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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늘문득 원문보기 글쓴이: 난지
길상호 시인 소개
1973년 (만37세) |소띠 충남 논산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청림문학 동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그 노인이 지은 집' 당선
현대시동인상(2004)
이육사문학상 신인상(2006)
귤껍질을 까세요
탱탱하게 잘 익을 놈을 골랐다면
이제 귤 껍질을 까세요
거기 어머니들의 눈물 알갱이
몇 개의 자루에 묶여 있을 거예요
투명한 자루는 뜯지 마시길
주루룩 눈물이 샐 수도 있죠
씹어도 질기기만 할 뿐
아무 맛도 없는 허물의 몸
눈물을 뺀 그녀의 실체는 자루였네요
달콤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꽁꽁 묶여 있던,
껍질 벗기기 전부터 풍겨오던
향기도 한번 기억해두세요
묶여 있는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더 진한 향기의 영혼을 만들어
살짝 몸을 벗어나기도 하죠
어머니 가끔 꿈속으로 찾아와
들고 온 자루에 내 발자국을 담네요
모르는 척 / 천년의 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
당신은
새벽 첫눈을 뭉쳐
바닥에 내려놓았네
그것은
내가 굴리며 살아야 할
차가운 심장이었네
눈 뭉치에 기록된
어지러운 지문 때문에
바짝 얼어붙기도 했네
그럴 때마다
가만히 심장을 쥐어오던
당신의 손,
온기를 기억하는
눈의 심장이
가끔 녹아 흐를 때 있네
눈의 심장을 받았네 / 실천문학사, 2010
나무의 결을 더듬다
그녀가 쓰던 나무주걱을 꺼낼 때
나는 지나온 길과 만나게 된다
나무의 결을 따라 깊이 새겨 있는
발자국, 그 소리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여자,
돌아오지 않는 사내를 마음에 묻고
그을음 어두운 부엌에 혼자 서서
뚝뚝 수제비 반죽을 떼 내고 있다
주걱 위에 올려진 새하얀 반죽이
손가락 끝에서 잘려 나갈 때
거칠게 일어나곤 하던 나무의 결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주걱 위에서
그녀 지워 버렸을까, 끓는 가슴에
하나 둘 응어리로 떠올랐을 얼굴
휘휘 저으며 익혀내고 있던 것일까
이제 다시 주걱의 결을 더듬어 보니
그녀 옹이로 단단하게 박혀 있다
결은 옹이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
더 촘촘하게 파장을 그린다
그 상처를 쉽게 지나칠 수 없어
오래 서성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나무의 결을 더듬어 가며 나는
아궁이의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모르는 척, 아프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구두 한 마리
일년 넘게 신어온 구두가
입을 벌렸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 한 마리 음메- 첫울음 울었다
나를 태우고 묵묵히 걷던 일생이
무릎을 꺾고 나자 막혀버리는 길,
풀 한 줌 뜯을 수 없게 씌어놓은
부리망을 풀어주니 구두가
길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기억이
그 입에서 되새김질되고
소화되지 않는 슬픔은 가끔
바닥에 토해놓으면서 구두 한 마리
이승의 삶 지우고 있었다
바닥에서 닳아버린 시간을 따라
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
내가 잡고 부리던 올가미를 놓자
소 한 마리 커다란 눈을 감으며
구두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모르는 척 / 천년의 시작, 2007
명치에 치명적인 붉은 점이
불안은 늘 명치끝에서 왔다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 덮개도 없이
놓여 있는 우물 , 두레박이 닿을 때마다 사이렌의 파장이 물결쳤
다 얄팍하게 쌓아놓은 우물의 내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
로웠다 명치에 줄 내렸던 그녀 시원한 물이 아니라 부들부들 떨
고 있는 물결의 그림자만 끌어 올려놓고 더 목이 말랐다
그녀 떠난 자리에 서서 돌을 주워 우물에 던져 넣었다 구멍을
다 메워버리려 , 모든 파장 돌무덤 속에 눌러놓으려 ,첨벙 첨벙 돌
을 던질 때마다 헉, 헉, 숨이 막혔다 급소를 맞추고서 돌은 입이
더 무거워졌다 첨벙, 물소리 속으로 가라앉은 침묵이 궁금해 우
물 들여다보았을 때 아, 거기 깨진 얼굴로 피 흘리는 아버지의 그
림자
집 나간 아버지의 명치에도 붉은 점이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다
며 손바닥으로 자주 명치를 누르곤 했다
모르는 척 / 천년의 시작
비의 뜨개질
너는 비를 가지고 뜨개질을 한다.
