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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주석
예수님의 변모 (마가복음 9:1-13)
Ⅰ.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고 있음을 예고하심(1절).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볼 수 있게 임하리라는 것이다. 메시야의 왕국은 여기에 장해가 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조직을 붕괴시킴으로써 이 세상에 수립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모두 무섭게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를 저지하려는 모든 방해를 압도하고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대해서 유대인들을 보복하실 때에도 이방인의 세계에 있는 우상의 세력을 점령할 때에도 그렇게 임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볼 수 있도록 임하는 것이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1절). 이와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24장 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일이 다 이루리라." 그리스도와 함께 여기에 서 있던 자들이 볼 수 있도록 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별치 못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에 볼 수 있도록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예고하신 "엿세 후에"
Ⅱ. 그리스도의 변형 가운데서 그 나라의 실례를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당하실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시기 시작하셨으며, 그 일을 단행하심에 있어서 그들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 당신의 고난이 자발적인 것임을 보여 주시려고 영광의 광채를 그들에게 비추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격의 놀라운 위엄과 영광의 미덕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1. 이 일은 시내산 위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가졌던 것과 같이 그가 비스가산 위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것처럼 "높은 산"위에 서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다볼산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셨다고 한다. 만일 그러했다면 여기에 대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볼과 헐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시 89:12). 라이트푸트 박사(Lightfoot)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얼마 전에 머무셨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다볼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세푸스가 말한 대로 가이사랴 근처에 있는 높은 산이라고 qhad 오히려 타당하다고 하였다.
2. 이 일에 대한 증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 이 사람들은 지상에서 증거 하는 셋이요, 예수와 대화를 한 모세와 엘리야, 하늘로부터의 소리, 이 셋은 위에서부터의 증거였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다 데리고 가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비밀히 간직되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만 베풀어지고 세상에는 베풀어지지 않은 특별한 은혜가 있듯이 어떤 제자들에게는 베풀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베풀지 않은 은혜가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다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분의 품속에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들 중에서 맨 먼저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한 자이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 중에서 맨 나중까지 살았으며 이 영광스런 일에 대한 최후의 목격자였다. 그는 증거하기를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 하였다. 그와 같이 베드로도 증거 하였다(벧후 1:16-18).
3. 그 일의 상황은 어떠하였나 보자. "예수께서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예수께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이 변형은 본질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는 형태의 변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변질은 본질에 변화가 있고 모든 형태는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기적이 아닌 것이며, 거짓과 속임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일을 결코 행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활의 날에 성도들의 몸에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인간들의 몸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겠나를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 "저희 앞에서" 변화되신 것이다. 그 변화는 아마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점차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안에 예수만 바라보고 있던 제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광스런 출현은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 자신이시며, 환상이 아닌 것이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이것을 언급하였으니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였다"고 하였다(요일 1:1). "그 옷이 광채가 나며 희어졌던" 것이다. 비록 검은 색은 아니라도, 아마 어두운 색이었을 것인데도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3절).
4. 이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대화를 가진 분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4절). 그들이 출현하여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였다. 예수에게 무엇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 증언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 사실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 간에는 대화와 교제가 있으며, 그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피차간의 대화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피차간에 시대의 격차가 크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는 그러한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 대화를 듣는 중에 기쁨이 넘쳤으며, 이들의 대변자인 베드로는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5절)라 말하였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변형되고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고 계셨지만 베드로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셨고 평상시와 같이 자유롭게 하시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신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대한 겸손한 친절을 전연 감소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크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동료들에게서 멀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롭게 되신 예수에게까지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히 접근을 하게 되며 자유롭게 대화를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늘의 대화에서까지도 베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절). 은혜를 사모하는 영혼들은 그리스도와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을 좋게 여기며 그분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며, 비록 춥고 외로운 곳이라 하더라도 "산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는 것을 좋게 여기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은퇴하여 그리스도와 조용히 지내며 교제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변형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만 산 이에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지내는 것도 좋겠거늘, 영화롭게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하늘 나라에서 지낼 수 잇는 일은 그 얼마나 좋겠는가 !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여기에 머물고 싶다고 할 때에, 그는 사람들 중에 예수의 임재와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도 다른 제자들이 예수와 그들을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14절). 우리가 잘되어 갈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쉽고 우리가 즐거움에 차 있을 때에 우리의 형제들의 필요를 잊기 쉬운 것임을 유의하라. 대중의 유익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의 은밀한 교제를 더 원하였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있었던 하나의 약점인 것이다. 바울은 영광의 산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에 "육신에 거하는 것"을 원하였던 것이다(빌 1:24, 25).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율법과 예언과 복음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한 장막 안에 그들을 다 영접하여 거하게 하시므로 연합을 이루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부조리한 말을 그가 했다 하더라도 그는 변명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6절).
