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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엣세이>
영은사靈隱寺 탄허스님의 일소굴一笑窟을 찾아서
-詩香이 싱그러운 영은사 2013,04,26.
약사삼불의 금련대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영은사(주지 행담 스님) 금련루 범종각에서 보이는 경내/정면
건물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옆에서 보았을 때 지붕선이 사람 인
(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특이하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삼존불상을 모시고 있고 5폭의 탱화가 있다.
영은사靈隱寺 주지는 시詩를 쓰는 행담 스님 이다. 영은사는 200만평의 광대한 산악지형에 빼어난 생태
환경을 간직한 전통사찰로 신라 진성여왕5년 891년에 범일국사가 창건했다. 5.03m×8.17m 괘불掛佛을
모신 <팔상전八相殿>은 1855년 서암 스님이 조성했다. 괘불은 기우제, 영산재 같은 야외 불교의식 때에
밖에 내다거는 탱화인데 도난 당했다. 탄허呑虛 스님의 영혼이 깃든 산사山寺 이다.
[설선당] 이다.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경내는 연등이 켜졌다.[설선당]맞은편 [심검당] 현판은 영친왕에게
서법을 가르치고 한국 최초의 어전 사진사였던 해강 김규진 작품이다.신검당에서는 매년 4월 삼척 두타문
학회에서 찾아가는 두타시낭송회를 펼친다. 기둥의 글씨는 탄허 스님 작품이다.
대웅보전 좌측에 있는 5층석탑 뒤 건물은 부처님 일생을 그린 5.03m×8.17m
괘불掛佛을 모신 팔상전八相殿이다.괘불은 도난당하고 새로 모셨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뒷태이다.외부 앞면의 살미는 쇠서형牛舌形인 데 비하여 뒷면은
운공형雲工形으로 초각草刻되었다.옆의 건물은 원래의 종각이다.
팔상전八相殿에서 바라보는 영은사의 뒤에서 보는 전경, 어스름이 내리는 산사
영은사 너와지붕 해우소
영은사 부도군
영은사靈隱寺 탄허스님의 일소굴一笑窟을 찾아서
일소굴一笑窟 오르는 오솔길/탄허스님은 일소굴에 계실때 매일 새벽
이 길을 오르내리며 개울에서 세수를 하엿다.
일소굴一笑窟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영은사靈隱寺에 부속된 건물이다.
영은사에 뒷편 야산에서 대한민국의 승려 탄허가 수행하며 화엄경을 번역한 곳이다.
한국 대표적 학승學僧 탄허呑虛 스님(1913~1983)은 영은사 토굴에서 법문 공부와 신화업경 번역에 심열
을 기울이며 보냈다. 토굴은 영은사에서 500m 떨어져 있는 초가 3칸으로 <일소굴一笑窟>이다.
토굴,초가 삼칸은 기와집으로 개량되어 있었다 .탄허 스님의 일소굴에서 생활은 새벽 2시30분에 기상으로
시작 했고,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계곡의 얼은 물에 세수를 하고, 하루 생활의 문을 열었다. 끼니 때마다
아래 큰절에서 올라와 공양을 했고, 산문山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일소굴一笑窟에서 바라보이는 앞산 무지개가 피였다.
일소굴一笑窟 남향
일소굴一笑窟 북향
일소굴一笑窟 내부1
일소굴一笑窟 내부2
일소굴一笑窟 내부3
<일소굴과 연관된 탄허 스님에 관련 최승순 교수의 글 1,2,3 >
탄허당과의 만남 - 삼척 영은사 일소굴(一笑窟)
국학(國學)의 골격이 동양의 유, 불, 선의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자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져 60년대 초에 조당집(祖堂集)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번역을 시도한 일이 있다. 당시 강릉포교당의 이수동포교사가 쓸 만한 불교사전을 가지고 있어 이따금 그 신세를 졌다. 그러나 시원치 않아 삼척 영은사에 거처를 정하고 있는 탄허당에게 속인이 찾아가도 좋겠느냐는 편지를 했더니 답이 왔다. 필자가 받은 탄허당의 서신에는 순한문과 국한문 혼용의 두 종류가 있다. 모필로 친서한 순한문의 서신은 그 가운데 한 통을 표구를 하여 필자의 서재에 걸어 놓았다. 이때 받은 답신은 국한문 혼용으로 겉봉의 우체국 소인이 1962년 12월로 되어있다. 그 서신에
“…마당 앞에 若干(약간)의 種藿(종곽)이 있어 白駒(백구)의 먹음을 바라는 바이온데 放學期(방학기)에 한 번 尊駕(존가)를 屈(굴)하시지 않으시니…`나는 비록 가지 않으나 君(군)은 어찌 오지 않느냐'의 古人(고인)의 詩句(시구)를 외울 따름입니다…”라고 시경의 교교백구(皎皎白駒) 식아장곽(食我場藿)의 구절을 인용하여 오라는 답이 왔다.
