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송아지
최근에 에어 프라이어(Air Fryer) 두 개를 장만했다. 아들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예전만큼 새로운 것에 대해 관심도 덜 하고 호기심도 없어서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컴퓨터를 비롯하여 스마트폰 기능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가까운 친구마다 에어 프라이어의 편리함과 오븐보다 맛이 더 좋다는 이야길 계속 듣고 있던 터라 도저히 반짝이는 아들의 갈망이 담긴 눈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국어사전에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나아 감’이라는 뜻의 사자성어 승풍파랑(乘風破浪)이 아들의 의지와 맞물려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가듯 나를 공략했다. 그래서 비교 영상과 후기를 참고해서 하나를 주문해 봤다. 좁은 주방에 자리 잡는 것도 부담스럽고 오븐도 크고 작은 것이 두 개나 있어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어라? 의외로 오븐보다 시간도 절약하고 기름도 거의 사용하지 않아 되레 건강식으로 먹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철봉에 매달린 통닭구이도 가능한 용량이 좀 더 큰 에어 프라이어 하나를 더 구입하게 된 것이다. 최신식 휴대폰을 들고 있어 봐야 40% 기능만 인지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아들의 배려는 에어 프라이어를 이용한 요리는 모두 아들 차지가 되었다.
연어구이가 연어 스테이크로 탈바꿈하면서 멋진 장식까지 해서 내놓는 아들의 요리는 웬만한 레스토랑을 능가했다. 기름이 아래로 쫙 빠진 통닭 겉껍질의 바삭함과 부드러운 속살의 훈제 향은 비위가 약한 나조차 식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통 삼겹살 역시 그릴이나 바비큐 팬으로 구워 먹던 것보다 희한하게도 장작불에 구워낸 것처럼 돼지고기 냄새도 나지 않고 정말 맛이 좋았다. 겉의 바삭함과 달리 속은 촉촉하고 기름이 아래로 빠져서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아들 덕분에 기존에 알고 있던 맛의 새로운 변화를 만끽해 가던 어느 날, 아들은 에어 프라이어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예쁜 접시에 올려놓았다. 함께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당근과 감자와 버섯을 곁들여 일류 스테이크 하우스를 준비하고 나를 식탁으로 초대했다. 식사 준비하는 동안 부엌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던 아들의 나오라는 밝은 외침이 들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을 열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살금살금 걸어 나가다가 멀찌감치 식탁을 슬쩍 훔쳐보고는 잰 뒷걸음질로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근사한 식탁에 걸맞게 의상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또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저녁을 준비한 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게다가 식탁을 감도는 클래식 음악이며 일류 레스토랑 버금가는 멋진 분위기에 매료되어 비록 매 끼니를 해결하는 곳이었지만, 착각을 줄 만큼 모든 것이 훌륭했다. 순간 외식이 집 밖을 나가야만 외식인가?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신선하고 새로운 장소를 가까이 찾았으니 이것도 외식이지 싶다. 사실 가격에 비해 형편없는 음식 맛에 실망한 적도 있고 후회한 적도 있는데 이렇게 가까이 마음에 쏙 드는 곳에 와 앉으니 오늘은 정말 좋은 곳에서 외식하는 기분이었다.
무대 뒤편의 모델처럼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런웨이를 걷듯 다가가는 엄마를 보더니 싱긋 미소를 던지던 아들 녀석도 말끔하게 셔츠와 긴 바지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는다. 작은아들은 여러모로 엄마의 감성을 많이 닮았다. 부탁하지 않아도 통하는 작은아들과 달리 큰아들이 곁에 있었다면 옷을 꼭 갈아입어야 하느냐는 불만을 아주 쪼끔 내비쳤을 것 같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큰아들 역시 옷은 갈아입고 즐기고 있었으리라.
칼날이 지나갈 때 드러나는 고기의 빛깔과 고소한 향내가 코를 간질거린다. 먹기 좋게 썰어 첫 한 점을 내 입 안에 넣어 주는 다정하고 친절한 아들 녀석. 살살 녹아 흐르듯 고기의 부드러운 육질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엄마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던 아들의 표정이 그제야 환해지며 “엄마, 정말 잘 샀지? 엄마가 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이젠 좋지?” 이미 엄마의 답변을 아는 듯한 으쓱함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그래. 잘 샀어.” 고기 맛이 어떠냐고 묻지 않고 에어 프라이어를 구입했기 때문에 이런 즐거움도 얻은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아들은 엄마의 칭찬에 함박웃음을 짓고 그제야 자기 입으로 고기 한 점을 넣었다. 연신 맛있다며 즐거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불현듯 몇 해 전에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고 와서 들려주던 아들의 기상천외한 멋진 표현이 생각났다. 그때는 아들이 밴쿠버 필름 스쿨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을 때였다. VFX Compositer로 맡은 프로젝트가 끝나고 동료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를 다녀와서 일이다.
