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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6장
남패천 총단으로 연일 급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남패천 지부에서 대지급으로 날아온 것으로, 옥령인을 앞세운 서왕문의 공격에 지원군을 요청한다든지, 괴멸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급보들이 총단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지부들은 괴멸되었고,
총단에서는 지원군을 보내기는 커녕 총단에서 가까운 지부들의 병력을 오히려 총단에 귀속시키고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얼마 후면 옥령인을 앞세운 서왕문의 군사들은 남패천 총단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남패천 총단에서는 특급 경계령을 내림과 동시에 외성 성문을 닫고 모든 다리들을 들어올렸다.
또 외성 주변을 둘러싼, 사시사철 유람선이 끊이지 않는 인공 호수에는 기관을 작동시키고 물속에는 식인어들을 풀어 그곳에 빠지면 황소라도 한 식경 내에 뼈만 남을 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남패천은 인공 호수 속에 완전히 격리된 한 채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완벽한 준비를 하였음에도 남패천 내부의 분위기는 긴장이 넘쳐났다.
강시나 마찬가지인 옥령인!
그들이 호수 속에 첨벙 뛰어들어 성벽을 향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할까?
옥돌만큼 강한 그들의 신체라면 식인어들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설치된 기관진식들도 그들의 차돌 같은 신체에 얼마만큼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남패천 내성과 외성에 설치된 기관진식은 모두 정상적인 인간을 겨냥해 만든 것이지 그런 괴물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그 기관진식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이라면 정파무림의 연합체인 무림맹이 옥령인이라는 천인공노할 마물을 만든 동방회에,
그리고 그들과 손잡고 있는 서왕문에 대항하겠다는 뜻을 공표하고 서왕문의 군사들 배후로 진격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총단에 대한 서왕문의 공격이 지금까지 늦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곳에는 피비린내 나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남패천주 구양천은 그런 긴박한 기운을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낸 채 총단으로 복귀한 무적대주 유화성을 맞고 있었다.
“ 솔직히 이렇게 다시 볼 줄 몰랐네.”
태상호법 나유백은 자신과 구양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유화성을 보고 감탄이 충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늑대들을 뇌옥에서 풀어주고 그들을 제압하여 자신의 휘하에 두려는 의도를 가진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들에게 물려 죽으리라 생각했다.
설령 그들을 제압했다 하더라도 서왕문과 동방회, 그리고 북제성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유화성은 나유백의 그런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고는 임무를 완수한 채 귀환하여 자신의 허리에 걸린 표풍검보다 더 날카로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 그동안 수고 많았네. 수고라는 말로 그간 자네가 이룬 혁혁한 전과를 모두 치하할 순 없지만 지금은 시국이 풍전등화 같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하게나.”
구양천은 유화성에게로 다가서서 두어 번 어깨를 두드렸다.
유화성은 여전히 담담한 모습으로 앞만 보며 서 있었다.
이곳 남패천 총단을 떠나면서 부여받았던 임무는 완벽히 수행했지만 자신 앞에 놓여진 먹구름 같은 운명은 조금도 걷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게 주변을 감싸고 있어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 앞으로 뭘 하고 싶은가?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이젠 내가 자네 부탁을 들어줄 차례일세.”
구양천은 정색을 하며 유화성을 쳐다보았다.
“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유화성은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 말해보게!”
“ 우선 천주님의 보검, 청룡검이 필요합니다.”
유화성의 말에 나유백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청룡검이라면 구양천의 신물이다. 그것을 든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구양천의 명령과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구양천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허락했다.
“ 그리고 ...철갑마차와 함께 백봉령주, 비원각의 사람들 몇 명도 붙여주십시오.”
유화성이 거침없이 말했다.
“ 알겠네, 더 있는가?”
이번 질문에는 유화성이 잠시 뜸을 들이며 나유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 태상호법님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별채에 계신 여덟 장로님들도...”
“ 어허! 이런 미친 놈 좀 보게! 아예 남패천을 집어삼킬 작정인가?”
나유백이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자신 혼자만의 도움도 모자라 남패천 여덟 장로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니? 그건 남패천의 본당 열쇠를 내어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유백은 눈을 부릅뜨며 유화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유화성의 눈빛이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대체 네놈 일에 내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여덟 장로들까지......?”
“ 마음 같아서는 천주님까지 동행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 태상호법님과 장로님들의 동행을 부탁드리는 것이지요.”
“ 이,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놈 좀 보게!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천주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천주를 보호하는 일이 아니더냐!
