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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기 네덜란드는, 아니 유럽천지가 온통 휴가 분위기다. 우리 직원 상당수도 휴가로 자리를 비우고 있고 밖에서 누구를 만나도 으례 ‘휴가는 다녀 오셨는지, 어디로 가실 건지, 다녀 오셨다면 어디를 가셨으며 어떠하셨는지’가 단연 주요한 화제가 된다.
(지난 번 집 인근 암스텔 강변에 혼자 민물낚시 갔다가 찍은 사진들..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고 그냥 햇살 좋은 평범한 일요일 오후 풍경이지만 꼭 무슨 해수욕장이나 유원지에 온 분위기다)
‘휴가’ 하니 옛날 언젠가 친구들과 대화 중 ‘야,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장장 한달 동안이나 여름휴가를 쓴다 카더라’ 며 부러움 반, 의심 반으로 ‘믿을 수 없는 장기간의 휴가’를 화제로 삼은 기억이 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여기가 거기’였고 오히려 그 이상이다. 기왕 꺼낸 김에 여기 근로자들의 휴가제도, 아니 정확히 우리 지점 현지직원 휴가제도에 대해 설명해 줄 터이니 너무 부러워하지는 말고 참고만 하시길….(보트 종류도 제 각각, 연령대도 다양하다)
일반 직원 기준으로 우선 일년에 약 30일간(영업일수 기준)의 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된다. 이것은 금전으로도 보상이 안되므로 무조건 100% 다 쓴다고 보면 맞다. 그 다음은 주 36시간 근무조항으로 인해 대게 하루 8시간 근무하므로 다시 주당 4시간 휴가, 최소 년 13일 이상의 휴가가 또 보장된다. (칼 출근, 칼 퇴근은 당연, 지난 번 현지 차장 한 명이 보고서 때문에 2시간 야근하는데 감격해서 눈물 나는 줄 알았다. 본점 앞 우수직원 상신, 요번에 장려상 수상, 나 원 참,.. 그래, 장하다….)
도합 43일 정도. 근무일 수 기준이니까 최소 두 달 이상이 넘는 셈이고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달 또는 몇 주 단위로 다 몰아 써도 된다. 법정 공휴일은 당연히 별도로 쉬니 참 징그럽게도 논다고 보면 맞지만 나 같은 본국 직원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 없는 얘기다.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 나라가 원래 그러려니 하고 봐줄 만 한다 치더라도 정작 골 때리는 휴가제도는 따로 있으니 그게 바로 ‘sick leave’, 즉 몸이 아파서 휴가를 받는 경우인데 이 제도가 웃긴 건 그 아프다는 기준이 따로 없고 병원 진단서나 의사 소견서도 없이 본인이 아프면 그냥 아침에 ‘나 오늘 아파서 못나간다’는 전화 한 통화로 끝, 하루건 열흘이건 나을 때까지 그냥 집에서 쉬면 된다. 당연히 급여는 정상적으로 나오고 위 자신의 연간휴가 일수에서 까지는 경우도 없는 그야말로 ‘독립적’이고 ‘자유 분방한’ 휴가인 셈이다.(좀 사는 집 같은데서 가족 총출동, 애를 튜브에 메달고 달리는 모습도 보인다)
아프다는 데야 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우리 현지 직원들도 대부분 년간 최소 열흘 이상씩은 ‘꾸준히’ ‘돌아가며’ 아픈 듯 해서 웬간히 익숙해져 있지만 문제는 이 제도를 악용해서 멀쩡한, 또는 한국기준으로 결근은 생각도 못하는 소위 '나이롱 환자' 상태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연속해서 쉬는 경우인데 실제로 우리 지점에도 작년 그런 케이스가 있었다고 하고(연속 두 달 결근, 점포장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 때문?) 최근 모 한국법인에도 가뜩이나 일손이 딸리는 판에 벌써 두 달째 아프다고 안 나오는 직원이 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한숨만 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달리 막을 방법이 없고 유일한 방어수단이라고 해 봐야 회사에서 별도로 의사를 고용, 집으로 보내서 이 나이롱 환자의 현재상태를 체크하는 정도, 만일 꾀병이 확실해 보이는 경우 이를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지만 어차피 의사는 종업원 편이라고 보면 맞고 그 아프다는 것도 ‘정신적 스트레스에 의한 두통’(작년 그 직원 병명) 등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것도 포함되므로 쓸데없이 돈 낭비할 필요 없이 그냥 ‘제발 아프지 않기’를 바라거나 부디 ‘조직에 대한 불만’ 또는 ‘그냥 단지 일이 싫어져서 생기는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열심히 ‘독려’하는 수 밖에 없다. (여기는 사실상 ‘해고’제도도 없고 정 억울하면 소송을 통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이기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란다. ‘여기가 노동자 천국?’....... 딱 맞다)
이러고도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워 쓸만한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우리나라 보다 훨씬 여유있게 잘 사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고 배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맨날 놀아 제끼는 니들 유럽국가 땜에 제 2의 금융위기가 생기지’ 하는 원망과 ‘그래, 앞으로도 얼마나 잘 사나 보자’ 하는 억하심정과 함께 개인적으로는 문득 아직 손실 폭이 너무 커서 그냥 방치상태인 ‘유럽펀드’를 이제라도 해약해야 마나 하는 고민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이 나라의 휴가실태인 것이다.