중간 중간 바람을 날실로 넣어 짠
비의 목도리가, 밤이 지나면
저 거리에 길게 펼쳐질 것이다.
엉킨 구름을 풀어 만들어내는
비의 가닥들은 너무나 차가워서
목도리를 두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거리 귀퉁이에서 잠들었던 여자가
새벽녘 딱딱하게 굳은 몸에
그 목도리를 두르고 떠났다던가,
버려진 개들이 물어뜯어
올이 터진 목도리를 보았다던가,
가끔 소문이 들려오지만
확실한 건 없다,
비의 뜨개질이 시작되는 너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것 말고,
빗줄기가 뜨거운 네 눈물이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다
발자국을 그냥 내버려둬요
발자국이 지워진다고
거기 앉아서
막대기로 자꾸 파내지 마세요
그 무늬 한 점씩 떼어 나르는
바람의 등이 휘었잖아요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2004 문학세계사
감자의 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과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夏至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가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2004 문학세계사
小春
가을 한복판에
봄꽃들 피어나는 시기가 있다지요
하늘 팽팽해지도록 찬 기운 불어넣던 바람도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제때 펼치지 못한 계절 어서 꺼내보라고
하느님도 모르는 척 고개 돌려주는
그 시기에 잠깐,
진달래도 개나리도 목련도
죽을힘 다해 꽃송이를 내민다지요
그렇게 핀 꽃은
피똥처럼 아프다지요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볍다는데
형도 죽기 전 며칠
얼굴 가득 그 꽃을 피웠지요
빨갛게 피워놓고서 하늘로 날아갔지요
잊혀지려다가 다시 또 봄
가을에 봄꽃이 피면
차마 그 향기 맡을 수가 없지요
시집 ; 눈의 심장을 받았네 / 실천문학사, 2010.
투명한 가을
줄기 하나에 매달려 담쟁이는
유리창을 닦습니다
종일 문지르고 문지르다가
붉은 목장갑이 다 닳습니다
헐거워진 장갑은 저 아래
툭, 던져버리기도 하는데
그 자리에 파란 가을 하늘이
조용히 내려와 앉습니다
이제 맑은 눈동자를 보았으니
당신을 쓰다듬던 나의 손도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 실천문학사, 2010
蓮의 귀
蓮들이 여린 귀를 내놓는다
그 푸른 귀들을 보고
고요한 수면에 송사리 떼처럼 소리가 몰려온다 물속에 가부좌를 틀고 蓮들은 부처님같이 귀를 넓히며 한 사발 맛있는 설법을 준비 중이다 수면처럼 평평한 귀를 달아야 나도 그 밥 한 사발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밥그릇 식구
처마 밑에 놓인 그릇
아침엔 까치가 기웃대더니
콩새도 콩콩 깨금발로 다가와
재빨리 한 입,
빗방울이 먹다 간 한쪽은
팅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저마다 배를 불린다
정작 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잠을 자다 뒤늦게 나와
구석에 남은 몇 알로
공복을 누르지 못해 야아옹,
뒷마당으로 사라지고
고양이가 흘리고 간 한 알
개미들이 기다랗게 줄을 선다
텃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텅 빈 밥그릇을 보고 허허,
또 한 그릇 덜어낸 사료 포대처럼
조금 더 허리기 휜다
시집 ; 눈의 심장을 받았네 / 실천문학사, 2010
계단 길
발목이 부은 할머니는
오르막 계단 길
몸뚱어리 하나만도 무거워
그림자 떼어놓고 오른다
난간을 잡고 헐떡이던 숨소리
잠시 민들레처럼 주저앉아
샛노래진 얼굴을 닦는다
굳어버린 할머니 등처럼
