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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다
1980년 5월 10일, 티토 주석의 장례식에는 (한국 등 극소수를 제외한)전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대표단, 최소한 단체 명의의 대표를 보냈습니다. 베오그라드의 호텔들은 외국 대표들의 수요로 바글바글합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래 만성적인 저성장과 고실업, 높은 인플레, 2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에 시달리는 유고슬라비아에게는 상황을 타개할 좋은 기회로도 여겨졌죠. 프라뇨 라디치, 스보보다 예디나, 율리야나 크네제비치, 다보르 야르니 등 4명의 젊은 당원들은 티토의 마지막 행정명령에 따라 별다른 직함 없이 장례위원회에 포함되었습니다. 배후에 질라스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베오그라드의 중앙당원들은 다들 평소 젊은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를 즐겼던 티토가 이번에도 어디에서 사람을 뽑아다 꽂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어차피 낙하산 인사가 오래 버틸 리 만무했으니까요.
티토의 장례식에는 제3세계의 지도자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게도 엄청난 수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월터 먼데일 부통령이,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 총리 본인과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서독에서는 헬무트 슈미트 연방총리가 직접 참석했습니다. 공산권에서도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그로미코 외무장관이 직접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는 등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죠. 제3세계의 경우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를 필두로 대부분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을 참석시켰는데, 중국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인 화궈펑이 참석해 유고와의 인연을 이어나가고자 했습니다. 칠레, 이스라엘, 남아공, 한국(남한) 등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국가 차원에서, 또는 단체 차원에서 대표단을 보냈죠.
일행에게 주어진 목표는 서방진영의 대표격으로 참석한 대처 총리에게 구제금융 및 채무유예에 관한 조건을 알아내는 일, 그리고 비상수단으로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에게도 비슷한 조건을 이끌어내는 일이었습니다. IMF를 필두로 한 채권단은 유고슬라비아에 고강도 긴축과 '충격요법'을 통한 시장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국가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 나은 조건을 찾아내야 했죠. 다만 크네제비치는 제3세력인 중국을 끌어들인다면 어느 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정보부(모사드)에서 크로아티아에 모종의 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국가안전부(UDBA) 팀장 직함의 예디나가 쿠르트 발트하임 UN사무총장을 접견해보기로 했죠.
먼저, 라디치는 대처 총리와 먼데일 부통령 등으로부터 "비동맹회의 차원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규탄하고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할 것"을 조건으로 총 45억 달러 규모의 긴급구제금융과 채무 만기연장을 받는 협상안을 이끌어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과 협상한 야르니는 코메콘에 가입해 자국과 동구권의 비호를 받는다는 해결책을 제시했죠. 당연히 두 제안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덩샤오핑의 심복이자 중국 대표단의 실권자 자오쯔양에게 "소련과 관계개선을 주선해준다면 서구권이든 동구권이든 유고슬라비아에서 필요로 하는 외교적 조력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들은 크네제비치는 나머지 일행들에게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서구권과 동구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에 놓인 베오그라드의 지도부는 고심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그 때, UDBA의 예디나가 놀라운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수상하게도 이스라엘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반응을 보이던 발트하임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이 유고에서 나치 전범들을 사냥한다"는 역정보에 넘어가 각국 정보부에 심층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아르헨티나와 남아공 정부에서 모사드의 지원을 받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아이티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는 당 중앙이 친소련 입장으로 급하게 선회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친서방 입장의 라디치가 중과부적으로 몰려 결국 대세가 결판나게 되었습니다.
베오그라드는 서구발 채무의 무기한 지불중단(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티토의 장례식장은 중소 관계개선의 장으로 활용되었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미국과 영국 대표단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보다 강경한 노선’을 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비동맹진영의 국가들은 일제히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 조건부 침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재빨리 출구전략을 취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입장도 애매해질 것이었죠. 아무튼 비동맹회의는 소련 대신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는 두 국가(이스라엘, 레바논), 그리고 한국을 규탄하기로 의결했습니다.
또한 티토 사후의 노선은 전체적으로 세르비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경제체제에서의 국가 역할 강화, 친소련 외교, 사회주의의 주도 이데올로기로서 위치 공고화… 그나마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달래주는 것은 자치권 문제에서 당장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많이 등장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이른바 '파시스트 국가'들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이용하려 했다는 결정적인 정보가 입수되어 크로아티아 내 분권주의자들이 제대로 의견을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슬로베니아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연방은 빠르게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야 했습니다.
