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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의 타당성
- 김형효 VS 이승종
오늘의 동양사상, 2002년 봄호 - <논과 쟁>
이번 호의 〈논과 쟁〉에는 모두 세 편의 글이 올라와 있다. 주제 면에서 이들 세 편의
글은 지난 5호(2001 가을)에서 다루었던 '동양 철학 담론'에 대한 논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
지난 5호에서는 '근래의 동양 철학 담론,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표제 아래 이른바 '도올 신
드롬'으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동양 철학 열기를 논쟁적으로 되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 자리가 동양 담론을 둘러싼 논쟁의 '2회전'을 알리는 실질적인 첫 라운드
가 되길 기대한다는 희망을 끝에 피력한 적이 있는데, 그 희망대로 이번 호에도 연속하여
그와 연관된 글들을 싣게 되어 우선 기쁘다.
전체 세 편 가운데 앞의 두 편은 노장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의 타당성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지난 5호의 김진석 교수와 김성환 교수 사이의 논쟁을 새로운 방향으로 한 차원 진
전시킨 글들이다. 먼저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은 이승종 교수의 글이다. 이승종 교수는 일단
노장에 대한 해체론적 접근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관점에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성과물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이승종 교수가 검토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이 방면의 독보적인 성과로 평가
받는 김형효 교수의 저서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이다.
이승종 교수가 김형효 교수의 작업에 대해 문제삼는 것은 세 가지이다. 김교수가 노장과
데리다 사이의 '같음'을 읽어내는 데에만 너무 집중함으로써 이 양자간의 '다름'에 대한 적
절한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첫째이고, 노장과 데리다를 연결짓는 전체적인 그림
을 지지해줄 수 있는 중범위 지대의 논리적 짜임새가 미비되어 있다는 것이 둘째이며, 노장
의 사유를 선험주의로 보고 있다는 점이 셋째이다.
이승종 교수의 이런 비판에 대한 김형효 교수의 답변은 근본적이다. 김교수는 먼저 구조
주의적 관점에서 철학적 사유의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 뒤, 이승종 교수가 생각하는
철학(논리)과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철학(논리)은 서로 다른 영역에 걸쳐져 있는 것임
을 분명히 함으로써 앞의 두 비판에 대해서 문제 자체를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리고 세 번째 비판에 대해서도 노장이 말하는 도는 이 세상의 원초적 문법을 의미한다는 점
에서 그 사유는 여전히 선험주의적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승종 교수의 비판에 대한 김형효 교수의 이러한 답변은 처음부터 기획되었던 것은 아니
다. 여기에 글을 투고한 이승종 교수가 같은 글을 한국분석철학회의 동계세미나(2월 20~21일.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발표한 것을 계기로 김형효 교수가 스스로 논평자로 참여함으로써 의미있는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후학의 비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토론의 장에
함께 참여하는 귀감을 보이고 또 편집마감에 임박한 무례한 원고청탁을 흔쾌히 수락해 주신
김형효 교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도구적 세상보기와 초탈적 세상보기 / 김형효
1. 철학적 사유의 세 가지 영역
대체적으로 약 10여 년 전을 전후하여 발표된 나의 노장 사상에 관한 교직성交織性(la
textualit )에 입각한 졸저와 졸고들을 진지하게 읽고 이렇게 비판적 시각에서 음미하여 주
신 이승종 교수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 이승종 교
수의 지적 사항에 대해서 직접적인 해답이 아닌 간접적인 우회의 소견을 피력한 데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런 이유는 나의 무성의 때문이라기보다 이교수가 의거한 비
판적 논거들을 잘 알지 못하는 논리학적 무지에 기인한다. 이 점을 깊이 감안하여 나의 소
견을 들어주시기 바란다.
이교수의 비판적 소론을 읽고 역시 철학은 도대체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의
성찰을 떠나서는 철학적 논의가 심화되기 어려운, 그런 본질을 지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다
시 한번 가졌다. 이 점이 철학이 과학과 다른 점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이 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나는 철학이 대상 영역에 관한 지식의 탐구가 아니고, 이 세상
을 근원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의 깨달음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사는 시대에 따라 명멸하는 수많은 철학적 학설들의 묘지명들을 넘어서 세상을 보는 몇 가지 사유들이 구조적으로 이간易簡하게 집합되어 정리되는것 같다. 그러므로 철학사는 철학자들의 실타래처럼 얽힌 학설들의 무덤과 그 묘지명들을 정신없이 살피게 하는 일이 아니라, 유사한 구조들이 어떻게 통사通史의 변화와 함께 거의 불변적 사유 구조 속에 반복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사한 사유 구조들이 몇 개로 분류된다는 것은 다른 사유 구조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
제로 한다. 이 점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유는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흔히 동양 철
학은 서양 철학과 다르다고들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동서고금의 차이를 넘어서 철학은
서로 유사한 것들과 다른 것들이 늘 반복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사유 구조
의 결에서 이런 유사성의 구조와 또 다른 저런 유사성의 구조들이 있을 뿐이지, 지역과 시
대와 사람들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철학들이 인과적으로 혼란스럽게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철학 이론들과 학설들이 혼란스럽게 부침하지만, 이 세상을 읽고 보는 근원적
방식에서 본다면 다만 몇 개의 것들이 유사성들을 지니며 모일 수 있기에, 결국 철학은 유
한한 몇 개의 철학소哲學素들(philosophemes)로 그려진 세상보기의 몇 가지 퍼즐짜기와 비슷하다.