(강 건너편에서 웬 처자가 수영복 차림으로 집에서 나오더니 앞의 강물로 풍덩 빠지길래 잽싸게 한 장 찍었다. 정작 찍고 나니 에게? 볼게 없다...사실 옆에도 비키니 차림의 잘 빠진 처자들이 더러 있지만 눈치 보여서 사진은 못 찍었다. 대신 배위에서 놀고 있는 야시시 차림의 처자들을 줌인으로 슬쩍.ㅎㅎ, 여기가 내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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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는 마침 ‘하반기 유럽점포장 영업전략회의’를 파리에서 하게 되어 약 5년 만에 다시 그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시간도 많지 않았고 여행이 주 목적이 아니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5년 전 처음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면서 받았던 그 신선한? 문화충격을 잠시나마 다시 경험해 보고 싶은 기대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시간 여의 짧은 비행을 거쳐 호텔에 도착, 체크-인을 끝내니 저녁 회식까지 여유시간은 겨우 2시간 반, 어디를 가 볼까 하다가 마침 호텔 옆에서 출발한다는 2시간짜리 시내 투어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막상 버스에 올라 전망 좋은 2층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더위로 인해 주변 풍경 감상보다 햇볓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어느덧 유럽식 건축물에 익숙해져서 인지 도무지 5년 전과 같은 감흥은 느껴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휴가철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어서 인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 들로 거리는 바글거리고 대부분의 숙박업소도 만원, 오늘 묵은 호텔도 파리지점에서 무척 어렵게 잡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 사람들, 별로 잘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순전히 조상 잘 만난 덕을 톡톡히 보는 듯 하다.(버스 뒷쪽으로 보이는 개선문, 사실은 뒤에 처자를 담는 것이 주목적...)
개선문으로부터 쭉 이어지는 샹제리제 거리… 야간에 왔으면 ‘오, 상제리제~~~’ 음악이 절로 나올 지 모르지만 역시 낮 시간에는 폭염 속에 시원한 맥주 마시느라 다들 정신이 없는 듯하다.
지난 번 왔을 때는 석양이 시작되는 세느강 유람선 위에서, 칵테일 한잔 덕에 더 아름답던, 밤거리를 배회하다 다시 마주친 휘황찬란한 조명 속, 영롱하게 솟아있던 에펠탑도 오늘은 그냥 더위 먹은 고압선 철탑같이 보인다.
반대쪽 잔듸광장에는 사람들이 쳐다 보든 말든 뜨거운 염장질이 한창인 커플도 보인다.
그리고 노틀담 대성당..역시 주변에는 인파로 바글바글..
한인식당에서의 저녁 회식이 끝나고 인근 국가에서 온 점포장들과 함께 샹졔리제 거리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낭만과 활기가 넘치는 호텔인근 한 노천카페에서 다양한 종류의 맥주와 이 유럽 대륙의 어처구니 없는 휴가제도를 안주 삼으며 늦은 시간까지 소박하나마 파리의 낭만을 만끽하였다.(늦은 시간이었지만 젊은이들로 바글거리는 한 노천 카페에서)
다음날 하루 종일 이어진 회의를 마치고 바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 왔는데 어디 다른 나라에 갔다 왔다는 기분은 전혀 없고 그냥 제주에서 서울 잠깐 다녀온 정도? 다소 아쉬운 마음은 다음 번 여행다운 여행 때 다시 가서 달래며 더 멋있는 사진과 알찬 내용으로 여기 다시 소개하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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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에는 선상 고등어낚시를 다녀 왔다.
