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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
비단彩色 110.7×51.0cm, 국보 218호
아미타불은 산스크리트어인 아미타브하(Amitabha), 아미타유스(Amitayus)를 어원으로 하며 번역하면 무량수불, 무량광불로 부른다. 대승불교 보살사상의 중심에있는 부처로서 인도 서북부(카시미르, 네팔)에서 발생한 신앙형태로 보여 진다. 우리나라에서 아미타 신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권력층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 까지 뿌리 깊고 폭도 넓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에도 무량수전(=극락전)을 짓고 아미타불을 모신 점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이유로 들 수 있는 점은 아미타불이 대표적인 구원불이고 그 신앙이 인도적으로 중생의 구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느껴 지는 느낌이 이를 잘 보여 준다.내용적인 면에서 관찰해 보면 관무량수경에선 좌우 협시보살로 관음과 세지보살이 모셔지지만 이 그림에선 관음과 지장이 협시하고 있다. 그 중 관음보살은 왕생인을 향해 몸을 숙인 채 연화대를 두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또한 아미타불은 계주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으로 왕생인을 비추고 있다. 자비를 중심적 이념으로 두는아미타,관음,지장이 이제 막 임종한 사람을 받아 드리고 있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불화 중에서 아미타불을 소재로 그린 불화들 -아미타본존도, 아미타삼존도, 아미타팔대보살도, 아미타정토변상,관무량수경변상에선 대체적으로 장중함(왕생인과 부처의 스케일대비만 하더라도)과 표정의 우울함이 느껴진다.이 그림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잘 나타나 있으며 아미타불의 손모습(수인)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회화] 수월관음보살도(水月觀音菩薩圖)
수월관음보살도(水月觀音菩薩圖)
고려 14세기, 비단彩色 119.2×59.8cm, 보물 926호
산스크리트어 Avalokitesvara를 한역한 관음보살은 광세음, 관세음, 관세자재 ,관세음자재로 불리우며 시무외자 또는 원통대사로도 불리워 진다. 관음신앙에서는 부처의 자비사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현실적인 소망을 이루어 주는 보살로 잘 알려져 있다. 관음신앙은 화엄경,아미타경,법화경,능엄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거처하는 곳인 보다락가산은 화엄경 입법품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올려 놓은 그림을 비롯한 관음보살도는 고려불화중 가장 아름답다 평가되고 있다. 머리부분을 자세히 살펴 보면 화불이 있는 보관을 볼 수 있고 몸에는 백색의 베일(사라)과 각종의 문양을 수 놓은 천의를 입고 있다.이러한 외모는 관무량수경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관음보살도의 표현 가운데 양류관음이라 하여 한 손에 버드나무 가지가 든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은 밀교경전인 <청관음경>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쌍죽을 묘사한 데에는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설화에서 관음보살이 의상에게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 있는 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겠다."하여 짓게 되었다는 설화에 기원한 것인데 고려 관음보살도만의 독특함이라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왼쪽 아래부분엔 선재동자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화엄경 입법품계에서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회화] 지장도(地藏圖)
지장도(地藏圖)
고려 14세기, 비단彩色104.0×55.3cm, 보물 784호
지장보살은 산스크리트어 Ksitigarbhr에서 나온 말로 대지의 덕을 의미한다. 인도 아리안족의 신화 가운데 프리히비(Prthivi)여신이 불교화하여 들어 온 부처이기도 하다.지장신앙은 지장십륜경, 지장본원경, 점찰선악업보경등의 경전에 근거 하고 있으며 지장신앙의 특징은 사후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에 구제에 기반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무불세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본원을 세운 보살로 삿발하고 가사를 걸친 비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석장과 보주를 든 입상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하며 고려 불화에서는 특히 머리에 두건을 쓴 피모지장보살상이 많은데 이는 투르판(Turfan)지방과 돈황에서도 발견된다.
좌측의 불화와 같은 지장시왕도에는 협시한 도명존자가 반드시 표현되는데 도명화상은 당나라 때 명부를 직접 보고 왔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 여기에서 시왕은 중국 태산신앙을 불교적으로 윤색한 판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중국 당말 송초에 만들어진 위경의 일종인 <예수시왕생칠경>에서 비롯 된다. 여기나오는 인물들은 좌우 협시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사천왕, 범천, 제석천등이며 일반적으로 표현되어 지는 명부시왕, 판관, 사자,금모사자는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다. 도상적으로 볼 때 권속들의 위치가 지장의 가슴 높이 까지 올라와 있는데 시기가 앞 설수록 무릅 아래쪽에 표현되며 조선시대에 오면 완전히 위쪽까지 차게 된다.
[설화] 목탁의 유래
<목탁의 유래>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물고기로 태어나 고통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천도재(水陸薦度齋)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하며 다음생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木漁)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하였다고 합니다.
[설화] 손순의 효심
<손순의 효심>
손순은 모량리 사람인데 아내와 함께 남의 집 폼팔이를 해서 늙으신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가난한 살림이다 보니 어머니 한 분께만 밥을 지어드릴 뿐 다른 식구들은 죽으로 때우곤 했다. 손순의 어린 아들은 밥 때만 되 면 할머니 밥상 앞에 버티고 앉아 노상 할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곤 했다. 매일 그런 일이 계속되니 손순은 어머니 뵙기가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가 없소. 저 애가 늘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님이 얼 마나 시장하시겠소? 차라리 저 애를 몰래 묻어 버리고 어머님을 배고프지 않게 모십시다."
아내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 어머니도 아이도 잠이 들자 손순은 아이를 업고 아내와 함께 마을 북쪽 들판으로 나갔다. 눈물을 흘리면서 흙을 파 내는데 문득 손에 뭔가가 잡혔다. 깜짝 놀라 파 보니 뜻밖에도 너무나 훌륭한 돌종이 나오는 것이었다. 시험삼아 옆에 있는 나무 에 걸어놓고 쳐 보았다. 조용한 밤하늘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소리였다.
손순의 아내가 기뻐하며 말했다.
"이처럼 신기한 보물을 얻은 것도 이 아이의 복인 듯하니 묻지 말고 데려가도록 해요."
손순도 그렇게 생각되어 아이와 돌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두고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치는데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퍼져갔다.
대궐 안에 있던 홍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비할 데 없이 맑고 청아하구나. 예사 종이 아닌 듯 하니 얼른 가서 알아보도록 하라."
왕의 명을 받고 가 보니 모량리 손순의 집 대들보에 돌종이 걸려 있는데 바로 거기서 나는 소리였다. 그 종을 구하게 된 경위 를 들은 사자가 돌아와 왕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옛날에 곽거가 자식을 묻으려 하매 하늘이 금솥을 내려 치하했는데, 지금 손순이 자식을 묻으려 하니 땅이 돌종을 솟아 나게 했구나.
하늘과 땅이 두 효자를 다 함께 표창해서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섬씩을 주도록 했다.