6.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그리스도의 중재자 되심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7절).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어"주어 저희를 그늘지게 하였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다른 두 분을 위해 장막을 짓겠다고 이야기하였다. 그가 아직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입을 다물게 한 사실이 나타난 것이다. 이 구름은 초막 대신에 그들의 피난처가 된 것이다(사 4:5). 베드로가 초막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초막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지금 이 구름 속에서, 베드로가 말하던 것보다 훨씬 영광스런 그늘이 된,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7절). 하나님은 예수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정하시고 영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영접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7. 이 하늘의 소리를 소개하기 위해 계획된 그 환상은, 그 뜻이 이루어졌을 때에 사라진 것이다(8절). 사람들이 놀랐을 때에 어디에서 그런가 하고 둘러보듯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엘리야도 모세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만 예수만 보였는데, 변형된 모습이 아니고 전과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비상한 기쁨과 위로가 떠나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을 버리시지 않으심을 기억하라. 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보다 더 한 감상적이고 매혹적인 신비한 교통을 체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지만, 언제나 변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들과 항상 같이 할 것이며 세상 끝날 까지도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하늘 이 편에서 계속적인 잔치를 기대하지 말자.
8.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면서 담화를 가졌다.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이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의 사명을 완성하는 마지막 증거인 것이다(9절). 그러기 때문에 그 때에는 이 사실과 더불어 나머지 다른 비밀들을 밝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지금 그리스도께서 멸시를 당하시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사실들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므로 아무 것도 알리지 말도록 하신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러한 상태에 순응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이 명령을 내리신 것은 또한 그들이 체험한 신령한 고통에 대해서 뽐내지 않게 하시려고 또 그들이 "여러 가지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고후 12:7)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남에게 알리고 싶은 것을 못하게 억제를 당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을 못할 때에 고역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라 당황하였다. 그들은 메시야가 죽음을 당한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다(눅 18:34).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살아난다"는 것은 그분의 현재의 초라하고 낮은 신분에서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위엄과 군주의 신분으로 오르시는 것을 비유적으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하다면 여기에 또 하나의 사실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구약 성서의 예언된 순서에 따라서 메시야가 그 영광 중에 나타나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1절) 그러나 엘리야도 떠났고 모세도 역시 떠났다. 지금 이 어려움은 다름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의도한 것은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지닌 사람인데, 서기관들은 가르치기를 엘리야를 기다리라고 한 것이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진리를 대하는데 큰 편견에 빠지게 함을 유의하라.
(3) 그리스도께서 엘리야에 관한 예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그들에게 주시었다(12,13절).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였고 그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고' 바르게 할 것이라고 예언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너희는 잘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인자'에 대해서 예언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하였다. 비록 서기관들은 너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하여도 성경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믿고 기다려야 할 것이며 이상한 일같이 생각지 말라. 다시 엘리야에 대해서 말하거니와 '엘리야가 왔다.' 그리고 만일 너희가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다'는 말을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박해한 일에 대해서 사용한 용어이다. 많은 고대인들이나 천주교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정신으로 온 일보다 엘리야 자신이 에녹과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나타날 것으로 보통 생각하였다. 말라기 예언서에 세례 요한에게 이루어진 것보다 더욱 충분한 예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 성서에 약속된 참 엘리야도 참 메시야와 같이 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을 더 참아서는 안 된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기록된 이 말씀들은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던" 일들은 언급되지 않고 그가 임할 것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그는 자기에 대해서 "기록된" 대로 세상에 왔으며 머물렀고 사명을 다하였던 것이다.
