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경이 정경화되기 까지의 과정
가톨릭과 신교의 성서 차이는, 용어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제 2경전 혹은 외경이라고 불리는 구약 문헌을 성서로서 인정할 것인가의 차이다
1. 유다교 내부에서의 구약 성서의 잉태와 확정
구약성서 문헌이 언제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는지는 문헌 고고학적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명확하지 않다. 집필 연대가 가장 오래된 모세 오경을 학계의 다수설인 4전승설의 분류법을 따라 구분하여 가장 오래되었다는 야훼계나 엘로힘계 전승들을 검토해 보아도, 헤브라이 왕국기 이전의 시대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경을 이루는 대부분의 나머지 후기 전승 문헌(사제계, 신명계)들은 유다왕국 멸망 후 신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하에서 '하시딤'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바빌론 유수기에 이미 완성되어진 것도 있지만, 많은 작품들은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 에스라의 뒤를 잇는 서기관 계급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이었던 셀레우코스가 분봉왕으로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게 되면서, 그 후예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 후기 구약 문서들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구약 문헌들은 특별한 저자가 모두 만들어 낸 산물이라기 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서 여러 저술가/필사자에 의해 내용들이 조금씩 윤색, 첨가됨으로서 비로소 현재의 성서로서 완성되어졌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제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신봉자였고, 국제화를 특색으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를 그가 정복한 넓은 지역에 유행시켰다. 알렉산더의 이런 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그가 정복한 지역들은 삽시간에 헬라화되었고, 유다인들도 이러한 헬라화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헬라 세계 구석구석으로 흩어졌고,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는 이른바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제국의 또다른 분봉왕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산하였던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혹독한 팔레스타인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 통치 아래의 본토 유다인들과는 다르게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차 헬라화 되어갔고,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고서 점차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전통적 유다교의 보존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고, 종교적 생존에 위기를 느낀 알렉산드리아의 제사장과 랍비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종교적 문화를 온존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70인역의 탄생이었다.
BC 3세기 경 모세 오경의 번역을 시작으로 이후 수백년에 걸쳐서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본 성서를 두서없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와중에서, 히브리 원본 문헌의 존재 여부를 알기 어려운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이 새로이 번역된 성서의 목록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70인역은, 원래의 히브리어 성서보다 그 권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고, 그것은 기나긴 외경의 경전성 논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70인역은 히브리어를 몰랐던 대다수의 이방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자리를 잡았고, 이방 유다인들은 70인역을 그들의 일반적인 성서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도, 사도 시기에도, 사도 이후의 시기에도 70인역은 헬라 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성서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모세 오경을 제외하고서는 인정되는 성서 목록이 달랐던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예수님과 12사도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하층 유다인들은, 타르구밈으로 상징되는 아람어 구전 구약을 익혔을 가능성이 더 높다.('타르굼에서 설명') 어쨌든, 신약 성서 문헌의 기록자들은, 대다수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었고, 그들은 이후 신약성서가 되는 문헌들의 기록에 있어서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당시에 오경은 어느 지역이던지 공통적인 성서로서 받아들여졌지만,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몇몇 문헌이 그 경전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원전이 남아있는 성서 문헌의 권위가 더 높았었고, 그 당시에 히브리어 원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인정받았던 그리스어 문헌의 목록이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달랐다는 점은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외경의 경전성을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2. 얌니야 회의
로마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사건으로 인해, 전통적인 유다인들의 지배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사두가이파 계급이 소멸된 가운데, 살아남은 바리사이파의 랍비들은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를 중심으로 하여 이른바 표준성서(원 마소라 본문) 목록의 확정 작업에 들어간다.
