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맹구와 할머니가 택시 합승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맹구가 방귀가 나오는 것을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손가락으로 택시 유리문을 문지르며 ‘뽀드득’ 소리를 냈습니다. 그렇게 몇 번 하면서 방귀를 다 뀌고 나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때 옆의 할머니가 하는 말, “소리는 그렇다 치고 냄새는 어쩌죠?” 우리는 가끔 ‘방귀’하면 소리만 신경 쓰는데 방귀는 소리와 냄새가 함께 나는 법입니다. 감출 수 없는 것은 방귀 냄새만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우리의 속내고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 하나님 말씀, 그리스도, 성령님, 성도의 기능 등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등불은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며, 더 나아가 죄악 된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하는 성도들의 사명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마가는 천국비유를 기록하면서 21-25절의 두 내용을(21-23, 24-25절) 한 데 어우려서 일종의 삽화처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차례 말씀하신 내용들입니다. 누가는 본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기록하고 있으며(눅 8:16-18), 마태는 산상수훈을 근간으로 본문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마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자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 비추고 그 영향력을 끼쳐야만 합니다. 그 빛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는 ‘그 등불’이라며 ‘등불’ 앞에 정관사 ‘그’를 붙여서 세상에 오직 하나의 빛이신 ‘오직 예수’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우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었고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었기에 우리는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만 가르치고 예수만 전해야합니다. ‘등불’은 여럿 중 ‘하나의 등불’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등불’ 곧 ‘오직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등불’이 예수라면 ‘등불이 빛을 비추는 것’은 당연히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전해야하는 것은 모든 죄악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의 하늘나라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참 빛 곧 세상의 유일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요 1:9).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로 뽑힌 어느 목사에게 교인들이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님’이라 적힌 메달을 주었습니다. 교인들은 그 메달을 바로 다음 주일에 다시 빼앗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가 그것을 목에 걸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방심하면 주님이 아닌 자기를 자랑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이스라엘 웃시야왕입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웃시야의 이름이 퍼져 나갔고 그의 군대가 강성해졌습니다. 족장의 총수가 이천 육백 명이고 그 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 오백 명으로 그들은 왕을 도와 적들을 물리쳤습니다(대하 26:12-13). 성경은 그에 대해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 26:4-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경은 그 다음에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16절)”져서 파멸로 치달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는 자신을 형통케 하셨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언해 주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향단에 분향하려 함으로써 주님 앞에 죄를 범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문둥병으로 치셨습니다(대하 26:16-19). 그는 “죽는 날까지 문둥이(21절)”로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뜻이나 욕심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빛을 발하는 삶입니다. 모든 문제를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대로 푸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밀어내 버리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기 이익을 따라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합니다. 선과 악을 제 멋대로 바꾸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합니다. 선악의 표준이 없습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표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선이고 그가 싫어하시는 것은 악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면 빛이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면 어둠입니다. 성도는 참과 거짓을 뒤 섞어 놓고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선한 목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갈 1:4,창 5:22). 혹시라도 거짓을 배격하고 참을 따라가다가 자신이 손해를 보고 바보취급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우리의 순교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비로소 이 세상의 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첨탑이 새서 작년에 업자를 불러서 방수를 했는데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금년에 크레인 비용만 대면 자기들이 다시 손을 보겠다고 해서 다시 손을 보았는데도 아직도 새고 있습니다. 다시 실상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싫은 소리 한 마디 않고 좋게만 말했습니다. 어제는 업자가 와서 장마 전에 손을 보겠다고 왔다가는 사다리가 고장이 나서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스스로 “목사님 제가 예배를 드리러 꼭 오겠습니다.” 약속을 하고 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우리는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결코 복음에서는 손해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만약 이 빛을 거부하면 인간은 금방 어두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본문의 주요 단어들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마가는 본문 21절을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헬라어 ‘메티(-아니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간접적인 명령입니다. 