‘네덜란드에 왔으면 모름지기 바다에서 고등어 한 마리 쯤은 잡아줘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 익숙한 문구지만 실제로 서기 1928년 2월 30일에 쓰여진 UN보고서 12페이지 15째 줄에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 주최측 초청장에 적힌 내용이다..…... 이거야 게그라쳐도 실제로 멀리 유럽내륙에서도 고등어 낚시를 하러 네덜란드로 원정 올 만큼 ‘네덜란드 고등어 낚시’는 역사도 깊고 꽤나 유명한 것은 사실이고 막상 항구에 도착해서 보니 독일번호판을 단 전세버스들도 여러대 보인다.
이번 행사는 여기 진출한 모 현지법인에서 배 한 척을 통째로 전세 내 직원 야유회와 유관업체 초청 단합대회를 겸한 형식으로 개최되었는데 나는 업무적으로도 관련 있지만 ‘네덜란드 한인 중 낚시 최고수’ 자격으로 특별 초청을 받은 터였다.
제주에서야 그냥 저냥 평범한 낚시꾼에 불과한 나였지만 여기 사람들 대부분 전문적인 바다 낚시 경험도 없거니와 ‘조류 흐름에 따라 밑밥과 미끼를 동조…’ ‘제로제로(00) 찌로 부력을 극소화 시키며 고기가 이물감을 못 느끼게……’ 등 약간의 전문용어?만 구사해도 입을 쩍 벌리며 ‘스승님!’ 소리를 듣는 입장이라 ‘뭐가 없는 곳에서는 뭐가 왕’이라더니 내가 딱 그 형국이다.
(헤이그항 출항 전, 오늘 낚시할 배 위에서)
이른 아침 출항을 준비하고 있는 다른 고등어 잡이 배에서는 낚시까지는 한참 시간이 남았음에도 한 마리라도 더 잡아 보려고 일찌감치 부산을 떠는 것을 보니 '고기에 대한 욕심'은 국가고 민족이고를 떠나 전세계 낚시꾼의 공통된 습성인 듯 싶다.
드디어 출항. 바람도 불고 파도도 꽤 높았지만 아직까지는 다들 쌩쌩해 보인다...하지만 경험으로 보아 두 시간만 지나면 지금 환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저 선수 포함, 반 이상이 멀미로 자빠지려니 했는데... 역시였고 특히 저선수는 어디서 디졌는지 항구로 돌아올 때까지 코빼기도 안보이더라.
난바다로 약 한시간 반에 걸친 항해 끝에 포인트 도착, 저 쪽 배에서는 벌써 낚시가 한창이고 떨어진 고기 찌꺼기라도 줏어 먹으려는 듯 주위엔 갈매기 천지다
본격적인 낚시 모습, 수심은 생각보다 얕은 약 30M 정도,, 별도의 미끼는 없고 너 댓개 주렁 주렁 달린 카드채비에 색실과 비닐조각 같은 것을 엮어 놓은 일종의 루어낚시 형태...
잡아봐야 나는 어차피 집에 가져 갈 것도 아닌지라 낚는 족족 아무에게나 던져 주었는데 고등어 특유의 당찬 손맛은 좋았지만 한 서른 마리 정도 낚고 나자 시들해 져서 광어 같은 바닥고기를 낚아 보려고 준비해간 생미끼로 시도해 봤지만 꽝….원인을 생각해 보니 바닥이 광어조차 살기 어려운 순수 뻘 밭이라 고등어 같은 회유성 어종 외에는 붙박이 고기가 있을리가 만무하다.
(방금 낚인 고등어, 제주에서 봤던 굵직한 노르웨이산을 생각했는데 대부분 씨알은 별로..)
앞쪽과 옆쪽에서도 낚시가 한창이고 입질이 뜸해지면 어군 탐지기를 이용해 바로 이동, 정작 낚시 시간보다 옮겨 다닌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갈매기에 둘러 쌓인 채로 이동 중인 다른배 모습)
나 뿐만 아니라 참석자 대부분의 주목적이 낚시 그 자체보다 ‘싱싱한 즉석 사시미’ 인지라 두 명의 칼잡이가 특별 초빙되어 부지런히 썰어대건만 입들이 워낙 많다 보니 썰자마자 금새 사라진다.(한쪽에서는 열심히 썰고 저쪽에서는 이미 술판이 벌어졌다, 나도 주거니 받거니 정신이 없다 보니 사진 찍는 것도 잊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생선 조각 몇 개를 던져주니 갈매기들이 몰려들고 용감한 놈은 던지기도 전에 손에든 고기조각까지 잽싸게 채간다.