귀머거리 귀신을 쫓아내심 (마가복음 9:14-29)
우리는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로부터 귀신을 추방하신 기사에 접하게 된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 17장 14절 이하에 나와 있는 내용보다 더욱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 이하에서 이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돌아와 그들이 곤경에 처해있는 것을 보시었다. 그분은 당신의 영광의 옷을 벗어 놓고 당신의 권속들을 보살피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를 물으셨다. 산상에 있었던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산 아래에 있는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큰 겸손 중에 그들을 방문하신 것이다(14절).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당황과 곤경에 처해 있는 알맞은 때에 오신 것이다. 예수께나 그들에게 있어서 원수인 서기관들이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린 어린 아이 하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그 귀신을 추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서기관들은 그들을 공격하였으며, 이는 자연히 그들의 스승인 예수에게까지 영광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그 날은 자기들이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하여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으며 무리가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일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와 같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이스라엘의 장막에서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귀환은 틀림없이 제자들에게는 크게 환영을 받았을 것이나 서기관들에게는 그렇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보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출현하시자 사람들이 놀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만 하였을 것이다. "이 예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어떤 사본들은 kai,, evxefobh,qhsan-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달려와(어떤 사본들은 prostre,contej, 대신에 proscai,ronetj - 그를 축하한다, 환영하는 말을 하다로 되어있다), 문안하거늘"(15절). 그들이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들이 예수를 보았을 때에 그들이 그렇게 심히 놀라게 되었을까? 아마도 아직까지 예수의 용모에 이상한 무엇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모세가 하산하였을 때에 그의 얼굴의 광채를 보고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한 것처럼(출 34:30), 그리스도의 얼굴에도 어느 정도 그 광채가 남았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예수에게서 피로의 기색은 안 보이고 생기가 넘치는 밝은 표정을 보고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Ⅱ. 제자들을 당황하게 하던 사실을 예수에게 가지고 왔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늘 괴롭히며 사사건건마다 그들을 시비하는 서기관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엇 때문에 지금 다투었느냐?"고 하시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출현에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제자들도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안심하고 예수께로 달려갔었으므로 대답을 못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대답을 하였다(17, 18절).
1. 그의 아들은 "벙어리 귀신 들린" 것이다. 그 아이는 넘어지는 병을 가졌으며, 그의 병이 발작하면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의 경우가 가련하였다. 어디서든지 병의 발작이 일어나면, 귀신이 저를 잡으면, 그를 거꾸러뜨리고 거의 그 몸이 찢겨질 것처럼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매우 비통한 일이지만 그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또한 병이 발작하면 그는 입에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지며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곧 그 발작이 끝나더라도 그는 아주 쇠약하고 창백하고 뼈만 남다싶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시편 102편 3-5절에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끊임없는 고통인 것이다.