꼬깃꼬깃 사연들 접혀 있는 길
한 해 또 지나면
더 가팔라질 것인데
이승 고개 후딱 넘어야지,
혼잣말을 들은 오후 햇살이
할머니 주름 계단에
주르르 미끄러진다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 실천문학사, 2010
눈깔사탕
골목길이 사라져요. 한 채의 오래된 집들도 무너져요. 아그작아그
작 동네 귀퉁이를 씹으며 전진하는 포크레인 몇 대. 여기는 재개발
지역이레요. 아이는 날마다 언덕에 올라 사탕을 씹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눈앞에서 사라져도 모르는 달콤한 눈깔사탕, 깔깔대는 웃음
소리 위에 풀썩 뿌연 먼지가 일어요. 다리 잘린 곡목이 비틀비틀 담
장 뒤로 숨어보지만 금방 들키고 말죠. 아이에게 숨기 장난처럼 즐
거운 놀이는 없어요. 실핏줄로 빨갛게 금 간 눈망울 굴리며 동네 구
석구석 잘도 찾아내지요. 아이가 가리키는 풍경은 그대로 녹아버려
요. 몇 개 남은 가로등마다 어둠이 켜져도 돌아갈 집이 없어요. 끈적
끈적한 졸음을 빨다 아이는 낡은 처마 밑에 잠이 들지요. 이런 밤에
는 한쪽 모서리 깨진 달이 떠요. 아이의 감은 눈을 어루만지다 달도
그만 눈이 멀어요
물끄러미
물끄러미라는 말
한 꾸러미 너희들 딱딱한 입처럼 아무 소리도 없는 말
마른 지느러미처럼 어떤 방향으로도 몸을 틀 수 없는 말
그물에 걸리는 순간
물에서 끄집어 낸 순간
덕장의 장대에 걸려도
물끄러미,
겨울바람 비늘 파고들면
내장도 빼버린 배 속 허기가 조금 느껴지는 말
아가미 꿰고 있는 새끼줄 때문에
너를 두고 바다로 되돌아간 그림자 때문에
보아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말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 실천문학사, 2010
열매 떨어진 자리
잠시 장마가 멈춘 골목에서 보았네
나무들 채 익지 않은 푸른 열매 떨어뜨리고
늙은 개처럼 빗물 털고 있었네
배꼽 불거진 감또개를 잃은 감나무와
알도 차지 않은 석류를 놓친 나무가
암캐와 수캐처럼 서로를 향해
속으로 젖었는데 그 울음이
밟혀 뭉개진 열매처럼 마음에 걸려
한참을 막다른 골목이 되어 버렸네
놓쳐 버린 시간들을 떠올리듯
거기 멍하니 바라보는데 눈물을 닦고
두 나무가 나를 더 애처롭게 바라보네
떨어진 열매의 자리, 그 빈자리가
남은 열매를 키우는 힘이라고
자리를 양보한 둥근 꿈들이
남은 열매들의 몸에 씨앗으로 박힐 거라고
푸른 잎으로 반짝 말을 던지네
나는 상처 입은 열매를 주워 들고서
그 어두운 골목을 얼른 빠져나오네
어미를 먹은 기억
고구마에 싹이 돋았다
물 한 방울 없는 자루 속
썩은 내 풍기는 저 무덤 속에서
새파랗게 싹은
잘도 자랐다
탯줄을 자르기 전
어미를 먹고 자라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시집 ; 모르는 척 / 천년의시작, 2007
박병두 엮음, 착한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난다 / 천년의시작, 2010
너라는 소문
고로쇠 호스를 혈관에 꽂고 오늘은 나무의 맥박으로 눕고 싶어, 수천 개 푸른 귀를 달고도 너의 말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가 필요해, 가지에 가지를 친 너의 말들을 가지마다 찾아가 가만히 푸른 손으로 틀어막겠어, 그래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말들은 나이테 두루마리에 차곡차곡 새겨놨다가 죽어서도 가져가겠어, 스스로 속을 파내고 관이 되어 거기 부장품처럼 너의 말들 안치할 거야, 밤마다 유리창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때문에 너의 잠도 편치 않겠지, 나를 꺾고 싶은 너의 바람, 그렇게 강도를 낮춰도 소용이 없어, 내게는 온몸에 박아둔 낚시들이 있거든, 가지 끝 푸른 미끼를 무는 순간 파르르 너의 말들은 낚이게 될 거야, 그러면 너는 온통 푸르게 변한 내 얼굴과 마주해야 해, 조심해! 그 말의 주인공이 너라는 소문이 있어!
