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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9일 주일메세지(Asan UBF)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말씀 / 누가복음 14:7~35
요절 / 누가복음 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한자, 한문, 한족... 중국 역사에서 ‘한’나라의 영향력은 대단히 큽니다. 한나라를 세운 사람이 한고조 유방입니다. 그와 겨루며 대립했던 사람이 초나라 항우입니다. 항우는 대단한 영웅이었습니다. 항우는 유방과 싸워 여러 차례 이겼습니다. 그는 딱 한 번 유방에게 졌습니다. 그 한 번의 패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해하여 죽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유방이라면 다시 재기를 모색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유방이 비참한 패배에서 재기하는 과정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와신상담’입니다. 항우는 고난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고난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합니다.
오늘날 우리 아산, 천안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좋은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과목을 싫어합니다. 공부 많이 시키는 교수님을 싫어합니다. 과제가 많은 과목도 싫어합니다. 곧 수강신청 기간이 올 것입니다. 과제 적은 과목, 점수 잘 주는 과목, 세 시간 강의를 두 시간만 하고 마치는 과목은 순식간에 학생들이 채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4년을 보낸 결과, 어떤 학교는 취업 잘된다는 IT전공이 취업율 50%가 되지 않습니다. 전기 전자과를 나오고도 학과 취업율이 70% 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이며, 취업하더라도 연봉 3천만원을 받지 못합니다. 4년간 고난을 회피한 결과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난을 감당하는 믿음을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난을 영접하는 믿음을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1.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7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였습니다. 식사자리에 온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공식 모임에서 자리는 중요합니다. 아산과 천안에 14개의 대학교가 있는데, S대학교 총장님이 자리를 아주 잘 잡는다고 합니다. 모임에서 시장, 도지사의 동선을 빨리 파악하고 좋은 위치, 좋은 자리를 잘 잡는다고 합니다. 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총장 옆자리, 부총장 옆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지는 중요합니다. 보직교수들이 앉는 자리가 있고 평교수들이 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식 석상에서 자리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서 좋은 자리, 높은 자리에 앉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 자신의 존귀함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날 바리새인이 지도자의 집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바리새인 지도자와 식사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산다고 인정받는 종교지도자, 제사장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세상사람들과 똑 같은 행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지향합니다.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백성들을 섬기는 것을 지향합니다. 말로만 그러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로부터 받들여 지기를 강렬하게 열망하였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에서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왜 거기 있는가? 이리로 올라 오시오!’ 주인에 의하여 올라 앉을 때 영광이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잔치 자리에서 스스로 끝자리에 앉을 때 위로 올라오라고 청함받듯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상급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을 때, 기꺼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얼마든지 낮은 자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인격이 안되면 믿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내면성이 부족하면 믿음으로 낮은 자리로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는 인격이 천하고 내면성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것을 믿으면 우리도 낮은 곳에 처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내려가 하나님의 높여 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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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절을 보십시오. 잔치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음식과 술을 준비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인건비도 준비해야 합니다. 잔치를 베푸는 장소도 넓은 곳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서 손님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게 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청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친절을 베풀고 음식을 베풀 때,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절과 선행을 하면서 내가 준 것 몇 번, 내가 사준 것 얼마, 따졌습니다. 받아야 할 것 몇 번이며 덜 온 것이 얼마나 되는지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준만큼 되돌려 받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조건없이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친절과 헌신은 이유가 있었고 계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조건 없는 섬김,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친절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아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자랑스럽고 말로만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조건없이 섬기고 베풀었는지 알았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친절하고 섬김이 풍성한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들, 가고 나면 갚을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풍성하게 대접하고 섬겼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아브라함의 나그네 섬김이 기록된 창세기를 통째로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섬김과 친절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알았지만 성경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살았지만 성경대로 실천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할 수 있었던 것은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고 베풀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상급, 하나님의 보상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익 중심으로 