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군악대 총감독을 지낸 요시프 이바노비치(Ivanovici, Josif ).
Waves of the Danube(다뉴브강의 잔물결) 또는 도나우강의 잔물결 (Donauwellen Walzer)이라는 곡이다.
군악대를 위한 곡으로 1880년에 작곡했으며 피아노독주용·합창용 등으로도 편곡돼 있다.
이바노비치의 이름을 이 한 곡으로 음악사에 남게 한 A단조의 곡은
도입부(알레그로 모데라토)와 4곡의 작은 왈츠로 이루어졌으며,
이 선율은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미국에서는 《애니버서리 송 Anniversary Song》이라고 편곡돼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윤심덕을 사랑한 김우진이 가사를 붙이고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로 소개됐다.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윤심덕 - 사(死)의 찬미
앨범 - 유성기로 듣던 여명의 한국 가곡사
본래 '사의 찬미'는 '다뉴브강의 잔물결' 이라는 왈츠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루마니아는 동유럽 지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다뉴브강 하류에 위치한 지역이다. 곡창지대인만큼 주변국들의 침탈이 잦아 수많은 농민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점철된..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뉴브 강의 잔물결은 역시나 동유럽 특유의 애수와 슬픔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렇지만 단순히 애수와 슬픔만 묻어나는 것은 아니고 활발하기도 하고 세련된 멜로디도 적지 않다. 게다가 군악대 지휘자 출신이 만들어서 그런지 꽤나 씩씩하고 절도가 있어 '사의 찬미'의 절망으로 일관된 분위기와는 굉장히 구별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의 찬미'는 다뉴브강의 잔물결 가운데 극히 일부분 특히 슬프고 애수어린 분위기로 가득찬 부분만 떼어서 윤심덕이 직접 쓴 허무에 쩔어버린 가사로 장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가사가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절망적이다. 이런 절망과 허무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경험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아마 이러한 가사가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히 윤심덕 자신의 생각과 체험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는 이 정도로 이미 좌절과 절망에 신음하고 환락과 퇴폐로 물들어 결국은 허무와 죽음만이 마지막 도피처로 기능하는 그런 참혹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윤심덕의 예술가적 무의식에 깊이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게 한다.
192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거의 모든 싹이 돋아난 시기였다. 이상이나 김유정 이효석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문단에 등장했으며, 나운규의 아리랑을 비롯한 적지 않은 영화들이 제작되고 상영되던 시기였다. 대중음악 가수가 등장했고, 연극공연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윤심덕은 언제나 단연 주연급이었다. 도쿄음악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여성 국비 유학생, 최초의 여류 성악가, 최초의 대중가수, 당대 최다 레코드 판매량 보유 가수, 방송국 사회자, 최신 패션모델... 이 정도 수식어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정도다..게다가 틈틈이 연극배우도 했고, 스캔들도 곧잘 터뜨려 부잣집 첩실로 들어갔다느니 하는 소문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는 것은 그냥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1920년대 조선 최고의 스타였던 것이다. 유명작곡가 홍난파와 염문을 뿌리고 작곡가 채동선의 사랑 고백을 물리쳐 울게 만들고, 작가 박정식을 상사병에 걸려 죽게 만든(강준만의 한국근대사산책 참조.. 믿을 수 없음..-_-;;) 희대의 팜므파탈 윤심덕은 그러나 연극단체 토월회의 멤버였던 극작가 김우진과 연애를 시작했다. 김우진은 당대 굉장한 부잣집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달리 장손으로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그야말로 좌절과 방황의 청춘을 보내고 있던 시절에 윤심덕을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윤심덕은 그래 봤자 천한 딴따라에 불과했고, 김우진은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그 죽음이 매우 드라마틱하다.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도중 관부 연락선 선상에서 현해탄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아마 둘이 꼬옥 껴안고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녀의 죽음과 그에 대한 대대적인 보도 이후 발매된 '사(死)의 찬미' 음반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치인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죽음 마케팅 또는 자살 마케팅이 되어버린 셈인데, 그 둘이 얼마나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에 대하여 반감과 울분, 허무와 좌절을 느끼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실감이 온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면 차라리 그렇게 죽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근대 신여성의 원조라고 불리는,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나혜석은 시대에 대항하여 자신과 스캔들을 냈던 지식인들을 고소하고, 남편과 세상을 향한 <이혼고백서>를 언론에 발표하는 등, 전근대 가부장적 사회현실에 극렬하게 투쟁하였지만, 결국은 친정집과 남편, 심지어 자식들에게까지 버림받는 모진 고난 속에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