손순은 살던 집을 회사해서 절을 짓고 이름을 홍효사라 했다. 들에서 얻은 돌종은 이 절에 소중히 모셨는데, 진성여왕 때 후백 제군이 쳐들어오는 난리를 겪고 나서 종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말았다.
[설화] 신효거사 이야기
<신효거사 이야기>
신효거사는 공주사람으로 세상에서 그를 보살화신(菩薩化身)이라 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는데 어머니는 고기 반찬이 아니면 밥을 잡숫지 않았으므로, 그는 항상 사냥을 하여서 고시를 대접하였다. 어느 날, 또 사냥을 하려고 활을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들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쏘았더니 학은 날아가고 오직 학의 깃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신효는 그것을 주워 가지고 돌아오다가 무심히 눈에 대고 본즉,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 형상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고, 그들이 전생에 쓰고 지내던 우마육축(牛馬六畜)등의 형상들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사람이나 짐승이 본래 다름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께 고기 반찬을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마침내 자기 다리에서 살을 베어서 반찬을 만들어 드렸다.
그리고 그는 피가 흐르는 다리를 냇가에 앉아서 씻고 있었다. 마침 그 나라 임금의 사신이 그 물을 건너려다가 위에서 피가 섞인 물을 흐르므로, 이상히 생각하여 물을 따라 올라가 거사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거사는 마지 못하여 사실을 고하였더니, 사신은 그것을 다시 왕께 아뢰었다. 왕은 거사의 그 효성을 크게 찬탄하여 그의 어머니가 생존하는 동안은 나라에서 매년 쌀 백 석을 내려서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였다. 그 뒤로 신효거사는 어머니를 더욱 지성으로 모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살던 집을 효가원(孝家院)이라는 절을 만들고 자신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신효거사는 그 고장 사람들은 대개 전생에 짐승이었던 사람들로서 악한 자가 많은 것을 보고, 다른 살만한 곳을 구하기 위하여, 전에 얻은 깃을 눈에 대고 사람들을 보아 가면서 경주 땅을 거쳐 바다를 따라서 명주(溟州)땅에 까지 이르렀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보니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으므로, 신효거사는 마침내 이곳에 정착할 생각으로 길에서 어떤 노인에게 살만한 곳을 물었다.
그 노인은 서쪽을 가리키면서 저 고개를 넘으면 북으로 뚫린 골짜기가 있으니 그리로 가보라 하고는 곧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생각하고, 그 말대로 성오평(省吾坪) 골짜기로 들어서서 자장율사가 계시던 곳에 이르러 살 터를 잡으니 그곳이 곧 지금의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이다. 신효거사가 그곳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문득, 다섯 사람의 스님이 찾아와서 가사(袈裟) 한 폭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신효거사는 그 뜻을 몰라서 오직 눈만 멀뚱멀뚱하고 서 있으니, 그들은 다시 눈에 대고 보는 학의 깃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곧 그것은 내 주었더니 그들은 한 폭의 찢어진 가사를 내 놓고 그 깃으로 찢어진 곳을 때우니 그 깃은 변하여 가사의 바탕과 같은 옷감이 되었다. 신효는 이들이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그들이 오류성중( 五類聖衆)의 화신임일 깨달았다.
[설화] 꺼지지 않는 등불
<꺼지지 않는 등불>
석가세존께서 사위국의 어느 정사에 계실 때 일이다. 사위국에 난타 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국와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 들이 각각의 신분에 맞는 공양을 석가와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스스로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범한 죄 때문에 가난하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모처럼 고마우신 스님을 뵙게 되었는 데 아무 공양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슬퍼한 나머지 온종일 돌아 다닌 끝에 겨우 돈 한푼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돈 한푼을 가지고 기름집에 가서 기름을 사서 등불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집 주인은 겨우 한푼어치 기름을 사다가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모르지 만 하고는 기름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난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하자 기름집 주인은 따한 생각에 한푼을 받고 몇배나 되는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기뻐 어쩔줄을 모르며 등을 하나 만들어 석가가 계신 정사로 달려갔다. 이를 석가에게 바치고 불을 밝혀 불단 앞에 있는 무수한 등불속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타가 바친 등불 만이 새벽까지 홀로 밝게 타고 있었다. 손을 저어 바람을 보내도, 옷을 흔들어 바람을 보내도 꺼지지를 않았다. 뒤에 석가가 난타의 정성을 알고 그녀를 비구니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현우경》의 빈녀난타품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빈자일등 이란 말이 생겼고 「부자의 만 등보다 빈자의 한 등이 낫다.」는 말이 생겼다
[설화] 세조와 문수동자
<세조와 문수동자>
조선 제 7대 세조(수양대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로서 1425년 문종이 승하하고 왕위가 어린 조카 단종에게 돌아가자 측근인 한명회·권남 등의 권유에 의하여 1455년 마침내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 낸 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단종의 복위운동을 했다하여 성삼문 등 사육신을 무참하게 죽이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됐던 단종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세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왕권강화와 학문 장려 등의 정책을 펴 나갔지만 어린 조카와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을 인하여 항상 불안감과 죄의식 속에서 생활하였다.어느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이며 문종의 아내되는 형수가 나타나서 세조를 호되게 꾸짖다가 "에이 못된 것! 어린 조카를 죽이다니! 조카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에이! 더러워라"하면서 세조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 후 세조는 꿈 속에서 침에 맞은 곳에 종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온 몸에 퍼져서 결국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고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보고 각지의 온천과 약수를 찾아 다녀 보았으나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차에 마침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면서 병치료와 속죄를 하게 되었다.하루는 세조가 상원사에서 500m쯤 떨어진 관대거리에 나가 관대와 띠를 풀고 맑은 계곡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는데 아무리 씻어도 가려움증이 가시자 않아 길가에 한 소필승(동자)이 나타나기에 "얘 너 이리 와 내 등을 좀 밀어 줄 수 있겠니?"하니 사마승이 "예 그러지요."하고 대답을 한 후 한참 등을 밀어주자 가려움증이 씻은 듯이 가시며 몸이 날 것만 같아졌다. 목욕을 끝낸 후 세조가 "참 그놈 기특하다만 어디 가든지 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하자 사마승이 "예. 그러나 대왕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문수동자가 와서 등을 밀어주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하고는 몇 걸음 걷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부터 몸의 병이 점차 씻은 듯이 낫자 세조는 동자를 찾기 위해 상원사 뿐 아니라 오대산 전 암자를 뒤졌지만 끝내 그 동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세조는 그제서야 자기의 병이 나은게 약효나 우연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의 힘인 것을 알고 등을 밀어준 사미승이 다름이 아닌 문수동자의 화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즉시 이름난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보았던 문수동자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두 번을 그려도 모양이 같지 않더니 세 번째에 가셔야 겨우 자신이 본 문수동자와 비슷하였다. 이렇게 그려진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에 받들어 모시고 강릉 신석평 7백석지기를 하사하여 문수동자상에 매일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고 하는데 지금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고 본당의 오른쪽에 목각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설화] 조과선사와 백낙천
<조과선사와 백낙천>
당시 항주의 진망산에 도림(道林)이라는 덕망 높은 스님이 계셨는데 이 스님께서는 항상 산중의 나무가지에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어서 마치 새의 둥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조과선사 또는 작소선사라고들 하였다. 때마침 백낙천이 그곳을 지나다가 선사를 보고 "당신은 그런 곳에 앉아서 새처럼 생활하고 있는 데 위험하니까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라고 말을 건넸더니 "아니 상관하지 마시오. 위험한 것은 오히려 당신이구려."하고 말했다.