그런 나를 보고 네놈 일에 동참해 달라니?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나유백이 펄펄 뛰며 고함을 질렀다.
“ 일개 상인연합회에게 무림 최강의 단체인 남패천의 모든 지부가 구할 이상 괴멸당하고, 이제 총단마저 침범당할 위기에 몰린 사실은 더욱 말이 안 되지요.”
“ 이, 이놈이!”
나유백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출수했을 것이다.
“ 맞는 말이네. 이곳 총단마저 무너지고 나면 천주고 무어고, 태상호법은 또 무엇이겠나? 그럼 한 가지 묻겠네,
자네의 복수가 성공하면 동방회에게는 크나큰 타격을, 그리고 우리 남패천에는 또 그만한 유리함이 있겠지?”
구양천은 신중한 표정과 함께 유화성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절대적인 신임의 빛이 어려 있었다.
“ 그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사 모두 인간의 마음대로, 인간의 계산대롤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분명한 것은 제 복수의 대상과 남패천이 상대하는 적이 동일하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그거면 됐네! 다른 것은?”
“ 그 외 다른 것은 비원각주님과 상의하면 됩니다.”
“ 알겠네. 내 장로회의를 소집해서 최대한 설득해 보겠네.”
구양천이 서둘러 지필묵을 당겼다. 유화성이 요구한 것에 대한 허가증을 친서로 작성하여 비원각과 장로들 처소에 보내기 위함이었다.
“ 이 사람아! 난 아직 승낙하지 않았네! 내가 자네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나유백이 구양천의 손에서 붓을 뺏으며 소리를 질렀다.
“ 자네가 내 곁에 있으면 항상 신경이 쓰여. 어떤 때는 누가 누구 호법을 서는지도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네.
모처럼 그런 신경을 안 써도 될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자네가 저 아이를 도와 일을 성공시키면 그게 나를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드는구먼.”
구양천이 다시 붓을 뺏어 들었다.
“ 저놈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도 모르면서 청룡검과 나와 여덟 장로까지 내놓으려 하는가?”
“ 저 아이는 이제껏 쭉 내 예상을 세 배쯤 뛰어넘는 행보를 보였네. 이번에도 그럴 것 같네.”
나유백의 기가 막힌 표정에도 불구하고 구양천은 계속해서 붓을 움직였다.
“ 이놈아! 대체 네놈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냐?”
주먹을 가슴을 친 나유백이 고함을 질렀다.
“ 지금으로서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유화성이 짤막하게 답했다.
“ 허허! 이놈이 갈수록.....”
나유백은 연방 한숨을 내쉬다가 구양천의 지시서가 다 작성되는 것을 보며 뒤로 물러앉았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팔대장로와 자신까지 대동하고 가려는 것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구양천의 말대로 이놈이 이런 정도의 요청을 한 이상 그 계획 또한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만한 것일 것이다.
평생 동안 곁에 붙어 안위를 지키던 구양천 곁을 떠나는 것이 더없이 걱정되었지만 이곳 총단이 무너지면 태상호법이든 천주든 한 구덩이에 처박혀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자신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어 남패천의 앞길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날려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바람직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유백은 문득 가슴이 뛰고 혈관 속으로 더운 피가 줄달음치며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무위도식했던 이십여 년의 세월!
이젠 다시 그 옛날의 혈기 넘치던 시절의 기분을 되살릴 수도 있을 것 가타는 예감이 호흡마저 가빠졌다.
“ 좋다. 이놈! 네놈 하는 일이 결국은 천주를 지키고 남패천을 위하는 일이라니 따라나서겠다.
그러나 만에 하나 별 시답지도 않은 일에 날 끌어들인 것이라면 내 손으로 네놈 목을 칠 것이니라.”
나유백이 불길을 토하는 것 같은 눈으로 유화성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유화성의 시선은 나유백의 시선을 뛰어넘어 자신의 계획 저 먼 곳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다시 끊어졌다.
처음에는 우연히 방향이 같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꾼 골목길에서도 그 발자국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끼자 미행이 붙었음을 알았다.
아주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여서 아직까지도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은 그 발자국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만들었고 이젠 미행자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 대체 어떤 인간이지?’
소녀는 미행자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완벽히 은신하지 못하고 기척을 드러낸 것을 보면 하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기척을 찾으려고 하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기척을 드러낸 것은 의도적이라는 얘기였다.
‘ 그러고 보니.....’