항구로 돌아와 고기 많이 잡은 사람에게 시상하기 위해 협찬으로 준비해간 고급 와인 몇 병은 오늘 회 써느라 수고한 칼잡이들에게 전달하고 모처럼 맛 본 싱싱한 회와 소주로 네덜란드에서의 또 하루가 알딸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지난번 한인월례대회 3등으로 받은 자그마한 트로피와 부상인 대형 후라이판을 번쩍 들고…, 여기 와서 처음 한달 평균이 27타, 지난 주 3회 평균 15타, 나 마니 늘고 있다)
남들은 다들 휴가니 뭐니 분주하지만 가족이 없는 나로서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고 가을이 지나 비수기 때 저렴한 가격으로 이집트나 튀니지 등 어디 아프리카 조용한 동네(나중에 가족과 같이 갈만한 지역은 빼고)에서 푹 쉬다 올까 생각중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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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으로 ‘추진위’에서 한창 채근중인 설문내용을 아래에 싣는다. 옛날 사진은 여기 하나도 안가지고 와서 생략이고 가족 사진이나 요즘 사진은 나중에 올리든지 아니면 주인장이 카페에서 적당히 하나 골라서 첨부 하시 앞…..그러고 보니 응답 내용도 좀 기네.. 1등 하던 성준이가 알아서 적당히 요약하던지…..어차피 행사에 참석도 못할 꺼, 나도 이젠 ‘따고 배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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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추억에 남는 한가지?
추억이라기 보다는 좀 쪽 팔린 기억…..
1학년 초 남들은 주말에 예습이니 복습이니 다들 학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나는 공부는 뒷전이고 누구 꽁무니를 쫓거나 맨날 사라봉으로, 바닷가로 싸질러 다니곤 했다. 어느 월요일 오전, 물만두 선생님께서 간단한 영어 한 문장을 해석해 보라고 하신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문장, ‘My sister is a nurse’.. 그런데 이놈의 ‘nurse’ 란 단어가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안나 머뭇거리다가 ‘이런 쉬운 것도 해석이 안되냐’는 꾸중과 함께 늘 들고 다니시던 막대기로 머리를 두 대 맞았다. 아, 그 쪽 팔림…..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다 졸업하고 나서야 뒤늦게 영어란 것에 흥미를 느끼고 집중, 입사시험부터 모 대학 어학고시 포함 웬만한 영어관련 시험은 대부분 1등을 하며 한때 영어께나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엄청 삭기는 했지만 어쨌든 지금도 영어가 안되면 생활자체가 힘든 나라에 살고 있으니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
고교시절 생각나는 선생님과 이유
1학년 담임이셨던 정 운택 선생님..여름방학 때 좀 부진한 친구들을 특정 시험결과 기준으로 추출, 별도로 보충수업을 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선생님 보시기에 당연히 포함될 것으로 생각됐던 내가 용케 빠져 나가자 ‘너도 나와서 들어라’ 라고 좋게 말씀 하셨고 나도 선뜻 ‘예, 그러겠습니다’ 했는데 처음 하루는 빼먹고(‘대상도 아닌데 꼭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둘쨋날 수업에 다소 불량한 복장(얼룩무늬 남방, 교련복 바지, 형의 빽구두)으로 나타나자 처음에는 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곧 엎드려 뻗쳐 하고 몽둥이로 꽤 심하게 때리셨다. 하지만 지금으로 치면 거의 폭력수준인 그 매가 단순한 감정폭발이 아닌 진짜 내 장래가 염려돼서 하시는 ‘사랑의 매’로구나 라는 기특한? 생각이 맞으면서 얼핏 돌아서 본 선생님 표정으로부터 읽을 수 있었고 따라서 별로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에휴…..바로 그 순간을 고교시절의 turning point로 삼았어야 했는데….
보고 싶은 고교동창 및 선생님
오랫동안 못 본 친구들과 선생님들 대부분 다….그 중에서도 늘 여유 있는 모습의 까마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작고하셨다는 한 국인(미술) 선생님…언젠가 모처럼 있던 야외 실기시간에 교무실 앞 연못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다 잠시 쉬고 있는데 이리 저리 지도 차 다니시던 선생님께서 내 그림을 흘깃 째려 보시더니 ‘야, 이거 니가 그린 것 맞냐? 너 이시키, 누가 그려줬지? ’하면서 거의 짝대기로 때릴 듯한 분위기였다. 이거 뭐 돌아가신 분께 영 도리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아니, 선생님, 학업이 좀 떨어지면 그림도 못 그려야 됩니까? 아무리 공부를 젤로 치는 학교라 해도 다른 과목도 아니고 미술선생님께서 그런 고정관념 가지시면 몹시 섭하지요~~~’
(그런데 고교시절 기억이라는 것이 나는 어째 주로 맞은 거, 아니면 맞을 뻔 한 거 뿐이냐?)