백낙천은 "나는 위험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니까, 선사는 "당신의 마음은 마치 나무섶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백낙천은 그만 화가 나서 "그렇다면 묻겠는데 불교의 극치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니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답했다. 해석하면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 이것이 바로 불교의 궁극적인 참뜻이란 말이다. 그런데 백낙천은 또 "그런 것쯤은 세 살 먹은 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하고 말하니, 선사께서는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알고 있더라도 팔십 노인도 그것을 행(行)할 수 없는 것이다."고 답했다.
[설화] 아쇼카왕의 전생이야기
<아쇼카왕의 전생이야기>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와 함께 성 안으로 탁발하러 가시는 길에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만나셨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으로 집과 창고를 만들고 또 신발에다 모래를 담아 밥이라고 하며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중에 키가 작은 아이 하나가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이렇게 생각한 아이는 신발에 밥이라며 담아 놓은 모래를, 동생을 엎드리게 하고는 그 위에 올라가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모래밥을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건네 주셨다."이 모래를 가지고 가서 내 방의 허물진곳에 바르도록 하여라."정사로 돌아온 아난이 말씀대로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고 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두 아이가 환희심으로 모래를 보시하였으니, 그공덕으로 다음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 보탑을 세울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 한 줌 흙의 공덕으로 그와 같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읍니까?"
"과거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을 청하여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왕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았다.
왕은 이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팔만사천 장을 그려 보시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팔만사천의 탑을 건립할수 있는 과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국왕이 바로 오늘 모래를 공양한 소년이다."
기원 전 삼세기 중엽에 인도를 통치한 아쇼카 왕이 바로 그소년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는 인도 역사에서 가장 넓은 땅을 통일하고 다스린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통감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성전을 베풀었다.
아쇼카 왕은 참다운 평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터득하였다. 인생과 사회에서 누구나 구하는 평화란 무기나 군대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덕치로써 노력하여야만 가능함을 깨달았다.
아쇼카 왕 자신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왕비와 왕자, 대신들에게까지 불법을 배우게 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불법을 펼쳤다.
왕위에 오른지 열일곱 해가 되었을 때는 천 명의 승려로 하여금 경전을 편찬케 하는 결집을 주최하였고,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키프러스, 스리랑카와 같은 여러 나라에 불교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살생을 금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렵을 막아 동물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겼으며,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평등한자유를 부여하였다.
스스로도 불교의 생활 규범에 철저하였던 아쇼카 왕은, 이처럼 모든 인류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파하여 생활 속에서 구현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도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아쇼카 왕의 석주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전쟁에 의한 승리보다 자비에 의한 정복이 훨씬 훌륭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이러이러한 선행을 행하였다 하여 스스로의 선한 점만을 보려고 하며,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번뇌와 같은 나쁜점은 보려고 하지않는다."
[설화] 학륵나존자
<학륵나존자>
학륵나존자는 月氏國 사람이니, 성은 바라문이요. 아버지는 천승(千勝)이요, 어머니는 金光 이다. 그들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七佛에게 빌었는데 어머니의 꿈에 수미산 정수리에서 한 神童이 금고리를 들고 와서 「내가 왔소」하고 외치는 것을 보고, 깨어서 태기가 있었다.
나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 마을 사이로 놀러 다니다가 동네사람들이 굿을 하는 것을 보고 곧 당집으로 들어가서 꾸짖었다.
「너희들은 허망하게 복과 재화를 일으키어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면서 헤매다 산짐승을 소비하니, 살생이 이보다 더 할 수 있느냐.」
말을 마치자 당집의 화상이 저절로 무너지니 이로부터 마을 사람들이「거룩한 아기」라 불렀다. 나이 22세에 출가하여 30세에 마라나(Manoluta)존자를 만나 正法眼藏을 받았다.
학륵나존자에게는 항상 오백마리의 학이 따라 다니면서 존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학륵나존자는 스승인 마라나존자께 묻기를
「 저에게 어떤 인연이 있어서 학(鶴)의 무리가 저를 따르는 것입니까? 」한데,
마라나 존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네가 과거생(過去生)에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너는 용궁(龍宮)에 가서 공양을 대접받곤 했는데 너의 제자들은, 복(福)이 박(薄)하고 덕(德)이 미미(微微)하여 데리고 가지 않았다. 이에 제자들이 불만을 표시하자 한번은 제자들을 데리고 용궁의 공양을 받았는데 제자들은 용궁의 공양을 받을만한 복이 없었기 때문에 죽어서 날개 족으로 떨어져서 5겁(劫)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학(鶴)의 몸을 받아 너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이니라. 」 하시니,
학륵나가 여쭈기를,
「 어찌 하여야 저 학의 무리를 해탈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 한데, 마라나존자는 다음과같은 게송을 말씀하셨다.
「마음이 만 경계를 따라 움직이니,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그윽하다. 흐름에 따라 본 성품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이에 학의 무리들이 울면서 날아갔다고 한다.