2. 제자들은 그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그렇게 하여 주려고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러므로, 비록 적당한 때에 오시지는 않으셨지만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Ⅲ.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을 꾸짖으셨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9절) 하몬드 박사(Dr. Hanmmond)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 하신 것인데 이는 그들이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수행하지 않았고, 특별한 경우에 시행하도록 그들에게 지시하셨는데도 그들이 금식과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이 말씀은 서기관들에게 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제자들의 당하는 절망을 기뻐하였고 저들이 곤경에 빠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불렀고, 그들과 "함께 있으며, 참으시기"에 지친 자처럼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내가 얼마 동안이나 이런 비천한 상태에 있으며 그것을 참으리요?"라고 불평하시는 말씀을 결코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있으며, 그들을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Ⅳ. 그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왔을 때에 그는 실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그에 대하여 슬픈 표현을 하였다. 그 아이가 예수를 보았을 때에 발작이 일어나 엎드러졌다. 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귀신이 즉시 그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고 그를 괴롭게 하였다." 마치 귀신은 그리스도에게 도전하고 그분도 자기를 다루기에 힘들기를 바라면서 그분의 임재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사로잡으려는 듯이 발악을 하였다.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20절). 우리는 여기에 다른 성귀 한 절을 인용할 수 있으니 곧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계 12:12)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물으셨다. 그 병이 오래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가로되 어릴때부터니이다"(12절). 병이 그렇게 되었으므로 그 상태가 더욱 비참하고 치료는 더욱 어렵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본래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므로 악령들이 역사하며, 우리가 어릴 젖부터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잠 22:15) 오직 강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이를 추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Ⅴ.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그리스도께서 그 병을 고쳐 주시기를 바라면서 긴급한 예를 말씀드린 것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22절). 귀신은 자기가 지배하고 역사 하는 사람을 멸망시키기를 목적하며 "삼킬 자를 두루 찾는"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잇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마태복음 8장 2절에 나온 문둥병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하였지만 "면"을 토를 달어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불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선하신 의지를 신뢰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던 제자들이 곤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의 노경과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Ⅵ. 그 사람의 간청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시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앙의 약함에 대하여 넌지시 타이르신 것이다. 이 가련한 사람은 제자들의 능력이 부족한 데서 영향을 받은 듯, 그리스도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란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되받아서 그 사람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반성하도록 하고 그가 당하고 있는 이 실망이 바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한 그의 불신앙 탓이라고 깨우쳐 주시었다.
2. 예수께서 그 사람의 소원에 대해서 힘을 북돋아 주시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또한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는 전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함에 있어서 대단히 많은 부분이 우리의 신앙에 주어지며, 신앙으로 얻을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유의하라.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감히 믿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모든 영적인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세상적인 모든 일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것을 행할 수 있을 만한 자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비록 당신이 큰 죄인이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으며 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록 당신이 인색하고 가치가 없다하더라도 당신은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믿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완고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고 당신의 영적인 병이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약할지라도 당신은 끝까지 참고 버티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Ⅶ. 여기에서 그 불쌍한 사람은 신앙 고백을 하였다(24절).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는 당신의 능력과 동정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설복되었습니다. 나의 아들의 치료가 나의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서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자원함에 대한 그의 확신에 더욱 확고히 의지할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였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1.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은혜로 말미암아 말할 수 있는 자들도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불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할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자신들에게나 그들의 사정에 대해서 쉽사리 적응시키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뢰하려고도 않는다.
2. 자기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불평하는 자들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은혜를 구하도록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의 은혜가 그들에게 족하게 될 것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것을 용서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나를 도와주소서. 나의 믿음이 없는 그것을 당신의 은혜로 도와주소서. 우리의 약함에서 당신의 능력이 온전케 될 수 있나이다."
Ⅷ. 어린아이의 치료와 그 아이 속에 있는 성난 귀신에 대한 정복.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들은 예수께서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능숙하게 해결하시나 보고 싶어서 달려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더 이상 애태우게 하시지 않으려고 다른 곳에서 그렇게 하시듯이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신" 것이다. 다음에서 여기에 대하여 살펴보자.
1. 그리스도께서 이 더러운 귀신에게 무어라고 명령을 하셨는가 보자.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네가 이 불쌍한 아이를 벙어리와 귀를 먹게 하였다. 너는 네 스스로 네 운명을 듣도록 하라.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라. 즉시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 아이에게서 발작 증세를 거두어 가고, 다시는 그 발작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그리스도께서 누구의 병을 고쳐 주실 때는 완전하게 고쳐 주심을 기억하라. 사탄은 스스로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사로잡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추방하였을 때에는 그는 다시 침범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2. 더러운 귀신은 어떻게 하였는가 보자. 그 귀신은 더욱 발악을 하며 "소리를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다". 귀신은 그 아이를 떠나기를 몹시 싫어했고, 그리스도의 월등한 능력에 대하여 몹시 화가 났으며, 아이에 대해서 몹시 악의적이었으며, 그래서 그를 몹시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고 하였다. 그 안에 있는 사탄의 세력을 분쇄할 때에 영혼이 당하는 충격은 아마 현재로는 무서울지 모르나 최후의 위로를 얻는 길이 되는 것이다.
