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비리길
2024. 3. 17
창녕 남지 개비리
창녕 남지 개비리는 용산마을에서 영아지 마을까지 이르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옛길로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을 지닌 길이다.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 길로 애용되었으며, 조선시대 고지도와 일제 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이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벼랑길에서 조망되는 낙동강의 경관과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이 옛길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또한 개비리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창녕 남지철교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옥관자(玉貫子) 바위(巖)
“옥관자 바위“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남지읍 동포마을 박ㅇㅇ씨가 수로 공사 중 발견하게 되었다. 중장비로 작업을 해도 바위가 움직이지 않아 박ㅇㅇ씨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몇 번을 시도한 뒤에야 바위 앞부분이 보이기 시작하여 조심스레 들어 내어보니, 마치 봉황(鳳凰)새의 알처럼 타원형 모양이었으며, 크기가 오척(五尺)이 넘었다. 바위는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고 영험한 기운의 느낌이 났다. 당시 주변을 살펴보니 옹달샘에는 서광이 비치면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주병의 산세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자욱한 운무(雲霧)를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기도를 드렸던 ”옥관자 (玉貫子) 바위(巖)“와 자식을 등관시킨 ”층층나무“를 옆에 모셔두어 재령이씨(載寧李氏)댁 할머니(昌原黃氏)의 뜻을 기리고자 한
남지개비리길의 유래
남지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바을 장아지 나루터까지 이르는 낙동강가에 있는 길로 벼랑을 따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이 길은 수립 미터 절벽 위로 아슬아슬 아어가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광을 가슴에 수놓아 올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호홉하며 걷는 시골 여행길이다. 또한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찻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개비리길 유래는 여러 이야기로 전해진다. 양아지마을ㅇ[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 뜻의 지방 사투리)였다. 본시 개의 젖이 10개 밖에 되지 않아 조리쟁이는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씨 할아버지는 이를 가엾게 여겨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디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 너머 시집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댁인 알게실로 데려갔다; 며칠 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닌겠는가 ,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山)을 넘어온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 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 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명의 급겅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다녔던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울 히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으로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