[설화] 혜능대사
<혜능대사>
혜능스님의 부친은 본관이 범양인데 좌천되어 영남의 신주로 옮겨 살았다. 혜능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땔나무를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나뭇꾼 소년이었다. 어느날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그 손님께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손님이 말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대사님을 예배하였는데 그곳의 문하생이 천 명이 넘는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이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대사를 예배하였다. 홍인대사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느냐? 또 내게서 새삼스레 구하려는게 무엇이냐?" 혜능 왈, "제자는 영남사람인데 지금 큰 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너는 영남사람이오,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혜능은 한 행자승이 이끄는대로 방앗간에 가서 여덟 달동안 방아를 찧었다. 하루는 홍인이 문하생들을 다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반야의 지혜를 써서 계송 한 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거라. 내가 너희들의 계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조사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러나와 의논했다. "신수화상은 우리들 중의 대사형이므로 굳이 우리들이 계송을 지어 큰 스님에게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가 법을 얻은 후에 육조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신수는 혜능보다 먼저 오조 홍인의 문하로 들어와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혜능에게는 대선배라 할 수 있다. 신수는 이것을 알고 심한 부담감을 느껴 번민을 하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삼경에 남쪽의 복도에 몰래 계송을 적었다. "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오조 홍인이 아침에 그것을 보고 신수가 쓴 것임을 즉각 알아보고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지은 이 계송은 소견은 당도했으나 다만 문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범부들이 이 계송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비록 타락하지는 않겠으나 진리는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너는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한 계송을 지어 나에게 보여라." 신수는 돌아가 며칠을 지냈으나 계송을 짓지 못했다.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계송을 외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혜능이 그것을 들었다. 혜능은 한 번만 듣고도 단번에 이 계송이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은 본래 글을 쓰지 못하는지라 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읊는 계송을 복도에 쓰게 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그리고 또 하나의 계송을 읊었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오조 홍인대사는 이 계송을 보고 즉각 그가 큰 뜻을 알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시기할까 두려워 밤에 몰래 그를 불렀다. 그는 혜능을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강론해 주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모두 깨우쳐 그날밤으로 법을 전수받았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홍인은 그에게 의발을 전수하며 말했다. "너는 이제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서 신표를 삼을 것로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우치도를 해라.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즉시 길을 떠나도록 해라." 혜능은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남쪽으로 떠났다. 두 달가량 되어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그때 가사와 법을 빼앗으려고 그의 뒤를 추적하던 진혜명이란 승려가 있었다. 혜능대사는 가사와 바루를 바위 위에다 던져두고 바위 뒤에 숨었다. 혜명스님은 가사와 바루를 가지고 가려고 들었으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혜능대사에게 “제가 짐직 멀리서 쫒아 온 것은 법을 구하고자함이요, 가사와 바루를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에 혜능대사가 법을 설하니 혜명스님은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 혜능대사는 혜명스님으로 하여금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말씀하시니 명에 따라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 이후 혜능은 남쪽지방을 순례하며 불법을 전파했고, 소주 동남쪽 삼십오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물러 수행법의 혁신을 주장했다.
[설화] 진묵대사와 나한동자
<진묵대사와 나한동자>
자료를 찾으려고 하니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혹 이 글을 보시고 아시는 분은 저에게 꼭 연락을 주십시요. 제가 알고 내용만 임시로 적겠습니다. (정확하지 않음)
진묵대사가 어느 절(이름 잘 모르겠음) 에 계실 때 한 보살님이 득남을 하기 위해 기도를 왔다. 진묵대사는 곡차를 가져온다면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해서 보살님은 곡차를 가져다가 진묵대사께 드렸다. 그러나 득남을 하기위해 매일 절을 찾아와 기도를 하건만 진묵대산는 한 번도 법당에 들어와 같이 기도염불을 해 주지 않았다. 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살님은 진묵대사를 찾아가
“스님께서는 곡차를 가져오면 기도를 해 주시겠다고 하시고선 매일 곡차만 마시고 기도는 안 하시니 너무 하십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나한님에게 득남을 할 수 있게 부탁을 드려보지요.”
진묵대사는 나한전에 들어가 “보살이 득남이 원인데 한 번 들어주지” 하면서 나한의 빰을 일일이 때렸다. 그날밤 그 보살의 꿈에 나한님들이 나타나서 진묵대사가 우리들의 뺨을 때려서 몹시 아프니 득남의 소원은 들어 줄테니 제발 진묵대사에게 다시는 부탁은 드리지 말라고 부탁을 하고 사려졌다. 그 후 과연 그 보살님은 득남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서 기도를 한 후 영험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진묵대사는 인연이 다 되어서 그 절을 떠나려고 내려오는데 길에서 우연히 한 동자를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오다 냇가에 이르렀다. 마침 전날 소나기가 내린 후라, 냇물이 많이 불어 있는 상태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스님 냇물이 많이 불은 것 같은데 제가 먼저 건너가 보지요. 스님께서는 제가 간 길만 따라오시면 안전할 것입니다.” 동자는 곧 바로 냇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보기에는 냇물이 불어 깊어 보이는데 동자가 냇물 중간쯤에 가서도 발목까지밖에 잠기지 않았다. 진묵대사도 안심을 하고 곧 동자가 간 길을 따라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자는 발목까지밖에 잠기지 않았는데 진묵대사가 냇물 중앙쯤에 가니 가슴까지 물이 차 올랐다. 어렵게 강을 건너고 보니 동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그 동자는 나한임을 알았다. 진묵대사는
“신통은 나보다 나한이 높을지는 모르나 도에 대해서는 나에게 물어야 할 걸”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설화] 관음보살의 전신
<관음보살의 전신>
옛날 남인도 마열바찔에 장나장자와 마나사라가 살고 있었다. 그들 사이 에는 조이라는 큰 아들과 속이라는 작은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병이 들어 부인 마나사라는 죽게 되었다. 장나장자와 그의 아들들은 3년을 외롭게 살다가 아버지는 비라장자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여 단란한 살림을 꾸렸다. 그러던 중 어느날 큰 흥년이 들어 생활이 어련 게 되자 장자는 이웃나라로 무역을 가고 새어머니가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있게 되었다. 하루는 새어머니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장차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데 큰 장애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사공과 짜고 무인도에 갖다버리 기로 마음먹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날 저녁, 새어머니는 사공과 짜고 바다 위에서 아버지가 기다린다며 아이들을 조각배에 태워 바다에 띄워 보냈다. 잠자다가 엉겁결에 조각배에 타게 된 조이와 속이는 어느 정도 나아가다가 번개와 태풍을 만나 부등켜 안고 춥고 무서워 어머니를 부르며 울어댔지만, 아무도 구 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의하여 야속하게도 조각배는 뒤집혀져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되었다.
한편 새어머니는사공과 정을 통하고 바다에 빠진 아들들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조이와 속이는 정신을 잃은 채 파도에 쉽쓸려 어느 무인도에 당도하게 되었다. 무인도에서 얼마를 지내고 생활하던 추운 어느날, 조이는 굶주림에 지쳐 울면서 서원했다. "속이야, 이제 우리 목숨이 다 된 것 같다. 살 려해도 살 수 없는 우리 신세가 가련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와 같은 신세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부모형제를 잃고 기한에 떠는 자, 벗이 그리워 애통한 자, 풍랑에 쉽싸여 고생하는 자, 독충 악귀에 시달려 고난이 많은 자,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 해탈을 얻지 못한 자, 그런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 산의 신 (神)이 되어서 그들에게 알맞는 몸을 나투어 구제해 주자. " 하고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찢어진 옷자락에 이 같은 32응신의 서원을 써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죽었다.
한편 장나장자는 안나라산에서 무역을 하여 많은 돈을 벌어 집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아이들이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부인에게 물으니
"아버지를 찾으러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사람을 풀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나장자는 미친듯이 직접 배를 몰아 사방으로 찾으러 다녔다.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맨 끝에 무인도에서 아이들의 해골을 발견하고, 또 아이들이 써놓은 서원을 읽고는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났다. 장나장자는 아이들과 같이 구도심을 발하여
'원컨데 나도 모든 악한 중생을 제도하고 조속히 불도를 이루어지이다'하고 서원을 세웠다.