소녀는 온몸에 얼음물이 끼얹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자신의 꾀에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은 적당한 경계심과 적당한 호승심을 자극하여 자신을 이곳까지 밀어 넣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고수라고 느꼈으면 이런 한적한 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많은 대로변으로만 방향을 잡아 곧장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수 같은 어설픈 기색을 흘려 호승심을 자극하고 유인하게끔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미행자에게 유리한 장소로 온 것이다.
‘ 너무 자만했어!’
소녀는 허리에 찬 검병에 손을 갖다 댔다. 자기 한 몸 지킬 정도의 무공은 익히고 있었지만 상대는 예상보다 훨씬 고수 같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척에서도 기척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필요에 의해서 드러낸 것일 뿐이리라....
챙-
검갑에서 검이 빠져나오며 달빛 아래로 시린 광채를 뿜어냈다. 이젠 지루한 신경전이나 추격전은 필요없다.
미행을 해온 것이 확실하다면 나설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이 골목길을 벗어나 집으로 갈 것이다.
‘ 착각이었나?’
검을 빼 들고 골목 몇 개를 돌아가던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끊어질 듯하다가 이어지고 그러다가 다시 끊어진 기척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 크윽!”
골목 한쪽에서 낮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급히 신법을 펼치려 했다.
“ 여기서 꼼짝 말고 있으시오!”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소녀는 기겁을 했다.
“ 큭!”
길게 놀랄 사이도 없이 또 한마디의 비명이 울리며 복면을 한 인영이 벽에서 튀어나오며 쓰러졌다.
퍼퍽!
퍽!
거의 동시에 여러 곳에서 파육음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이제 놀라다 못해 온 몸이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 한명이 자신을 끈질기게 미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소한 다섯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들이 거의 등 뒤에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것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그런 그들을 그림자처럼 미행해 순식간에 쓰러뜨려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은 전혀 의식 못하는 사이 등 뒤에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 것 같았다.
“ 괜찮으십니까?”
귀신처럼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소녀는 기겁을 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등 뒤에까지 접근한 미행자를 처치하고 자신에게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지시한 목소리의 주인 같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솟아오르듯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서 있었다.
소녀는 그 인영이 자신만큼 어려 보인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며 온통 혼란에 빠져들었다.
“ 다 해치웠어요, 사형!”
더 어릴 것 같은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두 명의 인영이 더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이남일녀가 더 나타났다.
제일 뒤에 나타난 인영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 서, 설마?”
소녀는 귀신을 본 듯 중얼거렸다.
“ 오랜만이오, 조 소저!”
철탑을 방불케 하는 사내가 빙긋 웃으며 조수아에게로 다가왔다.
“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관제묘 한쪽에서 조송령이 건네준 물병을 거의 다 비운 후 겨우 진정을 한 조수아는 득달같이 물었다.
“ 이곳으로 와서 은밀하게 소저의 집으로 향하던 중 소저를 보았소.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다가 미행의 낌새를 느끼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오.”
진우청은 간단히 설명하고는 우려 섞인 눈빛으로 조수아를 쳐다보았다.
인근의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이 소녀에게까지 놈들의 마수가 뻗칠지는 몰랐다. 조수아의 얼굴에서도 그런 우려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내게서 갈취해 간 한철 조각은 잘 가지고 계시오?”
진우청은 무거운 분위기를 날려 버리고자 농을 던졌다.
비로소 조수아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지고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눈에 보아도 촌놈 티가 줄줄 흐르던 진우청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그리고 그 손에서 오십 냥도 넘는 한철 조각을 열 냥에 후려쳐서 손에 넣고 돈을 건넸을 때,
마치 횡재를 한 듯 식사도 다 하지 않고 객점을 빠져 나가던 진우청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 뒤로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그리고 진우청은 더 많이 변했다. 북제성의 제자라는 신분과 함께 무림 비무대회에서 우승하여 신성이 되었다는 소식은 가만히 있어도 귀가 따갑게 들렸다.
들을 때마다 설마 하며 믿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다.
“ 그런데 이분들은.....?”
긴장이 풀린 조소아는 경설형 등을 쳐다보며 말했다.
“ 경황 중이라 소개가 늦었군요. 이분들은 내 사문의 사람들이오. 그리고......”
진우청은 유화결을 쳐다보며 잠시 조수아의 눈치를 살폈다.
복면을 쓴 채 텅 빈 눈을 한 유화결을 조수아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 이 친구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북제성.....?”
경설형 등과 유화결을 쳐다보는 조수아의 눈에 이채가 번져갔다.
