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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민 목사의 '은혜론'이 빠지는 함정 [꿈꾸는 자가…], 정작 우리가 가져야 할 꿈의 내용은
없어
강준민 목사는 대중들에게 매우 섬세하게 다가간다.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인생의 한 고비에 서 있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려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로써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 일으켜
세운다면 기쁜 일이다. 강준민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묶어낸 책,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꿈을 꾸고 사는 인생은 결국
승리하고야 만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강준민 목사의 책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준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이러한 접근법이 마치 한때 유행했던 '적극적 사고방식'의 한
변형이거나 '세속적 축복론'의 계열에 속한 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강준민 목사와
같은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진정한 메시지가 이해될 경우, 우리는 시대의 거대한 장벽과 마주 서서 자신의 온몸을 던져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던,
그래서 꺾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 가진 의미를 끝끝내 깨우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개인주의의 대단히
세련된 한 형태로 변질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이제 역사의 비애와 극적으로 대결하면서 시대의 빛과 소금이 되려 하기보다는, 믿음이
주는 은혜라는 고리를 통해서 개인주의의 대단히 세련된 한 형태로 변질되어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모순과 갈등, 고난과 비극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만나는 이마다 한국 사회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정세의 혼란을 말하며 한반도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강준민 목사의 글에서 우리는
그러한 절절한 고난에 대한 성찰을 보지 못한다. 우리의 이웃이 겪고 있는 고난과 비극은 없다. 함께 풀어나가야 할 이 시대의 과제는 그의 책에서
주목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유의 책들에 의해 훈련된 기독교인들은 그래서 역사의 과제를 말하는 신앙을 회피하거나 또는
적대한다. 그것은 신앙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듯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성공하고 승리하듯이, 이 시대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공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이 너무도 자명한 사실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말하는 '꿈', 그가 말하는 '역전'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우리의 사명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가 늘어나고 그와 함께 믿은 이들의 수가 증가한다 해도 그것은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켜나가는 사건이 될 뿐,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역사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일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민류의 은혜론이 빠진 함정은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시대가 전체가 직면한 악과 죄, 그리고 고난의 현장에는
십자가의 논리를 적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 우리의 분단과, 전쟁의 위기,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문화적 타락과 경제적 모순
따위의 문제는 그의 관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구하는 믿음으로서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문제 앞에서는 그저 무능력하다는 말인가? 세상이
어찌되든, 나 혼자 잘 되면 만사가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기에 그의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그 힘찬 역동성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개인주의적 영역에만 한정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 그 반경을
축소하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야웨 하나님은 우리를 출애굽 시키셨고, 고난의 시대에 빛을 보게 하셨으며, 온갖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십자가의
능력 가운데서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살아 움직여 역사를 바꾸신 것이다. 바로 이 뜨거운 힘을 쏟아내지 못하고 마치 신앙이 한 인간의 출세나
성공에 관련되어 위력을 발휘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게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정작 꿈의 실체는 사라져
강준민
목사와 같은 섬세한 인간이해와 성서에 대한 정돈된 접근의 능력을 가진 이가 자신의 은사를 그런 식으로 제한시키고, 이 시대를 울리는 열정적인
육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의 신앙이 한국 기독교계에 계속 이런 식으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면, 한국
기독교는 역사는 돌아보지 않은 채 나 혼자 어떻게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식의 사회적 심성을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셉의 생애를 다룬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를 통해서 강 목사는 하나님 안에서 꿈꾸는 자의 축복을 설파하고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여러 가지 현실적 도전과 장애 앞에서 좌절하기 쉬운 인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성취감 높은 삶을 향한 동기 부여를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 책은 나름의 귀중한 목회적 차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책을 다 읽고
덮은 뒤에 남는 중요한 질문이 있게 된다. 강준민 목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작 우리가 가져야 할 꿈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요셉이 결국 세계를 구원하는 구원자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고 하면서 작은 꿈이 마침내 그렇게 큰 열매를 맺게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책에서 강준민 목사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바로 이러한 꿈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자칫,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성취에 대한 목표와 열망을 모두 다 이 '꿈'의 집합에
분류하게 되기 쉽게 한다. 요셉은 자신의 야망에 충실했던 존재에서,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세계에 자신을 여는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신이 품고
있는 야망으로 교만했던 것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감격해하는 겸손한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가족적으로·사회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자신을 내세웠던 것에서부터 그 모든 것이 박탈되어도 여전히 빼앗기지 않은 하나님의 축복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되어갔던
것이다.
