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병연 선생 공적비
젊음의 푸른 꿈을 흙에 묻고 뜨거운 執念(집념)은 不死鳥(불사조)되어 헐벗은 農民(농민)의 벗으로 風雲(풍운)이 凄絶(처절)한 逆程(역정)을 걸으며 至死不休(지사불휴)로 한 生涯(생애)를 農村運動(농촌운동)에바친 人間常綠樹(인간상록수)가 여기 있다.
그 분은 바로 嚴公 秉燕(엄공 병연)이시다.
公(공)은 1908년 8월 28일 寧越郡 北面 文谷里(영월군 북면 문곡리)에서 嚴泗源 翁(엄사원 옹)의 長男(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時節(시절)부터 남다른 意志(의지)와 氣槪(기개)가 있었다.
頑固(완고)한 家庭(가정)의 挽留(만유)를 무릅쓰고 나아가 弱冠 十八歲(약관 18세)에 寧越公立普通學校(영월공립보통학교)를 卒業(졸업)하였다. 때는 日帝의 彈壓(탄압)이 날로 더하여 겨레의 怨恨(원한)은 山河(산하)에 사무치고 農村(농촌)의 貧窮(빈궁)은 骨髓(골수)에 깊어갔다.
公(공)은 決然(결연)히 일어나 農村問題(농촌문제)는 産業開發(산업개발)로 經濟自立(경제자립)에 있음을 斷定(단정)하고 그 당시 收益性(수익성)이 높다는 잎담배 生産分野(생산분야)에 投身(투신)키로 뜻을 굳혔다.
1929년 영월경작조합(寧越耕作組合) 技士(기사)로 발탁되어 混亂(혼란) 激動期(격동기)에 面政(면정)을 잘 收拾(수습)하였고
그 後(후) 同面 農民會長(동면 농민회장)에 被選(피선)되기도 하였다.
1952년 地方自治制實施(지방자치제실시)에 따라 北面面議會副議長(북면면의회부의장)에 被選(피선)되고
仝年 民選面長(동년 민선면장)으로 選任(선임)되어 滿三年(만3년) 동안 面民(면민)의 福趾(복지)에 獻身(헌신)하였다.
1956년 8월 江原道議會議員(강원도의회의원)으로 當選(당선) 되니 望重(망중)한 聲譽(성예)가 鄕道(향도)에 떨쳤다.
1961년 8월 組合員(조합원)의 絶對的(절대적)인 支持(지지)로 寧越 葉煙草生産組合長(영월 옆연초생산조합장)으로 選任(선임)되어 七回連任 二十年間(7회연임 20년간)을 在任(재임)하던 中(중) 1979년 2월 11일(음력 1월15일) 宿患(숙환)으로 卒(졸)하니 遠近(원근)이 모두 크게 슬퍼하였다. 이로 미루어 公(공)의 德望(덕망)과 組合員(조합원)의 信任度(신임도)를 忖度(촌도)할 수 있다.
公(공)은 젊음과 꿈과 情熱(정열)을 農民(농민)의 權益擁護(권익옹호)와 組合發展(조합발전)에 마지막 一瞬까지를 아낌없이 바쳤다.
現組合廳舍建立(현조합청사건립)은 公(공)의 血誠(혈성)의 結昌(결창)으로 組合史(조합사)에 기리 남을 業績(업적)의 하나이다.
한 때 聯合會任員(연합회임원)으로 連任(연임)된 바도 있고 專賣廳長(전매청장)으로부터 模範組合長(모범조합장)으로 認定(인정)받아 感謝牌(감사패)와 功勞賞(공로상)을 받기도 하고 聯合會長(연합회장)으로부터 組合指道育成賞(조합지도육성상)을 받기도 하였다.
뜻을 세운 곳에 結實(결실)이 있고 德(덕)을 쌓은 곳에 따르는 이가 있다.
寬厚(관후)한 襟度(금도) 軒昴(헌묘)한 儀表(의표) 壁立千仞(벽립천인)의 그 氣像(기상)을 追慕(추모)하며
公(공)의 生前(생전) 남기고 간 그 功績(공적) 잊지 못해 기리 千秋(천추)에 남기고자 우리 모두 뜻을 모아 이에 碑(비)를 세운다.
1980년 5월27일
寧越 葉煙草生産組合員一同(영월엽연초생산조합원) 竪(수)
聯合會長(연합회장) 豊山(풍산) 柳時碧(유시벽) 撰(찬)
眞城(진성) 李完栽(이완재) 書(서)








영월군 북면사무소 2층 소회의실에 계시되어있는 엄병연 선생 사진기록
제9대 북면 면장(000~1951.5..7). 제11대 북면 면장(1952.5.13~1956.12.31)
아래 기록사진제공 : 엄병연 선생 친손녀 엄윤진 님(북면 문곡리 하늘샘송어장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