진우청과 같이 나타났으니, 그리고 자신을 미행하는 자들을 너무 쉽게 제압하는 무위로 봐서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북제성이란 단어는 언제나 신비로웠다.
“ 험! 험! 북제성 사람들이라고 해서 머리에 뿔난 건 아니오!”
다섯 사질과 유화결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조소아를 향해 진우청이 농을 던졌다.
“ 결례했어요.”
조수아가 얼굴을 붉혔다.
“ 괜찮아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우릴 그렇게 쳐다봐서 이젠 익숙해졌어요. 이곳으로 오면서 사숙으로부터 조 소저 얘긴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조송령이 나서며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 사숙?”
조수아가 진우청과 조송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우청이 이들과 같은 북제성 제자인 줄은 들었지만 이들의 사숙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하늘 같은 사숙이에요.”
조송령이 과장스런 몸짓과 함께 말했다.
“ 말로만?”
을지소소가 쓸데없는 잡담은 그만 하라는 듯 조송령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리고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우연찮게 조수아를 만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이곳 둔계는 휘주와는 좀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놈들의 촉각이 미치는 곳이다. 그런 곳이니만큼 신속히 행동하는 것이 좋았다.
“ 조부께선 잘 계시오?”
진우청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 잘 계세요. 하지만......”
조수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왜?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 할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 그럼?”
진우청의 눈 사이가 좁아졌다.
“ 해천 할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서....”
“ 그 노인장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이오?”
진우청은 조수아의 말끝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 남패천에서 이리로 오신 후, 해천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머무르라는 할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휘주로 가셨어요.
그 다음부터는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걱정이 태산 같아요.”
가볍게 물어본 안부 인사에서 뜻밖의 사실을 들은 진우청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 그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못한 것이오?”
진우청은 다시 질문했다.
“ 우리 무관 무사들을 통해 연락을 하려 했지만 꽃집은 텅 비어 있다고 했어요.
그러다 뜻밖에 해천 할아버지로부터 오늘 해질 녘 강변의 어느 곳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남자들의 움직임은 감시가 심해서 제가 물놀이 나가는 척 나간 것인데...”
“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요?”
진우청은 긴장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미 어둠이 짙어졌으니 일이 틀어져도 한참 틀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해천 노인의 신상에도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행히 좀 늦게 약속 장소에 왔다고 하더라도 조수아에게 미행이 붙을 정도라면 그곳에서도 절대로 안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곳이 해천 노인과 끈이 닿는 유일한 곳이다.
“ 강변에 있는 한 나루터에요.”
조수아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답했다. 이제까지는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자신의 안위가 확보되자 그녀 역시 해천 노인의 신상이 태산같이 걱정된 것이다.
“ 우선 그곳으로 가봅시다. 혹시 늦게라도 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곳에서 무슨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진우청의 말에 조수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부터 이곳까지 달려나올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절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지금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든든한 호위가 생긴 것이다.
“ 어서 가요.”
조수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는 만월에 가까운 달이 강물 한가운데에 풍덩 빠져 있었다.
그 달을 품은 강물이 은가루를 뿌린 듯한 빛을 뿜어내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소슬바람이 고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통 때라면 짝을 이룬 연인들이나 서탁을 짊어진 수재들이 제법 보일 듯도 했지만 지금 강변에는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한 마리 눈에 뜨이지 않고 괴괴한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
그건 인근 어디라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곳은 휘주 복판과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동방회가 휘주에서 유가검보를 무너뜨리고
그곳 검대운들과 서왕문의 부상자들을 옥령인이라는 마물로 만들어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부터는 밤은 물론 낮에도 한적한 곳에는 사람들이 나돌아다니지 않았다.
“ 여기가 확실하오?”
진우청은 아무도 없는 강변을 둘러보며 조수아에게 확인했다.
조수아는 굳은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주변을 한번 살펴보아라.”
진우청은 장위봉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위봉과 운기목, 조송령, 을지소소는 산책 나온 청춘 남녀들처럼 짝을 맞추어 느긋하게 강변을 걸으며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한동안 그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강변 제방과 강 아래의 자갈밭을 서성거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을 찾아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진우청에게로 되돌아왔다.
“ 근처에는 아무도 없어요. 사숙.”
을지소소의 말에 진우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아를 돌아보았다.
조수아의 얼굴에 드리워진 불안의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함께 해천 노인이 약속을 못 지킨 일은 노인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생겼음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일단은 집으로 돌아갑시다.”
“ 하지만......”
조수아는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걱정으로 발걸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 손에 몽둥이 하나만 들면 겁나는 것이 없는 노인네니 괜찮을 거요.”
