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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호촌 달빛나비 탄생 이야기
다 인연이 한 짓이라
달빛나비.
중국 운남성 여강 옥호촌에서 한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우리 객잔의 이름이다. 참 근사하다.
달빛나비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예쁜 이름 때문에 객잔 주인들이 너무도 훌륭한 감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시는 분들도 많고. 그렇기에 왜 객잔 이름을 달빛나비라고 지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다. 중국어로는 ‘위에광디에커잔(월광접객잔,月光蝶客棧)‘인데 중국인들도 어떻게 만들어진 이름이냐고 많이 묻는다.
왜 ‘달빛나비’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빛나비’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저 약간의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결국 그 이야기가 여러 가지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긴 하지만.
따슝이 리장 옥호촌에 처음으로 온 것은 2012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인상여강 공연과 빙천공원을 보러 가기 위해 옥룡설산으로 향할 때, 왼편 설산 아래로 늘 보이던 마을이었는데, 그날은 마침 옥호촌으로 직접 들어가게 되었다. 여강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 동생의 새로운 일이 바로 옥호촌의 마방과 관련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옥호촌은 나시족 특유의 말과 생활 습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 여강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돌담과 돌집들이 늘어서 있는 곳, 옥룡설산의 흰 눈과 돌처럼 순수한 표정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 그런 곳이었다.
옥호촌과 나의 인연은 그곳에서 가장 예쁜 '띠이쥐(제익거, 帝謚居 - 황제가 웃으며 기거하는 곳?)'라는 객잔을 운영하던 어느 나시족 가족을 만나면서...내게(후에 흑형에게도) 필연적인 운명으로 바뀌어졌다.
따슝과 흑형의 삶을 바꾼 나시족 여인
처음 만난 옥호촌이 너무도 맘에 들어 그 여름, 한동안 그 객잔에 머물렀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하다가 밤이 되면 객잔 식구들과 밥과 술을 먹고 별을 보는 매일의 일상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더군다나 객잔의 식구들은 나를 정말 또 하나의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집주인 내외(후에 나는 이 두 분을 싼거(셋째형)와 싼지에(셋째형수)라고 불렀다. 싼거는 위로 두 형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는 내게 편안한 잠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을 내게 내주었고, 동네 여러 행사에 나를 한 식구처럼 데리고 다녔다. 예쁘고 수줍은 많은 두 딸들도 나를 삼촌처럼 잘 따랐다. 설산을 바라보며 평원을 걷다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술을 마시다가... ‘아, 이런 객잔에서 내 집처럼 살았으면’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었다. 여름을 보내고 떠난 후, 가을에 이곳에 다시 왔을 때도 이 가족들은 첫 휴가를 나온 동생과 삼촌처럼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리고 초겨울 싼지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 리장 시내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는데, 그 소식을 받고 여강의 중국 동생과 함께 문상을 갔다. 처음으로 가보는 나시족의 장례식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며 가장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너무도 서럽게 오열하던 형수의 모습이었다. 싼지에는 하얀 천에 싸여있는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나시족의 말을 하며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가장 많은 귀여움을 받고 자란 막내딸이어서 그런지 옆에 있던 다른 형제들보다 크게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서럽게 울었던 막내아들, 나의 모습도 생각났었다.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 햇볕 좋은 마당에서 싼지에가 큰딸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다. 뭔가 짠하며 울컥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데... 난 괜히 뭔가 서럽다.)
그날 장례식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내게는 처음 보게 되는 나시족의 상갓집이라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다. 어머니를 하늘로 보낸 형제들은 서럽게 울고 있고, 부고를 듣고 모인 사람들은 마당에 앉아 차려진 음식을 덤덤히 먹고 있었다. 음식과 복장을 제외하면 한국의 상갓집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수의 큰딸 허위위에는 친구, 사촌들과 함께 어른들을 도와 음식을 만들고 또 날랐다.