그런 철학소들을 간단히 예시해 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철학은 세상보기를 각각 '무위적
無爲的/ 당위적當爲的/ 유위적有爲的'인 진리(道)에 의한 퍼즐짜기로서 구분된다. 하이데거
에 의하여 해석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스피노자의 '신즉자연神卽自然'(Deus
sive natura) 사상, 하이데거와 노장 사상의 '유有/무無'의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사유,
그리고 불교 사상에서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의 '부즉불리不卽不離'의 사유와 유학 사상에서의 안자顔子와 맹자적 사유의 일부, 양명학과 선학에서의 '무선무악無善無惡'의 사유와 데리다의 이중긍정과 이중부정 등의 사유법이 대개 세상을 무위적 진리로 해석하려는 철학적 유사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들 사유의 유사성은 자연성(Physis)의 무위성을 근원으로 하여 마음을 그 자연성의 무위적 현시와 은적(사라짐)과 함께 동거하려는 물학物學의 진리를 견지하려 한다는 점이다. 물학과 자연학自然學과 무위학無爲學은 다 유사한 진리의 개념들을 말한다. 이런 사유의 유사성은 또 인간의 자연동형론(physiomorphism)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본다. 즉 인간을 자연성(Physis)의 그물망 속으로 해체시키는 초탈적 사유가 인간의 자연동형론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당위적인 선善의 형이상학과 도덕학이 있다. 이런 형이상학과 도덕학은
서양에서 플라톤 이후의 진 선 미의 형이상학과 그 도덕학, 그리고 동양에서는 증자曾子에서부터 시작하여 맹자적 사유의 일부를 거치면서 북송의 정이천程伊川을 통해서 이어져 온 주자학의 계보가 여기에 귀속한다 할 것이다. 여기서 맹자 사상을 무위와 당위로 이분화하는 까닭은 맹자적 사유의 이중성에 기인한다. 즉 맹자가 요堯순舜 식의 무위적 자연성을 유가의 도道로 보기도 하고 또 탕湯무武 식의 당위적 도덕성을 유가의 도로 간주하는 이중적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가 그런 태도를 취한 데는 공자의 사유가 이미 세 가지의 상반성을 돌려나기(共生)의 복합성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사유는 안자로 나타 나는 무위적 사유, 증자로 표현되는 당위적 사유, 뒤늦게 순자로 대변되는 유위적(작위적) 사유의 세 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즉 안이 복잡한 일종의 'implex'인 셈이다.
이 당위적 선의 형이상학(도덕학)은 진리를 내면적 영혼의 지고선과 동일시하고, 세상의
문제(problem)로서의 부조리를 마음의 내면적 의사擬似 문제(pseudo-problem)로 해소하여(resolving) 세상을 마음(영혼)의 혁명으로 다시 보려는 그런 심학心學을 뜻한다. 마음의 혁명은 마음(영혼) 속에 깃든 영원한 실재의 빛에 의거해서 세상을 다시 바꾸려는 그런 의지의 노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위학은 형이상학이고 심학이다. 이 심학은 세상을 초월하려는 신학적 형이상학과 세상을 다시 '어진 마을'(里仁)로 개조하려는 도학적 형이상학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심학은 자연의 인간동형론(anthropomorphism)의 본질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본질은 자연성을 성선性善의 고향으로 여겨 그 성선을 인성의 본질로서 이행시킨다. 그래서 인성이 비록 후천적으로 악에 젖어 있고 또 근본악(das Radikalb se)의 경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여도, 그 인성이 천성天性이나 신성神性의 씨앗을 결코 근원적으로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낭만적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학은 낭만적 자연의 인간 동형론이라고 여겨진다. 낭만적인 인간동형론의 의미는 낭만적으로 세상을 소유하려는 깊은 의도를 간직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세상에 대한 형이상적-도덕적 혁명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혁명은 성선적 관념에 의한 세상의 소유이므로 나는 이것을 마르셀의 용어를 빌려 함유적 소유(l'avoir-implication)라고 부르고 싶다. 함유적 소유는 세상을 경제적, 과학 기술적으로 소유하려는 점유적 소유(l'avoir-possession)의 방식보다는 세계라는 대상을 장악하려는 소유의 형태가 훨씬 묽은 것처럼 보이기에 존재론적 세상 이해와 가까운 것 같지만, 이념이나 관념에 의한 소유의 방식이므로 어떤 점에서는 경제적 과학 기술적 세상보기보다 더 안으로 집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형태의 자연의 인간동형론이 있다. 이런 형태의 인간동형론을 우리는
실학實學이라고 부른다. 심학은 자연을 지고선의 고향으로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실학은 자연을 그런 은유적 낭만의 고향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을 무심한 기계론
과 생물학적 본능의 투쟁적 생존 전략이 지배하는 그런 곳으로 간주한다. 인간은 자연이면
서 동시에 사회다. 인간의 심신心身은 자연의 기계론적 작동의 축소판이면서 자연계에서 가장 본능의 힘이 취약한 그런 동물이다. 본능은 자연계의 생존 전략이나, 인간은 취약한 본능으로 그런 기계론적 생존 전략에 의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본능 대신에 지능을 갖고 사회적 생존 전략을 강구한다. 본능은 닫힌 지능이고 지능은 열린 본능과 유사하다. 둘 다 사회적 생존 전략을 위한 실용적인 도구이다.