진우청은 조수아를 안심시키며 팔을 끌었다.
“ 잠깐!”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을지소소가 걸음을 멈추고 귀에다 손을 갖다댔다.
“ 백왕의 신호에요.”
빠르게 말한 을지소소는 입술을 오므려 긴 호흡을 뱉어냈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녀와 세 마리 짐승들 간의 원거리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 누군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요!”
을지소소가 진우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 해천 할아버지 같아요.”
짤막하게 말한 조수아는 진우청이 말릴 새도 없이 을지소소가 귀를 기울이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사숙! 우리도 어서 가요!”
조송령도 조수아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피잉-
섬뜩한 음향과 함께 강전 한 대가 등 한복판을 향해 날아들었다.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경공을 펼치면서도 한 발씩 쏘아져 오는 화살은 뱀의 독니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사내는 급히 방향을 틀었다.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옆쪽 바위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다시 한 개의 강전이 날아왔다. 사내는 애병을 흔들었다.
창-
강전을 쳐낸 애병이 날카로운 비명을 토했다.
“ 젠장!”
사내는 역정을 토하며 한층 더 강한 힘으로 바닥을 박찼다. 날아오는 화살에 실린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건 그만큼 추격자들과 자신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놈은 경공을 펼치는 자세 그대로 화살을 날리면 되었지만 자신은 그럴 때마다 방향을 틀든지, 등을 돌리고 화살을 쳐내야 했다.
그런 순간에 추격자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뒤를 맡은 부하들도 이젠 모두 쓰러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거리가 조금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젠 반대였다.
쌔액-
다시 한 대의 강전이 날아왔다. 방향을 틀기 힘든 지역에서 정확히 날아온 화살이었다.
몸을 숙이든지 허공으로 솟구쳐 피해야 했다. 땅에 구르듯이 몸을 숙이면서 피해낼 순 있지만 그만큼 경공의 속도가 떨어진다.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면 오히려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추격자의 이차 공격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궁수들은 땅에서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표적을 가장 좋아한다.
찰나적인 갈등을 한 청년은 발 끝에 힘을 주어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아슬아슬하게 강전은 아래로 지나갔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또 한 대의 강정이 허공이 뜬 자신의 몸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왔다.
“ 망할!”
역정을 입 밖에까지 토하지도 못한 청년은 천근추의 수법을 펼치며 벼락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으윽!”
청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짝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강전에 실린 힘이 너무 극강했기에 스친 것만으로도 살점이 뭉턱 떨어져 나갔고 불에 지진 듯한 통증과 함께 피분수가 터졌다.
청년의 인상이 야차처럼 구겨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속도를 더욱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선혈도 문제였다. 아직은 양이 적어도 공력을 북돋우며 경공을 펼치다 보면 머지않아 더 큰 핏줄기로 터져 나올 것이다.
“ 연익추 이 죽일 놈!”
청년은 이를 갈며 내뱉었다. 줄곧 자신의 등을 향해 강전을 날린 자의 이름이었다.
그자는 자신의 상관을 위해 기필코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반면 자신 역시 자신이 얻은 정보를 기필코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척백대주의 휘주 잠입!
복마전이 되어가는 휘주에 그자의 잠입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황제가 양지의 최고 권력자라면 척백대주는 음지의 최고 권력자이다.
그런 그가 이곳 휘주에 나타났다.
그 이면에 어떤 복잡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자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필코 상부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 내 덩치가 이렇게 거추장스럽기는 오늘이 처음이군.’
사내는 더욱 강하게 땅을 박찼지만 발 끝에 와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 독?’
절망적인 생각이 뇌리를 지나갔다.
화살촉에서 전해진 독이 운기를 방해하며 경공마저 방해한 것이다.
" 죽일 놈!”
마침내 청년은 그 자리에 섰다. 중독된 상태에서 더 이상 달려보아야 소용이 없다.
오히려 남은 공력마저 급격히 소진시킬 것이다.
공력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악마처럼 쫓아오는 그놈이라도 저승길의 동반자로 삼고 싶었다.
연익추....
한때 절친한 동료에서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놈!
동창의 가장 촉망받던 동료에서 척백대로 투신하여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한 놈!
이젠 그놈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여야 할 때이다.
“ 내 예감이 정확했군!”
동료 두 명과 함께 강궁을 들고 나타난 연익추가 빙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말했?.
“ 닭대가리가 무슨 예감까지...”