유대인들은 등불을 켜지 않을 때 가루나 곡식을 되는 ‘말(됫박)’로 등잔을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그 등잔을 내려놓는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말’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 단절시키게 만드는 세상적인 부와 이익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평상’은 침상을 뜻하며 상징적으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평온함과 쾌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이처럼 ‘말’과 ‘평상’으로써 ‘그 등불’을 가리듯이 주께로 받은 복음 곧 빛나는 그 계시를 결코 세상의 부와 유익과 평온과 쾌락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등경’은 등잔을 올려놓는 받침대로서 상징적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할 사명을 맡은 교회를 상징함과(계 1:20) 동시에 성도가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들은 성도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러한 유혹과 시험은 필연적인 것이고 또 그런 것들을 이기고 물리칠 때 비로소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강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 좋은 우리는 예를 요셉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10대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애굽의 바로 왕의 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어 그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20대 중반쯤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우아하고 잘 생기고 똑똑했던지 보디발의 아내가 눈독을 들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합니다. 하루는 여자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사정을 합니다. 다급해진 요셉이 웃옷을 벗어던지고 도망갔습니다. 여자의 그리움은 드디어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에게 요셉의 옷을 내밀면서 요셉이란 놈이 자기를 성폭행하려고 해서 소리를 질렀더니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다고 모함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감옥도 필요 없습니다. 노예에게 재판 또한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풍습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요셉을 감옥에 넣었다는 것은 아내의 말보다 요셉을 더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아내보다 요셉을 더 믿게 했을까요? 요셉의 높은 도덕성, 아니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표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도 상황도 아닌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보디발은 평소 요셉에게서 늘 이 그것을 보아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따라 살 때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주의 사랑을 따라서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이웃들에게 매우 거치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했다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왕의 왕이 자기를 낮추시고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라면 우리도 우리 이웃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기를 원한다면 먼저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가야만 됩니다. 그것이 미련해 보이고 지고 망하는 길일지라도 그 길이 진정 풍요로운 길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일에 사단의 훼방을 이기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을 더 멀리 비추시기 위해서 우리들을 더 높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본질상 진리(빛)이기 때문에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단은 수많은 유혹들을 통하여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복음이 확산되지 못하게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빛 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상 주님과 천국복음은 세상을 비추어야 하는 빛(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등불은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자체입니다. 진정한 진리의 등불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제자들은 그 진리의 근원으로부터 빛을 받아 전하는 한 개의 등불입니다. 성도된 우리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면 우리 역시 세상에 빛을 비추는 한 개의 등불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등불이 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과 복음으로 무장된 이러한 등불들을 통해서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진리는 본질상 숨겨지지 않고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일시 거짓이 승리하는 듯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진리는 반드시 거짓을 이기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가져오신 복음은 인류에게 참 자유를 주는 진정한 진리고 빛입니다. 그러므로 참 진리인 천국복음은 반드시 세상에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감내하신 주님을 늘 전파해야합니다.
어떤 장님이 길을 가는데 자기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치는 것을 예방하려고 등불을 켜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쳐서 이마가 상했는데, 이 장님이 화가 나서 “나는 장님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자네는 왜 눈 뜬 사람이 이 등불을 보고도 왜 들이 받는가!”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저쪽에서 하는 말이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이미 꺼진지 오래 되었소.”라고 하더랍니다. 장님의 문제는 빛을 못 본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둠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불쌍한 것은 소망을 못 보는 것만이 아니라 절망의 실상 조차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외면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한 인간은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분별력을 잃은 인간은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 대신 강도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복음은 바로 그런 세상에 구원의 생명 빛을 비춤으로 빛과 어두움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복음이 잠시 가리어지는 것 같을지라도 결국에는 모든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본문 21절 ‘가져온다.’는 말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계시를 종말의 시점에 이른 이제 만민에게 알리고자 하는 종말론적 사상을 함축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주의 재림이 임하기전 주의 빛을 ‘가져다’ 만민에게 비추어야만 합니다.