바리사이파 / 사두가이파 / 에세네파(열심당 포함) / 나조레오스 공동체 등으로 갈라진 분파주의 덕분에 유다 왕국이 단결된 힘을 내지 못하고서 로마에 멸망당했다고 바리사이파 랍비들은 인식하였다. 그때 당시 유다교 내에서 바리사이파에 대립하고 있는 세력은 바로 나자렛파(현재의 기독교)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바리사이파 랍비들에게 있어서 타도되어야 할 분파주의자로 인식되었다.
나자렛 파는 성서로서 70인역을 사용하였기에, 바리사이파 랍비들은 70인역 자체의 경전성을 부정하고, 원점에서 성서 목록을 재논의할 필요성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 원문이 잘 보존되어있는 24권의 문헌만 성서로서 긍정하였고, 이 표준 본문과 계통을 달리하는 사본들을 회수하여, 폐기한 후 별도로 보관하여 성서 문헌 난립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려 하였다. 이렇게 회수하여 폐기한 후에 별도의 장소에서 보관된 문헌들을 '게니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70인역이나, 사마리아 오경은 '게니자'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그 전파된 양이 많고, 전파 지역도 넓었다. 따라서, 바리사이 랍비들은 70인역을 폄하하여, 70인역의 번역 자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70인역이 번역된 날을 유다민족에게 있어서 재앙의 날로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당시에 히브리어 원전이 남아있지 않았던 70인역의 그리스어 문헌들은 바리사이파 랍비들로부터 경전성을 부정당하였다. 그 사유는 일단 원래 히브리어 원 사본이 없음으로 인한 '출처 불명확'이었고, 거기에 보충하여 바리사이파의 가르침에 반하는 경전들에게 '경전성 부족'의 사유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방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위해서 바리사이 랍비들은 24권 목록의 랍비 성서들을 다시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는데, 랍비 아키바의 제자 아퀼라는 그 선봉에 서서 70인역의 의역적 요소를 배제하고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하고자 하였다. 이결과 나온 산물이 아퀼라 역본이다. 그 외에도 에비온파의 심마쿠스가 번역한 심마쿠스역, 테오도시온이 번역한 테오도시온 역이 있었다. (이를 기독교의 교부, 오리게네스가 편집해서 헥사플라를 만들었다.) 바리사이 랍비들은 이러한 새로운 그리스어 성서의 번역과 보급 작업을 통해서 70인역에 익숙해 있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 물론, 70인역의 배척사유는 단지 나자렛파에 대한 반감만은 아니었고, '구시대의 전통'으로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측면도 상당히 크다. 또한, 70인역의 번역의 정확성에서도 의심이 많이 갔는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동정녀 수태설'에 대해서, 그들은 히브리어 '알마'는 마땅히 '네아니스'(젊은 여자)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파르테노스'(처녀, 동정녀)라는 70인역의 번역은 틀렸다라고 주장하였다.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의 기자는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 타르굼 *****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국제적 언어였던 아람어를 쓰는 일반 계층의 유다인들을 위해서 유다인 랍비들은 회당에서 히브리어 성서들을 아람어로 번역해서 읽어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예루살렘 파괴 이후 유다인 랍비들은 아람어로 히브리어 성서들을 번역하였다. 이것이 타르굼이며, 유다인 랍비들은 3~7 세기에 걸쳐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어로 번역하였다. 물론, 최초의 타르굼은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3. 초대교회의 구약성서
초기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 문구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안에 있는 외경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유스티누스, 폴리카르포, 로마의 클레멘스, 이레네오등은 이 문헌들을 폭 넓게 성서의 말씀으로서 이용하였다.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유다인들의 히브리어 성서와 70인역간 목록이 다른 점을 놓고서, 이미 그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70인역의 성서는 본래 '모세오경(토라)'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초대 기독교의 교부들은 성서의 범위를 성문서와 예언서등의 전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교부들은 70인역의 번역 과정에 대하여 아리스테아스나, 요세푸스가 미화시킨 기록들을 더욱 더 미화시켜, 70인이 각자 번역한 성서의 결과물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고 과장하기에 이르렀으며,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 성서에 못지 않은 영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그 견해를 일치시켰다.