그뒤 조이는 인도 바라문교의 신노파(神奴派) 여신이 되어 백성을 수호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불교에 귀의하여 관세음보살이 되었다. 동생 속이는 대세지보살이 되었고, 후처는 제바달타(불교교단을 분열시키려 했던 배반자)의 전신이었으며 장나장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었다.
[설화] 황벽 희운선사
<황벽 희운선사>
황벽선사는 복주(福州) 민현에서 출생하였다. 출생한 연대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어렸을 때 황벽산으로 출가하였다. 황벽산은 복건성(福建省) 복청현(福淸縣)에서 서쪽 20리에 있는 산으로 황벽나무가 많았는데, 황벽은 몸이 왜소하고 이마가 튀어나왔으므로 육주(肉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황벽선사는 <백장청규>로 잘알려진 백장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백장스님의 법을 이어 받는다. 황벽스님에 대한 일화는 너무나 많지만 여기서는 벽화에 관련된 이야기만 하겠다.
어느 날 백장은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제자 황벽을 만나자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디를 다녀오느냐."
그러자 황벽은 버섯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산 아래에서 버섯을 따옵니다. "
그러자 백장이 느닷없이 물었다.
"산 아래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던데 너도 보았느냐."
황벽이 갑자기 '어흥-'하고 호랑이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백장이 허리춤에서 도끼를 빼들고 호랑이 소리를 내면서 우는 황벽을 내리 찍으려 하였다. 황벽이 날쌔게 달려들어 백장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들고는 얼른 따귀를 세차게 후려쳐버렸다.
그날 밤 만참 때 백장은 법상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중들아, 산 아래 호랑이가 한 마리 있으니 그대들은 조심해라. 그대들은 드나들 때 앞뒤로 잘 살펴 다니거라. 이 노승도 오늘 아침 호랑이에게 한입 물렸다. "
이후로부터 황벽의 별명은 '호랑이'가 되었는데 일찍이 스승 백장으로부터 '붉은 수염 난 오랑캐'로 불리기도 하였으므로 두 가지 별명이 합쳐져 '호랑이 수염'이 되었음이다. 황벽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호랑이 수염'이라고 부르기를 즐겨 하였다.
설화] 선혜(善慧) 행자의 구도행(求道行)
선혜(善慧) 행자의 구도행(求道行)
선혜 행자의 구도행에 관해서는 『본생경(本生經)』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과거 사(四) 아승지 십 만 겁의 옛날에 연등(燃燈)부처님이 세상에 오셨다. 이 무렵 무마성(無魔城) 혹은 불사성(不死城)이라는 도시에 선혜라고 부르는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선혜의 아버지는 무마성의 호족 바라문으로 대단한 재력을 가진 부호였으나 선혜가 어릴 때 수많은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혜는 그의 아버지가 이 많은 재산을 모으느라고 말할 수 없는 수고를 하고도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죽음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복락의 종자(種子)를 심으리라고 뜻을 일으켜, 정진 끝에 여덟 가지 선정(禪定)과 다섯 가지의 신통력(神通力)을 얻었다. 이렇게 신통력을 얻고 정진에 힘쓸 무렵 연등부처님께서 선혜가 있는 마을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견하러 나갔다. 이때 연등부처님이 지나실 길에 진흙탕이 있는 걸 보고, 선혜는 곧 입었던 사슴가죽 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도 부족하자 머리를 풀어 진흙 위를 덮고, 엎드려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사뢰었다.
“부처님, 진흙을 밟지 마시고 부디 제 머리털과 몸을 마치 마니구슬의 판자로 된 다리를 밟는다 생각하시고 지나가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저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며 지극한 마음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면서 선혜 행자를 칭찬하신 뒤에 꽃을 공양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며 예를 마치신 뒤에 떠났다.
[설화] 설산(雪山) 동자의 구법(求法)
설산(雪山) 동자의 구법(求法)
설산 동자는 선혜 행자가 역시 한 수행자의 몸을 받아 정진할 때의 모습으로 『대열반경(大涅槃經)』 「성행품(聖行品)」을 통하여 자세히 알 수 있다. 설산 동자라는 소년이 크게 발심하여 정진할 때, 어느 날 제석천왕이 흉악한 형상의 나찰로 변하여 지난 세상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송의 반을 읊었다.
“모든 것 변천하여 항상한 것 없어(諸行無常), 이것을 이름하여 나고 죽는 법이라 하네(是生滅法).”
동자는 이 게송을 듣고 무한한 기쁨에 가득 차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험상궂은 나찰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찰에게 “당신은 어디서 그토록 거룩한 게송을 들었습니까? 그 게송의 나머지를 들려 주실 수 없습니까.”
나찰은 험상궂은 얼굴을 찌푸리며, “수행자여, 그런 말씀 마시오. 여러 날 굶어 허기가 져서,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했을 뿐이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게송을 마저 일러주시면 당신의 제자가 되어 모시겠습니다.”
“당신은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욕심뿐, 자비심은 없구려. 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오.”
“당신은 무엇을 먹습니까.”
“사람의 더운 살과 끓는 피요.”
“내가 더 살고 죽는다 해도 진리를 얻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 나머지 게송을 일러 주면 이 몸으로 공양하겠소.”
이에 나찰은 게송을 읊었다.
“생기고 소멸함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면(生滅滅已) 모든 고통 떠나버린 대열반의 기쁨이다(寂滅爲樂).”
동자는 게송을 듣자 환희심이 솟았다. 게송을 깊이 새기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 나찰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자 그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나찰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수행자를 받아 땅에 내려 놓으며 찬탄하고, 여러 천신과 함께 발 아래 엎드려 예배를 올렸다.
[설화] 가난한 여인의 등불
가난한 여인의 등불
왕을 대할 때에도 결코 그들의 세속적인 권위나 힘에 위축됨 없이 당당하셨던 부처님께서 한번은 코살라 국의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과 승단을 위해서 큰 연등 법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연등회가 열리고 있는 코살라국의 슈라바스티 성에 성실하지만 가난한 한 여인이 살았다.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과 스님들을 위하여 연등회를 연다는 말을 듣고는, ‘왕은 많은 복을 짓는구나. 저렇게 복을 지으니 내생에도 큰복을 받겠구나.
나는 박복하고 가난하여 복을 지을 수 없으나, 등불을 하나 켜서 부처님께 공양해야겠는데…’라고 생각한 여인은 남의 집에서 일해 주고 받은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사러 갔다. 기름집 주인이 기름을 무엇에 쓰려느냐고 묻자,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이제 그 부처님을 뵙게 되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나는 가난해서 공양할 것이 없으니 등불이라도 하나 부처님께 공양할까 합니다.”라고 대답한 여인은 부처님 처소로 가서 휘황찬란한 수많은 등불 사이에 걸어두고 기도를 하였다.