궁촌 근처의 국도에서 버스를 내려 10리길이 넘는 절에 이르러 내의를 알렸더니 주지스님이 “큰 스님께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큰 스님은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계시니 여기서 저녁 공양을 하고 가십시오.”라 한다. 식사 후 호롱불을 든 스님을 따라 산길을 한 참 갔더니 산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리고 좀더 가까이 가니 강의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탄허스님의 음성이었다. 흡사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를 실연한 셈이다. 이 토굴은 영은사에서 500m 이상 떨어져 있는 초가 3칸으로 일소굴(一笑窟)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방에서는 동국대학대학원 학생들이 장자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교재를 가지고 있는데 탄허당은 책이 없었다. 장자 내·외 잡편까지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이다. 승려가 불경의 어느 일부를 외운다면 괴이할 것이 없지마는 장자는 고삽하기로 이름 난 책이다. 그 긴 전편 한 권의 책을 다 외우고 있으니 그 근기(根機)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제 어디까지 했던가”라고 묻고 학생이 더듬거리며 어제 마지막 한 장을 읽으면 “다음”하고 어제에 이어 본문을 외우고 강의를 한다.
탄허당(呑虛堂)과의 만남 (1)
율곡 이후 처음보는 석학을 찾아
이 지방에서 학문이 깊다는 노인을 찾던 가운데 한 노인이 “자네 공연히 우리와 만날 것 없이 오대산 월정사에 탄허(呑虛)라는 승려가 있는데 내가 만나 본 바로는 율곡 이후에 처음 보는 대학자니 시간이 나거든 그를 만나보게”라는 것이다. 이 노인에게서 탄허라는 법명을 처음 들었고 어떤 분이기에 `율곡 이후에 처음 본다고 하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새겨두었다.
이 무렵 휴전이 되어 포성은 멎었으나 전후의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나라에서 주는 봉급이라는 것이 우선 연명을 하라고 쌀 몇 말과 보리쌀 몇 말로 그것도 부정기적이었으나 불평하는 교사는 없었다.
전후 교통기관이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담임을 맡고 있던 학생들이 가을에 오대산 월정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후생사업을 하는 군 트럭을 빌려서 타고 월정사로 갔다.
개화 이전 우리 문화의 바탕을 따지고 보면 동양 3대 사상이라 하는 유·불·도(선)가 우리 토속사상의 근간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불이 가장 영향이 컸다. 그 증거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문화유산 가운데 7, 8할이 불교유물이고 강원도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강원도에 본산 사찰이 3곳 있었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 건봉사, 금강산 유점사가 그것이다. 건봉사와 유점사는 38선 북에 있었으나 전쟁 때 다 소실되었고 월정사는 38선 남에 있었으나 전쟁중에 소실이 되었다는 말만 듣고 있었다. 중국의 시성인 두보(杜甫)가 그의 시에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나라는 망하였는데 산천은 그대로다.)'라더니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에서는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월정사의 계단을 마지막 올라서니 그 고색이 창연한 웅장한 가람은 오간 데 없고 초라한 간이건물인 함석집 한 채가 1,300년 옛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유·불·도(선) 3교가 우리 문화의 근간적 역할을 했다는 말을 앞에서 했거니와 강원도의 불교문화를 말할 때 첫손 꼽아야 할 곳이 월정사이다. 강원도 내에서는 38선 이남의 유일한 본산 사찰로 강원도 불교문화의 본원지인 월정사가 자취도 없이 타버려 1,300년의 세월이 폐허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때 필자가 담임했던 학생 중에는 군에서 제대했거나 제대한 상이군인도 있어 나이 든 학생이 더러 있었다. 학생의 통솔은 반장에게 맡기고 필자는 홀로 강릉에서 들은 `율곡 이후에는 처음이라'는 우리나라 불교계의 석학 탄허당을 만나러 갔다. 승려 중 한 사람에게 찾아온 내력을 알리고 뵙게 주선해 달라 했더니 가건물 뒷방으로 안내하였다. 이때 처음 탄허당을 대면하고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만남 이후 그 학문적 온축에 경도하여 열반 때까지 교분을 가졌다. 그때 스님 거처에는 지금 월정사 성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에서 인출한 8만대장경의 일부가 꽉 차있었다. 월정사는 강원도 불교문화의 보고다. 강원도에 있는 국보가 8개인데 그 가운데 오대산 내에 4개가 있으니 강원도 국보의 반이 오대산에 있는 셈이다.