계산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고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주고 나누고 베풀 때 오히려 더욱 풍성해 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낮아질 때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누고 베풀며 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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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을 보십시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지금 지체 높은 바리새인의 지도자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서 살고 사람에게서 보상 받고자 집착하는 바리새인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는 원론적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상세하게 드러난 것에 대하여 만회하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이래봬도 우리가 천국잔치 때 만찬을 함께 할 사람들입니다’ 자부심을 표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16~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습니다. 당시 사치를 즐겼던 로마인들은 하루 네 번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여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식사를 했는데, 10시 쯤 아침을 먹고 저녁은 어두워지면 식사를 하였습니다. 잔치는 통상 저녁을 차렸으며, 잔치 초청은 두 번 하였습니다. 처음 초청하고 잔치 시간이 되어서 다시 종들을 보내어 오라고 초대하는 것이 유대 상류사회의 예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처음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전원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초청받은 잔치에 가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근본적 Identity 는 ‘초청받은 사람’ 맞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초청받은 사람들 맞습니다.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초청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실존적 상황은 ‘초청을 거절하여 초청한 사람을 분노하게 한 사람’입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돈이 많았습니다. 사두개파는 유대의 정치권력까지 강력하게 거머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건배사는 ‘이대로!’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여기가 좋은데, 왜 예수님을 통한 천국잔치에 들어가야 하는가? 거부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확대하며 백성들을 확실히 틀어쥐고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말 한마디면 모든 백성들이 절대 복종하고 ‘목자님 만세!’ 부르는데 왜 예수님 의지하라고 하는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천국잔치를 거절하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타도, 이스라엘 독립이 우선이라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서 헤매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과 몸 불편한 사람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맹인들은 지은 죄가 있어서 그렇게 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죄와 소외와 멸시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지옥의 불_쏘시개로 쓰려고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매일 기도하며 감사하는 첫번째 감사제목은 ‘저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청함받은 사람 대신 저주와 멸시의 대상인 이방인까지 들어가 앉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부단히 영적 투쟁을 지속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노인들이 자식을 상대로 소송 거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키워주고 가르치고 재산까지 물려 주었는데,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서 라고 합니다. 부모가 설마 나를 어떻게 하겠어? 자식이 나를 어떻게 하겠어? 이런 생각하며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70년대, 80년대 직장은 한 번 들어가면 내가 사표를 낼때까지 해고는 없었습니다. 1998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정리해고, 명예퇴직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포항제철, 전기통신공사, 이동통신공사 등 여러 공기업들이 민간기업이 되었습니다. 대학교의 대학교수도 성과연봉제를 실시합니다.
취업했다고 안일하게 근무하면 정리해고 대상이 됩니다. 공기업이니 정년 보장해주겠지 하며 들어갔는데, 한 10년 다니고 있는데 민영화 되어 버립니다. 민간 기업 같이 정리해고가 가능해집니다. 교수 임용되었다고 안일하게 강의 조금 하고 빈둥 빈둥 폼 잡고 놀다가는 남들 억대 연봉 받을 때 그 절반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요즘은 대학평가 때문에 정원이 조정되고 학과가 없어집니다. 학과가 없어지면 교수도 해고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안일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안일한 사람, 느긋하게 방심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상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영적인 생활에서도 안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투쟁에 힘써야 합니다. 구원받고 부르심을 입은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구원과 부르심을 입었다고 방심하고 영적 안일 속에 사는 것은 자신을 위험과 위기에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Asan ubf
오늘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이 가까운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 주시는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아주 구체적이고 강하게 주시는 말씀들 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고자 하십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2.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25절을 보십시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섬김이 좋아서 몰려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치유,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은혜는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좋으니까 좋았을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거여~!’
또 한가지 이유는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드디어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시지 않겠는가? 큰 기대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뒤로 줄서고자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지면 좋은 일들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가까운 제자들은 내각에 들어갈 것이고,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큰 권력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가까운 곳에 같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이라도 떡고물이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 상황입니다.