3. 어린아이가 어떻게 완전하게 회복되었나 보자(27절).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원어 "krath,saj"는 "빨리 붙잡는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재빨리 그 손을 잡아 작 부축해 주니 그가 일어났고,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왜 그들이 귀신을 추방하지 못하였는가하는 이유를 말씀하시었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들은 자기들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서 다음에는 대중 앞에서 그러한 수치를 더 당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고 예수께서 대답하시었다. 제아무리 다른 어떤 차이가 실로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이 불쌍한 환자를 사로잡고 자기 세력을 강화하고 자기의 포박을 굳힌 더러운 귀신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불치의 병과 같이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악습에 대하여 그 처방을 호소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느뇨?" 물으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이 일을 항상 쉽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들은 보통 때의 고생보다 더 심한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헛된 야망 (마가복음 9:30-40)
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난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예고하심. 예수께서 평상시와는 다른 긴 여행을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쌔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었다(30절).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 중에 많은 능력과 선을 행하시었지만 그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과 같이 그러한 능력과 선을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도 원치 않으셨고 그들이 나와서 어떤 유익을 얻는 것도 원치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가 가까이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얼마 동안 조용히 지내면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로 하여금 다가오는 시련에 대비하도록 하고 싶으신 것이다(3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예지에 의하여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악마들의 손에 넘기워지고 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었더라도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인자"데 대해서 그렇게 악의에 차 있다는 것은 이성을 가졌고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에는 항상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죽음에 대한 비난을 없애고 제자들로부터 당신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씻으며 하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32절). 그 말씀들은 아주 쉬운 말이었는데도 그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무슨 신비적인 의미인 것으로 생각하고 "묻기도 무서워"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접근하기에 어려운 분이시거나 상담하기에 엄하신 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 진리를 알기에 꺼리었거나 그 말씀을 깨닫는데 둔함에 대하여 꾸중을 들을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기가 부끄러워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이다.
Ⅱ. 예수께서 자기 자신들을 높이려는 제자들을 책망하심.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조용히 물으시기를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었다(37절). 예수께서는 그들의 토론이 무엇이었음을 잘 알고 계시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직접 이 대답을 듣고 싶었고 그들에게서 자기들의 과실과 어리석음에 대한 고백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1.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인생 행로와 시련의 노중에서 무엇을 행하였는지 고하도록 부름을 받게 된다는 것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는 우리들 가운데서 말한 우리의 말에 대하여 고하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부름을 받게 된다는 것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우리가 인생의 노중에서 우리들 가운데서 한 말에 대하여 고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토론에 대하여 고하도록 부름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많은 토론 중에서 우선과 우월에 관한 그들의 토론을 생각하고 물으신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서 한 토론의 제목은 "누가 크냐?"는 것이었다(34절). 그리스도 나라의 두 가지 법이며, 예수 학교의 교훈이며, 예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신 겸손과 사랑에 대해서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욕망과 그의 대한 논쟁만큼 더 모순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쁜 성격을 어떠한 경우에도 다 금하 신 것이다. 그것은 이런 교만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데서 기인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복음의 존귀성을 저하시키고 순결성을 부패케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며, 교회에 큰 해독이 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자기들의 허물을 숨기려고 하였다. "저희가 잠잠하니"(34절). 그들이 자기들의 무지가 들어날까봐 묻지 않은 것처럼(32절) 여기에서는 자기들의 교만이 들어날까봐 부끄러워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2)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 허물을 고쳐 주고 좋은 성품을 갖도록 하시기를 원하시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위엄있게 충분히 말씀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신"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려는 대신에 이 세상에서 남보다 높아지고 남을 다스리려고 하는 포부와 욕망은 그들을 맨 뒤에 머물게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고 말씀하시었다.