“보잘 것 없는 등불이지만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저도 부처가 되어지이다.”
이 작은 등불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 등불들이 점차 다꺼졌는데도 여인이 밝혀 놓은 그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아난 존자가 불을 끄려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손으로 끄려 해도, 가사자락으로, 또는 부채로 끄려 해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그 등불의 공덕으로 오는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하셨다. 그리고 놀란 왕과 대신들에게도 정성스러운 공양과 그 공덕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다.
위의 이야기는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초파일을 맞이하여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두루 벽화를 보면서 자신의 신행이 청정공양이 되도록 마음에 새겨 봄직 하다.
[설화] 소년의 모래 공양
소년의 모래 공양
부처님께 모래 공양을 올리는 소년의 그림 역시 벽화로 쉽게 대할 수 있다. 이는 인도 최초로 통일 왕국을 이룩한 마우리아(Maurya) 왕조의 삼 대째 왕인 아쇼카(Asoka) 왕의 전생이야기를 벽화로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탁발하러 가시는 길에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작은 아이는 부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참으로 높고 귀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려 드려야겠다.’ 생각하고는 놀면서 신발에 밥이라며 담아 놓은 모래를, 동생을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올라가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올렸다.
부처님께서 이를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건네 주시며 “이 모래를 가지고 가서 내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도록 하여라.” 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길, “어린 두 아이가 환희심으로 모래를 보시하였으니, 그 공덕으로 다음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三寶)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의 보탑(寶塔)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셨다.
다시 한번 나의 공양도 오로지 불보살님을 찬탄하며 올린 청정공양인지 되돌아 볼 일이다.
[설화]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팔을 잘라 도를 구하다)
중국 당대에 형성된 선종은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 즉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그 지혜와 덕성을 일상 속에서 완성하고 전개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장 본질 적인 가르침이 선(禪)수행이라고 여겼기에 이 전승의 출발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첫번째 조사는 가섭 존자이며 두 번째는 아난 존자이다. 이후 27조 반야다라 존자를 잇는 28조가 바로 달마(達磨) 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의 태자였던 달마 대사는 인도 28조이면서 중국 초조(初祖)가 된다. 그로부터 2조 혜가(慧可) 대사, 3조 승찬(僧璨) 대사, 4조 도신(道信) 대사, 5조 홍인(弘忍) 대사에 이르렀고, 홍인에게서 6조인 혜능(慧能) 대사가 나왔다.
그래서 서천(西天) 28조와 동토(東土) 6조를 합쳐 33조사를 헤아리고, 이를 지혜의 등불을 잇는 전등(傳燈)의 정통으로 삼는 전통이 생겨났다. 이제 벽화를 보자.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팔을 잘라 도를 구하다)
달마 대사는 스승이던 반야다라 존자의 열반을 마지막으로 인도 내의 교화를 제자들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양(梁)나라의 왕이던 무제(武帝)를 만났으나 무제는 대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대사는 그 길로 낙양(洛陽)의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면벽(面壁)하며 시절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렸다.
대사의 말없는 교화가 9년째이던 어느 해 엄동설한에 유불선(儒佛仙)의 이치를 통달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법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신광은 춥고 눈내리는 긴 겨울밤을 인내로 지세웠다.
그러나 대사는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며 꾸짓자 신광은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잘라 구도 결심의 척도를 보였다. 이에 땅에서 파초잎이 솟아나 팔을 받쳤고 대사는 신광의 입문(入門)을 허락하여 혜가(慧可)라 하였다.
혜가는 달마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혜가단비도는 벽화 뿐만 아니라 예로 부터 회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지기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내용을 사실적이고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설화] 육조도정도(六祖搗精圖:혜능이 방아를 찧다)
육조도정도(六祖搗精圖:혜능이 방아를 찧다)
혜가단비도는 벽면의 형태와 큰 상관없이 표현 방식이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육도도정도는 인물 표현에 있어서 방아를 찧고 있는 혜능(慧能) 만을 그린 것과, 도판과 같이 5조 홍인 대사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경우 등 두 가지가 있다.
혜능 대사는 당나라 태종 12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나무장사를 했다.
그러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하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홀연히 깨우쳐 홍인 대사를 찾아 갔으나 대사는 혜능에게 방아를 찧도록 하였다.
그 뒤 혜능은 후원에서 장작도 패고 힘이 부족하여 돌을 짊어지고 방아를 찧었다.
여덟 달이 지난 어느 날, 홍인 대사가 방앗간에 들러 혜능에게 “내 너의 견해가 쓸만하다고 생각하나, 약한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 너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지 않음을 알고 있느냐?” 하니 혜능이 “예, 제자도 스님의 뜻을 짐작하고 있습니다.”하였다.
홍인 대사는 야밤 삼경(三更)에 조실 방으로 오도록 암시를 주었고 그날 밤 삼경에 홍인 스님은 마침내 혜능의 오도(悟道)를 인가(印可)하였다.
혜능은 제6조가 되었고 선종을 크게 선양, 중흥을 이루어 남종(南宗)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설화] 무착(無着) 선사 이야기
무착(無着) 선사 이야기
무착 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과 교학을 열심히 닦았다. 그러다가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발심하여 문수보살의 영지(靈地)인 중국 오대산의 중턱에 있는 외딴 암자인 금강굴에서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양식이 떨어져 마을로 가서 탁발을 하고 오다가 범상치 않은 한 노인을 따라서 웅장한 절로 따라 들어 갔다가 그 노인의 질문에 답을 못한 무착은 내침을 당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웅장했던 절은 간 곳이 없고 허공에서 게송 한 구절이 들려왔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없이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무착은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앙산(仰山) 선사의 법을 받아 깨치고 대자유인이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무착 스님이 동지팥죽을 쑤는데 김이 나는 죽 속에서 문수보살의 모습이 거룩하고 장엄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무착 스님은 팥죽 젓던 주걱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문수보살은 “내가 바로 자네가 그리도 만나고자 했던 문수라네 문수!” 하니 무착스님은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이다.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주겠다.” 하니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무착 스님이 깨닫기 전엔 원불(願佛)로 모시고 친견코자 하였으나 깨달은 뒤에는 오히려 호령을 하며 주걱으로 갈긴 것이다.
[설화] 도림(道林) 선사와 백낙천
도림(道林) 선사와 백낙천
당대(唐代)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유명한 백낙천이 항주의 자사(刺史)로 부임하였다.백낙천은 항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찰에 도림 선사라는 고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시험해 보고자 작정하고 찾아갔다.
도림 선사는 곧잘 경내의 노송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했는데 마침 이 때도 노송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본 백낙천은 “스님의 거처가 너무 위험합니다.”하니 선사는 내려다보며, “자네가 더 위험하네.” 하였다. 이에 백낙천은 “나는 이미 벼슬이 자사에 올라 강산을 진압하고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무엇이 위험하오.”하였다.
