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24. 금요일.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모스크바 필
차이콥스키 교향곡 3번(폴란드)& 6번(비창)
아직은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공기가 상당히 찼다.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이따금 시야에 들어오는 눈의 나라(러시아) 사람들조차 실내까지 쫓아 들어온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냉기로 부르르 떨곤 했다. 그들에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쇠고기 스튜 한 대접이, 우리에겐 뜨끈한 김치찌개 한 그릇이 간절한 날씨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겐 차이콥스키의 음악이 절실할 터였다.
본래 나란 위인은 매정하질 못하고 다른 한편으론 예민하지 못하여, 어느 오케스트라가 월등하고 어느 교향악단이 열등하다........비교하기 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높이 사기를 즐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유난히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던 골족(Gauls)의 후예들답게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은 작품마다의 독특한 뉘앙스를 기가 막히게 잘 잡아내고, 매우 이지적이고 성실하지만 융통성이 2% 부족한 게르만이 대다수인 베를린 필은 신 같은 섬뜩한 완벽성을 보인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모스크바 교향악단은 스태미나 면에서는 세계 최강이다. 만일 그들이 자국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한다면, 99.9프로 얼이 빠질 정도의 신들린 연주를 기대해도 좋다.
시작은 예상 밖이었다. 프로그램대로 차이콥스키 심포니 3번으로 출발하려니 하고 있던 우리들로서는 전혀 뜻밖이었다. 지휘자 유리 시모노프가 예정에도 없던 “에브게니 오네긴 의 폴로네즈”를 연주한 것이다.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음악회에 온 관객에 대한 깜짝 이벤트인가?!“ 마애스트로의 사려 깊은 음악 선물에 몸과 마음의 한기는 어느덧 사라진다.
사실 차이콥스키 심포니 3번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거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중에 음반점에 가보면 차이콥스키 심포니의 출발은 언제나 4번부터 시작하니까 말이다. 엄마의 자장가에 맞먹을 정도로 익숙한 4, 5, 6번. 그에 반해 3번은 얼마나 낯선지....... 따라서 그 작품에 대해서 소감 운운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것과도 같은 존재의 이면엔, 다른 한편으론 교묘한 익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 친숙함이란, 굳이 말하자면 차이콥스키“식”의 혹은 “풍”의 스타일일 것인데, 그 형체는 4, 5, 6번에서와 같이 완벽하진 못했으나 제법 완성도에 근접한 분위기를 내긴 했다. 마치....... 유명한 위인의 유년시절이 담긴 스냅사진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현재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듯이.......
인터미션 이후, 오늘밤의 하이라이트 비창이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그 곡은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의도적으로 가장 원초적으로 흔들어놓았다. 슬라브족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이해할 수 없어 아름답다.), 심연을 알 수 없는(심연을 알 수 없어 아름답다.)바순의 탄식조의 선율이야말로 순수하게 정제된 러시아식의 염세주의였던 것이다. 죽음으로의 추락, 충격, 그리고 분쇄의 마침표. 한마디로 차이콥스키와 이반 일리치는 등가(等價)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던 것일까?!
평소대로라면 통상 맨 앞에 배치된 현악 파트, 기껏해야 그 뒤 목관 악기 정도쯤으로 시선과 관심 영역을 한정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초미의 관심사는 맨 뒤에 자리 잡은 퍼커션과 금관파트였다. 푸줏간 주인 혹은 산적같이 생긴 퍼커션 주자는 노퉁검을 두드리는 지그프리트 같은 가공의 힘으로 팀파니를 내리치고 있었고, 금관악기의 거침없는 황금빛 괴성은 거인족 파졸트와 파프너 형제처럼 위압적이라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1악장부터 퍼커션과 금관 악기는 압도적이었고 3악장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압도적이다 못해 무시무시했다. 금관악기는 황금비늘의 거대한 용이 되어 불을 내뿜는 듯싶었고, 팀파니 주자는 완성된 노퉁검을 마구 휘두르며 엄청난 정력을 과시하는 영웅처럼 한없이 무모해졌다. 굉음의 번쩍임과 진동 한가운데 마피아 두목만큼 다부진 “작은 거인” “유리 시모노프”가 있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천지가 개벽하고 집채만 한 파도가 일었다. 거대한 음악이 통째로 뭉텅이로 다가왔고 무자비하게 쏟아지고 짓눌렀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었다. 삼 십 여년 살면서 음악이 이토록 무섭기는 처음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최대한의 스태미나를 끌어 모아 단박에 발사했다. 핵폭탄 같은 위력이 삽시간에 객석을 강타했다. 4악장이 시작되었다.
다시금 염세주의, 허무 그리고 죽음이 연주된다. 그 옛날 수메르의 위대한 신들이 인간에게 부여한 몫이 죽음이며, 소포클레스가 비극 ‘안티고네’의 정립가에서 밝혔듯 인간이 유일하게 풀지 못한 숙제가 죽음인 것이다. 첼로, 특히 콘트라베이스의 비통한 선율이 점차 늦어진다. 오늘밤 다시금 세기의 마애스트로의 심장이 멎는다. 이생의 온기가 사라진 그의 시신만큼 추운 초겨울의 밤이다.
첫댓글 감동적인 후기에 공연장 분위기와 소리가 그대로 느껴지는듯 합니다.
10-11월 굵직한 공연 퍼레이드에
놓친게 아쉽군요.
고맙습니다.
오우 정말 아깝지 않더라고요 ♥
러시아 완전 사랑하게 되었어요..
음악은 물론 발레고 문학이고 참 깊이 있는 나라임
이날 감상 후의 클래식 선배님의 권고는 '당분간 다른 교향악단의 연주는 듣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좋은 여운으로 오래 즐기려면, 다른 연주와 비교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프로그램에 없던 차이콥스키 오페라 '에브게니 오네긴' 폴로네이즈를 앙코르 곡으로 했다면,
시작의 당황함이 감동으로 이어 지지 않았을까? 하는 투정?을 부려본다.
언젠가 핀랜드 지휘자가 '핀란디아'를 앙코르 곡으로 연주 했을 때의 청중의 환호와 감동이 생각난다.
ㅋㅋㅋ그날 용캐 뵈어서 반가웠네요 ㅋㅋㅋㅋ솔직히 푸시킨 원작 보다 음악이 훨 좋음요ㅋㅋ원작 에브게니 오녜긴은 살짝 좀 닭살인지라 ㅋㅋㅋ투르게네프의 첫사랑보다 운문체라 그런지 엄청 닭살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