실학은 물학이나 심학과 달라 주체가 객체를 문제로서 정립한다. 여기서 쓰여진 문제(le
probl me)의 개념은 초문제(le m ta-probl matique)로서의 신비(le myst re)와 구분한 마
르셀의 철학 용어로 이해되었으면 좋겠다. 마르셀이 말한 '문제'의 용어는 모든 객관적 대상이 주관에게는 문제로서 제기되고, 주관은 그 문제로서의 객관을 풀어서 정답을 찾아야 하는 그런 문제해결사로서 군림하게 되는 철학적 관점과 분리되어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실학은 객관적 대상을 늘 문제로서 풀어야 할 도전으로 여긴다. 그래서 문제를 객
관적으로 해결해서(solving) 답을 찾아야 하는 이성적 동물로서의 지능적 주체는 유위적(작
위적) 기획을 갖고 인간의 다차원적인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도구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지능의 원천으로서의 이성은 이 점에서 늘 도구적이다. 이런 실학의 유위적 진리는 과
학 기술과 경제의 세계에서 그 타당성을 가장 확실히 보장받는다. 그래서 실학은 과학적이
고 실용적이다. 모든 과학은 다 실학이다. 논리학도 수학과 같은 논리 과학이다. 이 실학적
자연의 인간동형론은 꿈꾸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세상의 점유적 소유
(l'avoir-possession)를 겨냥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앞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하였지만, 세상을 문제로서 보고 그 문제로서의 세상을 과학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장악하려는 그런 소유 의식을 뜻한다. 동양에서 순자의 철학과 청대淸代 이후의 실학이 이 계열에 속하고, 서양에서는 근대의 합리론과 경험론과 그 두 가지 사유를 결합한 칸트적인 인식 이론 등에 의하여 흘러나온 모든 종류의 과학 철학이 거의 이 영역의 산물이다.
2. 실학적 객관성과 물학적 교직성
이승종 교수가 행한 나의 졸저와 졸고에 대한 논리적 비판을 나는 같은 수준의 논리로서
응답을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나의 논리학의 수준이 이교수의 실력에 버금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노장 해석이 내가 말한 실학의 철학과 유위적 진리의 영역이 아니고 무
위적인 초탈의 도를 밝히는 영역에 속하는 작업이었던 까닭에 이교수와 내가 근원적으로 서로 유사성이 없는 다른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교수가 지적한 노장 사상과 데리다 철학 사이의 '동치성'(equivalence)을 나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내가 시도한 노장과 데리다의 비교는 다만 동서와 고금의 시간적 공간적 간
격을 넘어서 유사한 사유의 구조를 정시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데리다도 기존의 존재신
학적 형이상학을 해체시키는 자기의 교직성(la textualit )이 자기에 의하여 발명된 것이 아
니라, 이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등의 거장들의 사랑방이 아닌 안방에
서 무심코 나타났던 그런 사유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데
리다보다 이들 철학자들의 사상을 더 잘 소화했다고 보지 않으므로 거기에 나의 견해를 덧
붙이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런 교직성의 독법이 이미 동양에서 노장 사상에서의 '유/무'의
동거성과 '소요유逍遙遊'와 '제물론齊物論'의 이중성, 불교의 화엄 사상에서의 '성기性起
'(Ereignis)와 '성거性去'(Enteignis)의 여래如來와 여거如去의 비동시적 동시성과 같은 진리의 양면성, 원효의 '일심一心/삼공三空', '불연不然/대연大然', '무리無理/지 리至理' 등의 새끼꼬기와 같은 대사법代謝法은 데리다가 말한 저 교직성의 사유 논리와 다를 바가 없고, 또 이 점에서 세상을 무위의 사실성으로 깨달으려 하는 그런 철학적 사유 구조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유사성은 서로 비슷함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이 세상에 논리적 작위의 경우를 제외하고
완전히 일치하는 동일성이 어디에 있겠는가? 유사성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함을 말한다.
내가 아는 한에서 데리다, 특히 하이데거와 불교적 사유와 노장적 사유, 그리고 양명학 좌
파(예를 들어, 王畿)의 사유가 아주 유사하다. 어떤 점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프
랑스적으로 변형한 냄새가 진하다. 데리다를 차연差延(la diff rance)의 진리를 설파한 철학
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진리는 하이데거가 이미 그 전에 제시한 'Unter-Schied'의 반反개
념과 무엇이 다른가? 그 동안 하이데거 철학의 난해성으로 사람들이 그를 잘 소화를 하지
못해 저것이 '차연'의 반개념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느껴진다. 데리다가 '차이'를 뜻하는 불어의 'diff rence'와 '차연'을 의미하는 'diff rance' 사이에 발음상의 동일성을 중요한 특징으로 지시했듯이, 하이데거도 '차이'를 말하는 독어의 'Unterschied'와 발음상 동일한
'Unter-Schied'를 만들어 그의 사유를 표시하고 있음을 말장난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낱말은 데리다적인 '차연'의 의미와 같은 그런 뜻을 데리다 이전에 이미 하이데거가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사하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다. 유사하다는 것은 사유의 문법과 그 구조의 논
리가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닮음을 물학적이라고 규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여 하이데거의 물학이 정신성(Geistigkeit)의 그윽함을 보여주는 것은
데리다가 세상을 교직적 사유의 정교함으로 입론하는 이지성(l'intellectualit )과 뉘앙스에서 차이를 띠고 있다. 이 점은 불교적 사유의 수행적 정신성이 노장적 사유의 사실성의 깨달음과 차이를 노정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사유의 유사성은 구조적(structural)이고 계열체적(paradigmatic)이나 차이성은 연속적(serial)이고 결합체적(syntagmatic)이다. 이 점을 조금 설명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이데거와 데리다, 불교와 노장 사상 등이 유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유사성 속에서
차이가 발견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그들의 사유가 구조적으로 유사해서 유사한 계열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들의 사유가 철학적으로 다 초탈적이면서 교직성을 세상의 근원적인 무위적 사실로 보려는 유사한 계열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유가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이 산 시대가 서로 달라 생각을 표현하여 통사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선택하고 결합하는 어휘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며(예: 나는 자동차를 타고 여기에 왔다/ 나는 말을 타고 여기에 왔다), 또 그들의 나라가 포함된 문화권의 업業으로서의 역사가 상이하여 업의 연속이 다르게 연계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사성 속에서의 차이는 업의 연속성(역사)과 사유를 표현하는 매개로서의 어휘가 시대적으로 다름에서 오는 통사적 결합의 차이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이승종교수가 제기한 '비대칭성'과 '중범위성'의 각도에서 이루어진 논리적
비판은 내가 말한 논리나 문법과 다른 차원인 것으로 보인다. 이교수의 논리는 논리학(논리
과학)의 논리로서 실학적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식의 유위성이지만, 내가 말한 논리와
문법의 의미는 물학적인 교직성을 뜻하는 무위성과 연관된 그런 의미를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없겠는가? 나는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하다'의 어구인 'Es gibt'(그것이 준다)가 실은 라깡이 말한 무의식의 문법인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a가 존재한다'(Le a est, l o je ne
pense pas)와 유사한 물학의 사유 문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직관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불투명하다. 즉 하이데거의 'Es'(그것)와 라깡의 ' a'(그것)가 유사한 물학적
사유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희미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해 보아야 될 것 같다.