02. 산악 부족의 반란
유고슬라비아의 전격 코메콘 가입선언 이후 몇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기존의 용미-반소 전략을 미소 등거리외교로 수정한 중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이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이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아프간 인민해방기구(ALO) 등 마오주의 게릴라 단체들이 정부측에 가담하면서 카르말 대통령의 파르참파가 강경 할크파에 함께 대항할 동지를 찾았다는 점이 고무적이었죠. 중국이 반소 입장을 철회한 나비효과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캄보디아에 괴뢰정부(캄푸치아 인민공화국)를 세운 베트남은 중월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고, 모든 가용전력을 캄보디아에 쏟아 노로돔 시아누크의 반군과 신사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혁명 후 혼란기를 겪고 있는 이란을 침공하며 발생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군이 이라크군을오히려 압도하면서, 분쟁의 불씨는 중동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소련에서 아프간 개입을 반대했던 코시긴과 그로미코, 개입을 찬성했던 안드로포프와 우스티노프는 적어도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된 레이건이 취임도 하기 전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비난하고 대대적인 공세전략을 예고한 탓에, 모스크바에서도 하루빨리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중-소 회담이 아프가니스탄 회담이 되고 제3세계 대표이자 중재측으로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이 끼게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했습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파키스탄을 통한 미국의 공세적 봉쇄전략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협력해 파키스탄에 지하드 전사들을 공급하는 일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동해 접경지대인 중앙아시아에 직접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고 실무진으로 파견된 예디나는 이 점을 읽어내고 소련이 가질 수 있는 완충지대의 조건을 찾아나서기 시작했죠. 그리고 완충지대 수립을 가능케 할 열쇠는 바로 이라크를 두들겨패고 있는 이란이었습니다. 무자헤딘 연합 내에서 소수파로 한 축을 담당하던 시아파 하자르족 민병대가 정부를 편들게 할 수 있다면, 소련에서는 아프간 문제를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란 측은 협조의 대가로 "소련과 아프간 사회주의 세력의 완전한 철수"를 제시했지만, 유고 대표단과 우스티노프 소련 국방장관은 베트남의 미국제 무기를 이란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아프간 인민민주당(PDPA)을 존속시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고심하던 이란은 소련의 손을 잡아보기로 결정했죠. 베트남이 F-5E 전투기를 포함한 미국산 무기들을 짭짤한 가격에 이란으로 팔아넘기는 동안 소련 역시 최신형 무기들을 베트남에 지원했고, 베트남은 동부 인도차이나의 패권을 장악한 채 태국을 전방위로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북부에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남부 파슈툰족 영역에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이 각각 선포되며 소련이 바라던 완충지대가 설립되었죠. 물론 할크파를 숙청한 인민민주당은 조국당(와탄)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연방주의와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이 되었지만, 아무튼 레이건의 끈질긴 공세를 버텨내야 할 소련에게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03. 대타협(Ausgleich)
동구권 복귀전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그럴듯하게 해결하고 돌아온 예디나와 야르니는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심각한 표정의 이반 스탐볼리치 세르비아 총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1981년 3월 중순 학생들의 작은 시위로 시작했던 코소보에서의 정치불안이 무려 수천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동으로 번졌다는 것입니다. 코소보 자치주(SAP 코소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연방의 지방분권 시스템에서도, 최근 입안된 지역균형 발전안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그 결과 코소보는 연방에서 가장 실업률이 높고 소득이 낮은 지역이 되어버렸죠. 특히 알바니아계는 티토 시절부터 알바니아 호자 정권의 배후조종을 받아 연방을 전복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하에 주요 직위에서 철저히 배제된 바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프리스티나 대학 등을 졸업한 고학력 무직자들이 다수 생겨나 오늘의 소동에 이르게 된 것이었죠.
