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성경본문 : 살전 5:1~11
7)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 - 예고 없이 닥치는 해산의 고통 같은 심판
여러분, 정전을 겪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저녁 준비를 하다가, 혹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온 집안이 캄캄해지는 그 순간 말입니다.
예고도 없습니다.
준비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냥 순식간에 어둠입니다.
아이들도 그 느낌을 압니다.
갑자기 불이 꺼지면 누구나 순간 멈칫하게 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그렇게 온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리고 3절이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말씀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무섭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 안에는 무서움으로 끝나지 않는, 우리를 붙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 이 말이 왜 위험한가
바울이 여기서 쓴 헬라어를 보면 "평안"은 에이레네(εἰρήνη)이고 "안전"은 아스파레이아(ἀσφάλεια)입니다.
둘 다 전쟁이 없다거나 위험한 사고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근거 없이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무 문제도 없다고,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안심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살아보면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가 몇 년째 정상이라 괜찮다고 믿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서 전화가 오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괜찮다"는 말이 실제로는 아무 근거가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닫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거짓 평안이 바로 그런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살펴보지도 않은 채,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사는 삶 말입니다.
해산의 고통 — 반드시 오고, 되돌릴 수 없는
바울은 이 심판을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온다고 표현합니다.
헬라어로 오딘(ὠδίν)입니다.
이 비유가 강력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해산의 고통은 반드시 옵니다.
산모가 준비되었든 아니든, 그 시간이 되면 시작됩니다.
둘째, 한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습니다. 되돌아갈 수도, 미룰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갑자기"라는 말, 헬라어로 아이프니디오스(αἰφνίδιος)가 그 앞에 붙어 있습니다.
예고 없이, 준비할 틈도 없이 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3절 마지막에 나오는 "멸망"입니다.
헬라어 올레스로스(ὄλεθρος)는 존재가 사라져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가장 무서운 건 존재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나를 지으신 분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모습입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저도 이 말씀 앞에 서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예배는 드리고, 신앙생활은 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일 점검하며 사는가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신앙, 별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살아온 날들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무관심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도 얼마든지 이 거짓 평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채로, "나는 교회 다니니까 괜찮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3절이 경고하는 그 자기기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3절에서 심판을 선언하고 곧바로 4절부터 뭐라고 말하는지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그리고 9절과 10절에서 이 본문 전체의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설교의 진짜 중심입니다.
3절의 그 피할 수 없는 심판, 그 해산의 고통 같은 진노를 성도가 피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정신을 잘 차려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심판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그 갑작스럽고 피할 수 없는 진노를 홀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그 심판 앞에 서지 않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5절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이건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낸 신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우리에게 주신 신분입니다.
그러니 6절의 "깨어 근신할지라"는 명령은 이 신분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 신분에 어울리게 살라는 초대입니다.
순서가 이렇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 다음에 우리가 깨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무엇을 돌이켜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루를 마치기 전 몇 분만이라도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점검해보십시오.
"나는 정말 괜찮은가"가 아니라 "나는 정말 주님과 함께 있는가"를 물어보는 겁니다.
습관처럼 지나가던 신앙생활 중 한 가지를 다시 붙잡아 보십시오.
성경 한 장을 읽든, 기도 시간을 정해두든,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담기도록 조금 다르게 해보는 겁니다.
내 삶에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넘어가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믿을 만한 성도나 목회자에게 솔직히 나누어 보십시오.
혼자 안심하는 것보다 함께 점검받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결론
여러분, 갑자기 불이 꺼지는 순간에 정말 두려운 건 어둠 자체가 아닙니다.
그 어둠 속에서 내가 혼자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어둠을, 그 심판을 온몸으로 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스스로 만든 거짓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참된 평안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를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