아들 녀석은 그 당시 하던 영화 작업이 끝나면 동료들끼리 조촐하게 파티하자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직장에서 아들은 동료 중 나이가 가장 어리고 대체로 일고여덟 살 더러는 열 살 넘게 차이가 나지만, 친구라 칭하며 잘 지냈다. 프랑스, 아이슬란드, 폴란드, 영국, 브라질 등등 캐네디언이 아닌 동료들도 적지 않고, 밴쿠버가 고향이 아닌 캐네디언도 있어서 다들 밴쿠버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가장 맛있기로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를 가자고 의견이 모이고 정한 곳이 ‘고담 스테이크 하우스(Gotham Steak House)’였다. 스테이크 크기가 엄청나게 크고 가격이 다른 곳의 서너 배가 되는 곳이라며 디저트에 음료수까지 먹다 보면 돈이 많이 나올 텐데 괜찮냐고 말하던 아들 녀석의 표정이 떠오른다. 엄마 빼고 친구들과 비싼 집에 자기 혼자만 가는 것이 미안한 구석이 역력했었다. 한편으론 그때가 아들로서는 사회 초보로서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엄마, 정말 행복하게 죽은 송아지야.” 황홀한 눈빛과 말투에 진심 어린 애정이 묻어 있었다.
“송아지가 죽을 때, 자기를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아~ 행복해! 하며 죽은 송아지였어.” 스테이크 맛이 어땠느냐고 가볍게 던진 인사말에 진정성 있는 아들의 최고의 찬사였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맛의 평가는 나 또한 그러한 맛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아직도 입안의 감촉이 느껴지고 생각나는지 입맛을 다시며 아들 녀석은 맛을 즐기고 있었다. “엄마, 소들이 죽는 순간에 죽나 보다 하고 죽거나 그냥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은 소를 그동안 우리가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정말 고기 맛이 달랐어. 같은 고기라도 오늘 내가 먹은 고기는 행복한 송아지 맛이었어.” 아들의 행복한 눈망울은 나까지 뭔지 모를 맛의 설렘에 들뜨고 그 기분마저 전가되어 덩달아 행복해지는 거였다.
“나를 맛있게 먹고 행복하세요! 라고 자기를 먹어 줄 사람을 위해 기뻐하며 행복하게 죽은 송아지였기 때문에 엄마, 나도 행복한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거야.” 아들의 꿈 꾸는 듯한 행복한 표정은 자연스럽게 내게도 행복한 송아지의 모습이 연상 되었다.
고기 한 점 입 안에 들어갈 때마다 쏟아지던 아들의 에어 프라이어의 요리 예찬이 끝나갈 무렵 우린 행복한 송아지의 기억을 꺼내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해 뒤에 그곳에서 가졌던 또 다른 행복한 추억을 나누기도 했다. 엄마의 59세 생일을 위한 아들의 깜짝 이벤트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그곳은 나나 아들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다시는 방문하고 싶지 않다. 황홀했던 아름다운 순간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후줄근한 편한 옷을 입고 때가 되면 습관처럼 차려 먹던 식탁의 변신이 오늘 나를 무척 기쁘고 설레게 한다. 우아한 식탁보를 펼치고 작은 꽃 화분을 놓아 장식하고 예쁘게 세팅한 접시에 조용히 음악까지 흐르니 외식을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짙은 자주색 원피스에 달랑거리는 귀걸이까지 하고 앉아있다 보니 정말 멋진 레스토랑에 와 있는 것 같다. 아들의 환한 얼굴에서 뿜어지는 밝고 행복한 기운이 잠언 23장 24, 25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마치 오늘의 내 모습을 위해 준비하신 말씀처럼 흐뭇하고 뿌듯하고 가슴에 담긴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행복한 송아지를 떠오를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맛을 일깨워주는 아들 덕분에 감사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다. 오늘은 행복하게 죽은 그 송아지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기도 해야겠다. 그리고 마음으로 전하는 편지를 송아지에게도 전하고 싶다.
"네 덕분에 아들과 즐겁게 지냈으니 정말 고마워 행복한 송아지야….”
-2022년 9월 9일 입 안에 넣은 고소한 스테이크에 떠올린 행복한 추억을 즐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