시작 / 2009년 겨울호
그 노인이 지은 집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시집 ;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문학세계사
벽돌공장 그녀는
모래 속에 사는 물고기
세상 뭐 볼 게 있냐고
질끈 아래 위 눈썹 지퍼를 채우고
모래 씹으며 사는 물고기
물살의 부드러운 손길도 잊은 지 오래
푸른 물풀의 손짓도 잊은 지 오래
성긴 아가미로 시간을 걸러
사각 틀에 꾹꾹 다져 넣다 보면
수북이 쌓여가는 모래벽돌
건들기만 해도 허물어질 몸으로
단단한 집 한번 지어보겠다고
지느러미 쉬지 않는 물고기
몸에 박힌 모래 알갱이
햇빛 아래 반짝이는 비늘이라고
애써 흔들리는 웃음 지어보지만
낮잠 시간이 되면 아무데서나
무게를 못 이기고 스르륵
모래더미로 내려앉는 물고기
창작과비평 / 2008년 겨울호
희망에 부딪혀 죽다
월요일 식당 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 않은가
제 날개가 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속이 까맣게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불빛으로 뛰어들던 왜소한 몸들,
신문에는 복권의 벼락을 기다리던
사내의 자살기사가 실렸다 어쩌면
저 벌레들도 짜릿한 감전을 꿈꾸며
짧은 삶 걸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얇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얼마나 큰 수렁이었던가
쓰레받기에 그들의 잔재 담고 있자니
아직 꿈틀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저 단말마의 의식이 나를 이끌어
마음에 다시 불 지르면 어쩌나
타고 없는 날개 흔적을 지우려고 나는
빗자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2004. 문학세계사
어떤 노숙자
아파트 쓰레기장 한쪽에
사각형 반듯한 꿈을 꾸던 그가 있다
사고가 있었는지 회로판을 드러내놓고
브라운관은 산산이 깨져버려
채널을 돌려도 이제
어떤 삶의 잔상도 떠오르지 않으리라
한때 그
모두의 눈을 고정시킬 만큼
뛰어난 직조술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두 갈래 더듬이로 찾아낸
가닥 가닥의 전파들을 끌어 모아
수놓았던 허상들 앞에
나도 몇날며칠을 붙들린 적 있다
플러그가 손잡았을 빈 구멍은
이제 쓸슬함에 감전되어 침묵하거나
다른 놈과 짜릿한 연애를 즐기겠지
버려진 인생은 먼지를 끌어다
제 속에 고요를 재우고 있다
모든 게 허상이었던 꿈이
내 속에서도 지지직,
혼선을 일으킨다
시집 ; 모르는 척 / 천년의 시작, 2008
장마 속의 잠
한 바가지 남은 쌀을 쏟아놓고
쌀벌레 골라내는 어머니, 제발
저의 꿈틀대는 몸은 집어내지 마세요
시간을 까먹고 또 파먹어도
푹 꺼져버린 배를 채울 수 없어
쌀로 만든 집 필요했던 거예요
아직 날개 돋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우 단 꿈 씹고 있는데
어머니 시커먼 손가락이 닿으면
서둘게 지은 집 깨지고 말아요
눅눅한 장마 지나고 나면
퇴화된 등판 날갯죽지가
삐걱삐걱 다시 움직일 것 같아요
넌 환상의 방에 누워있는 거란다.
