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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15일 목요일
[(백) 성모 승천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도 기뻐하며,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의 표징을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의 맏물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는 인사를 듣고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제1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20-27ㄱ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종착점을 보여 줍니다. 그 종착점은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로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는 성모님의 승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차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맏물”(1코린 15,23)이신 그리스도께서, 미완성의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르게 될 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 성모님의 승천이 구원된 이들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습니까? 삶의 많은 근심 걱정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한 달 후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들어 올려지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감사송에서 말하듯이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성장하시며, 천사를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시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으셨고, 그 계획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피난을 가시고 낯선 땅에서 사셔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시는 삶에서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저 마음에 새겨야 하셨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하셨으며, 예수님의 죽음까지 보아야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 모든 미완성을 거쳐 가신 성모님께서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하늘로 올라가셨기에,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온갖 불완전함을 겪으면서도 하늘을 바라봅니다. 믿으셨기에 복되셨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믿음을 간직한다면 복될 것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도 결핍과 흠결투성이인 저 자신의 모습, 백번 천번 결심을 하지만 크게 변화되거나 성장하지 않은 제 모습에 실망도 큽니다. 동료 형제들의 모습도 개진도진, 거기서 거기라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가뭄에 콩나듯이 멋진 형제를 만납니다. 부족함과 미성숙을 극복하고 하루 하루 일취월장합니다. 주어진 탈란트도 잘 활용해서 자신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런 능력치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니, 선배 입장에서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성장은커녕 퇴보하고, 겨우겨우 현상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인생, 성장하는 않는 신앙, 성장하지 않는 공동체,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이 올라간 분이십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가장 큰 진보를 이룬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오늘 우리에게 한 인간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는지, 얼마나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과 자극을 주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을 위한 성모님의 큰 희생과 노고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가 좀 더 예의주시해야 할 부분은 성모님의 신앙여정입니다.
한 평생 다양한 위기와 고통, 큰 십자가와 험난한 가시밭길이 성모님 생애 내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희미한 안개 속의 위험한 길을 걸어가시면서도 그 발걸음이 늘 당당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들려온 하느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새롭게 결코 만만치 않은 신앙의 길을 기쁜 얼굴로 걸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제 성모님께 주어졌던 역할이 우리 모두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그 옛날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는 그저 오래전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아기 예수님의 잉태는 되풀이되어야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미혼모가 낳고 떠난 아기 한 명을 입양하면 그것은 내가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도 힘들지만 도움이 필요한 보육시설 아동들의 구체적 결핍을 채워주는 일은 어떤 면에서 내가 직접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필요에 응하는 일, 작지만 시간 내어주는 일은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멀리 계셔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거듭 태어나셔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아쉽지만 또 다시 나를 떠나고, 안타깝지만 어제와 결별하고, 늘 새로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부단히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때로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때로 작은 울타리에 갇혀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한히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가 역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성모님처럼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결국 우리 안에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늘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길 바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8년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목사님이 성당엘 찾아왔습니다. 대화 중에 목사님은 제게 몇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모님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 해 줄 수 있지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배운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답답했습니다. 먼저 흠숭과 공경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흠숭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공경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성인과 성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는 좀 더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분이 이제 너의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모님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서 전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5살 때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다. 큰 길에 나갔다가 그만 버스에 타고 말았습니다. 내리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얌전하게 생겨서 누가 데리고 갔을 거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길을 잃어버리면 파출소로 가라고 했던 아버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파출소로 갔고, 거기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버님은 실종신고를 했고, 제가 있는 파출소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머물면서 사제들과 대화를 하셨는데, 저는 파출소에 머물면서 경찰 아저씨가 사주신 순두부찌개를 먹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할 성당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한 모습으로 사목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으로 갔을 때를 빼고는 어머니는 언제나 저보다 먼저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1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하늘로 오르는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네.”(루카 1,47)
내
앞에
길 하나
놓여 있으니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하늘로
부르시는
임의 손잡고
지금여기에서부터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믿음으로 한걸음
희망으로 한걸음
사랑으로 한걸음
더디더라도 쉼 없이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길 없다 외면하는
뭇사람들 틈바구니
행여 놓칠세라
임의 손 꼭 붙잡고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한걸음 한걸음에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임만이 오롯이 남아
임 품에 가벼이 안겨
하늘로 오르는
길이라네
오늘의 성인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Stanislaus Kostka)
활동년도 : 1550-1568년
신분 : 신비가
지역 : 폴란드(Poland)
같은 이름 : 스따니쓸라우스, 스타니슬라우스, 쓰따니쓸라오, 코스트가
폴란드 로스트코보(Rostkovo) 성에서 태어난 성 스타니슬라우스 코스트카(또는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었다. 그는 개인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14세 때에 비엔(Vienne)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근면과 신심 그리고 고행으로 유명하였고 또 수 차례에 걸쳐 환시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고자 했으나 비엔의 관구장은 너무 어린 나이 등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자 그는 집을 몰래 빠져나와 순례자의 복장을 하고 당시 독일의 예수회 총장인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12월 21일)가 있는 딜링엔(Dillingen)까지 350마일을 걸어가 입회를 청하였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그가 비록 17세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착실하고 열성적인 모습에 반해 입회를 허락하고 로마(Roma)의 수련소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567년에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더욱 엄격한 고행을 하였고, 미사 중에 자주 탈혼하였으며,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예수회 수련자로서 단지 9개월을 지낸 뒤 사망하였다. 그는 160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31일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서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타르시치오 (Tarsicius)
활동년도 : +3세기경
신분 : 복사,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타르시치우스, 타르시키오, 타르시키우스, 타르치시오, 타르치시우스, 타르키시오, 타르키시우스
성 타르시키우스(Tharsicius, 또는 타르시치오)의 행적에 대한 것은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그에게 바친 "성체를 위한 소년 순교자"라는 헌시에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교회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복사의 수호성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소년다운 용기와 신앙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전설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가 살던 3세기 말경에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한번은 미사가 끝난 후 신부가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감옥까지 성체를 모시고 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가는 도중에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어린 성 타르시키우스가 나서서 그 일을 자청하였다. 너무 어린 것을 걱정하는 신부에게 그는 자신이 어리기 때문에 경비병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신부도 이 말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체를 모시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감옥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은 성 타르시키우스에게 같이 놀자고 했지만 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거절하고 서둘러 가려 하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의 손에 있는 성체를 발견하고 빼앗으려 하자, 이를 거부하는 성 타르시키우스와 친구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급기야는 친구들이 돌로 그를 쳤다. 이때 지나가던 군인이 다가오자 친구들은 도망갔고, 그는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주교에게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여 주교에게 성체를 감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추기경 와이즈먼(Wiseman)의 소설 "파비올라 혹은 카타콤바의 교회"(Fabiola or the Church of the Catacomb, 1854)의 소재가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성 타르시키우스는 복사와 첫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타르키시우스(Tarcisius)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