그 겨울 장례식 이후, 항상 밝고 활기차던 싼지에 뭔가 풀이 죽은 사람처럼 보였고 모든 일이 힘겹고 지겨운 듯 했다. 장례식장에서 서럽게 오열하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면... 그런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봄이 올 무렵 어느 날, 나는 이 객잔을 다시 찾았다. 모든 것이 여전히 평화롭고 안정적이었지만, 싼지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해 처음 만났을 때의 환한 미소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고, 얼굴은 수척해져 조금 늙어 보였다. 싼지에는 모든 일이 다 하기 싫고 객잔도 더 이상 운영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냥 말이나 끌면서 돌아다니며 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싼지에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그러면 내가 객잔을 운영하면 어떻겠냐고 장난처럼 물었다. 그런데 싼지에의 대답은 진지했다. 정말로 따슝이 할 수 있다면 자기대신 이 객잔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더 진지해졌다. 그 자리에서 정말이냐고 되물으며 내가 맡겠다고 대답했다. 이미 옥호촌에다가 ‘아티스트 레지던시(Artist Residency)’를 만들고 싶어 했던 터라, 내게는 이곳에 사놓은 땅에 건물을 다 지을 때까지 머물 수 있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이곳 객잔은 내가 생각하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 객잔을 따슝이 맡겠다고 우선 서로 구두약속을 하고 나는 리장 시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한국에 있던 흑형에게 전화를 했다. 흑형도 옥호촌에 와 본적이 있고, 이곳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분명 같이 하자고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다.(전 해에 리장을 한 달간 나와 함께 여행했던 흑형은 당시 이쪽으로의 이주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흑형은 먼저 옥호촌의 객잔을 우리가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스럽게 놀랐고, 이후 이것저것 조건을 물었다. 그리고 며칠 후, 흑형이 이곳으로 와서 객잔을 함께 운영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나는 이 사실을 싼거와 싼지에에게 알렸다. 그리고 또 다시 며칠 후 싼거와 나는 객잔의 임대계약을 체결하였다.
시간은 빨리 흘렀다. 흑형은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주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었고, 따슝은 늘 그렇듯 하는 일 없이 바빴다.
2013년 4월 17일, 흑형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사랑니 뽑는 일을 마치고 리장으로 왔다.(그 후휴증으로 아직까지 고생이고.) 약 2개월 전, 춘절(설날) 휴가 때 이곳을 다녀간 후, 10년 다니던 직장을 과감히 정리하고 이주를 결심한 팅팅도 함께.(팅팅은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우린 그저 형제다.) 그리고 따슝의 어머니와 그녀의 남친(지금은 헤어지셨다. ㅎ), 어머니의 아는 언니도 함께 오셨다. 객잔의 계약은 5월 1일부터 시작되었기에 우리는 먼저 모두 함께 여행을 하였다. 모두가 못 가 본 곳으로. 석두성과 루구호 그리고 마지막은 옥호촌으로. (이에 대한 여행기는 이미 흑형께서 따로 카페에 소개해 놓았으니 생략.)
마지막 일정으로 향한 옥호촌에서 어머니와 우리는 시장에서 사온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고 모두 함께 마을 뒤 평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따슝과 한국 친구들이 함께 사놓은 또 다른 집과 땅(일명 ‘옥호랜드’)을 보러 간 것이다. 객잔 오픈이 며칠 남지 않은 터라 우리는 객잔 운영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방값은 얼마로 할지,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지, 김치 담글 고춧가루는 어떻게 수급할지, 중국 손님들에게는 어떻게 홍보할지 등등. 그렇게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고민하나가 불쑥 다시 튀어나왔다.
‘그런데 객잔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기존의 이름을 그냥 쓰면 뭔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맛이 덜할텐데...’
‘한국이름으로도 중국이름으로도, 또 영어이름으로도 좋은 뭔가가 없을까?’
따슝과 흑형, 팅팅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객잔 이름만을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일행은 다리가 아프시다며 쉴 곳만 찾고 계셨고.
‘옥호칼’튼, ‘러브 인 옥호’, ‘두 총각네’, ‘사람 사는 곳’ 등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름들이 따슝과 흑형의 입에서 아무 생각 없이 튀어 나왔고 그때마다 팅팅은 특유의 썩소를 날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 따슝의 옥호랜드 1호점에 모두 도착했다. 어머니 일행은 마땅한 곳을 찾아 모두 앉으셨고 따슝은 객잔 이름을 생각하기 위하여 1호점 마당을 계속 서성였다.
