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이 개경을 수복하여 공신에 책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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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1년(1362)에 〈최영(崔瑩)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니, 공훈을 기려 1등으로 삼고 벽상(壁上)에 초상을 그리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부모와 아내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제수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 김용(金鏞)이 난을 도모하여 그 일당을 보내어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하게 하였다. 최영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우제(禹磾)·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壽)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적을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공훈을 논하여 1등으로 삼고 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시켰다가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평리(評理)로 전임시켰다. 어떤 사람이 김용이 간직하였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얻어 도당(都堂)에 헌납하니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며 구경하였다. 최영이 혼자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김용의 지조가 이러한 물건으로 상하였는데, 여러 공들께서는 어찌 구경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곧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공민왕〉 13년(1364)에 적신(賊臣)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리 군사가 싸워 패배하자 적이 승승장구하여 선주(宣州)에 들어가 주둔하니 온 나라가 흉흉해졌다. 최영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安州)로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최영이 명령을 듣고 즉시 가서 장졸들을 독려하였고 반드시 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하니 조야(朝野)가 믿고서 겁내지 않았다. 최영이 도중에 도망하는 군사를 만나면 번번이 참수하여 조리를 돌리니 군령(軍令)이 비로소 엄숙해졌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나누어 적을 달천(獺川)에서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으며, 병마부사(兵馬副使) 안주(安柱)를 보내어 승리를 보고하니 왕이 기뻐하며 안주에게 말 1필과 은 2정(錠)을 하사하였다.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 박바이에타이)가 연주(延州)로 들어와 노략질하니 최영이 그의 장수를 보내어 공격하여 물리쳤다. 나중에 왕이 풍저창사(豐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령하여 환관[閹人]들에게 쌀을 내려주라고 하니, 정득년이 양부(兩府)를 거치지 않은 명령이라고 하여 교지를 받들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매를 치고 유배 보내려고 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책임은 신 등에게 있는 것이고 정득년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이에 〈왕이〉 그를 석방하였다.