아무튼 노장의 도는 형이상적 도덕적 당위의 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 유위적 도
구의 도를 지칭하지도 않는다. 노자와 장자의 차이는 있으나 그들이 다 초탈의 도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초탈적 세상보기는 도구적 세상보기처럼 현실적이지 않고, 도덕적 세상보기처럼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달리의 초현실주의적 그림에서는 시계가 열에 녹은 치즈처럼 축 늘어져 있다. 현실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지시하는 시계를 그는 녹여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시간의 현실에서 벗어나 초현실의 문지방으로 우리를 인도한 셈이다. 초현실주의의 의미는 비현실주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탈해서 봐야 아전인수격이 아닌 이 세상의 본질로 서의 사실성이 제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와 비현실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되리라. 오히려 낭만적인 심학의 도학이 이 세상을 비현실적인 꿈으로 혁명하려는 사유의 범주에 더 유사하리라 본다.
장자의 사유는 이 세상을 성선의 도덕으로 혁명하겠다는 맹자적 낭만주의자들과 이 세상
을 실용적 지능으로 경영하겠다는 순자적 현실주의자들을 다 부질없이 세상을 어떤 점에서
소유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비꼰다. 그에 의하면 소유적 발상법은 언제나 인간 중심주의를 낳아서 보편적 자가성이든 이기적 자가성이든 자아성自我性이 진리라고 여겨 세상을 그 자아성의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헛된 정열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소요유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노닐면서 세상을 초탈적인 차연의 사유로서 보기를 종용한다. 오직 자가성을 비운 마음만이 세상의 근원적 사실로서의 교직성과 연기緣起의 법인 대사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종 교수가 말한 백정인 포정 丁이나 기타 장인들의 이야기는 실학적인 도
구적 기술자의 찬양이 아니라, 자연이 투쟁과 친교의 이중성을 무심히 그리고 절묘하게 반
복하듯이 그렇게 의식적으로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하나의 물物처럼 만들어 자연이
가는 길을 같이 걷는 그런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도르레로 물을 긷는 기
술을 마다한 것도 기술적 사유의 지배성을 고발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세상
을 혁명하거나 이용하려는 유식한 사람들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민중주의의 이념을 설파하
는 대변인도 아니다.
끝으로 이승종 교수가 졸저『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에서『도덕경』1장의 독법의 이상
한 점을 지적하였다. 대단히 예리한 파악이고 그의 비판이 일리가 있고, 따라서 내가 그런
오해를 받지 않을 만큼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한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
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라는『도덕경』1장의 한 구절에 대한 나의 독법을 내 방식대로 풀이하면 '무명이 만물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유명이 천지의 시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이교수의 물음이다. 왜냐하면 무명이 만물을 담는 코라(khora)와 같은 자궁이고, 유명이 천/지의 차이를 알리는 이름의 시작이라고 내가 이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곧 그의 글에서 왜 내가 그런 식으로 독해를 하였는지 하는 이유를 인용하고 있다. 앞의 구절은 다 무와 유가 서로 독자적인 자기 봉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는 유에 의하여 상감되어 있고, 또 동시에 유도 무에 의하여 동봉되고 있는 수사학적 교차배어법(chiasmus)이나 무의 바탕(le fond)에 유의 무늬(la figure)를 보는 것과 유사함을 언명한 것이다. 즉 무명의 무는 천/지라는 유명의 쪼개짐을 가능케 하고, 또 만물이라는 유명의 유는 이미 허공이라는 무명의 무 안에 동봉되어 있기 때문에 원효가 말한 대사법처럼 유/무가 서로 교대로 주고받는다는 말이다. 나의 독법은 바로 이 점을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사법을 좀 더 자세히 해석하지 않았던 미비점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마지막으로 이교수는 노장 사상의 해석에 대한 선험성을 비판하였는데, 우리가 물학의 존
재 양식, 자연성(Physis)이 생기하고 있는 논리 또는 무의식의 문법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
다면, 그것을 선험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을 경험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경험적이란 말은 의식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고, 인간 중심적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노장적 사유가 말하는 도는 이 세상의 원초적 문법을 의미하고, 그