전쟁으로 회진이 되어버린 대찰의 사정이 이러하니 학생들의 숙소로 정한 민가는 더 어떠했겠는가. 임시가옥으로 지붕에 판자를 얹고 그것이 날아가지 않게 베개 크기의 돌을 얹져 놓았으니 불안하여 잠인들 편하게 잤을 리 없었다.
다음날은 학생들과 같이 상원사를 거쳐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까지 갔다. 비로봉 정상에는 일제 때 국토 측량의 기점으로 잡은 돌기둥이 눈을 끌었고 노정에 있는 중대사와 적멸보궁은 전화를 피하여 제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월정사는 잿더미가 되었으나 상원사는 전화를 면하였다. 거기에는 한국 근세의 고승인 방한암(方漢岩) 조실스님의 힘이 작용 했던 것이다.
글 : 최승순·강원대명예교수
출처 : 강월일보 2007.3.27
탄허당(呑虛堂)과의 만남(2)
전후 한때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절을 지킨 스님이라는 내용의 단원이 있었다. 그게 바로 상원사를 전화에서 면하게 한 한암선사의 이야기이다. 우선 상원사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두 점이 살아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엄청난 문화재 보존 업적이고 이러한 문화재가 있기에 우리 역사가 빛이 나는 것이다.
탄허스님과의 교분으로 월정사의 스님을 여러 사람을 알게 되었고 탄허스님이 강릉에 올 때는 포교당에 묵으면서 전화가 없던 때이기에 사람을 보내 알려 주었다.
월정사에 방산굴(方山窟)이라는 액판을 건 건물이 있다. 6·25전쟁 뒤에 새로 지은 건물로 탄허스님의 거처이다. 절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속인들은 굴이라하면 산허리에 굴을 뚫은 토굴을 연상하기 쉬운데 여기서 굴이라고 하는 것은 토굴이 아니고 수도하는 사람의 깨끗한 정사(精舍)를 말한다.
방산굴에서 며칠 탄허스님과 같이 기거할 때 스님이 “나를 찾아오는 손님에게 3등위의 대접이 있오. 인사차 온 손은 공양 때가 되면 절에 가서 대중공양을 하라고 내려 보내고 교분이 좀 가까운 사람이면 손님공양 나와 겸상으로 올려오라 하고 침식을 같이 할 교분이면 손님 이부자리를 내 이부자리 옆에 깔아라 하면 아이들이 귀빈이 왔다는 것을 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오대산은 강원도 불교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재의 보고이다. 조선시대에 여기에 사고를 두어 국보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다. 일제가 한국을 합병하고 문화적 침탈로 한 행위의 하나가 오대산 사고에 있는 왕조실록을 도쿄대학으로 약탈해 간 것이다. 이때 일제는 주문진에 배를 대어 놓고 촌민들을 동원하여 지게로 지금의 진고개를 넘어 배에 싣고 갔다는 이야기를 노인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보가 남의 나라의 재화(災禍)로 다 타버리고 겨우 몇 권 남아 있는 것이 돌아와 옛 고향인 오대산에서 잠깐 얼굴을 보였다는 것은 이곳이 문화재의 성지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전시의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한암스님이 국보를 지켜냈다는 것은 스님의 법력(法力)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보를 전화에서 지킨 그 업적이 원체 크기에 여기서 한암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대로 좀 서술 하기로 한다. 필자는 한암스님을 생전에 만난 일이 없다. 6·25전쟁 직후 월정사에서 사진으로 보았다. 이곳에는 사진이 두 장 걸려 있는데 한 장은 스님이 가사 장삼을 한 정장의 사진이고 한 장은 얼굴에 가죽만 있고 머리는 뒤로 젖혀 있는 사진으로 아무리 보아도 산사람의 사진 같지 않아 물었더니 운명 직후의 것이라 한다. 그것은 앉아서 숨을 거둔 사진이었다. 앉아서 마지막 숨을 거둔 사람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몰라도 거룩한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국보를 지켰던 스님의 마지막에 뒤따르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일부는 탄허스님에게서 들었고 일부는 한암선사가 열반 할 때 그 임종을 지켰던 희찬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6·25전쟁 전 10년에 걸쳐 화엄경(華嚴經) 원고 16만장(뒤에 30여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음)을 쓴 탄허당은 그 원고를 삼척 영은사에 옮겨 놓았다. 멀지 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고 그렇게 되면 월정사에 원고를 두면 전화를 입을 것 같아 영은사에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원고는 전쟁을 피해 뒷날 햇빛을 보게 되었다.
글 : 최승순·강원대명예교수
출처 : 강원일보 200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