시위대의 요구는 다양했습니다. 처음 시위를 주도했던 대학생들은 코소보의 정식 공화국 승격을 주로 주장했지만, 대중 항쟁으로 퍼져나간 4월 1일 시점에서는 시위대가 알바니아 깃발을 들고 나오는 등 민감한 상황들이 더욱 자주 일어났습니다. 물론 본질은 경제적 불평등이지만, 연방 각료들, 세르비아 및 마케도니아 당중앙을 중심으로 알바니아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대처를 요구했죠. 심지어 크로아티아 고위당원들마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강경론이 더더욱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공화국, 슬로베니아의 공산당만은 유일하게 코소보 인민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코소보-메토히야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식 수립을 연방에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슬로베니아 공산당 간부 밀란 쿠찬(Milan Kučan)을 중심으로 모금활동이 이루어져 코소보 시위대를 지원하는 상황입니다. 물론 세르비아의 스탐볼리치 총리는 “대알바니아주의 책동을 조력하는 슬로베니아 공산당의 무책임한 이기주의”라며 맹비난을 펼쳤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예디나와 야르니는 미리 프리스티나 당 건물에 도착해있던 라디치와 크네제비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코소보 공산당 서기 마흐무트 바칼리(Mahmut Bakalli)는 어리둥절해하는 일행들에게 코소보 알바니아인 주민들의 고충을 낱낱이 알려주었습니다. 1960년대 란코비치(Aleksandar Rancovic)의 코소보 탄압, 경제적 소외, 내부불만을 이용한 알바니아 정보부(시구리미)의 공작 가능성까지... 게다가 슬로베니아에서 대놓고 세르비아 측에 반기를 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답도 없는 이 사태를 두고 모두가 고민하고 있을 때, 베오방카(베오그라드 은행) 은행장이자 세르비아 공산당 간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ć), 그리고 크로아티아 공산당 문화위원회 부의장 이비차 라찬(Ivica Račan)이 나타났습니다. 전자는 연방 내 단일연방주의자(중앙집권론자)의 대리인, 후자는 국가연합주의자(분권론자)의 대리인이었죠.
연방의 분열 그 자체를 막는 것이 목적이던 일행들은 코소보 사태를 연방체제를 향한 경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UDBA를 동원해 알바니아의 개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에게 몇 가지 혜택(알바니아어의 이중공용어 인정, 알바니아계의 등용비율 상향 등)을 주어 당장의 소요를 진정시키고, 공산주의자동맹(SKJ) 당대회를 조금 앞당겨 연방의 앞날을 결정지을 '담판'을 짓자는 제안이었죠. 밀로셰비치와 라찬이 모두 이 제안에 동의하면서 우선 코소보 문제는 1차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크네제비치의 알바니아계 마피아 인맥, 야르니의 행정적 지원, UDBA 작전책임자 예디나의 총괄, 그리고 라디치의 언론을 이용한 선전이 이어지면서 코소보 내 시구리미 작전인력은 모두 와해되었습니다.
여기서 발생한 놀라운 일은, 알바니아의 2인자이던 메흐메트 셰후가 노동당의 굳건한 집권을 수호하기 위해 '대중에 휘둘리는' 라미즈 알리야를 숙청하고 1인자 엔베르 호자 주석마저 축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셰후는 무분별한 민족주의와 대중주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호자를 치워버리고 유고 연방과 손을 잡아 어떻게든 정국 안정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알바니아계 마피아의 구 일원이던 크네제비치와 접촉했습니다. 몇 번의 협상 끝에 알바니아에서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주는 대신 알바니아의 독립적 지위와 코소보 분할안을 유지하는 합의안이 도출되었고, 이는 대타협의 근간으로 작용했습니다.
본래 단일연방주의자들과 국가연합주의자들 간의 타협안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세르비아 중심의 국가연합"이었으나, 이는 슬로베니아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물론 세르비아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인민군(JNA)이 슬로베니아의 저항을 당장 억누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런 방식은 NATO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을뿐더러 장기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체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크로아티아 내 단일연방주의자들의 수장인 밀카 플라닌츠와 세르비아 단일연방주의자들의 대표인 이반 스탐볼리치는 세르보크로아트어권의 단일국가(unitary state) 형성이라는 제2안을 꺼내들었습니다. 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중앙집권주의자들, 군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제안이었죠. 슬로베니아가 아예 국가연합에서도 탈퇴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한 그들의 주장 역시 어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스탐볼리치-플라닌츠 각서에 따라, '사바-드리나 사회주의 공화국(Socijalistička Republika Savsko-Drinska)'이라는 세르보크로아트권 거대국가가 등장했습니다. 알바니아는 서부 마케도니아를 얻지는 못했지만 코소보 땅의 상당수를 할양받을 수 있었고, 슬로베니아는 (물론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와 함께) 독자적 육군 군사력을 허락받아 명목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렸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4개국 간 국가연합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합'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문제는 이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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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아니 온건해진 중국 ㄷㄷ
4) 유럽연합
유럽은 겉으로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옛 강대국들은 만성적인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 그 반대급부로 성장한 대중영합주의와 정치극단주의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면, 다음 세기에서 이들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서유럽이 작살났군요...저런.....