것이 불교가 말하는 진여眞如와 유사하고, 데리다가 말한 교직성(la textualit )이 하이데거
가 말한 유(Sein)와 무(Nichts)의 동거성(Selbigkeit)과 유사하다면, 이런 유사성을 세상의
선험적 사실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글쓴이 소개
김형효金炯孝 :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에서 철
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이다.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비롯하여『데리다의 해체철학』,『베르그송의 철학』,『메를로- 뽕띠와 애매성의 철학』,『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원효에서 다산까지』,『하이데거의 마음의 철학』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노장의 해체와 분석 / 이승종
노장 사상을 해체적으로 읽어낸 김형효 교수의 기념비적인 텍스트들의 철학적 의의는 아
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한국도가철학회에서 엮어낸 {노자에서 데리다까지}(예
문서원)에 수록된 여러 편의 글들도 그의 선구적 해석에 빚지고 있다. 김형효 교수의 해석
은 노장 사상과 해체주의의 만남을 둘러싼 근래의 논의의 출발점이자 심장부이다. 김형효
교수의 작업을 '논과 쟁'에 부치려는 것도 그 눈부신 성취를 더욱 심화하고 만남의 가능성
문제를 천착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들을 비대
칭성, 중범위성, 적합성, 이렇게 세 가지 범주를 통해 비판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이 세 범
주가 의미하는 바는 글의 전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1. 비대칭성
동서고금이라는 네 기준에서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여타의 기준에서 서로 다른 영역에 놓
여 있던 텍스트들을 불러내 대화시킬 때 범하기 쉬운 오류는 텍스트들간의 일치와 차이 어
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텍스트간의 일치는 한 텍스트가 놓인 층위에
다른 텍스트를 같은 눈 높이로 자리 매김 하는데서 기인하곤 한다. 그러나 철학적 만남이
생산적인 대화로 성공적으로 이끌어지려면 만남에 참여하는 어느 한 쪽이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상대방이 수용할 것을 전제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보편적 합리성이나 과학적 객관성과 같은 이념이 쌍방간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척도를 제공해준다는 전제하에 만남의 틀이 짜여질 때, 그 대화는 애초부터 불평등한 관계에서 시작될 것이며 결국은 비생산적인 형태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폭로하고 있듯이 전제되는 두 이념은 서양의 이성중심적 형이상학과 그 뿌리를 같이 하는, 서양중심적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텍스트간의 대화의 이념으로 기존의 일치나 차이대신 상동과 상사를 대안으로 제
시한다. 상동은 다름 속의 같음을, 상사는 같음 속의 다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상동과 상
사는 같음과 다름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서로 엮어내고 풀어낸다. 상동의 한 예로 우리는
양자역학의 형식화에 공헌한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이론 텍스트들을 들 수 있다. 각각 행렬과 파동함수라는 서로 다른 개념 틀에 의거하는 두 학자의 텍스트는 후에 논리적으로 동치임이 증명되었다. 상사의 한 예로 우리는 광학의 담론을 양분해온 입자설과 파동설이라는 이론 텍스트를 들 수 있다. 빛이라는 같은 주제에 대해 경합해 온 두 텍스트의 상이성은 빛이 입자성과 파동성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상동과 상사를 하나의 논리적 모형에 의해서 설명해보기로 하자. 파푸스의 분석의 관점에
서 우리는 (1) {(q ⊃ p) & q}, (2) {(~p ⊃ ~q) & q}, (3) {(q v p) & ~q}, (4) (p & q)
등의 전제로부터 p를 추론할 수 있다. 역으로 파푸스의 종합의 관점에서 p로부터 (1), (2),
(3), (4)를 소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p는 (1), (2), (3), (4)와 같이 상이한 전제에
공유되어 있다. 전제 (1), (2), (3), (4)가 p를 공유하기 위해서 이들 네 전제가 논리적으로
동치일 필요는 없다. 아울러 이들 각각의 전제로부터 p를 이끌어내는 추론의 근거도 네 경
우 모두 같지 않다. 요컨대 (1)의 경우에는 긍정식(modus ponens), (2)의 경우에는 부정식(modus tollens), (3)의 경우에는 선언 논법(disjunctive argument), (4)의 경우에는 단순화(simplification)가 각각 그 추론의 근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네 전제는 모두 p를 함축하고 있다. 이를 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다이어그램은 한편으로는 (1), (2), (3), (4)와 같이 상이한 전제가 p라는 같은 결론
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동을 나타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한 p가 각각 (1),
(2), (3), (4)라는 상이한 전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상사를 나타내고 있다.
