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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1
창세기 33:1-20
야곱과 에서의 만남
하나님의 언약이란 야곱처럼 악착같이 자기의 복을 챙기는 그런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나타내셨다. 즉 언약의 이름을 주심으로 언약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라는 뜻에서 주신 이름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에 근거한 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얍복강의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이고 그것을 에서에게 나타내심으로 야곱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1-3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라는 표현은 얍복강 이후 야곱이 보는 것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흔히들 여기서도 야곱이 여종의 자식들을 앞세우고 레아와 라헬의 자식들을 그다음에 세웠다는 것으로 아직도 야곱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라는 말씀이다.
이제 보는 것이 달라졌기에 형 에서를 두려운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되었다(10절). 죽었다가 살아난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으로 야곱은 맨 앞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에서는 야곱을 헤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에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바뀐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과 야곱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실 자는 야곱이기 때문이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라고 한 말씀은 언약의 아들 야곱이 땅적 존재 에서와 동일시 되었는데 그것은 곧 죽음을 상징한다. “일곱”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진짜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찾아와 죄인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되는 언약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4절). “안고”의 ‘하바크’는 ‘끌어안다, 포옹하다, 쥐다, 거두다’라는 뜻이고, “목”의 ‘차우와르’는 ‘장식을 걸거나 힘든 일을 건다는 뜻의 목’이다. “어긋맞추어”의 ‘나팔’은 ‘떨어지다, 받아들여지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생명을 걸고 있는 야곱의 목이 생존을 위해 율법의 무거운 짐을 걸고 있는 에서의 목을 거두어 받아들여 하나가 되니 “입맞추고”, 즉 같은 진리의 말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니라”라는 말의 ‘바카’는 ‘애도, 불평, 후회나 회개’를 포함한 울음이다.
결국 이 말씀은 단순히 형제간의 화목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쌍둥이였지만 두 진영으로 따로 있던 자들이었다. 즉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달리 존재하였으나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 됨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야곱이 두 진영으로 있던 상태에서 하나 됨, 곧 하나님께서 야곱의 진영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언약을 이루고자 한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고 그런 존재를 하나님의 군대가 점령하여 이스라엘로 만들어 화목을 이루신 분은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선언한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우리에게 직무를 주신 것은 사람들을 전도하여 화목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진리를 넘겨주는 일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확인하라는 차원이다. 야곱이 에서와의 화목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확인하듯이 말이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5-7절). “여인들과 자식들”은 언약의 열매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이끌고 오신 것에 대한 은혜의 증거라는 뜻이다. “나아와 절하고”라는 표현의 ‘샤하’는 ‘몸을 구부리다, 경배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인데 언약의 아들 야곱과 하나 된 자는 율법의 짐을 지고 있는 자를 같이 섬긴다는 의미이다. “요셉”도 절하였다고 하였는데 요셉이 율법의 짐을 진 자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는 39장 이하에서 드러날 것이다.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8-9절). “모든 떼”는 ‘마하네’로 ‘야영지, 진영, 군대’이다. 즉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을 점령한 것처럼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의 열매로서의 군대가 에서를 점령해야 한다. 그래서 에서가 진리를 말하게 된다면 그것이 에서가 야곱에게 베푸는 은혜가 된다. 그래서 야곱이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는 은혜를 거부함으로 진리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율법에 매인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10-11절). 10절에서 “예물”이라는 ‘민하’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헌물, 조공, 희생제물, 선물, 소제’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성경은 11절에서 “예물”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로 ‘베라카’는 ‘바라크’(무릎꿇다, 송축하다, 복을 주다, 저주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축복, 복을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희생제물이 에서에게 선물로 주어졌는데 에서는 거부한다. 하나님의 희생제물을 받아들이게 되면 복이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은 저주가 된다.
야곱이 물리적으로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으나 그 장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 언약 안에서의 장자의 의미는 단순한 혈통 관계의 차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에 있다. 복의 근원이란 단순히 자신이 얻은 많은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데 있음은 야곱이 복의 사람이 되고 난 뒤에 깨닫게 된 놀라운 은혜였다. 야곱은 자기 욕심대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이제까지 이끌고 오셨다.
그래서 “강권하매 받으니라”라고 말씀한다. 인간은 언약의 복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다. 율법의 행위로 자기 의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강권하여 은혜로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 십자가 은혜는 내가 원하지 않은 은혜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율법적 행위의 자기 의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베풀어지면 날마다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고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하늘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12-14절).
야곱은 세일로 가자는 에서의 제의를 거부한다. 에서가 종들을 야곱의 진에 두겠다는 것도 거절하였다. 에서와 함께 가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벧엘로 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일”은 지리적으로 언약의 땅 건너편에 동쪽에 있다. 그러기에 야곱은 에서의 인도함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야곱이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에서가 있는 곳으로 추후에 가겠다고 한 것이라기보다 자신도 동쪽의 땅 세일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에서에게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지만 에서가 야곱을 인도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여전히 율법적 행위를 가지고 복음을 아는 자들을 인도하겠다고 나선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언약으로 이끌어 오셨던 것처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끄신다(참고 요 15:1-5, 고전 3:6-7).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15-17절). 야곱은 “숙곳”이란 곳에 머무르는데 ‘피난 장소, 오두막’이라는 뜻이다. 숙곳은 야곱이 아직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강 건너편에 임시로 거주한다. 그 이유는 야곱이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13절) 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난다. 즉 자식들은 아직 연약한 상태여서 언약의 땅을 좀더 분명하게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숙곳은 하나님의 이끄심의 노정에 있다는 의미의 지명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은 분명하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출 12:37)라고 하여 애굽을 벗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약속의 땅을 가는 삼일 길의 노정에 있음을 다른 장소이지만 숙곳이라는 것으로 보여주셨다.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18-20절). “세겜” 역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이끌려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12:6). 그래서 “평안히”(히, ‘샬렘’)라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이제 야곱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삭의 경외하는 이”(31:42, 53, 32:9)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언약으로 이끌어 왔던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야곱이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야곱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인도하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비록 세겜이 가나안 땅이긴 하나 야곱이 여행을 중단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 개로 토지를 매입하였다. 야곱은 여기에 임시로 머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정착 생활을 시작한다. 야곱이 정착하고자 하나 하나님은 사건을 일으켜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이다(202410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