‘아 좀 폼나고, 멋있고, 세련되고, 아름답고, 감수성도 풍부하고, 부르기도 좋고, 손님들도 좋아할 만한 이름이 뭐가 있을까? 뭐가 좋을까?’
이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 때, 바로 그 순간,
1호점 마당 흙과 풀 속에 박혀있던 어떤 물체가 따슝의 작은 눈에 확 들어왔다.
의미는 없으나 이야기는 있다.
그것은 바로 폴더형 구형 휴대폰의 액정화면 부분이었다. 흙속에 묻혀있었기에 처음에는 떨어져나간 한쪽만이 남아 있는 휴대폰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혹시 누가 흘려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여 얼른 주어보았다. 제조사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휴대폰이었다. 게다가 자판 누르는 곳은 이미 떨어져 나갔고 액정마저 다 깨져있었다. 누가 여기다가 버리고 간 것이겠거니 하며 뒤로 돌려 보았는데... 그 때 따슝 깜짝 놀랐다! 아니, 심봤다!
놀랍게도 뒷면에 한글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달.빛.나.비 라고.
이건 또 무슨 운명이고 인연인가. 한참 새로운 객잔이름을 고민하고 있을 때, 중국 운남성 리장하고도 거기서 한 참 더 들어 온 옥호촌, 게다가 마을 안쪽도 아닌 바깥쪽 평원의 흙바닥에서 한글이 선명하게 쓰인 휴대폰 조각을 줍다니! 심지어 달빛나비라는 글자아래에는 따슝과 흑형이 아주 아주 가끔 꿈속에서나 뵐 수 있는 작품 같은 ‘여인’, 아니 ‘여신’이 날갯짓을 하는 그림도 있었다. 이건 마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던 것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던 밤에 그 꼭대기에서 그녀를 만난 것보다, 부산가는 기차 안 조준구와 김두수가 바로 앞자리에서 마주쳤던 것보다, 그린란드 땅끝마을 까낙에서 일각고래를 만났을 때보다, 우연히 얻어걸린 보이차를 마시며 흑형의 피부가 뽀얗게 변하는 것보다 훨씬, 훠~얼씬 더 신기한 우연, 아니 인연인 것 같았다.
그 휴대폰 반쪽을 모두에게 보여주자 흑형과 팅팅은 놀라운 표정을 지었고, 어머님 일행도 역시 어머 어머, 허참~을 연발하시며 훌륭한 리액션을 보여주셨다. 그 분위기를 틈타 따슝은 객잔의 이름을 ‘달빛나비’로 하자고 말하였다. 뭔가에 홀린 듯 한 이 기막히고 상서로운 인연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모두 바~로 찬성!
산책에서 돌아온 후, 객잔이름으로 최종 확정하기 위하여 흑형과 마지막 심의를 진행하였다. 한국어 이름으로는 대항할 만한 후보가 없었으니 확정은 유력하였으나, 영어이름과 중국어이름으로 했을 때도 무리가 없느냐는 것이 마지막 심의의 주요 의제였다.
영어로는 Moonlight Butterfly Guest House. 흐어허~ 발음 좋고, 어감 좋고~. 무조건 통과. 그리고 중국어로는 ... 사전을 뒤져보았다. 월광접(위에광디에, 月光蝶)와 월광호접(위에광후디에, 月光蝴蝶) 두 단어가 모두 가능하였다. 월광접은 뭔가 교향곡 제목 같은 느낌이 있었으나, 월광호접은 뭔가 허접한 분위기로 바뀔 염려가 있을 것 같았다. 월광허접. 향후 객잔 달빛아래서 따슝과 흑형이 벌일 짓들을 생각하면 월광허접도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름도 아니었으리라. 하여튼 중국 친구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어감상 ‘위에광디에’가 훨씬 더 젊은 분위기가 난다고 하였다. 우리랑 딱 맞다! 그리하여 중국어 이름은 월광접(위에광디에, 月光蝶)로 확정.