주님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비유로 천국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수많은 박해로 잠시 숨겨지는 듯 했지만 그 빛은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가서 빛과 어둠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닫힌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잠시 복음을 비밀로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제자들에게는 그 비밀은 밝히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 주님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구원계획(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복음을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서 세상 널리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은 복음의 빛이 세상을 속속히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선포하셨습니다. 그 빛이 비추어질 때 감추인 것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이나 더러운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최후 심판의 때에는 모든 감추어졌던 사실들이 다 드러나데 됨으로(고후5:10)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기의 죄를 감추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죄는 물론 성삼위 하나님이 대해서도 밝히 드러날 날이 올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역시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예수의 비밀 역시 현재는 숨겨져 있으나 언젠가는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된 사건에서 그분의 메시야성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시에 모든 영광으로 예수를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닌 바로 이 주님과 주님의 복음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높이 들어 세상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오늘도 불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빛을 비추어줍니다. 이 복음은 주님 오실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파될 것입니다. 복음은 본질상 빛이기 때문에 전파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일꾼들을 끝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복음을 계속해서 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빛이기 때문에 반드시 비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등불로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책임을 잘 감당할 때에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빛을 더 멀리 쉬지 않고 비추도록 더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타인의 등 받침은 진흙으로 만들어 졌는데 말로 덮으면 불은 꺼집니다. 작고 대부분 창문이 없으며, 굴뚝조차 없는 단칸방 농가에서는 이런 불 끄는 방법이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불어서 끄면 연기와 냄새가 생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티에 의해 불이 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등불을 가능하면 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에서 팔복을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라 말씀하셨을 때 이 사실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끊이지 않는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가 빛인 것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진실한 삶에서 우러나는 멈추지 않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보고 우리가 어둠이 아닌 빛에 속한 자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대접입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고사하고 향기를 막는 역한 냄새만 풍기는 스컹크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얼마나 크게 보시고 또 크게 대접해 주시고 계시는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자신에 속한 자로 그분의 권속으로 대접을 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빛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이 빛은 많은 사람에게 비추기 위해서 밝혀진 빛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에게 빛의 사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나게 합니다. 빛 앞에 머물 수 있는 어두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빛입니다. 이 빛을 제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빛은 이제부터 비추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숨긴 것은 조만간 드러날 것입니다. 마음의 깊은 생각과 의도를 아시는 주님 앞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밝히 빛나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이 빛을 욕심(말)으로 덮어서 끄거나 쾌락(평상)으로 빛의 발산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빛 되신 예수를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자는 모두가 이 세상의 빛이 된 자들입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는 어둠을 뚫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 때문에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구원의 길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기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과거의 우리는 어둠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 빛에 속한 자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정도 빛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무엇에 기가 죽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와 사랑에 목마르지 않고 돈과 출세와 권력에 기가 죽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세상)을 붙잡고 있는 자들입니다. 누가 고급 차나 보석을 가진 걸 보면 기부터 죽어서 부럽고 시기어린 눈으로 우러러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화스러운 아파트, 고급차, 멤버쉽 카드, 권력, 명예 그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남과 차별화할 때 써먹는 겁니다. 그런 차별화는 이 세상을 불평과 원망 그리고 시기와 투기가 판치는 불평등과 갈등의 골을 키워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발하는 빛은 너와 나의 막힌 담을 헐고 말씀의 토양위에 사랑을 꽃피우는 동산입니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 차별화를 꾀하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불신자와는 다른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빛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둠과는 결별한 삶의 모습입니다.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사람으로, 이기기보다는 지는 사람으로, 거짓보다는 정직과 신실함으로, 돈만 아는 세상에서 돈보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사람으로, 교만이 판치는 세상에 겸손으로, 미워하고 시기하기보다는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덕을 세우는 삶입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김으로 어두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이 있음을 보여주며 사는 자들이 성도여야 합니다.
언젠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서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늙고 덕망 높은 성도 ‘로버트 C. 채프만’에게 어떤 책을 읽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채프만은 다음과 같이 매우 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직 다 읽지 못한 매우 흥미로운 책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100세 가까이 살았지만, 그는 결코 그 책을 다 읽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 자체가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때 완전한 일치가 있으며(암 3:3) 그리스도의 권능이 그 위에 머물며(고후 12:9) 매우 달콤한 교제가 있으며(요일 1:3) 세상을 닮지 않고 하늘에 속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롬 12:2)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명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날마다 엄청난 양의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성도들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악으로부터 순결을 지키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성경을 현대화란 이름으로 사람의 지성과 기호에 맞도록 변개하고 삭제하여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멋대로 가르치는 기독교서적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말씀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고 세상에 대한 욕심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굽니다. 우리는 그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길은 말씀에 귀를 열고 듣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빛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듣고 행하는 자에게 곧 생명이고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빛의 메시지, 복음을 감추지 말고 만방에 선포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복음을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선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 귀해서 방구석 깊이 감추어 두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비추어야 하는 빛입니다. 그래서 그 빛을 비추어야 하는 사명자들입니다. 만약 등불을 말 아래 둔다면 그것은 등불의 존재 의미를 잃는 것입니다. 등불은 빛이 필요한 곳에 빛을 비추어 세상에 어둠이 깃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등불은 빛을 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인 이 복음을 숨기고 감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널리 알려야합니다. 비록 세상은 무지해서 우리를 오해하고 모독하고 배척하고 반대할지라도 우리는 전해야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모든 유혹을 빛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어둔 세상에 우리가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는 것만이 아니라 말과 행동에서 세상에 빛이어야 합니다. 각자가 속한 사회의 한 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성도들은 빛 가운데 살며 빛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빛으로 이 땅에 오셨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주님, 지금도 그 빛을 이 세상에 비추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늘 빛 된 삶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회개하며, 이웃에게 빛이 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말로 전하고 또 그 복음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의 향기로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악취를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채우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