@렌지파일 지금 영국 꼬라지가 서유럽의 평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E.샤츠슈나이더 아.........
@E.E.샤츠슈나이더 벨 에포크의 영광은 어디로 갔는가...
@E.E.샤츠슈나이더 아앗... 아니 대체 무슨 실수를 한건지... 아니 것보다 연합 못한게 이렇게 심각해질수도 있군요(...)
+ 아. 근데 설마 동구권이 붕괴가 안되었으니, 통일도 못한건가요...?
@dear0904 동서독 통일도 없고, 유럽연합도 못 만들고, 탈냉전 꿀도 못 빨고… 남은 건 오직 냉혹한 적자생존주의 뿐…
@E.E.샤츠슈나이더 이건 내가 바라는 유럽의 모습이 아니야!!!
@E.E.샤츠슈나이더 아앗... 하긴 실패의 댓가는 큰 법이죠. 좋은 이벤트 하나도 못 뽑았으면 각오 해야지(...)
+ ... 이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지는것 하나. 만일 처음 이벤트에서 미국쪽을 골랐다면(...)
@dear0904 단일통화 만든걸 보니 상호 독립국 인정같은 최악의 루트로 갔을수도 있죠 ㅋㅋ..
@렌지파일 ㅋㅋ... 그래도 현실 남북한 관계보단 낫지 않을까요(...)
@dear0904 남북한은 상호 독립국 인정도 해피엔딩이죠(.........)
@렌지파일 하긴... 그게 안되니 지금 이 **을 하고 있는거라(...) 으음... 원 역사랑 비교하면 참 차이가 많을것 같네요 ㅋㅋ... 이 세계 독일의 운명과 한국의 운명이 맞 바뀐건지...?
@dear0904 독일과 한국의 운명이 맞바뀌... 총장미?
@돈이 곧 진리 그 연대기가 제일 악몽같군요. 하긴 완결 못 본 연대기중 악몽 아닌게 없다만은 그게 제일 최악이었던거로(...)
+ 아. 프랑스는 제외합니다. 그건...
@dear0904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총장미가 제일 최악?
@돈이 곧 진리 완결 못 본 연대기. 라고 한정 했습니다. 완결 본거로 치면 가리기 어렵죠...
@dear0904 BNW도 완결을 가장한 연중 아닌가요?
@돈이 곧 진리 맞긴 합니다만, 그건 수습이라도 쳤고... 총 장미는 연쇄 탈주가 줄 이은 끝에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막을 내렸다. 라는 차이죠. 그니까... 전자는 소드마스터 야마토라도 했다 치자면, 후자는 그것도 못 한거니...
+ 그만큼 완결의 강점이 큽니다. 완결을 가장한 연중... 이라기보다, 연중 할 수밖에 없어서 완결 할 방법을 찾은거죠.
@E.E.샤츠슈나이더 번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6/5 = 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은 1984년 이래 정치적으로 많은 격변을 겪었습니다. 본래 특유의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체제유지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할 평양 엘리트들은 대거 중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막 첫 결실을 맺을 즈음, 덩샤오핑 정권을 끝장낸 천안문 투쟁이 시작되었죠.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이 엘리트들은 시위대의 대중주의,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되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을 본 뒤 그들의 ’신념‘은 더욱 강렬해졌죠. 하나둘씩 조국에 복귀한 이들은 외무성, 국가보위성 등 정부조직과 당조직, 총정치국을 포함한 군조직의 핵심인재로 스며들었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평양 당 중앙은 치열한 권력 암투에 돌입했습니다. 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인민무력부장 최광, 총참모부 보위국장 원응희 등 ‘실로비키’들이 빈자리를 빠르게 메꾸었습니다. 김일성의 세 가지 직책 중 조선로동당 총비서직은 조명록에게, 국가주석직은 최광에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직은 원응희에게 돌아갔죠.
@E.E.샤츠슈나이더 이 새로운 ‘삼두정‘은 개혁개방과 데탕트의 시대에 어떻게든 구체제를 수호해내고자 했습니다. 차우셰스쿠가 비참하게 몰락하고 헝가리에서 너지 임레가 복권되며 동서독이 상호 인정을 토대로 국가연합을 형성하는 동안 오로지 북한의 지도부만은 극단적 방법을 쓰면서까지 구시대의 전통을 지키고자 암약했죠.