[2] 예수께서는 당신 아래에서는 높게 될 수 없고 많은 일과 겸손에 대한 기회와 의무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가 그렇게 되었을 때에 "모든 자들에게" 근면하고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딤전 3:1). 그것은 왜냐하면 그가 사도 바울과 같이 더욱 링을 많이 하고 자기를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3] 가장 겸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장 온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례를 들어 이 일에 대하여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아무런 야망도 교만도 없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었을 것이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친절한 기질을 가진 자들은 내 사람이 될 것이며 내가 호의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힘을 돋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루어지는 일을 내게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할 것이다. 또한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영접한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큰 유익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제자들을 꾸짖음. 그들이 누가 큰 가에 대해서 다투는 동안에 그들과 교제를 하고 있지 않은 자들을 용납치 않은 것이다. 아래에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요한이 예수께 보고하기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나 그들을 따르지 않으므로 금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그들이 서로 크다고 다투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권세를 이렇게 행사함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선생께서 이와 같은 처사를 옳다고 인정하시고 그렇게 명령하실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신성한 학회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능력을 활용할 때에 나쁘게 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하여 꾸짖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요한이 여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1) 예수께서 자기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신앙을 고백하지도 않은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은 이상하게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셔서 특별히 그 권세를 주시었기 때문이다(막 6:7). 어떤 자들은 그 사람이 아직 예수에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예수신 줄 모르면서 가까이 있으면서 메시야의 이름을 활용하여 능력을 행하는 요한의 제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오히려 그 사람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활용하여 귀신을 쫓아낸 것같이 생각된다. 비록 그가 외관상으로 사도들과 같이 부름을 받지는 않았어도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역사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성령을 왜 받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아마 이런 자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보이는 교회에 매여 있지 않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자가 스스로 사도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계속 그들과 떨어져 행동하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기를 꺼리고 있었다는 것 외에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방해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만일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를 수 없었다면 그는 좋은 이유는 못되는 것이다. 사태가 좋지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지 않는 한 예수의 이름을 사용치 못하도록 금하였던 것이다. 이 일은 다른 자들과 같이 회막에 나아가지 않고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언한 엘닷과 메닷에 대하여 여호수아가 취한 행동과 같으니 그가 말하기를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민 11:28) 하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아무런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과 우리와 같이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아무리 그들이 흩어져 있다 하여도 그들이 당신에게 속해 있음을 아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분명히 옳고 선하다고 믿는 교회의 연합을 위한 지나친 열심히 인해 우리가 한편으로 교회의 확장과 발전에 손해를 주지 않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는 것이다.
2. 이 일에 대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39절). 이 말씀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과 같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민 11:29). 비록 어떤 결점이나 반칙이 잇다 하더라도 선이나 선을 행하는 일이면 금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사탄을 추방하는 그와 같이 사탄이 왕국을 파괴하는 일, 이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믿고 소유하는 일, 예수께서 은혜의 샘처럼 존귀를 돌리는 일,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설교, 그리스도를 높이는 설교 등은 대단히 좋은 일들이다.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을 단순히 우리와 같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금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자기가 가리워진다 하여도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기만 하면 자기는 기뻐한다고 바울은 말하였던 것이다(빌 1:18). 그리스도께서 왜 그런 자들을 금해서는 안 되는 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하시었다.
(1)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같이 예수의 이름을 모독할 수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하면서도 다른 관점에서 볼 때에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 사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저주하지는 않는 것이다.
(2) 우리와 같이 교제를 안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가치 아래서 사탄을 대항하여 싸우는데 우리와 일치한다면 다른 입장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같은 편에 있는 자들로써 서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40절). 그리스도와 바알세불의 상반됨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예수께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말씀하시었다(마 12:30).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않은 자들은 사탄을 소유한 것이다. 비록 우리와 사정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우리와 함께 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면 우리와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들이므로 우리 편임을 생각하고 그들의 유익에 대하여 우리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한 경계심 (마가복음 9:41-50)
Ⅰ.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든 자들은 상급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41절).
1.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큰 행복과 영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니 그들은 "그 몸의 지체들"인 것이다.
2.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는 그들은 때로는 "냉수 한 그릇"으로도 기뻐할 만큼 궁핍에 처할 때도 있는 것이다.
3. 그들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가난한 자를 구제함은 선한 일이며 좋은 효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선행을 받으실 것이며 그 상급을 주실 것이다.