그의 자만심을 이미 꿰뚫어 본 선사가 “티끌 같은 세상의 지식으로 교만심만 늘고 번뇌와 탐욕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은가?” 하니 백낙천은 선사의 기개에 눌려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사는 이렇게 설하였다.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자기의 마음 맑게 하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백낙천이 실망하여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 아닙니까?” 하니 선사는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하였다.
백낙천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루었다.
[설화] 사천왕(四天王) 헌발(獻鉢)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을 통해서 사천왕(四天王)의 헌발(獻鉢)을 그린 벽화와 구지(俱指) 선사의 일지두선(一指頭禪) 벽화를 살펴보자. 구지 선사 이야기는 비교적 많이 그려짐으로 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사천왕 헌발도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벽화는 아니다. 본 도판은 청도 호거산 운문사의 대웅보전 내부벽화로 경(經)의 내용을 잘 함축하여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또한 스님들의 공양구일 뿐만 아니라 재가 신도들도 수련회 등을 통해서 경험케 되는 발우공양의 참 의미도 함께 새겨 봄직하다.
사천왕(四天王) 헌발(獻鉢)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차리니카 숲에서 7·7일 동안 해탈락에 계셨다. 이는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 이래로 삼매의 힘으로 이제까지 목숨을 지탱해 오신 것이다. 그 때 마침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북천축(北天竺)으로부터 크게 이익을 얻고 돌아가는 두 장사꾼이 지나게 되었다.
그 때에 숲을 수호하는 수풀신이 몸을 감추고 소를 붙잡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 상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합장하고 모든 천신에게 정례한 다음 지극한 마음으로 빌었다. “비옵건대 우리에게 지금 만난 재앙과 괴변의 두려움을 빨리 멸하게 하옵시고 편안하고 다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때 차리니카 숲의 수호신은 곧 색신(色身)을 나투어 그 상인들을 위로하였다. “그대들은 두려워 말라. 여기는 아무런 재화도, 재앙도 없으니 겁내지 말라.
이 곳에는 오직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시고 오늘 이 숲 안에 계시노라. 다만 여래께서 도를 이루시고 49일이 지나시도록 공양을 안 드셨으니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공양을 올리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오랜 밤에 편안하고 안락하여 큰 이익을 얻으리라.”
두 상인은 숲신의 말함을 듣고 곧 각각 보리가루, 우유, 꿀경단을 가지고 모든 상인들과 함께 부처님 처소로 나아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저희들의 이 청정한 보리가루, 우유, 꿀경단을 받으소서.” 이 때에 부처님께서는 ‘내 이제 어떤 그릇으로써 발우를 삼아 음식을 받을 것인가?’생각을 하셨다.
부처님께서 이런 마음을 내자 사천왕은 각각 사방에서 금발우를 하나씩 가지고 와서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올렸으나 부처님은 “그와 같은 금발우를 받는 것은 출가자에 합당치 못한 것이다.”며 안 받으셨다.
사천왕들은 다시 은·파리·유리·진주발우를 가져 왔으나 받지 않으시고, 다시 네 개의 돌발우를 드리자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발우를 받아 하나로 만들어 상인들이 올리는 음식을 받았다.
그리고 상인들에게 수기를 주시자 상인들은 부처님 발에 엎드려 예배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설화] 구지(俱指) 선사의 일지두선(一指頭禪)
구지(俱指) 선사의 일지두선(一指頭禪)
구지(俱指) 선사는 중국 당대(唐代)에 무주 금화산에 머무르면서 한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천룡(天龍) 선사의 법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이후 구지 선사는 가르침을 얻으려고 찾는 이가 있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 세울 뿐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먼 곳에서 구지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다. 마침 선사는 출타하고 안 계셔서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시중 드는 동자가 “우리 스님의 법문이라면 그 동안 많이 보고 들은 바가 있어 저도 잘 알고 있으니 물으십시오.” 하였다. 이에 객승이 정중히 물으니 동자는 구지 선사가 하듯 곧바로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불법을 얻으려 왔던 스님은 의아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가다가 구지 선사를 만나게 되어 절에 다녀온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절에 돌아온 선사는 동자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는 “좀 전의 그 법문을 나에게도 한 번 해다오.” 하니 동자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순간 구지 선사는 동자의 손가락을 거머쥐고 칼로 잘라 버렸다. 울며 달아나는 동자를 고함을 질러 부르며 “어떤 것이 불법의 참다운 뜻이냐?” 하니 동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던 버릇대로 손가락을 들려 했으나 이미 손가락은 없었다. 그 순간 동자의 마음은 활연히 열렸다.
구지 선사는 입적하시면서 이르기를 “내가 천룡의 일지두선법을 받고서 일생 동안 썼으나 다하지 않았다.” 하였다.
[설화] 목련구모(目連救母) 반야용선극락도(般若龍船極樂圖)
목련구모(目連救母) 반야용선극락도(般若龍船極樂圖)
글· 최성규 / 사단법인 한국전통불교회 불화연구소 소장
석존의 멸후로부터 미륵보살이 성도(成道)할 때까지의 무불(無佛) 시대에 있어서 육도 중생의 제도를 부촉받으신 지장보살(地藏菩薩)! 백천의 방편으로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각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모습을 나투어 죄를 짓고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해탈케 하려는 대원본존(大願本尊)이시다.
그래서 이를 상징하여 오른손에 여섯의 고리가 달린 석장(錫杖)을 쥐고 계시고 왼손에는 중생의 소원과 복덕을 구족시켜 주심을 뜻하는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쥐고 계시는 형상으로 조성하여 신행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장전(地藏殿, 또는 冥府殿)의 외벽에는 「부모은중경」 벽화와 함께 유명교주(幽冥敎主)이신 지장보살의 권능과 관련하여 영가천도(靈駕薦度)를 통한 효의 실천과 또한 생자(生者)나 망자(亡者)에 대하여 법에 의한 진정한 제도중생의 의지 표현으로 「목련구모(目連救母)」 벽화와 「반야용선극락도(般若龍船極樂圖)」 벽화가 그려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목련구모」 벽화는,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도한 효성을 설한 경인 『우란분경(盂蘭盆經)』에 근거하여 여름 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 백중(百中)에 지옥과 아귀의 과보를 받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우란분재(盂蘭盆齋)를 베푼다. 그 내용은, 세존의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가장 수승한 목련 존자가 신통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니, 아귀가 되어 굶주리고 목이 타는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고생하는 모습을 본 목련 존자는 자신의 신통력으로 구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죄가 너무 무거워 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존자가 세존에게 간청하니,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여름 안거(安居)가 끝나는 백중날에 여러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스님에게 갖가지 음식과 과일을 정성스럽게 공양하면 어머니는 천상(天上)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하셨다. 목련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어머니를 지옥의 고통에서 구하였다.