70인역은 초대 교회의 기독교 교리 형성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얌니야 회의와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유다교가 기독교를 배척하자, 초대 기독교 교회는 더욱 70인역에 집착하였다. 대다수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70인역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당대의 히브리어 원문 성경과 그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더라도, 복음 기자들과 사도들도 70인역 성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을 들면서 하느님의 섭리로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게 성서의 내용이 변형된 것이라고 우기면서까지 70인역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물론 멜리토(2세기 소아시아 사디스 주교)가 작성한 구약 성서 목록에는 그리스어 성서에서 추가된 문서들(외경)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단순히 학술적 면을 따진 예외적인 경우이다. 오리게네스(약 185-254년)의 헥사플라는 구약 정경을 22권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헥사플라의 정경 목록도 얌니야 회의의 24권 결정 목록과는 다르다. (제 2경전에서 바룩과 합본된) 예레미야의 편지가 정경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주석의 경우에는 70인역의 내용을 그대로 헥사플라에 적용시켰다. 아타나시우스도 히브리어 구약 성서를 정경이라고 하면서도, 그 자신이 외경의 내용들을 성서의 말씀으로서 자주 인용하였다.
(**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어 구약 본문의 우수성을 어느정도 인정하면서도, 초대 기독교 교리의 근간인 70인역의 권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중간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헥사플라는 히브리어 본문과 각 번역본을 대조 - 비교하였고, 번역상의 문제점을 전부 표기하였다.)
4. 불가타 번역작업 및 라틴 전통과 비잔틴 전통.
기독교 공인 이후에, 로마의 총주교였던 다마수스는 정리되지 않고 산만하게 널려있는 구 라틴역 성서를 정리하기 위해서, 새로이 라틴어 표준성서의 목록을 확정하는 작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작업은 당시 그리스어의 권위자였던 히에로니무스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 대본으로 삼은 70인역의 많은 내용이 오역되어 있고, 그 출처가 불명확한 점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 그는, 유다교의 히브리어 본문 성서가 보다 정확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을 어필시키며, 구 라틴 역본의 정리 작업 대신에 문헌적인 근거가 확실한 히브리어 성서를 기반으로 하여 불가타 성서 목록 확정 작업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생각대로 얌니야 회의에서 확정된 24권의 히브리 성서 목록을 '정경(κανων, kanon)'으로 부르며 39권으로 재분류하여 번역을 하였고, 70인역에는 있되 히브리어 원전에 없는 성서 문헌들을 '외경(αποκρυφσ, apocrypha)'으로 부르며 그 중 일부만 따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그가 70인역의 외경 문헌들을 모두 번역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제 2경전으로 확립된 책들 이외에도 몇 권의 책, 즉 마카베오 3, 4권, 에스드라스 3, 4권, 므나쎄의 기도 등을 추가로 불가타에 더 넣었으며, 2경전의 내용 일부는 '거짓 경전(위경)'으로 보고서 번역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번역에 대하여 종전 초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 즉 신성하고 오류가 없게 번역이 이루어짐을 부정하였고, 더이상 70인역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번역되었다고 보지도 않았다. 그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서 말하는 70인역은 모세 오경만 의미한다는 유다인들의 견해를 지지하였으며, 신약의 내용을 70인역이 아닌,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 충실하게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는 번역작업에 있어서의 성령의 영감이 있어야 함을 부정하고, 오직 원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언어적 지식이 번역시에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많은 다른 교부들의 비난을 불러왔다.