4.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베푼 친절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행해져야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는 친절을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5. 이렇게 행함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에 대하여, 비록 그들이 우리의 마음과 방법이 다르더라도, 우리가 무안이나 실망을 주지 않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 말씀이 여기에 주어진 것은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자들을 금하지 말라는 이유로서 인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영접을 받고 항상 나를 따르는 자들과 제자들인 너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크고 훌륭한 선행뿐만 아니라 나의 제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일과 같이 지극히 적은 친절 하나에 비례할 수 있는 지극히 적은 모든 신실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선행도 기억하신 바 되고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친절을 당신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신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대한 봉사가 우리에게 베푸는 친절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선행이라 하더라도 찬성을 해야할 것이다."
Ⅱ. 예수께서 "소자 중 하나를" 고의적으로 범죄케 하거나 괴롭게 하여 실족케 하는 자들에 대하여 두려운 말씀을 하신 것이다(42절). 누구든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제아무리 그들이 약하더라도, 괴롭게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자들이니 그들의 진로에 실망을 주거나 방해하는 자들이나 선을 행하는 것을 금하거나 범죄케 유인하는 자들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42절). 그런 사람의 형벌은 대단히 중하며 그의 영혼의 죽음과 파멸은 그의 몸의 죽음과 파멸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6절을 참고하라.
Ⅲ.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시었다. 이러한 자비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일에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들에게 범죄의 기회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면 우리는 더욱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고 우리를 범죄케 하는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로 범죄케 하는 그런 것은, 아무리 우리에게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잘라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마태복음에는 5장 29, 30절과 18장 8, 9절 두 번이나 나와 있다. 여기에는 더욱 광범위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 말씀은 우리의 심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심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 "우리의 손이나 눈이나 발이 우리를 범죄케"하며, 우리가 방탕하여 범죄케 됨은 눈이나 손처럼 우리에게 중대하며, 눈이나 손처럼 우리를 범죄케 하는 보이지 않는 유혹이나 그 기회가 되는 경우를 상상한 것이다. 소중한 것이 죄가 되고, 죄가 소중하게 될 때를 상상하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실족케 하고 넘어지게 할 때를 생각하라. 우리가 그 소중한 것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우리의 선한 양심을 잘라버려야 함을 생각하라.
2. 그 경우에 대하여 명령하신 의무. "네 눈을 빼어버리라. 네 손이나 발을 찍어 버리라." 지나친 욕심을 억제하라. 그것을 죽이라.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것을 무력하게 하라. 그것을 위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말아라. 즐거움 것이 되었던 우상이 싫은 것으로 버려지게 하라. 아무리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도 그것이 유혹이 될 때에 멀리하라. 범죄의 근원이 되는 부분은 전부를 보호하기 위해 잘라지도록 해야 한다. "치료될 수 없는 상처의 부분은 건전한 다른 부분이 상하지 않도록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이 고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며, 자신이 멸망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이것을 행할 필요성.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43, 45, 47절). 죄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현재에는 마치 절름발이나 불구자와 같이 느껴질지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를 바쳐야 한다. 그것은 다른 길로는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함이다. 이런 절름발이나 불구자 됨은 주 예수의 표가 되는 것이며 그 나라에서 영광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4. 이렇게 행하지 않음에 대한 위험. 이 문제는 마침내 죄가 죽거나 우기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만일에 우리가 데리라를 우리의 물 속에 안고 있으면 그녀는 결국 우리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우리는 불가피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에 우리로 범죄케 하는 "두 손"과 "두 눈"과 "두 발"을 간직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 지체들과 함께 지옥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구주께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하시면서, 만일에 우리가 계속 범죄를 한다면 우리를 멸망케 하는 지옥의 고통에 대하여 말씀하시었다. 여기에 그러한 두려운 말씀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강조하신 것이다.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3, 45, 47, 48절). 이 말씀들은 이사야 66장 24절에서 인용하신 것이다.