달빛나비, Moonlight Butterfly, 월광접(위에광디에, 月光蝶)
이렇게 우리 객잔의 이름이 확정되었다. 왜 달빛나비냐고? 지금까지 말한 것이 전부다.
말한 그대로 의미는 없고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따슝은 애써 의미를 만드는 것보다 어떤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가진 우리 객잔이름이 너무 좋다.
따슝과 흑형
2006년 겨울, 따슝과 흑형은 처음 만났다.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시립미술관에서였다. 그 전시회의 총괄 프로듀서였던 흑형, 그리고 유명 비보이팀의 총괄 매니져였던 따슝. 둘이 모두 알고 있는 어느 감독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이국적인 외모에 프랑스식 매너를 가지고 있는 흑형, 곰 같은 외모에 영국식 소심함을 가지고 있는 따슝. 둘은 그 이후에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에서 비보이 특별공연을 기획한 이후로 참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했다. 서로 다른 회사였지만, 함께 공연을 제작하여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발, 중국 투어 등을 같이 다녔고, 이후에 영화 홍보, 축제 기획 등도 함께 했었다. 함께 했던 사업은.. 결국적으로 ㅎㅎ 거의 다 말아먹었지만... 왠지 그 인연의 끊은 서로를 놓아 주지 않았다. 전생의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좀 부족한 서로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지금 따슝과 흑형은 이곳 운남성 리장 옥호촌 ‘달빛나비’라는 새로운 울타리 안에서 각자 꿈을 꾸고 있다.
...
객잔을 시작한 이후로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중국 사람들, 한국 사람들, 그리고 서양 사람들도. 돌이켜보니 모두 다 좋은 사람들,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이곳에 와서 먹고, 마시고, 자고, 걷고, 울고, 웃고 그리고 기도하고, 꿈꾸며... 그렇게 다녀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라도 그들 모두는 이곳 달빛나비에서 여행의 도중이 아닌 삶의 한 순간을 살고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모두들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한 때, 한 순간 이곳 달빛나비에서 따슝, 흑형과 함께 살고 간 모든 사람들... 모두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그립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모두...
다 인연이 한 짓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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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희 가족이 다녀간 사진은 보이질 안네요 삐짐~...
마음 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는데...미처 꺼내질 못했네요..ㅜㅜ
남재벌은 쿨하니까~쿨하게 믿지요ㅋㅋ
한번 더 오시면 그 때 사진 많이 찍어요.
곧곧곧 가겠습당~
ㅎㅎ안녕하세요!잘지내고계신가해서 한번들렀어요! 맨밑사진에저희가족이작게보여요ㅋㅋ
또가고싶은옥호촌ㅠ.ㅠ
보고 싶어요~ 오세요^^*
우린 없지만 이렇게 많은 조합원 후보들이 있다는게 안심~^^
인생이 흘러가네요. 다 꿈같네요.. 하필 이름이 나비라서..그런가. ㅋ
참 재미있는 스토리....인연을 중시하라
그러네...
바로 오늘 새벽 리장의 진한 추억을 가지고 귀국한 단비입니다. 따슝의 넉넉함과 해박함에 감사드리며 바로 카페 가입해 인사드립니다.
대단하신 단비님~! 먼저 모든 트레킹 코스를 완주하신 것 축하드리고요, 인연이 닿을 때 다시 뵙겠습니다~^^*
혹시 이번 트레킹을 도와주신 분이신가요? 닉네임으론 누구신지 잘 몰라서........
재빠른 답글 감사합니다.
나노끄가 따슝입니다~ㅎㅎ
세상에..... 따슝님이신것도 모르고, 이번 트레킹 성공의 절반은 따슝님 덕분입니다.
그 달빛나비의 추억은 2018년에도 계속됩니다 쭈~~~우~~~욱~~~
달빛나비객잔의 탄생이 궁금했는데,,그런 스토리가 있었네..ㅎ.ㅎ
드디어 봤구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