동시대의 가장 저명한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히에로니무스를 동정하였으나, 그의 의도가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온 거룩한 가르침을 부정하려고 하며,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혼란시키고 유다교의 논리에 굴복하려는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 또한 거두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과 사도시기 부터 사용해 왔었고, 초대 교회에서도 계속 사용해왔던 70인역 성서의 권위가 부정되는 것과, 성서 인정문제를 둘러싸고서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마침내 아프리카 교회의 초기 공의회들(힙본에서 393년, 카르타고에서 397, 419년)은 아타나시우스 목록에 따라서 베드로 2서, 유다서, 요한 2,3서, 요한 묵시록등 안티레고메나 5권을 수용함으로서 기나긴 안티레고메나 분쟁을 끝내고 신약 성서 27권을 최종적으로 확정함과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와 다수 교부의 의견을 수용하여, 당시 동-서방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교회의 책들'로 불렸던 70인역의 구약 외경을 성서로서 사용할 것을 최종 긍정하였다. 그럼으로서 초대 교회의 경전성 갈등 문제는 일단 봉합되었다.
(** 하지만 이때까지도 아직 교회 내에서 외경의 위치는 유동적이었다. 시나이 사본에는 마카베오 4서가 들어가며, 바티칸 사본은 마카베오서를 전부 제외한다.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2경전 전부를 인정하지만, 솔로몬의 시편을 성서로서 제안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경전성을 긍정한 외경의 범위-즉 카르타고 공의회의 구약성서 목록은 지금의 제 2경전 포함 불가타 개정역보다 넓다. 이후 소개되는 가톨릭내 배제 외경들이 그러하다.)
(** 비록 히에로니무스의 학술 우위적인 주장이 당대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학술적 탐구의 결과로 나온 불가타 성서(39권 정경 + 갈리칸 시편 + 70인역의 외경)는 중세교회에서 70인역을 제치고 일반적인 성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원 - 마소라 본문에 기초하게 된 것으로서, 개정 마소라 본문을 사용하는 유다교와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정교회가 오히려 70인역의 전통에 보다 충실하다. 하지만 불가타 성서가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받게 된 것은 무려 천년도 더 지난 1548년의 일이었다.)
시리아 동부에서는 7세기까지도 교회가 히브리 정경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집회서(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를 더하고,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를 제외한 히브리 성서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솔로몬의 지혜, 바룩, 예레미야의 편지, 다니엘 추가본 등이 합쳐지기도 하였다. 6세기 페시타(시리아 본)의 필사본은 암브로시안 사본으로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마카베오스 3, 4권과 에스드라 2, (때로는 4) 권, 요세푸스의 전쟁사 7권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에서는 유다교의 구약 정경을 인정하면서도 에스델서의 경전성을 의문에 붙였으며, 가톨릭에 귀일한 콥트 교회와 에티오피아 교회는 에녹서와 모세 승천기등 일부의 '개신교 위경'들도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5.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의 경전확정.
천주교의 제 2경전에 속하는 70인역의 '외경'들은 힙본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의 성서 확정 이후부터는, 교회 내에서 별 다른 의구심 없이 경전성을 인정받아 왔지만, 히에로니무스 이후에 히브리어 성서 본문의 우수성이 가톨릭 내에서 조명받게 되면서 소수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외경의 경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계속 제기하였다. 한편, 70인역과 초기 불가타의 목록 중에서 마카베오스 3, 4권, 동방의 그리스도교, 시편 151편의 경전성은 가톨릭 내에서 차츰 부정되었다.
