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교시 : 오리엔테이션
- 장소 :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 (430호) * 경향신문사(전 문화방송국) 남쪽 옆
- 서대문역(5호선) 5번 출구 이용 (5분)
- 시청역(1, 2호선) 1번, 12번 출구 이용 (10분)
* 2교시 : 덕수궁 답사(*복원된 돈덕전) :
◈ 덕수궁 답사
◇ 덕수궁(德壽宮) : 중구 정동 5-1번지(사적 제124호)
이 궁은 조선시대에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려왔으며,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요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이 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궐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고, 경운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의 이 궁에는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으며,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그 후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었다.
조선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1897년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기자,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다.
이 무렵 궁내에는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1906년에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고, 덕수궁의 정문이 되었다. 대한문은 1970년에 14m 안쪽으로 이전되어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은 황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자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그 후 1910년 덕수궁내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 궁에서 일어났는데, 1897년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 헌종의 계후(繼后)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태상황 고종은 1907년 이후,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이 궁궐은 일제 때인 1933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덕수궁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궁궐 내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소실되었으나 전쟁 후에 복원되어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위치와 건물배치〕
덕수궁은 원래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궐이 된 만큼, 궁궐이 자리 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 곳은 한성부 서부 황화방(皇華坊)·정릉동(貞陵洞) 일대로 조선초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康氏)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정릉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덕수궁의 자리는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구 러시아공관이 위치한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미국·러시아의 공관 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세워지고, 도로가 나게 되었다.
덕수궁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明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궐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입궁하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重層)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에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 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이 보물 제819호, 함녕전이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궐내의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조선후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에 중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황제가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는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退)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궐의 북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편에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덕수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건축 구성의 변화〕
덕수궁 궁궐 배치는 1904년에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다.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화재 뒤에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6년 덕수궁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개수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쪽으로 옮겨졌다.
덕수궁 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 석조전 :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궐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 돈덕전 : 돈덕전은 석조전 북쪽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돈덕전은 우크라이나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돈덕(惇德)'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는 것인데 《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
1903년에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으나 결국 개최하지 못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1906년(광무 10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고,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순종은 이곳으로 이어하려 했지만, 즉조당으로 이어했으며, 돈덕전은 신하들과 일본 관리들이 황제를 배알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大正)가 방한했을 때에는 상견례와 회식을 하는 곳으로 활용되었고, 11월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고종이 외부인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돈덕전은 고종황제 승하(1919) 후에 방치되다가 일제가 1926경 이전에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2017년까지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2018년부터 설계 및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연장되어 2023년 5월 22일에 현판 제막식을 갖고, 2023년 9월에 개관할 예정이다.
덕수궁은 비록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다.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