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탐구_나를 매료한 □□ | 안성훈
아이들이란 바로 이런 것!
『김 배불뚝이의 모험』
(송언, 웅진주니어, 2012)
매일 변신하는 아이
세상에 이런 아이가 또 있을까? 『김 배불뚝이의 모험』을 읽다 보면 절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국가 대표 장난꾸러기 김 배불뚝이는 담임 선생님의 음료수를 천연덕스럽게 뺏어 마시고, 툭 하면 배 아프다고 보건실 가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며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생님을 휠체어에 태워 팔아 버리려고 하는 이 황당한 아이가 마냥 밉상인 건 아니다. 한 권 한 권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김 배불뚝이가 어린 시절 우리 모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김세찬이 본명이지만 아기 돼지처럼 통통한 몸매 때문에 배불뚝이라 불리는 이 친구는 매일매일 변신한다. 하루는 『심청전』에 나오는 심 봉사가 되어 눈을 감고 더듬거리다가 또 어떤 날에는 물개가 되어 바닥을 쓸고 다닌다. 미술 시간에는 화가 난 수탉이 되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도깨비가 되기도 한다.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강아지도 되고 오뚝이도 되며 장난을 치려고 고장 난 물건이 되었다가 느닷없이 신종 플루로 변신한다.
전우치나 홍길동 같은 전래동화 속 주인공들은 도술을 부리지만 김 배불뚝이에게는 도술이 필요 없다. 목청껏 “나는 이제 물개다!” 하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배불뚝이의 외침에 교실은 순식간에 수많은 아기 물개가 뛰노는 바닷가로 변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을 방해하는 탓에 배불뚝이를 싫어하는 친구들도 배불뚝이를 보고 까르르 웃고 따라 하며 즐긴다. 배불뚝이는 말 한마디로 친구들 머릿속 풍경을, 반 분위기를 휙휙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마법을 가진 아이이다.
배불뚝이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면 그 어떤 사람의 말보다 자기 자신의 선언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어쩐지 배불뚝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OO이다!”라고 외치며 수백 수천 번 변신할 것 같다. 그러면서 점점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생님을 말을 죽도록 안 듣는 사고뭉치 김 배불뚝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다.
놀이를 만드는 아이
배불뚝이에게 학교는 답답하고 지루하고 숨 막히는 곳이다. 그래서 툭하면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런데 배불뚝이는 공부가 싫은 게 아니라 지루한 게 싫다. 노는 것도 늘 하던 대로 놀면 지루해서 못 견디는 아이가 바로 배불뚝이다. 고스톱 규칙 한두 가지만 바뀌어도 성질부리는 어른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단지 배불뚝이는 재미를 느끼는 지점이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다를 뿐이다.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아이들 얼굴을 관찰한다든지, 수업 시간에 새끼 선생님이 되어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보조한다든지, 배불뚝이가 재밌어 하는 일은 뭔가 유별나다. 배불뚝이의 놀이는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놀이라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결국 모두가 함께하는 놀이로 발전한다. ‘선생님 팔기 대작전’은 배불뚝이가 만든 놀이 중에 가장 기발하고 흥미진진하다.
배불뚝이는 빗자루 선생님이 홧김에 내뱉은 말을 놓치지 않고 선생님을 휠체어에 태워 학교 밖으로 나간다. 선생님을 팔아 맛있는 간식을 사 먹으려고 시장을 종횡무진 하는 배불뚝이와 친구들. 이 부분에서 가장 멋진 캐릭터는 다름 아닌 담임 빗자루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화를 내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황당한 장난에 말없이 따라 주면서 아이들 몸속 에너지를 모두 뿜게 해 준다. 선생님과 배불뚝이가 환상의 콤비를 이뤄 친구들과 함께 한바탕 재밌는 모험을 즐기는 이 장면에서 빗자루 선생님의 애정이 담뿍 느껴진다.
선생님 팔기 대작전처럼 흥미진진한 모험은 아니지만 배불뚝이의 놀이 마법이 빛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배불뚝이가 싸움 짱 동주와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장면이다. 배불뚝이는 동주에게 운동장에서 주은 돌을 그냥 가지고 노는 것보다 공룡이 살았던 시대의 화석이라 생각하면서 노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해 준다. 자신에게 이름 붙이기를 넘어 사물들에게도 새로운 이름과 뜻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집에서는 무서운 아빠 때문에 떨고 학교에서는 못된 아이로 찍혀 외로운 동주에게 시간 여행을 선물할 수 있는 아이는 배불뚝이밖에 없을 듯하다.