중세 말기에 종교 개혁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가톨릭 교리 일부에 대해서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특히 성인 성녀의 중보기도, 구원에 있어서의 행실의 중요성, 연옥설 등은 그 주요 타겟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기능하는 토비트서, 집회서, 마카베오스 2서등으로 인해서, 외경 전부는 그들에게 있어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마카베오스 2권의 일부 내용에 대하여 직접적인 문제 제기를 하였다. (마리아 신심의 경우, 초기 개혁자들보다, 개신교 교리 발전 과정에서 반 가톨릭 경향에 따라서 비판된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개혁자들은 마리아 신심을 유지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유다교 얌니야 회의의 결정과 히에로니무스의 견해를 그대로 따라, 유다교의 24권 경전을 재분류하여 39권으로 나누는 히에로니무스의 경전 분류법을 받아 들이고, '교회의 책들', 즉 외경들은 단지 경건문학으로서 분류하며, 경전성을 부정함으로서 가톨릭의 일부 교리들을 공격하는 포문을 열었다. 14세기 초의 가톨릭 신학자인 리라의 니콜라스는 히브리 성서 목록을 진리로 규정하고, 라틴어 불가타의 목록를 비판하였다. 이런 그의 주장은, 이후 마르틴 루터, 울리히 쯔빙글리, 쟝 깔뱅 등의 종교 개혁가들에게 계승되었고, 마소라 사본을 기초로 한 그들의 자국어 성서 번역본들은 '외경'을 '정경'들과 분리해서 수록하였으며, 외경의 경전성을 부정하였다.
이에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 측의 주장을 억누르고, 내적으로 이어져온 '정경시비'를 종식시키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었다. 주교들의 회의는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사크로산크타 교령'을 통해서, 교황의 교도권을 통하여 70인역 성서의 목록, 즉 '교회의 책들' 중에서 7권의 문헌을 경전으로 공식 인정하고(제 2경전), 초기 불가타 목록 일부를 제외하여, 구약 46권의 현재 가톨릭 경전 목록을 최종 확정하였다. 그 중에서 70인역의 에스드라스 3권과, 70인역에는 없고 불가타에 추가로 들어갔던 에스드라스 4권과 므나쎄의 기도는 불가타 개정판의 제 2경전 목록에 들지 못하였다. 앞에서 경전성이 부정된 문헌들에 대한 경전성 배제도 최종적으로 재선포되었다. 그와 함께 2경전을 성서로 사용함에 거부하는 (가톨릭이 보기에) 일부 이단 세력에 대한 저주가 선포되었다.
한편 동방 정교회측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 지역이나 나라별로 받아들이는 경전의 목록이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에 17세기 중반에 예루살렘에 각국 정교회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모여 시노드를 개최하고, 통합된 외경 목록의 경전성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의 책들' 중에서 토비트, 유딧,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만을 제 2경전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문헌들은 '외경'으로 남겨둠으로서 경전성을 부정하였다.
한편 사마리아 오경이 17세기에 유럽 신학계에 소개되면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다시 한번 외경을 포함하는 경전의 논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개신교 측은 극단적으로 유다교의 편을 지지하여, 마소라 본문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였고, 그 와중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사크로산크타 교령에 대한 반감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그들은 외경의 교회내 봉독을 완전히 금지하고, 초대 교회에서부터 성서로서 사용되어 왔던 외경을 교회 밖으로 축출해 버렸다. 가톨릭도 이러한 개신교의 조치에 반발하여, 초대교회에서부터 전해져오는 70인역과, 불가타는 원-마소라 본문보다도 더 오래된 다른 전통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팽팽히 맞섰다.
특히 스위스 지역의 깔뱅파 개혁교회와, 요한 북스톨프등의 일부 전문가들은 70인역은 사마리아 오경으로부터 번역된 것이라고 폄하해 버리며, 마소라 본문을 완전한 권위로서,(심지어 6~10세기 경에 마소라 학자들이 첨가한 모음 부호까지도) 받아들이는 극단적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저명한 언어학자인 게세니우스는 개신교의 이러한 극단적 태도를 비판하여 70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이 마소라 히브리 본문과는 다른 전통의, 고대 히브리어 대본에서 번역되었다는 가톨릭 측의 주장을 옹호하였고, 이는 20세기 초반 사해 근방의 작은 동굴, 쿰란에서 사해문서가 발견됨으로서 증명되었다.