사내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연익추는 아랑곳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 자네와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던 날.... 문득 지금의 이 장면이 떠올랐지. 자네와 내가 머지않아 서로의 가슴에 무기를 겨누게 되는 이런 장면.......”
빙글거리던 연익추의 미소가 점점 차가워졌다. 그와 함께 사내의 마음도 점점 차가워졌다.
이젠 마지막 남은 옛정마저 완전히 떨쳐 버렸다.
파앗-
사내는 애병을 뿌렸다. 빛살 같은 부챗살이 연익추를 향해 날아갔다.
활시위를 푼 연익추가 강궁을 휘둘렀다. 강궁은 순식간에 빳빳하게 펴진 몽둥이로 변하고 활시위 또한 유성추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는 부챗살을 튕겨냈다.
“ 네놈의 활대 양쪽 끝에 몇 바퀴나 감긴 시위와 방울 같은 쇠구슬 한개가 뭐 하는 건지 항상 궁금했는데 이런 용도였군.”
여조명은 빈정거림과 함께 부채를 활짝 펼쳤다.
“ 자네는 내 애병의 용도를 다 모르겠지만 잔 자네 애병의 용도를 속속들이 알지. 그것만으로도 유리한데 자넨 중독까지 되었네. 또한 자네는 동료들을 다 잃었고 난 둘이나 남았네.”
연익추는 느긋하게 말하며 몽둥이로 변한 활대를 흔들었다.
바닥에 있던 쇠구슬이 탄환처럼 튀어올랐다.
파츠츠츠-
여조명은 활짝 펼친 부채를 통째로 던졌다.
이번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더 이상은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급격히 빠져나가고 남은 공력을 이번 한 번에 모두 쏟아부었다.
파아앗-
연익추의 활시위가 그물처럼 허공에 얽히며 뻗어 나오는 부챗살을 막았다.
“ 윽!”
마지막 한 개의 부챗살이 허벅지에 꽂히며 연익추는 비명을 질렀다.
“ 놀랍군. 중독된 상태에서도 이 정도라니..... 하지만 이젠 끝일세. 한때 절친했던 관계를 생각해 고통없이 죽여주지.”
연익추는 반쯤이나 틀어박힌 부챗살을 빼내며 활대를 들어올렸다.
“ 한때 절친했던 적 없었어.... 그냥..... 네놈이 술값을 잘 내주기에.... 그런 척했지.”
여조명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며 내뱉었다.
“ 그럼 아주 아프게 죽여주지. 하앗-”
허공을 맴돌던 유성추가 벼락처럼 여조명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까앙-
유성추에서 쇳소리가 터져나왔다.
“ 돌머리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
놀란 눈으로 여조명의 머리를 쳐다보며 중얼거리던 연익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중독된 줄 알았던 여조명이 분신을 펼치며 옆으로 한 개의 신형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신술을 펼쳤으면 똑같은 모습의 신형이 몇 개로 늘어나야 하는데 옆에 나타난 신형은 대머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유성추는 그것에 막혀 쇳소리를 토한 것이다.
“ 포위해라!”
옆에서 몇 명의 인영이 더 나타나며 주변을 둘러쌌다.
“ 북제성?”
연익추는 경악한 표정으로 단말마를 내질렀다. 북제성은 자신들을 모를 수 있어도 자신들은 이제 양지로 나온 북제성 문도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들은 북제성의 인물들이었다.
“ 진... 공자..”
여조명이 스르르 무너졌다.
“ 보살펴 주시오!”
여조명을 부축한 진우청이 경설형에게 말하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해천 노인인 줄 알고 달려온 곳에서 뜻밖에도 여조명을 만났다. 반갑기는 했지만 해천 노인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다.
중독된 여조명은 경설형이 몇 군데 혈도를 찍자 검은 피를 토하고는 일어나 앉아 작은 알약을 삼켰다. 운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여조명은 억지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화살에 묻은 독은 보통 사람이 중독되었다면 벌써 사경을 헤맬 맹독이었지만 용독술에 조예가 깊고, 여러 가지 해독약을 몸에 섭취하고 있던 여조명이었기에 서서히 해독이 되고 있었다.
“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그리고 저들은 누구시오?”
마음이 급한 진우청도 여조명에게 한꺼번에 질문했다.
“ 저들은 척백대.... 척백대주가 이곳에 왔소!”
여조명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답했다.
“ 척백대?”
을지소소와 경설형의 눈이 번쩍 살기를 내뿜었다. 장위봉과 운기목도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갖다 댔다.