어른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만의 특권이 상상력이라면, 배불뚝이는 특권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아이이다. 아니, 그 특권이 무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배불뚝이의 상상력은 우주까지 닿아 있다. 개미와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신호등 안에 사람이 들어 있으니 생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운동장에 금을 긋는 것만으로 지루한 세계와 즐거운 세계를 나눌 수 있는 힘을 동심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요즘 우리 아이들
김 배불뚝이와 친구들, 그리고 빗자루 선생님은 시대를 초월한 동심의 세계를 아주 잘 보여 준다. 떠들고 장난치고 싸우고 그러다가 혼나고, 벌 받고…… 또다시 웃고 떠들고. 아이들 노는 모습이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배불뚝이의 모험』은 주인공들이 뛰어다니고 키득거리는 사이사이에 요즘 아이들이 직면한 문제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천하의 장난꾸러기 김 배불뚝이도 어찌하지 못하는 싸움 짱 이동주가 바로 요즘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캐릭터이다. 동화에 가정환경 때문에 말썽쟁이가 된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게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이 작품 속 동주는 다르다. 동주에게는 선생님과 친구들, 그 누구의 동정도 필요하지 않다. 동주는 자기 입으로 자기가 가진 슬픔을 모두 털어 버린다.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인 다른 사람의 위로와 보살핌으로 극복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폭발시키는 것이다.
빗자루 선생님은 다시 한 번 침묵과 경청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빽빽 소리 지르고 떼쓰는 아이는 자기 자식이라도 참기 힘든 게 분명한데, 빗자루 선생님은 묵묵히 동주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도 언제나 뒤로 밀려나 있던 소위 말하는 ‘나쁜 아이’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쁜 사람이 과연 누군지 되묻게 된다. 전혀 나쁠 것 없는 이 ‘나쁜 캐릭터’들은 작품에서조차 착한 아이, 착한 어른의 눈에 비추어져 그려졌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동주는 나쁜 캐릭터 연합의 노조위원장과 같은 보물 캐릭터이다.
주인공 김 배불뚝이의 집안 사정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항상 늦게 퇴근하기에, 비라도 내리면 우산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배불뚝이 할머니다. 그런 배불뚝이가 싸움 짱 동주의 처지를 이해한 걸까, 아니면 그저 날씨가 좋아 교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걸까. 화를 내고 운동장으로 나간 동주를 따라가 놀다가, 친구와 함께 늘어지게 낮잠 한숨 자는 배불뚝이는 어린 나이에 친구 위로하는 법을 다 깨우친 모양이다.
선생님 품 안에서
김 배불뚝이와 친구들은 어떻게 학교에서 그토록 신 나게 놀 수 있었던 걸까? 마지막 권을 덮고 나니까 알겠다. 사실 이 아이들은 빗자루 선생님 품 안에서 신 나게 뛰어놀았던 것이다. 세상에 어느 선생님이 공부하기 싫다고 뛰쳐나가는 아이를 좋아하겠는가. 온갖 장난으로 수업 방해하는 걸로 모자라 선생님과 맞먹고 농담 따먹기 하려는 당돌한 아이. 이런 아이의 부모는 쉼 없이 학교에 불려 다닐 게 뻔하다.
하지만 빗자루 선생님은 꾸짖을 땐 꾸짖고 이끌어 줄 땐 이끌어 주면서도, 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을 풀어 준다. 그리하여 배불뚝이는 마음만 먹으면 공부도 잘할 수 있고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고 동주 역시 화가 나도 친구를 때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교실이 무너지도록 아이들이 마음껏 놀면서도 아이다움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빗자루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엄하게 혼내고 통제했다면, 배불뚝이와 아이들의 머릿속 풍경은 무척 삭막해졌을 것이다.
뛰고 뒹굴고 엎드렸다가 누웠다가 흉내 내고 깔깔 웃고…… 정말이지 ‘온몸’으로 아이다움을 보여 준 김 배불뚝이에게 정말 고맙다. 작품 밖 현실에서도 김 배불뚝이와 같은 아이들이 낙오하지 않고 즐겁게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을 품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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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훈
2012년에 6회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받으며 동화 작가로 등단하였다. 쓴 책으로 『거꾸로 세계』(가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