요셉의 꿈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
그런데 요셉은 애초에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이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이는
것을 꿈꾸었다. 그것은 권세가 주는 희열이다. 아버지의 총애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던 시절의 오만이 도달한 절정의 산물이었다. 그의
관심은 이렇게 세상에서 자신이 어떠한 지위에 있게 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꿈꾸려는 것들도 다 사실은 이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그 초점이 있다. 세상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그 세상을 위해서 나는 어떻게 쓰임 받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어떤 과정으로 끌어 들여 훈련시키시려는 지의 문제는 그의 신학적 안목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 전의 요셉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중심이 된 세상을 꿈꾸는 자였던 것이다. 형제는 물론이고
부모조차도 그의 야망에 머리를 숙이는,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을 요셉은 무의식 속에서조차 바라고 원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인간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은 이기적이고 오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타자는 잘못된 것이다. 강준민 목사는 바로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신랄하게 갈파했어야 하는 것이다.
요셉은 '고발자'로 소년기를 보낸다. 자신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이 타자의 삶을 그 어떤
기준에 놓고 추궁하고 심판하며 그 잘잘못을 따져 판결을 내리는 종류의 인간으로 컸던 것이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사유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그는 형제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자리에 이들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그만 큰 코를 다친다. 그들 형제는 요셉이 알지 못하는 삶의 자리에 있었고, 그들 나름의 인생사의 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이미 자신은 이들의 인생사를 꿰뚫고 있다고 여겼고, 뛰어봐야 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그가 결국 깨지고 마는 사태가
발생한다. 형들에 대해서 다 안다고 여겼지만, 정작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이들의 속내, 요셉을 보고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를 알지
못하여 죽음의 처지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비극이다. 그리하여 그는 구덩이에 떨어져 살지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 있으면서 비로소 자신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후 우리가 보게 되는 그의 삶의 전격적인 변화는 놀랍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환경과 현장에 충실히 살아간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여기는가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여기시는가가 보다 중요한 문제임을 깨달아 알게 된 결과이다. 노예로 살아도,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어도 그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삶을 억누르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믿고
그 마음에 따라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요셉의 꿈이 아니라 그가 남들이 꾼 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꿈의 세계에서, 타자의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눈뜬 자의 충격적인 변화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꿈이 이 세상에 가져야할 지위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꿈대로 살아 그것을 완성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타자의 꿈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눈뜨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는 인생이 아니라 이 세상의 고통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자의 삶이다.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하는
이의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일깨운다. 한 시대가 겪게 될지 모를 고통과 비극의 계시를 보고, 그 시대를
구할 방도에 눈을 뜬다. 바로의 고뇌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자가 바로 요셉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는 자, 그것이 요셉의 믿음이 가진 진정한 신앙이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꿈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계획에 마음이 열린 자가 바로 요셉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강준민 목사가 말하는 요셉의 꿈이 결국에 가서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상태로 그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정작 놓치지 말고 봐야 하는 것은 요셉의 꿈이 아니었다. 그가 본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그것이 곧 믿음 가운데서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꿈의 내용인 것이다.
결국, 요셉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머리
숙임을 꿈으로 꾸었던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세상의 위기와 고난을 이겨내는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된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가 되지 않았던가? 섣불리 자신의 꿈을 말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야망이 될지 욕심이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놀랍게 일깨우고 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아픔과 이 세상의 고난과 이 세상의 흔들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할
것인지, 그래서 우리 자신이 어떤 쓰임으로 서야 할 것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주어진 지혜가 바로 우리의 진면목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은 알아볼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지금 우리는 다름 아닌 이러한 기독교
신앙인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월간 <기독교사상> 9월호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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