이젠 무림맹의 일원이 되어 황궁과의 오랜 은원을 청산한다고 선언한 북제성이었지만 척백대란 단어는 본능적으로 살심을 불러일으켰다.
진우청은 손을 들어올렸다.
저들을 잡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인근의 상황과 해천 노인의 행방이 더 급했다.
“ 혹시 해천 노인에 대해서 알고 계시오? 여옥화원.......”
“ 같이 탈출하다가 지금 잡혀가고 있소.”
여조명은 진우청의 말을 자르며 빠르게 답했다. 아마도 그동안 해천 노인과 같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 어, 어떻해?”
조수아가 울상이 되어 나섰다.
“ 어느 쪽이오?”
진우청이 윽박지르듯 물었다.
“ 너무 위험하오.”
“ 대답만 해주시오! 어느 쪽이오?”
여조명은 고개를 돌려 방향을 가리켰다. 여조명의 대답을 듣는 즉시 진우청은 몸을 날렸다.
경설형과 운기목, 조송령 등은 연익추와 그 부하들을 포위하고 유화결과 을지소소만 진우청을 따라 몸을 날렸다.
앞으로 치달려가면서 을지소소는 입술을 모아 백왕과 설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 저쪽 같아요.”
을지소소는 방향을 지시했다.
환한 달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지만 밤이 깊었다. 이런 밤에는 인간의 감각은 극히 제한적인 기능만 발휘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감각을 가진 백왕과 설아, 흑풍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사람들이 해천 노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진우청은 을지소소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저기에요!”
을지소소가 낮게 소리쳤다.
산과 맞닿은 강어귀에서 일단의 인영들이 배를 띄우고 있었다.
“ 망할!”
눈에 보이는 거리이긴 했지만 저곳까지 도달할 때쯤이면 놈들은 강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 나갈 것이다. 그러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만다.
진우청은 손을 등 뒤로 뻗어 용곤을 잡았다.
이제까지 몽둥이로서의 역할 외에 던져서 목표물을 맞추는 비곤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슈아악-
용곤이 호곡성을 터뜨리며 강 가운데 쪽으로 움직이는 배를 향해 날아갔다.
엄청난 속도와 파공음을 울리며 날아오는 용곤을 본 사내들이 포탄의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퍼엉-
폭음과 함께 물기둥이 다섯 장 가까운 높이까지 솟구쳤다. 그 물살에 작은 조각배는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놀라서 사방으로 튀어 올랐던 인영들이 신속히 움직이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조각배에 다시 올라타고 나머지 한 패는 용곤이 날아온 쪽으로 치달려오고 있었다.
진우청은 호곤도 빼들었다.
슈아악-
용곤과 마찬가지로 호곤 역시 무시무시한 소음을 내며 조각배를 향해 날아갔다.
좀 위험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조각배 앞쪽 이물을 겨냥하여 던졌다. 제대로 맞는다면 배 앞쪽은 박살이 나서 더 이상 뜨지 못할 것이다.
놈들도 그걸 예상했는지 그중 한놈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 병신!”
을지소소가 비웃음을 토했다.
거의 폭음에 가까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는 쇠몽둥이를 맨몸으로 막아낼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놈도 쇠몽둥에 실린 힘을 느끼면 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놈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그대로 서서 호곤을 막다가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끈 떨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 옥령인!”
을지소소가 신음처럼 말했다.
그 마물이 아니라면 제 죽을 줄 모르고 저렇게 막무가내로 막아서지 않았을 것이고, 쇠몽둥이 맞은 자리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마물의 방해로 배는 부서지지 않고 강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다른 한 무리의 인영이 이제는 얼굴을 분간할 정도로 빠르게 마주쳐 오고 있었?. 다행히 그들 중에는 옥령인이 없었다.
“ 부탁하오!”
진우청은 그들을 을지소소에게 맡기고 그들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유화결 역시 진우청을 따라 마주쳐 오던 놈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배는 이미 열 장도 넘게 강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안에 해천 노인이 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 배를 세워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너 헤엄칠 줄 알아?”
진우청은 유화결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 망할 자식!”
고함을 지른 진우청은 유화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이게 나고, 이게 너다. 넌 내밑으로 날아와, 알겠지?”
진우청은 양손을 유화결 눈앞으로 펴서 한 손은 아래로, 다른 손은 위로 위치한 채 날아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를 따라 유화결도 땅을 박찼다.
“ 그래, 바로 그거야!”