26,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미워한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더 앞세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기고 잘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인간사의 최고 가치를 둔 대상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감하게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학생 때,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친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과부가 되어 혼자 고생하며 키워주신 어머니를 마음 아프게 할 수 없어서 제자의 길과 효자의 길 사이에서 갈등과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제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키우고 있으니 자식만큼은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커서 예수님 제자의 길과 부자 아빠의 길 사이에서 고민 합니다. 부모 형제 자식을 공연히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하여 부모 형제 자식에 대한 의무와 관계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각오와 자세가 필요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무지개가 떠오르는 꽃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영광과 승리와 상급이 있지만, 그 영광과 승리와 상급과 영생으로 가는 길에 고난이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자매와 처자식을 귀하게 여기다가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서 만나는 고난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는 고생 하겠는데, 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못하겠다’. ‘자식까지 고난 받게 하는 일은 못하겠다’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ubf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돈은 없어도 ‘가오’는 설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려면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옵니다. 십자가를 질 때 ‘가오’고 뭐고 없습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픔과 수치와 괴로움입니다. 옛날 대전 센터의 동기들과 후배들은 전부 ‘스탶목자’, 자매들은 ‘스탶사모’를 비전으로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스탶목자가 되면 제자들을 훈련 주고, 방향주고, 그러면서도 존경받고 사랑 받는 좋은 모습으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스탶목자는 오래 인내하는 자리입니다. 요즘 누가 목자를 곧바로 존경합니까? 얼마동안은 오해하고 불신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는 대상이 목자 아닙니까? 스탶목자는 한시도 양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잊는 법이 없습니다. 목자에게도 늙고 병든 부모 보살펴야 하고 아내에게 관심 가져 주어야 하고 자식들 방에 들어가 보아야 하는데, 스탶목자는 양들을 늘 생각하고 양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양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관심가져야 합니다. 양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들을 상황이 되었을 때 해주어야지’ 삼키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공부하러 오는 양들, 예배에 말씀을 들으러 오는 양들에게 꾸정물을 먹일 수 없으므로, 좋은 말씀, 좋은 메세지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스탶목자는 주말여행, 가족여행 이런 것들은 깨끗하게 포기하여야 합니다. 군인은 군인이 감당해야 할 아픔과 수고가 있습니다. 자주 이사 다녀야 하고 근무지가 산간 벽지여도 가야 합니다. 발전소 근무하는 사람은 발전소에 근무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전기 기술사는 위험한 전봇대에 올라가야 하고 에어콘 기술자는 건물 옥상과 벽에 놓인 실외기를 만지러 위험한 곳에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안일을 사랑하고 이익을 원하는 자기의 욕심과 소원을 부인하고 사명에 따르는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제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망대를 건축한다고 널리 알리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망대 건축 비용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여 중단한다면 비웃음 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지금 유대인들이 우루루 몰려와 있습니다. 동네방네 ‘나 예수님하고 다녀!’ 나팔을 불고 자랑 했는데, 제자의 길에 따르는 아픔을 감당하지 못하여 중단하는 것은 건축하겠다고 하고는 건축을 마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31~33절을 보십시오. 전쟁을 하겠다고 1만명 군사를 이끌고 나갔는데, 적국에서 2만명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을 알았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작전을 잘 짜서 적은 수로 이길 궁리를 하든지, 전투가 안되겠으면 화친을 청하든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할 때는 고난이 있는지 십자가가 있는지 몰랐는데, 고난과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고난과 십자가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궁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난을 감당하여야 예수님의 약속하신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끝까지 완주하기 위하여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비용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영적 전쟁에서 끝내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전략 전술을 실행하여야 합니다. ubf
34,35절을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주로 바다물에서 얻는 천일염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위에서 얻는 암염에서 소금을 얻었습니다. 이 암염을 물에 넣으면 소금 성분이 녹는데, 이것을 반복하고 농축해서 소금을 얻었습니다. 소금을 추출하고 남은 암염은 소금 성분이 없어졌으므로 버렸습니다. 소금을 추출해내지 않은 암맥의 경우에도 밖으로 노출되어 비를 많이 맞은 경우 짠맛이 없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버리고 땅속에 있는 암염이어야 짠 맛을 많이 낸다고 합니다.
소금은 짠 맛이 있어야 음식의 부패를 막고 요리한 음식의 맛을 냅니다. 짠 맛이 없는 소금은 아무 곳에도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제사장나라로 불렀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불렀는데, 고난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에게서 높임 받으려 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안일과 자기유익에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감당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지도자가 있을 때 이스라엘 나라가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감당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을 때, 양들은 살아나고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불렀는데, 불러주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돈과 쾌락과 자기영광을 사랑하였습니다. 제사장 나라로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 유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세속의 권력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땅위의 유익과 세상 영광을 욕심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고난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고난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고난을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할 줄 알고 자기 십자가를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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