졸업 후 기억에 남는 순간 한가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어느 정도 학업도 따라 잡으며 나름의 진로를 꿈꾸던 3년 말 즈음, 그 동안 아프시던 아버지가 위암말기라는 것이 판명 되었고 형도 군복무 중, 어쩔 수 없이 원서도 내보지 못하고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예비고사 지역선택 시절, 이런 결과가 올 줄 모르고 제주를 선택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재수 아닌 재수, 가업이던 어선을 아버지 대신해서 타게 되었다. 돌아가실 때 까지 약 8개월…그 해 여름은 어찌나 한치도 많이 잡히는지 새벽부터 참돔 위주의 본업(주낙)을 나갔다 돌아와 좀 쉬고 오후에 다시 한치 잡이.. 멀쩡하던 시력까지 급격히 떨어질 정도(1.5에서 0.2 수준, 안경은 공부 잘하는 놈들만의 전유물인줄 알고 있을 때였다)의 몸 고생은 둘째 치더라도 마침 한치 나오던 곳이 제주항 동부두 부근이어서 매일 저녁 목포인지 부산인지 제주를 떠나는 여객선 위에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내 또래 남녀 대학생들이 울긋 불긋 화려한 차림으로 모두 갑판위로 기어 나와 멀어지는 항구를 향해 손을 흔들다 옆에서 조업중인 내가 꽤 낭만적으로 보이는지 열심히도 내게 손을 흔들어 댄다…....이런, 닝기리 ㅈㄸ……거.. 기분 참….
‘그래 좋다. 내 지금 어쩌다 이 좁은 곳에 짱박혀 뜻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꼭 훨씬 넓은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리라….’ 마음속 이런 다짐도 하곤 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뉴욕에 부임하자 마자 업무차 ‘월스트리트’ 쪽에 갈 일이 있었다. 그런데 길가 곳곳에는 성조기와 함께 ‘The capital of the world’라고 적힌, 뉴요커의 자부심이 잔뜩 베어있는 깃발들이 마치 나의 뉴욕입성을 환영하는 듯 가로를 따라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 시절이 다시 떠올라 종종거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래, 드디어 내가 여기에 왔구나…..’
졸업 30주년을 맞는 소감
이미 나의 치부를 다 드러낸 것 같은 고교 시절 기억이 별로 즐겁지만은 않기 때문인지 30년 이라는 의미도 달리 새롭게 와 닿지는 않는다.(입사 30년이면 열돈짜리 순금돼지라도 받을 텐데…쩝..)
그냥,,,, 졸업 후 30년… 그 동안 비록 사회적인 성공이나 노후를 염려하지 않을 만큼의 부도 축적하지 못하였지만 그저 남들과 비슷한 삶의 질곡을 겪으면서도 아직까지는 희미하게 나마 꿈이 남아 있고 나를 의지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별 탈없이 지내온 것에 감사하고 있다. 이 세상 어떤 명예나 재물도 어찌 내 자식새끼 손가락 한마디보다 더 중요하랴..
다만, 만일 33년 전 그 까까머리 고1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죽어라고 학업에 몰두해 보고 싶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하고 싶었던, 아니 지금도 하고 싶은 일들, 그냥 먹고 살기에 급급하지 않아도 되고 매일 매일의 삶 자체가 보람일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해 보고 싶다.
학업이 시기를 놓쳤을 때 그 기회비용이 얼마나 큰 지는 지금도 충분히 느끼고 있기에……
From 몽
첫댓글 역시 박철몽이야!!!!! 멀리서 후원해 준 거 고맙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가슴이 몽클해지도록 감동적이다""
이젠 그냥 재미거리가 아니라 유럽사회에 대한 지식도 전해 주는 일석이조로구나. MC몽 아니, PC몽 화이팅.
슬슬 여유가 생기면서 간혹 샥시덜 사진도 올라오는구나이![~](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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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카메라도 좀 업그레이드 시키고 필요하면 위장복이나 장비도 좀 준비해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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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과감히 공격적인 필요도 있다고 본다.... ![흐흐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47.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