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일 5:12-15)
주석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 )은 '에코'(* ,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5:13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 )는 문자적으로 '이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 )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 )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다'(* )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 )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