「목련구모」 벽화는 화면의 크기나 유형에 따라 여러 가지 도상이 있다. 본 도판에는 우측에 서운(瑞雲)에 싸인 연화좌 위의 목련 존자가 좌측에 그려진 지옥에서 벗어난 어머니를 맞이하는 모습이 공간감 있는 배경과 함께 『우란분경』의 내용을 함축하여 나타내 주고 있다.
「반야용선극락도」는 화면의 가운데에 반야용선이 있으며 뱃머리에는 영가를 맞이해 안내하는 총책임을 맞으신 분인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서계시고 우측의 차안(此岸)에는 망자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에 젖어 있는 유가족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좌측에는 극락도사(極樂導師)인 아미타불이 주존으로 계시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세계), 즉 극락정토가 표현되어 있다.
천도의식에서 인로왕보살은 망자의 영혼을 불보살의 법석(法席)이나 안락 정토로 인도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 따라서 영가 및 대중이 삼보의 사자(使者)이신 이 분께 귀의를 표하는 것은(南無大聖引路王菩薩) 곧 삼보님전에 귀의를 표하는 것이 되며 동시에 영가 또한 인로왕보살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극락왕생함을 이른다.
조형적으로 볼 때에, ‘극락왕생도(極樂往生圖)’같은 본 벽화 등은 관음·세지·지장보살 등과 함께 한 화면, 또는 여러 화면으로 나뉘어져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식(儀式) 때는 주로 기(旗)나 번(幡)에 모셔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간혹 독립된 존상의 형태로 조성되기도 한다.
[설화]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
‘안수정등도’ 벽화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나그네 한 사람이 큰 벌판을 걷다가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그는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히 우물을 발견하였다. 마침 우물 안으로 뻗어내려간 등나무 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또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룡이 노려보고 있었다.
위에는 미친 코끼리, 발 밑에는 독룡과 뱀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된 나그네는 등나무 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등나무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어디에선지 꿀물이 나그네의 입술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달콤한 꿀맛에 나그네는 그에게 닥친 두려움과 괴로움을 잊고 꿀물이 떨어지는 쪽으로 눈을 돌리니 머리 위의 큰 나뭇가지에는 몇 마리의 꿀벌들이 집을 짓느라 앉았다 날았다 하였는데 그 때마다 꿀이 떨어져서 입에 들어갔다. 나그네가 꿀의 단맛에 취해 있는 동안 들불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나그네는 인생 그 자체를 말하며 벌판은 무명장야(無明長夜)를,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이르며, 우물은 나고 죽는 일〔生死事〕이 험난한 이 세상을, 한 줄기의 넝쿨은 우리의 생명을 각각 뜻한다. 그리고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네 마리 독사는 우리의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地水火風)를 가리키며 꿀물은 오욕(五欲), 벌은 삿된 생각을, 들불은 늙고 병듦을, 독룡은 죽음을 각각 상징한다.
‘안수정등도’ 벽화는 위의 내용을 대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꿀물의 달콤함에 취하여 정신을 잃은 나그네를 통하여 그릇된 관념에서 벗어나서 삶의 참모습을 깨닫고 정행을 하도록 이끌어 준다.
[설화]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
당나라 정관년간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은 은사였던 풍간(豊干) 선사와 함께 절강성에 있는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살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국청사에 숨어 사는 세 사람의 성자라는 뜻으로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고 했으며 이들의 시를 한데 모은 『한산시집(寒山詩集)』을 『‘삼은시집(三隱詩集)’』이라고도 했다. 이들 세 분은 모두 불보살의 화현으로 즉, 풍간 스님은 아미타불,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 채 그들의 독특하고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멸시하고 천대하기 일쑤였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한암(寒巖)이라는 굴 속에 산다 하여 그렇게 불리었다. 한산은 헤어진 옷에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 되면 국청사에 들러 대중들이 먹다 남긴 밥이나 나물 따위를 습득에게 얻어 먹곤 하였다.
그리고 절에 와서 거닐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고 욕을 하기도 하면 절의 스님들은 그런 그를 쫓아내곤 하였는데, 그러면 한산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곤 하였다.
이렇게 큰소리를 지르고 미친 짓을 하기도 하고 이적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 말은 모두 불도(佛道)의 이치에 맞지 않는 바가 없다 하였다. 이를 주제로 한 벽화 또한 위의 도판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그려진다.
[설화]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오세동자(五歲童子)의 깨달음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 오세동자(五歲童子)의 깨달음
글· 최성규 / 사단법인 한국전통불교회 불화연구소 소장
관음신앙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의 신앙적 또는 신행적 극치라 할 수 있다. 관음신앙은 그 역사와 자취가 매우 넓고 많아서 시간과 공간, 나라와 민족, 출가자와 재가자, 왕족과 서민 등을 가릴 것 없이 전 시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행되어졌다.
『법화경(法華經)』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보면, “만약 갖가지 고뇌를 받고 있는 무량백천만억의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은 곧바로 그들의 음성을 관하여 모두 해탈케 한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관세음보살의 현세이익적 염원을 잘 나타내 주는 관음신앙의 요체라 할 수 있다.
관음은 관세음의 줄임으로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관(觀)한다는 말로,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 모든 중생의 온갖 고뇌의 소리를 다 들으시고 관찰하여 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는, 즉 무외심(無畏心)을 베풀어 주는 분이라 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하고 대자대비를 본원력으로 하시는 분이기에 대비성자(大悲聖者)라고도 한다.
또한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구제하시고 교화함에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체를 나타내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자비를 상징하는 백의(白衣)의 관음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이마엔 아미타불을 모셨으며 감로수(甘露水) 병을 들고 계시거나 또는 도판과 같이 옆에 두고 계신다. 감로수는 일체 중생이 고뇌와 번뇌의 불길에 휩싸여 받는 고통의 불길을 꺼주고 목마름을 적셔주는 구원의 상징이다.
오세동자(五歲童子)의 깨달음
백담사의 부속암자인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불교 성지요, 기도도량이다.
이 암자는 647년(선덕여왕 13) 자장 율사가 창건하였다. 이 곳에 조그마한 선실(禪室)을 짓고 머물렀던 자장 율사는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관세음보살이 언제나 계신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바꾼 것은 1643년(인조 21년)에 설정(雪淨) 스님과 5세 동자에 얽힌 유명한 관음영험설화 때문이다.
설정 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로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된 10월의 어느 날 스님은 월동준비 관계로 네 살의 조카를 위하여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 아래 마을로 내려 가면서 신신당부하였다.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절을 내려 갔다. 스님이 장을 본 뒤 올라가려니 폭설로 눈이 쌓여 올라가지 못하고 속만 태울 뿐 어찌할 수 없이 겨울이 지나 눈이 녹은 이듬해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달려가 보니 당연히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다 스님을 보자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그 까닭을 물었다.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관세음보살의 가피에 감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중건을 거듭한 오세암의 벽화는 천진무구한 믿음으로 인하여 5세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설화의 내용을 벽화로 자세히 그려 놓아 영험있는 기도도량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창공처럼 맑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