노장을 해체적으로 읽는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는 세상 만물을 단순한 일치나 배타적 차이
를 넘어선 관점에서 볼 것을 역설하고 있지만, 정작 그러한 주장의 근거를 이루는 노장의
텍스트와 데리다의 텍스트간의 교직은 일치 일변도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은 인정되고 부각되면서도 데리다의 텍스트는 노자와 장자의 텍스트와 무차별적으로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김형효 교수가 서양의 기준과 잣대로 동양의 텍스트를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노장적 사유의 흔적을 찾아내고 노장의 텍스트에서 데리다적 사유의 흔적을 찾아내는 대칭성을 관철했다는 점이 김형효 교수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칭성이 노장과 데리다가 정말 같은 층위와 같은 눈 높이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다른 곳에서 상세히 논했듯이 우리는 김형효 교수가 본 일치에서 상동과 상사를 본다. 김형효 교수가 확보한 노장과 데리다간의 동치성(equivalence)에서 우리는 사유의 층차와 교차를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형효 교수의 데리다와 노장의 해석에 텍스트간의 대칭성을 넘어선 비대칭성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 중범위성
김형효 교수에 의하면 데리다와 노장 사상의 공동의 적은 이성중심주의이다. 우리는 이성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핵심이 논리라고 본다. 논리학(logic)은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러던 논리학이 점차 기능화되고 도구화되고 형식화되고 수학화되어 논리학은 이제 그 철학적 성격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성중심주의의 비판자들 중에서 하이데거가 논리학사의 해체를 위한 밑그림을 제시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성중심주의의 핵인 논리를 해체나 비판의 구체적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성중심주의 비판이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임을 시사한다.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는 도를 사유의 문법과 논리로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동일률에 입각
한 전통적 논리학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김형효 교수의 논리학 비판은 물론 데리다
에 힘입은 바 크고 하이데거와도 상당부분 중복되지만, 하이데거의 통시적 접근과는 달리
공시적 관점에서 도의 논리와 문법을 전개하고 있다. 김형효 교수는 도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하고 현묘한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본 종래의 해석을 일축하면서 도의 논리화에 주력한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일단 긍정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 시도가 성공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이유를 하나의 예를 통해 보이고자 한다.
데리다에서 빌어온 보충대리의 '논리'에 대해 김형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것을 안이라 하고 다른 것을 바깥이라고 해보자.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이니
다른 것이 같은 것 속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 즉 다른 것이 같은 것에 접목되고 상감되고
있다. 그래서 바깥은 안과 다르지만 같다.
이 인용문은 '그래서'를 전후로 갈라지는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논증처럼 보
인다. 첫 문장은 논증에 사용되는 용어 사용의 규칙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문장의 전반부
는 논증의 전제이다. 두 번째 문장의 후반부와 세 번째 문장은 두 번째 문장의 전반부를 부
연하는 문장이기에 생략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논증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은 논증이 된다.
같은 것을 안이라 하고 다른 것을 바깥이라고 해보자.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이다.
∴ 바깥은 안과 다르지만 같다.
이를 김형효 교수의 논증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논증은 타당한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논증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가르는 기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증의 전제가
논증의 결론을 함축할 때 그 논증은 타당하고, 그렇지 않을 때 부당하다. 논증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결론을 어떻게 함축하는지를 보이는 연역의 과정을 제시하면
된다. 논증의 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논증과 형식에서는 같지만 전제가 참이고 결
론이 거짓인 논증을 제시하면 된다. 문제를 선명히 하기 위해 김형효 교수의 논증을 형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번역 편람(같은 것:s, 다른 것:d, 안:i, 밖:o)
(s = i) & (d = o)
s ≠ d
∴ (o ≠ i) & (o = i)
그런데 우리는 이 논증과 형식은 같지만 부당한 다음과 같은 논증을 만들 수 있다.
번역 편람(고양이:s, 개:d, 야옹이:i, 멍멍이:o)
고양이를 야옹이라 하고 개를 멍멍이라고 해보자.
고양이는 개와 다른 것이다.
∴ 멍멍이는 야옹이와 다르지만 같다.
이 논증의 전제는 참이고 결론은 거짓이다. 따라서 이 논증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이 논
증과 형식을 공유하는 김형효 교수의 논증도 부당하다. (여기서 세세히 거론할 수는 없지만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에는 이와 유사한 부당한 논증들이 많이 발견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형효 교수의 논증의 결론으로부터는 다음의 연역 과정을
거쳐 어떠한 임의의 a도 이끌어낼 수 있다.
1. (o ≠ i) & (o = i)
? a
2. (o = i) & (o ≠ i) 1. 교환 법칙
3. (o ≠ i) 1. 단순화
4. (o = i) 2. 단순화
5. (o ≠ i) v a 3. 첨가법(Addition)
6. a 4, 5. 선언 논법
Q.E.D.
이 논증이 시사하는 바는 김형효 교수의 인용문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우리가 무슨 말을
이어나가도 논리적으로 다 타당하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 김형효 교수의 논리에 전지전능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는 김형효 교수의 논리가 작동할 수 없다는 파산선고에 다름 아니다. 김형효 교수의 논리는 프레게의 수리논리학이나 칸토르의 집합론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의 비판적 분석에 대해 김형효 교수를 옹호하는 몇 가지 반론을 예상할 수 있다. 첫
째, 김형효 교수의 인용문을 기호언어로 옮겨 형식화하는 작업을 거부하는 반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김형효 교수는 노장의 텍스트를 의미론이 아니라 통사론적으로 해독해야함을 주장하고 있고, 부분적으로 우리와 같은 방식의 형식화를 시도하고 있다. 둘째, 김형효 교수의 해석을 논리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는 반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사진과 그림의 차이를 부분전체론적 이행성(mereological transitivity)의 준수와 위반으로 구별해볼 수 있다. 즉 사진의 경우에는 그것이 x의 정확한 재현이고 y가 x의 부분이거
나 세부 사항이라면 그 사진은 또한 y의 정확한 재현이다. 반면 그림의 경우에는 이러한 이
행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우리가 다소 거리를 두고 그림을 감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는 세계를 개념어, 혹은 반(反)개념어로 그려본 그림으로 보아
야지 정밀한 논리의 메스로 분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사유의 논
리와 문법을 강조하는 김형효 교수의 입장과 어긋난다. 셋째, 우리의 분석에 동원된 형식논
리학의 추론 규칙을 부정하는 반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던 것
처럼 (o ≠ i) & (o = i)와 같은 모순으로부터의 추론을 금하거나 추론 규칙을 달리 정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김형효 교수는 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나 제언을 하지 않고 있기에
그가 전개하는 적지 않은 부당한 추론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는 부담스런 미결 과제로
남겨진다.