(1) 죄인 자신의 양심의 비난과 치욕은 "구더기가 죽지 않는"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구더기가 죽은 시체에 생겨서 그것을 파먹고 다 먹어버릴 때까지 떠나지 않는 것처럼 저주받은 영혼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벌레는 양심을 갉아먹고 무섭게 말씀을 물어뜯는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히 여기"었다. !(잠 5:12, 23) 이 구더기의 밥이 되는 영혼은 죽지 않는 것이다. 저주받은 죄인들은 그들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영원한 고소를 당하고 정죄를 당하고 책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그렇게 사랑에 빠져있는 그것들이 결국에는 "뱀같이 물 것이며 독사같이 쏠 것이다"(잠 23:32).
(2) 범죄하고 더러워진 양심에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는 "꺼지지 않는 불"이다. 그것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에 그 진노가 임하는 자에게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저주받은 죄인들의 영혼들에는 은혜의 성령의 역사도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화성이 강한 기름의 성질을 바꿀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언제까지나 연소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간청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서운 불을 진압하거나 끌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휘트비 박사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은 그리스도 교회가 끊임없이 믿었던 신앙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신앙이었다고 말하였다.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 악한 영혼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그런 자들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지지해 왔었다고 하였다. 필로(Philo)는 말하기를 악한 자의 형벌은 "영원한 죽음이며 영원히 끊이지 않는 고통과 슬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끝의 두 절은 약간 다른 말씀이다. 그리고 주석가들은 그 말씀들의 의미에 있어서 일치하지를 못하고 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49절). 여기에 "사람마다"는 "대체로 모든 사람이"나 "그들 중 모든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절).
[1] "모든 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분부하신 것이다. 그것은 제물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던 제물이나 고기는 소금이 없이는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소제를 드릴 때에 더욱 그러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레 11:13).
[2] 인간의 본성이 부패해져서 "육체"라 부르게 된 것이다(창 6:3; 시 78:39).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 "소금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생선에 "소금을 친" 것을 "절임"이라 했다.
[3] 우리의 첫 관심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다(롬 12:1). 그리고 열납 될 남한 제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금을 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부패한 애정은 극복되고 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 은혜의 향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음직하게 되려"면(롬 15:16), 그 제물이 "소금치듯 함을 받아"야 한다.
[4] 은혜의 소금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 속에 "소금을 두고" 있는 자들, 그들의 심령 속에 은혜의 산 요소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든 부패한 기질과, 부패하게 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영혼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무미한 고기와 같은 우리의 양심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여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야"한다(골 4:6; 엡 4:29). 우리는 부패한 고기를 입에 넣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부패한 말은 입에 두기를 싫어해야 한다.
[5] 이 은혜로운 소금이 우리의 양심을 범죄로부터 지키어 주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 지키어 줌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않고 "서로 화목하게"하는 것이다.
[6] 우리는 이 은혜의 소금을 소유해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이 소금을 맛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만일에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진리에서 타락한다면, 만일에 그리스도인 그 맛을 상실한다면 그리고 그 영향력 아래 더 존속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그를 회복하게 하여 주겠으며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마태복음 5장 13절에 이 대답이 나와 있는 것이다.
[7]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산제물로 드리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영원히 죽은 제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서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소금으로 치지" 않으면, 그들이 자기들의 부패한 애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니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순복하지 않으면, 그리고 교만한 육체를 침식하는데 필요한 부식성에 대해 참을 수가 없다면 그들에게는 마치 "손 하나를 찍어버리고" "눈 하나를 빼어버리"는 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에서 "불로써 소금 치듯함을 받을" 것이다. 그들 위에 "숯불을"(겔 10:3) 마치 고기 위에 소금 뿌리듯이, 마치 소돔성에 유황과 불이 떨어지듯이, 뿌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즐겼던 쾌락이 "불같이 그들의 살을 먹을"것이다(약 5:3). "소금을 치는" 것이 불에 타는 것과 비교가 안 되듯이 육체를 억제하기 위해서 현재 당하는 고생은 그것을 억제하지 않음으로써 당하는 형벌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옥 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하시었다. 여기에 대하여 기름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수 있느냐고 반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께서 암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늘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에 던짐을 받은 자들은 지옥 불이 소금의 침식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지속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소금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보응에 대한 기념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과 욕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이 분명할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알고 주님을 두려워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