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밭
김재희
산뜻한 햇살의 유혹에 이끌려 먼 길을 나섰다. 소나무가 우거진 하동 송림공원에 발길이 머문다.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 군락 근처에 펼쳐진 넓은 모래밭.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모래밭에 내 마음을 송두리째 펼쳐 놓는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지만 아쉽다는 마음 한 가닥이 초가을 햇살처럼 알싸하다. 햇볕은 왜 그리 반짝이는지. 별로 크지도 않은 눈이 더욱 작아지며 실눈이 된다. 마음조차 작아지는가. 자꾸 나 자신이 못나게만 느껴진다.
새삼 내 마음을 비춰보지도 못한 우둔함이 아쉽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엎질러진 물이 늘 내 마음 한구석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 촉촉함이 있었기에 내 생은 그리 삭막하지 않았다. 삶이 어려울 때도, 마음이 외로울 때도, 건강 때문에 힘들 때도 그 촉촉함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넓은 모래밭에서 메아리가 느껴진다. 나만 들을 수 있는 메아리가 조용히 울린다. 그것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메아리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 메아리에 대한 반응을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반응이 오지 않아도 좋다. 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내 삶에 윤기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낮 뜨거운 모래밭에서 마음을 익힌다. 따뜻해진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따뜻하게 보일 거라고. 그러니 어떤 환경에 처해도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자고, 그래야 한다고…….
이런 마음이 자칫 어긋날지도 모르겠다. 사는 일이 마음 같지 않아서 헛발질 한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늘 좋은 것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길러보자 하건만 어느 순간 살짝 비켜나가기 일쑤다. 그래도 다시 제자리로 찾아가는 여정이 있기에 아직은 살만할 세상일 것이다.
모래밭은 발이 푹푹 빠져서 걷기가 힘들다. 넓은 모래밭을 마음껏 걸어보고 싶은데 팍팍해진 발걸음이라서 그런지 금세 지친다. 그런데 강물 가까이 쪽은 젖은 모래라서 걷기가 좀 수월하다. 젖은 모래가 더 단단하다.
그러고 보니 내 마음도 저렇듯 젖은 모래인 듯싶다. 내 마음을 촉촉하게 해준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내 생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 혼자 조용히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해가 기운다. 애써 익혀 놓은 마음 식을까 봐 발길을 돌린다. 백미러에 비치는 모래밭의 햇살이 계속 내 뒤를 따라온다. 내 마음자락에서 삐져나온 한 줄기 미련인가. 이제 그만 잠재우자고 백미러를 외면한다.
노곤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카메라 속 사진의 밝기를 좀 밝게 고쳐 놓는다. 모래밭이 더욱 하얗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