로 인해 망가진 차가 신사도 억울하겠지만, 신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입각한 상위층의 도덕적 책임이라 생각하고 다른 해결방법을 제시해 준다. 아무쪼록 시골로 내려가려는 수남이가 마음의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자신이 처한 난관과 심리적 갈등을 잘 이겨내길 바란다. 그리고 못다 이룬 꿈을 세상에 맞서 당차게 이뤄 나가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