진우청은 쾌재를 터뜨렸다. 유화결은 자신이 설명한 대로 자신의 신형 아래쪽에서 줄로 묶은 듯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지점까지 왔을 때 두 사람은 강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유화결의 몸이 강물에 반쯤 잠기는 순간 진우청은 유화결의 어깨를 강하게 박차며 재차 도약했다. 이럴 땐 유화결이 옥령인이란게 나았다.
그렇지 않고 물렁탱이 그대로였다면 유화결의 어깨는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을 것이다.
유화결의 차돌 같은 어깨를 박찬 진우청의 신형이 아까보다 더 쾌속하게 조각배를 향해 날아갔다. 조각배 위에 탄 사내들이 분분히 일어서며 도검을 빼들었다.
파파파팍-
배 위로 떨어져 내리며 진우청은 양 발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두 개의 검이 위로 튕겼고, 다른 세 개의 병기 역시 발 끝에 채여 튕겨났다.
풍덩-
검을 놓친 사내 두 명의 혈을 서투른 솜씨나마 제압하여 한꺼번에 강으로 던져 버린 진우청은 갑판을 쳐다보았다.
한 명의 노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진우청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남은 세 명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세 명의 사내도 귀신을 본 듯 진우청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이런 덩치로 그 먼 거리를 날아온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바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동료의 어깨를 차고 날아온 것이지만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허공에 뜬 상태에서 두 발로만 자신들의 공격을 모두 무력화시킨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 배를 저쪽으로 도로 갖다 대면 살려주지.”
진우청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젠 그물에 걸린 짐승을 바라보는 사냥꾼 같은 여유가 생긴 것이다.
사내들은 도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 살기 싫다면 네놈들을 노 대신 사용하지!‘
진우청은 제일 가까이 있는 사내에게 손을 뻗었다. 사내가 강맹하게 도를 쳐올렸다. 그러나 한발 앞서 진우청의 손이 사내의 도신을 두드렸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도가 바닥에 떨어지고 사내의 멱살이 진우청의 손에 잡혔다.
사내의 신형을 한 손에 들어올린 진우청은 사내의 혈을 제압한 채 아까와 똑같이 강 한가운데로 던졌다.
그러면서 갑판을 디딘 발꿈치에 힘을 주었다. 그 힘을 받은 배가 출렁거리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진우청은 다시 한 사내의 어깨를 잡았다.
“ 크윽!”
검을 든 오른쪽 어깨를 잡힌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검을 떨어뜨렸다. 진우청은 나머지 한 명까지 혈을 제압한 후 강 복판으로 던졌다.
혈이 제압당했으니 그대로 수장될 것이다. 잔인한 손속이었지만 놈들이 헤엄쳐 나가면 자신과 사질들이 위험해진다. 멈춰 섰던 배가 반대쪽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강가로 되돌아가며 진우청은 유화결을 찾았다. 유화결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 물렁탱아!”
덜컥 걱정이 된 진우청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배는 강가에 닿았지만 유화결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 이 망할 자식! 정말 헤엄을 못 치는 거야?”
진우청은 노인의 상세를 살피지도 못한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강 복판을 향해 막 헤엄을 치려는 순간 물속에서 머리 하나가 솟아올랐다.
복면을 벗지도 않은 유화결이었다. 그는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뚜벅뚜벅 걸어서 자갈밭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진우청은 어이없는 눈으로 유화결을 쳐다보았다.
옥령인이 되고 나서는 숨도 쉬지 않는 것인지 헤엄을 치지 않고 강바닥을 그냥 걸어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 사숙!”
다른 무리들을 다 해치운 사질들이 달려왔다.
유화결에게서 눈을 돌린 진우청은 얼른 갑판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부축했다. 초췌한 모습의 해천 노인이었고, 온몸에 상처가 심했다.
진우청은 해천 노인의 혈을 다스리고 금창약을 깊은 상처에만 우선 발랐다. 그때까지도 해천 노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 어서 빠져나가야 해요!”
을지소소가 주변을 살피며 재촉했다.
고개를 끄덕인 진우청은 주변을 둘러보며 용곤과 호곤을 찾았다. 용곤은 흙탕물이 뿌옇게 인 곳에 꽂혀 있었고 호곤은 옥령인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호곤과 용곤을 챙긴 진우청은 죽은 옥령인을 강 한가운데로 떠내려 보낸 후 해천 노인을 등에 업고 경공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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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 회원님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건강하십시요

싸,
항상 감사
드리면서오늘도 
,독. 하고 있읍니다
감사ㅎ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하구 갑니다!
갈수록 흥미진진 하군요??
ㄳㄳ
즐독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