김형효 교수의 작업이 지니는 이러한 문제는 작업의 층위 내지는 범위에 관련된 것이다.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는 하나의 큰 그림으로서는 분명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약
적 깨달음을 지향하는 참선의 도가 아니라 설득력을 갖춘 철학이고자 한다면, 그림의 전체
와 부분을 잇는 중범위 지대의 논리적 짜임새가 보다 밀도 있게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3. 적합성
김형효 교수는 노자의 "도는 이치의 세계지 구체적 모습의 세계가 아니므로 개별적 사물
들에 즉해서 귀납적으로 탐구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장자의 도에 대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상에 '주행'(周行)하는 도는 이미 파르마콘의 문법, '양행'(兩行)의 법칙을 갖고 있었
다. 그것이 '이미' 그러하였기 때문에 후천적인 경험적 집적의 결과로서 내릴 수 있는 귀납
적 결론이 될 수 없다. '양행'이나 '주행'이 비록 경험적인 유물(有物)의 세계에 적용되는 법
칙이기는 해도,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본디 모습이요, 그 모습의 문법이기
에 제물론의 파르마콘적 양행은 선험적일 수밖에 없다.
[장자는] 그런 파르마콘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어떤 선택도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하다면, 오직 초현실의 세계인 코라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자연과
같이 노니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형효 교수에 의하면 노장은 귀납적 사유에 반대하는 선험주의자들이다. 특히 장자는 초
현실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준거의 기본 틀
은 선험주의로 해석된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의해 제공된다. 데리다와 노장에 대한 김교수의 해석은 과연 적합한 것인가? 이 문제를 데리다와 노장의 순서로 점검해보자.
(1)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선험주의이기에 앞서 과거와 현재의 실제 텍스트를 현장으로 삼
고 그 텍스트의 해체를 근간으로 하는 철저한 작업의 철학이다. 해체주의에 관한 선험주의
적 논의들이 종종 공허하고 안이해 보이는 이유는 그 논의들에 텍스트라는 현장이, 그리고
텍스트 해체라는 작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해체주의를 미리 짜여진 방법적 프로그램이나 전략으로 보고, 정작 텍스트의 해체는 이 방법적 프로그램이나 전략을 연역적으로 적용시키는, 그래서 어느 텍스트에 대해서나 반복이 가능한 작업 정도로 간주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는 개별적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 해체 작업에서 출발하여 이들 각각으로부터 철학에 관한 소위 선험적 논의를 간접적으로 수렴해내는 일종의 귀납적 과정에 가깝다. 예컨대 보충대리는 루소의 {언어기원론}의 해체에서, 파르마콘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해체에서 이끌어낸 반(反)개념들이다. 데리다와 노장을 선험주의자로 규정하는데 수반하는 위험성은 그들의 사유가 노정하는 다양성의 국면들을 사상(捨象)하고 그들의 철학을 "이미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본디 모습이요, 그 모습의 문법"으로 단정하고 단일화시키는 데서 발견된다. 우리는 데리다가 이러한 "어떤 '단일한' 형이상학이 결코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김형효 교수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도덕경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
하고 있다.
유명과 유형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것들은 곧 삼라만상(萬物)과 같다. 그
러므로 유명과 만물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왜 유명이 '만물의 어머니'인가? 단순한
직관에서는 이 언표의 의미가 해독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자궁은 텅 빈 공간이지만, 그 공
간은 자기 속에 다양한 만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그러한 공간이다. 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만물도 궁극적으로 공간(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무형한 빈터가 없이는 차이와 접목의 운동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무명은 천지지시"라는 말이 무형무명한 선험적 힘이 유형유명한 천
지의 차이(相離)와 접목(相合)에 이미 시작이 없는 시작에부터 상감(象嵌)되어 있다는 것으
로 해독되어야 하듯이, "유명은 만물지모"라는 것도 경험적인 만물의 차이와 접목이 선험적
인 어머니와 같은 공간(자궁) 속에 이미 등록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김형효 교수의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유명(有名)이 아니라 무명(無名)이 만물의 어머니여
야 할 것이다. 이는 동일성 대치율(the principle of substitutivity of identity)에 의거한
다음과 같은 추론에 의거한다. 우선 유명과 유형이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념이듯, 무명과
무형도 그러하다고 전제해보자. 인용문의 흐름으로 보아 이 전제에 대해서는 김형효 교수도 이의가 없으리라고 본다.
1. 무명과 무형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념이다.
2. 어머니의 자궁은 무형이다.
3. 만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이다.
4. 어머니의 자궁이 만물을 거두어들인다.
5. 어머니의 자궁은 무명이다.
6. 무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Q.E.D.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도덕경의 구절에 대한 해석의 귀결이 "무명(無名)은 만
물의 어머니"가 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김형효 교수
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방식의 대응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동일성 대치율이나 동일률
같은 논리학의 근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김형효 교수의 텍스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간간히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이 초래할 엄청난 파장에 비해 관련된 언급은 지
나치게 간략하고 경쾌하다. 예컨대 "동일률의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모든 형식 논리
를 우습게 여기면서 결국 'A = 非A'와 같은 모순 관계를 긍정한 셈이다," "'A = 非A'의 관
계 정립은 시비(是非)에 관한 모든 제한적 사고의 이성을 조롱하는 셈이다," 등등. 그러나
후속 조처나 그 방향에 대한 언급은 대략적이고 불분명하다. 이런 연유로 김형효 교수의 텍
스트는 원전의 사후 주석과 해석으로서는 출중하지만, 그리고 동일률에 대한 조롱으로서도
탁월하지만, 앞으로의 사유에 대한 사전적 디딤돌로서는 아쉬움이 있다. 페르마가 메모할
책 귀퉁이의 여백이 좁아 그 증명을 생략했다는 아주 간단해 보이는 한 정리의 증명에 무려
3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수많은 수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경주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딛기가 이처럼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도 이러한 취지를 담은 네스트로이의 경구를 자신의 {철학적 탐구}의
첫머리말로 삼지 않았던가.