6. 사해 문서와 외경 논쟁
1947년 사해 문서의 발견은, 종전의 신 구교간의 '외경논쟁'에서 일단 가톨릭 측의 손을 부분적으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종전에 외경(제 2경전)에 해당하던, '예레미야의 편지(바룩)', '집회서', '토비트' 등의 제 2경전의 고대 히브리어 필사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얌니야 회의에서 랍비들이 외경 배제의 결정적 사유로서 주장한 일부 외경 문서들의 '출처 불명확'의 근본적인 사유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쥬빌리'나, '하가다'등의 개신교의 '위경(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헌도 발견되었으며, 정경의 문헌들과 비교해 볼때, 외경의 히브리어 문헌들의 보존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출토된 외경 문헌에는 정경 문헌과 달리 미드라쉬의 존재가 없다는 점을 놓고서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히브리어 문헌 출토가 경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유다교의 경우에는 아직 사해문서와 얌니야 회의의 결정의 연관성을 놓고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어쨌든, 사해 문서는, 유다인들의 히브리어 구약 성서 역시 여러가지 형태로 각 분파에 의해 존속되었음을 드러내준다. 즉, 유다인들의 표준성서(일명 원-마소라 본문, 마소라 본문으로 전승됨)는, 구약의 여러 히브리어 문헌 중에서 가장 잘 전수된 문헌을 골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작업을 실행한 사람들은 에스라로부터 시작하는 서기관 계층들이었고, 그 목록을 최종 확정한 사람들은 요하난 벤 자카이로 대표되는 바리사이파 랍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에세네파는 이런 주류 바리사이파의 흐름과는 다소 다른, 그들만의 고유한 다른 전승과 구약성서를 가졌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사마리아 오경을 둘러싼 17세기의 외경 논쟁에서 가톨릭이 제시한 가능성이 증명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70인역 성서[Septuagint]
약자로는 LXX.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헬라]어역(語譯) <구약성서> 번역본으로,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의 요구에 따라, 처음에는 BC 3세기 중엽에 ‘모세 5경(율법서)’이 번역되었고, 그뒤 약 100년 사이에 현재의 정경(正經) 거의 전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에서 유래한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후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70인역 성서는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지금의 히브리어 마소라본문 성서와는 분량이나 책 편집이 다르다.
히브리어 정경은 토라[율법서]·느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역사서·시가서·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서방세계 대부분의 성서 역본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되었으나, 개신교 역본들의 경우에만 외경을 빼거나 따로 묶는다.
70인역구약성서의 배열과 편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경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가 들어가고,
역사서에는
‘여호수아기’
‘사사기(또는 판관기)’
‘룻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지상’
‘역대지하’
‘에스라기 1(외경)’
‘에스라기 2(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
‘에스더기’
‘유딧기’
‘토비트기’
‘마카베오기 1’
‘마카베오기 2’
‘마카베오기 3’
‘마카베오기 4’
를 편집하였고,
문학서에는
‘시편’
‘송시’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지혜서’
‘집회서’
‘솔로몬의 시’
를 편집해 넣었으며,
예언서에는
‘호세아서’
‘아모스서’
‘요엘서’
‘오바댜서’
‘요나서’
‘나훔서’
‘하박국서’
‘스바냐서’
‘말라기서’
‘이사야서’
‘예레미아서’
‘바룩서’
‘애가’
‘예레미아의 편지’
‘에스겔서’
‘수산나’
‘다니엘서’
‘벨과 뱀’
등을 편집해 넣었다.
위에서 보듯이 배열과 분책(分冊)방법이 히브리어 경전과 다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은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70인역에 끼어든 필사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는데, 당시 사본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다른 학자들도 70인역을 좀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참조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라틴어역[불타역]·콥트어역·에티오피아어역·아르메니아어역·그루지야어역·슬라브어역, 그리고 아랍어역 일부의 주요 근거가 된 것은,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바로 70인역이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구약성서〉 표준역본으로 인정해왔으며, 히에로니무스[영어명:제롬]는 이 역본을 가지고 불가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70인역 인쇄본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對譯聖書)'(1514~22)에 실려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