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개요
고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베트남어: Ngô Quyền/ 吳權)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독립이후 베트남의 왕조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국경을 넓혀갔으며, 이러한 영토 확장은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 동안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게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명분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 전쟁
1956년 12월 –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 기간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상이 성사되어 미군이 철수하였고,
베트남 전쟁은 사이공 함락이 있었던 1975년 4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베트남 전쟁 종료 이듬해인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6.25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
대한민국군 32만명이 파병하여 5천명이 전사하고 31만명이 생존 귀환.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결국 공산주의 월맹(베트남민주공화국+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로 막을 내림.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민주진영인 월남(남베트남)의 패망이
절대로 군사력과 국력이 뒤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월남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지원받은
전투기 600여대, 헬리콥터 900여대 등으로 공군력이 세계 4위에 이르렀으며,
70만 병력의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었음.
☞그렇다면 월남이 패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월남이 진 것은 군사적인 패배로 진 것이 아님.
“정치 전쟁, 피 안 흘리는 전쟁”인 이른바 통일전선 전쟁에서
월남 내부가 붕괴되어 나라 전체가 무너졌던 것임.
자유 월남을 패망시킨 주역은 월맹군과 베트콩의 게릴라작전 때문이 아님.
'호치민'이 1930년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원과 민족해방전선의 '웬후토'가 양성해서 침투시킨 5만여명의 비밀조직원 때문.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한 이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채 시민,
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등 권력핵심부에 침투하여 반미,
반전 데모를 주동하는 선동전략을 펼쳤던 것임.

30년 전 월남패망은 이렇듯 분단 국가인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던져주고 있음.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족통일 이전에 평화정착을 앞당기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가 냉철히 뒤돌아봐야 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