어머니의 말은 듣기 싫어요
깨어나 날개 없이 처박히더라도
그냥 여기서 젖은 몸을 말리게
비 내리는 세상 불러내지 마세요
시집 ; 모르는 척 / 천년의 시작
집들의 뿌리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직 다 걸어보지 못한
골목들은 거기 감자처럼 달려 있는 집의 뿌리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골목은
기쁨과 슬픔을 실어 나르던 체관과 물관이었다
다 허물어져 알아볼 수도 없는 이 집에 들어
대문을 열고 드나들었을 사람들 떠올려보면
지금은 떨어져 버린 기쁨과 슬픔의 열매가 보인다
막 화단에 싹틔운 앵두나무에는 나무를 심으며
앵두꽃보다 먼저 환하게 피었을 그 얼굴이 있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로 하루를 식히다가 발견한
그 붉은 첫 열매는 첫입맞춤의 맛이었을까
그러나 저기 마루 밑에 버려진 세금고지서 뭉치,
대문에 꽂힌 저 종잇장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누렇게 변색된 나뭇잎 하나 걸려 있다
체납액이 커질수록 가뭄처럼 말라가던 가슴은
지금도 금 간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
어쩌자고 골목은 나를 빨아들여
사람도 없는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오래도록 먼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가 드나들던 집에 나는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물기 잃은 잎처럼 시들해진다
궁여지책
개다래라는 열매가 있는데요
이름도 못생긴 것이
꽃도 보잘 것 없이 작아
산 속 깊이 밀려나 사는 넝쿨나무가 있는데요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놈도
열매는 맺아야 하니까
나비의 입술이 필요했던 겁니다
은둔에 익숙해진 꽃으로는
얼굴 내밀 수 없어 궁여지책
잎들 하얗게 탈색시켰던 것인데요
잎을 꽃으로 바꾸기까지
제 속을 얼마나 끓였겠습니까
그 열매 날로 씹으면
혓바닥이 훨훨 탄다는데요
불기를 어르고 달래야 그제서
오장육부 따듯하게 덥히는
약재가 된다는데요
불을 약으로 만들기까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현대시 / 2007. 7월호 중
버려진 손
공사장 인부가 벗어놓고 갔을
목장갑 한 켤레 상처가 터진 자리
촘촘했던 올이 풀려 그 生은 헐겁다
붉은 손바닥 굳은살처럼 박혀 있던 고무도
햇살에 삭아 떨어지고 있는 오후,
터진 구멍 사이로 뭉툭한 손 있던
자리가 보인다 거기 이제 땀으로 찌든
체취만 누워 앓고 있으리라
그래도 장갑 두 손을 포개고서
각목의 거칠게 인 나무 비늘과
출렁이던 철근의 감촉을 기억한다
제 허리 허물어 집 올리던 사람,
모래처럼 흩어지던 날들을 모아
한 장 벽돌 올리던 그 사람 떠올리며
목장갑은 헐거운 생을 부여잡는다
도로변에 버려진 손 한 켤레 있다
내가 손 놓았던 뜨거운 生이 거기
상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다
아무것도 건져 올리지 못한 나는
몸의 장갑을 뒤춤에 감춘다
현대시 / 2004년 10월호
늦은 답장
이사를 하고 나서야 답장을 씁니다
늦은 새벽 어두운 골목을 돌아 닿곤 하던 집
내 발자국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
바람 소리로 뒤척이던 나이 많은 감나무,
지난 가을 당신 계절에 붉게 물든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마루에 올려 놓곤 했지요
그 편지 봉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잎들은
모아 태워도 마당 가득 또 쌓여 있었습니다
나 그 마음도 모르고 편지 받아 읽는 밤이면
점점 눈멀어 점자를 읽듯 무딘 손끝으로
잎맥을 따라가곤 했지요 그러면 거기
내가 걸었던 길보다 더 많은 길 숨겨져 있어
무거운 생각을 지고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당신, 끝자리마다 환한 등불을 매달기 위해
답답한 마음으로 손을 뻗던 가지와
암벽에 막혀 울던 뿌리의 길도 보였습니다
외풍과 함께 잠들기 시작한 늦가을 그 편지는
제 속의 불길을 꺼내 언 몸을 녹이고
아침마다 빛이 바래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
폭설이 많았던 겨울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길가 마늘밭에서
지푸라기 사이로 고개 내민 싹들을 보았습니다
올해는 누가 당신의 편지 받아 볼는지
나는 이제 또 다른 가지를 타고 이곳에 와서
당신이 보냈던 편지 다시 떠올립니다
소리의 집
그 집은 소리를 키우는 집,
늑골의 대문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루에 할머니 혼자 나물을 다듬거나
바람과 함께 잠을 자는 집,
그 가벼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삐이걱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집,
단단하게 박혀 있던 못 몇 개 빠져나가고
헐거워진 허공이 부딪히며 만드는 소리,
사람의 세월도 오래 되면 소리가 된다는 듯
할머니 무릎에서 어깨 가슴팍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들,
이팠던 곳이 삭고 삭아서 만들어낸
관악기의 구멍을 통해 이어지는 가락들,
나의 짧은 생으로는 꾸밀 수 없는
그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키워온 옹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바람 드나들며
나 또한 소리 될 것 같은데
더 기다려야 한다고 틈이 생긴 마음에
촘촘히 못질하고 있는 집
시집 ;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문학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