둘째, 문제되는 도덕경의 구절과 위의 추론의 결론을 모두 인정하는 어떤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방식의 대응을 생각해볼 수 있다. 김형효 교수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명(無名)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라는 어구가 여기서 되살아나
야 한다. 이 두 어구는 표현을 달리하지만, 사실상 같은 흔적을 교차 배어법으로 표시한 것
이다. 왜냐하면 "무명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고 "유명은 천지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 논리에 더 가까운 수사법이기 때문이다. 무명은 허공이기에 그 속에 만물을 담고 있어
서 어머니 같고, 유명은 이미 천지(天地)이고 그 천지는 시작의 쪼개짐처럼 그렇게 나누어
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무명과 유명을 서로 다르면서 보충대리로 주고받는 새
끼꼬기의 법칙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라 하였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라 하였다. (강조는 필자의 것임.)
동일성 대치율과 동일률은 유명과 무명의 교차 배어'법,' 보충대리로 주고받는 새끼꼬기의
'법칙'으로 대체되고, 이 '법칙'들은 노자로 하여금 유명을 써넣어야 할 자리에 '일부러' 무
명을 써넣게 한다. 이렇게 유/무, 혹은 긍정/부정을 '일부러' 바꿔 써넣은 혜시의 명제들과
그에 대한 해석이 김형효 교수의 {노장 사상의 해체적 독법}에 [혜시의 독법]이라는 이름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법칙, 문법, 논리에 대한 김형효 교수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빼어난 부록에서도 규칙성을 지닌 어떤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낱말의 정상적 사용이나 대입이고 어디까지가 '일부러' 저질러진 비정상적 사용이나 대입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떠한 일관된 문법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다음의 사유를 이어나갈 지에 대한 어떤 논리적 지침도 들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어쩌면 김형효 교수의 잘못이 아니라 데리다와 노자/혜시의 사유가 은유가 그러한 것처럼 배우거나 모방할 수없는 천재만의 것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천재성이 지나치게 우상화될 때 그것은 창조적 독창성이기를 넘어서 대화와 토론의 절차를 무시하는 철학 권력의 기표로 군림할 위험성이 있다.
(3) 장자는 김형효 교수가 부여한 선험주의자나 초현실주의자라는 세례명과 썩 어울리는
철학자가 아니다. 이러한 명칭은 김형효 교수가 훌륭히 재해석한 [소요유]와 [제물론]에서만 부분적으로 유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제물론]에 이어지는 [양생주]에 나오는 백정인 포정이나 [천도]에 나오는 바퀴공인 윤편은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평생에 걸친 기술 숙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양생의 도를 체득한 삶의 달인들이다. 그들은 각각 문자적 지식의 상징인 문(文)혜군이나 책 읽는 환공과 같은 상층 지식인들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장자}의 전편에 무수히 등장하는 하층의 천민들이나 불구자들은 한편으로는 삶이라는 거친 땅을 밟 고 걸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유 문법과 논리로 세계를 관조하는 피안의 선험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지혜의 수행자들이다.
자신의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논리적 선험주의의 허구성을 깨닫고 거친 현실의 땅으로 되
돌아오는 여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가 실제의 언어를 정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언어와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진다. (논리학의 투명한 순수성은 물론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요청이었다.) 갈등은
허용 범위를 넘게 되어 이제 요구 조건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한다.--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찰이 없다는 조건은 이상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된다. 걷고 싶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
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가자!
위의 구절과 함께 장자의 글을 읽어보자.
걷지 않기란 쉽지만, 걸을 때 땅을 밟지 않기는 어렵다.
장자는 마찰 없는 이상적 공간으로 미끄러지는 선험주의나 초현실주의를 쉬운 길로 묘사
하고 있다. 진정한 철학은 포정이나 윤편이 그랬던 것처럼 땅을 밟으며 걷는 데에서부터 우
러나온다. 장자는 걷는 길이 어디로 향한 길인지, 그 길로 무엇이 관통하고 있는지의 문제
이전에 땅을 밟으며 걷는다는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길(道)이란 걸어다니는데서 생
겨나게 마련이다." 도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지평을 떠나지 않는(땅밟
기로서의 行) 지속적인 실천(걷기로서의 行)에 의해 자연스레 형성되고 체득되는 것이다.
포정과 윤편은 자신들이 걸어간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우리는 장자에게서 이를 기록
한 텍스트를 기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마 쇼펜하우어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텍
스트에 새겨진 사유는 땅을 밟고 걸어간 사람의 발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 우리는 그
가 걸어간 길을 보지만 그가 그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알기 위해선 우리 자신의 눈을
사용해야 한다.
글쓴이 소개
이승종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학(버팔로)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철학과 교수이며 인지과학 협동과정과 비교문학 협동과정 교수
도 겸하고 있다. 학위논문 "Wittgenstein's Attitude Toward Contradiction"으로 페리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뉴턴 가버와 같이 쓴 Derrida and Wittgenstein과 이를 우리말로 옮긴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민음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