그러나 이 시도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중국 유학파 반체제 카르텔은 1995년 그 유명한 ’6군단 사건‘을 일으켰고, 프룬제 반란을 철저히 진압했던 원응희를 사살하는 등 일사천리로 국토 전역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진압하려 했던 중국 역시 ’삼두정’이 핵개발 프로젝트를 되살리려 했던 정황을 파악하고는 등을 돌렸죠. 결국 ‘조선인민해방과도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물론 대다수 한국 국민들의 염원대로 이들이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불과 39세의 나이에 북한의 국무위원장으로 등극한 반체제 카르텔의 수장 조용원은 박봉주 등 경제관료들을 포괄하는 정부를 구성, 독일 모델을 기초로 한반도 국가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격한 찬반논란이 일었으나, 신정부가 빠르게 국내의 혼란을 정리해나가자 ‘1국가 1정부 하의 통일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는 조건 하에 조용원의 ’2국가 2정부 국가연합‘안을 수용했습니다.
2001년 현재, 남북한은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좁히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언제 완전한 재통일이 이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이들이 민족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렌지파일 그러고보니 혹시 차기작 소재는 정하셨나요 ㅋㅌ
@E.E.샤츠슈나이더 소확행이나 쓰면서 땡땡이친다 가 차기작 소재 후보 중에 하나로 올라간 상태입니다(아무말)
@렌지파일 근데 소확행이 너무 재밌어서 그 의견 찬성입니다(?)
@렌지파일 오… 마침 제 차기작 후보 중 하나도 “참가자나 하면서 땡땡이친다”였는데… (?)
@dear0904 참고로 만약 근시일내에 차기작을 하게 된다면 “엘바부터 시작하는 꼬마 부사관의 유쾌한 반란“을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두고 있습니다.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엌ㅋㅋㅋ... 힙스터픽이 차기작 유력후보인 세계관... 좋네요(?)
@E.E.샤츠슈나이더 아님 짧고 강렬한 막장을 위해 매국노 RP 어떤가요?
@돈이 곧 진리 을사조약 체결 페이즈(...) 같은거요?
@dear0904 뭐 그것도 있고. 아님 다른 세계관의 최신우 같은(독립협회 해산 사주, 박제순을 겁박해 을사조약 체결, 국채보상운동 흐지부지, 남한 대토벌 작전 입안, 이승만-박용만 이간질, 김구 암살미수, 연통제 발각, 임시정부 내부 좌우익 이간질 등등등) 매국플도 있을거고요.
@E.E.샤츠슈나이더 오... 분명 한참 이전에 '어떤 체제든 상관없이 공화국을 지지하는' 캐릭터 컨셉을 만들었던 기억이..
@렌지파일 으으으으음... 누구요? 야디엘?
@dear0904 러시아 원정부터 시작하는 대체역사소설은 찾았는데 엘바부터 시작하는 건 아직 못 보긴 했네요 ㅋㅋ
적당히 하드코어하면서도 군인, 정치인, 외교관, 행정가 플레이 모두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소재같아서..
@렌지파일 프랑스 왕국 가안때의 일이군요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아 ㅋㅋㅋ 하긴 러시아 원정부터면 변곡이 많고, 원코는 더 있을건데, 엘바는 ㅋㅋㅋ 코인 자체가 없죠 ㅋㅋ 실패하면 끝! 이 무슨 신서유기...?
@E.E.샤츠슈나이더 그럼 라디치보다 더한 인체실험하는 막장 의사플 ㄱㄴ?
@dear0904 1) 벨기에 전역(영국+프로이센)과 알자스 전역(오스트리아+러시아), 이탈리아 전역, 스페인 전역에서 모두 군사적 승리를 거둬야 하고
2) 배신 전문가 푸셰와 협력(…)을 통해 국내 반대세력을 통제해야 하며
3) 외교 GOAT 메테르니히와의 외교력 배틀에서 승리해 대불동맹을 어떻게든 쪼개놔야 하고
4) 거의 30년에 달하는 혼란기로 극히 피폐해진 내정을 복구해야 하는 난이도!
@돈이 곧 진리 자중하시죠(…)
@E.E.샤츠슈나이더 그리고 그 모든게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미친 난이도 ㄷㄷㄷ...
+ 제일 문제가 ㅋㅋㅋ... 4개 다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네요(...) 영란은행처럼 불서은행 창립이라도 해야?
@dear0904 돈은 패전국을 착취해 가져오면 됩니다.(나치식 사고)
가능하면 오늘 내로 2화 겸 에필로그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